안시연은 한참 고민하다가 이만 도망가기로 결심했다.저녁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연정훈이 유치하게 자신을 놀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그래서 구청 사무실을 빙 둘러 뒷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조용한 정원까지 다다르자 정장에 가죽 구두를 신은, 척 보아도 정치 인사 같은 두 사람이 보였다.안시연은 일부러 피해 걸었지만 두 사람은 안시연 앞에서 멈춰 섰다.“안시연 씨 맞으시죠?”둘 중 한 명이 물었다.안시연이 경계를 하며 물었다.“그쪽은...”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두 남자는 길을 비켜서며 말했다.“양 대표님이 안시연 씨를 위층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안시연이 깜짝 놀라 자리에 굳었다.‘설마 양지원?’양혁수의 장난이 결국 양지원의 귀에까지 들어갔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양혁수가 오늘 이 자리에 오지 못한 건 아마 양지원이 손을 본 것 같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건지 직접 자신을 만나러 온 것 같았다.안시연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저는 양 대표님을 만날 이유가 없을 것 같아요. 오해는 도련님한테서 전해 들으시길 바라요.”두 사람은 안시연의 말을 무시한 채로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모시는 제스처를 했다.“이곳으로 모시겠습니다.”안시연은 전에 양지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조금 차가운 사람 같았으나 인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잠시 생각해 보니 양혁수의 일에 양지원이 어머니로서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상할 점은 아니었다.게다가 구청에서 큰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그러니 위층에서 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려고 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걸었다.3층으로 올라가자 오래된 대리석 바닥이 보이고 조용하고 여유로운 사무실 분위기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가장 안쪽 방 밖으로 5~6명의 경호원이 보였다.안시연은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어쩌면 양지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문 앞에 서서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뒤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깜짝
당황한 안시연은 얼빠진 듯 연정훈을 쳐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정훈이 여전히 뒤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감을 느끼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바깥은 햇빛이 눈에 부셨다.안시연이 나오는 것을 보고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수빈이 얼른 내려서 맞이했다.“안시연 씨, 대표님은요?”안시연은 그를 보고도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그녀는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3층에요. 일이 좀 있어요.”진수빈은 그녀를 차에 태웠다.안시연은 얼빠진 상태로 뒷좌석에 탔다.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을 보니 땀이 흥건했다.진수빈은 연정훈이 없는 틈을 타서 미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려 했다.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안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진 비서님은 양 의원을 본 적이 있어요?”진수빈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방금 차에 탄 사람이 양 대표님 아니었어요?”안시연이 침묵하자, 진수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양혁수가 함부로 하다가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안시연이 더 놀랄까 봐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계시니 오해를 풀 수 있을 겁니다.”안시연은 힘없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심장이 계속 쿵쾅거리고 있다.전국 남자들의 발언권 순위를 매긴다면 양석진은 단연 10위권에 들 것이다.그녀는 양지원도 만난 적이 있는데, 거리감은 느꼈지만 긴장감이나 공포감은 없었다.연정훈의 경우, 학창 시절의 기억이 있어서 다시 만난 후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였음에도 두려운 감정은 없었다.하지만 양석진은 다르다. 그녀는 사무실 문밖에 서 있을 때 다리까지 나른해졌다.그녀는 눈을 감고 아직 거기 있는 연정훈을 생각했다.연정훈도 양석진에게는 손아랫사람인데 불리하지 않을까?안시연은 삐져서 이렇게 큰 문제를 일으킨 것이 좀 후회됐다.한참 지나도 연정훈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했다.죽
구청.위층 사무실에서 비서가 연정훈을 보내자마자 양석진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았다.“지원아.”전화기 저편에서 양지원은 변함없는 남자의 덤덤한 목소리에 코끝이 찡했다.사실 최근 몇 년 그녀는 그에게 거의 전화를 하지 않았다.양혁수가 허튼짓을 하는데 미처 돌아가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부탁한 것이다.그녀는 책상 앞에 앉은 채 전화가 연결되자 손가락으로 전화선을 감았다.“오빠, 오늘 신세 많이 졌어요.”“응.”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외마디 대답이었다.양지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다음에 집에 오면, 제가 직접 요리해서 대접할게요.”“내가 죽어야 시간이 나서 제사상이라도 차려주겠지.”“...”그동안 항상 그를 피했고, 그가 집에 돌아오면 출장을 갔던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오빠는 지금 바쁘잖아요? 제가 어떻게 시간을 뺏겠어요?”그녀의 말에 전화기 너머에서 한참 말이 없었다.잠시 후 남자가 입을 열었다.“내가 총통부 근처에 묵고 있으니 도착하면 사람을 내려보낼게.”“저는 아마...”“오늘 나한테 신세 진 거 갚는다고 생각해.”양석진은 그녀의 말을 중도에 잘랐다.양지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또 한참 침묵이 흘렀다.잠시 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저녁 8시까지 갈게요.”“기다릴게.”-연정훈의 한마디에 안시연은 안도감이 들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오후에야 양혁수에게서 전화가 왔다.“미안해요. 당분간 선배님과 결혼할 수 없어요.”안시연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혁수 씨, 부탁인데 다시는 이 얘기를 꺼내지 말아요. 저는 박복한 사람이라 이러다가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아요.”“...”“제가 안 가서 연정훈이 비웃던가요?”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아니다.차에서 내릴 때 위로의 뜻으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전화기 저편에서 양혁수가 코웃음을 치며 연정훈을 음흉하다고 욕했다.“그 사람이 혁수 씨에게 무슨 짓을 했어요?”“말로는 시연 씨를 보내준다고 하
소현정을 생각하니 안시연은 마음이 복잡했다.그녀는 엄마를 보고 싶지만 소현정을 보고 싶지는 않다. 소현정은 전혀 그녀가 상상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시연아?”최미란이 그녀를 불렀다.“외할머니.”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최미란은 한숨을 쉬며 이전처럼 그녀를 달랬다.“일단 와. 평안 부적이라도 가져가야지.”안시연은 원래 핑계를 대고 가지 않으려 했는데 갑자기 양석진이 경인시에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 대단한 분이 양혁수의 일로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여동생인 양지원을 무척 아끼는 것 같다.그녀는 결국 병원에 가기로 했다. 모녀 관계를 생각해서 더 이상 미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소현정을 설득하고 싶었다.그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소현정은 병실에 없었다.“엄마는 내 상태를 물어보러 의사한테 갔어.”이 말을 들은 안시연은 의심스럽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잡생각 할 겨를도 없이 최미란이 그녀를 끌어당기더니 삼각형 모양의 부적을 그녀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너를 무사하게 지켜주는 거니까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안시연은 입을 삐죽거렸다.“몸에 지니고 다니기 불편해요.”“그럼 가방에 넣어두고 외출할 때 들고 다녀.”안시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소현정이 계속 돌아오지 않자, 최미란은 빨리 가보라고 안시연을 재촉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병실에서 나와 의사 사무실로 갔지만 소현정은 없었다.화장실 근처로 가니 소현정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언제 돌아와요?”“벌써 며칠 지났는데 당연히 보고 싶죠.”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업무가 다망하신 오 대표님께서 저를 기억하세요?”오... 안시연은 가식적이고 아양을 떠는 소현정의 목소리를 듣고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구역질이 나서 홱 돌아섰다. 구제 불능이다!최미란은 어두운 표정으로 황급히 돌아온 그녀를 보고 자초지종을 물었다.“저녁에 수업이 있어서 외할머니랑 같이 식사하지 못할 것 같아요.”말을 마친 안시연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지금 가지 않
안시연은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이 있었다.그녀는 연정훈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안시연은 별생각 없이 잡념을 버리고 수업에 집중했다.오전에 있었던 소동 때문에 오히려 연정훈과의 긴장 관계가 다소 완화된 것 같다. 적어도 날카롭게 맞설 필요는 없다.8시가 넘은 후 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휴식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비를 구경하러 나갔다.안시연은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아 좀 걱정됐다.일기예보를 보니 다행히 10시까지 내린다고 한다.“상황을 보니 10시에 그칠 것 같지 않아.”“일기예보가 맞지 않을 수도 있어.”옆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안시연은 걱정하기 시작했다.기사가 데리러 오지 않는 한 그녀는 비를 맞아야 할 것이다.지금 연정훈과 싸우고 있는데, 그의 기사를 쓰는 것은 면목이 없는 것 같다.그녀는 수업 시간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역시 마지막 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비는 그치지 않았다.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가 데리러 오거나 애인이 데리러 온다고 한다.그들의 말을 듣다가 그녀는 오히려 침착해졌다.처음 비를 맞는 것도 아닌데, 불안할 게 뭐가 있는가?그렇게 잡생각하고 있는데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연정훈에게서 전화가 왔다.안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아직 수업 중이야?”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안시연이 대답한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연정훈이 끝내 입을 열었다.“어느 동에 어느 교실이야?”안시연은 살짝 놀랐다.그녀는 확신 없이 위치를 말했고, 연정훈은 알았다고 말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었다.안시연은 그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데리러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아니... 예전이라면 착한 척하려고 올 수도 있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일어나서 교실 입구로 가서 기다렸다.밖에서 비가 쏟아지면서 빗물이 바람을 타고 복도로 튕겨 들어왔다.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녀는 갑자기 연정훈이 아직 감기가 낫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교실에서 선생님이 소리쳤다.
안시연은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답안지를 책 속에 끼워 넣으려 했다.연정훈이 계속 쳐다보자 그녀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휴지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안경을 닦아요.”연정훈은 휴지를 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책을 펼쳤다.수업 중이라 연정훈에게서 다시 뺏어올 수도 없는 상황이다.손바닥만 한 답안지를 손쉽게 손에 넣은 연정훈은 이내 뒤집어 보았다. 49와 123 두 개 숫자가 있었다.49가 점수라는 것을 아는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낙제야?”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책 모서리를 비비적댔다.“이제 막 수업을 시작해서 학생들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에요.”연정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다른 사람들도 이래?”“비슷해요.”“그 옆에 숫자는 뭐야?”안시연이 입을 다물고 있자, 옆에 있던 여자가 끼어들었다.“그건 등수예요.”“...”연정훈은 곁눈질로 그 여자를 훑어보았다. 30대로 보이는 여자는 젊은 총각과 함께 수업을 들으러 왔다.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여자가 또 한마디 했다.“반에 학생 수가 130명이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답안지 한 장을 책상 위에 놓았다.연정훈이 힐끗 보니 3등이었다.“...”왠지 집에서 제일 못난 말썽꾸러기 아이의 학부모 회의에 참석했다가 수모를 당한 기분이었다.그는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꽉 깨물고 안시연의 답안지를 뒤집어 놓았다.강사는 학생들이 듣든 말든 열심히 강의하고 있었다.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안시연에게 물었다.“너 성진대학교 회계학과를 나왔는데, 그동안 배운 것은 다 선생님께 돌려줬어?”안시연은 억지를 부렸다.“이건 세법이에요.”“회사 다닌 지 몇 년 됐어? 이 부분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어?”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졌다.그녀는 어려서부터 성적이 뛰어났고 학부모에게 이런 비난을 당해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는 그녀의 유일한 학부모로서 항상 그녀를 칭찬했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울분을 토했다.“보름 전에 강의를 구매했는데, 정식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들어야 하는 온라인 수업
성진대학교에 들어갈 정도이니 안시연의 학습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다만 너무 많은 일에 얽매여 있어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오늘 저녁 이 몇 시간 동안은 정말 집중해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수업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다 갔는데도 그녀는 계속 문제를 풀었다.연정훈은 답안지를 그녀의 옆에 놓고 연습지를 들여다보며 하나하나 풀게 했다.안시연은 말없이 열심히 풀다가 10시 반이 되어서야 멈추었다.“일단 집에 가요.”더 늦으면 교실 문도 닫을 것이다.연정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연습지를 가져갔다.“답과 맞춰봤는데, 다 맞아요.”그녀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연정훈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돌아가서 계속 풀어.”“알았어요.”비가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을 따라 건물에서 나온 후에야 그가 직접 운전해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 차는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그는 우산을 하나만 가져왔고, 그녀를 찾아갈 때 온몸에 비를 맞았다.두 사람이 같이 쓰려고 하니 편할 리 없었다.안시연은 차에 우산이 더 있으면 가지러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연정훈이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모자를 써.”안시연은 엉겁결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후드티 모자를 푹 눌러썼다.모자와 머리카락이 그녀의 시선을 가렸는데,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연정훈이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왼쪽 어깨가 남자의 넓은 가슴에 닿자, 그녀는 멍해졌다.연정훈은 한 손으로 우산을 들더니 두 사람의 앞쪽을 향해 버튼을 눌렀다.우산이 쫙 펴지면서 미세한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약간 차가운 기운이 안시연의 얼굴에 밀려왔다.연정훈은 곧바로 그녀를 껴안고 계단을 내려간 후 재빨리 차 쪽으로 걸어갔다.건물 안에 있을 때는 가랑비 정도로 생각했는데, 빗속에 들어서니 빗물이 우산을 때리는 쫘르륵 소리가 들리며 꽤 큰 비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비를 맞지 않았고, 단지 발밑이 약간 시렸다.차 옆에 도착하자, 연정훈이 차 문을 열어주
집에 들어선 안시연은 맨 먼저 주방에 갔고, 생강 두 조각을 찾아내고 기뻤다.며칠 주방에 들어가지 않은 그녀는 생강차를 끓였을 뿐만 아니라 생강 우유푸딩까지 한 번에 성공했다.그녀의 ‘작품’들을 바라보는 연정훈의 마음은 착잡했다.이전에 그를 좋아할 때 그녀는 저녁 식사로 최소한 5개 요리를 했었다.지금은 이런 디저트 하나를 만드는 것도 기분이 좋아야 가능하다.그의 마음은 속상함 반 즐거움 반이었다.속상한 것은, 그녀의 좋은 감정이 너무 가벼워서 확 타오르다가 이내 꺼졌기 때문이다.즐거운 것은... 그녀가 생강 우유푸딩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그는 생강을 싫어하면서도 한 접시를 다 먹어버렸고, 그러고 나니 온몸이 따뜻해졌다.방에 돌아가서 샤워한 그는 수건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아 안시연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그녀가 옆 방에 옮겨간 것이 생각났다.그 순간 즐거움보다 속상한 감정이 커졌고, 따뜻함도 사라졌다.그런데 샤워를 마치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머리를 닦고 있던 그는 말없이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동물 잠옷을 입은 안시연이 문 앞에 서 있었다.“서재의 프린터를 좀 쓸게요.”“...편할 대로.”“고마워요.”안시연은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정말 예의가 바르네!’그가 문가에 서서 언짢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또 울렸다.그는 바로 문을 열지 않고, 몇 초 후에야 손잡이를 잡았다.문이 다시 열렸다. 안시연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프린터가 반응이 없어요...”연정훈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반응이 없는데, 나를 찾으면 반응이 있어?’“한번 봐주실래요?”안시연의 요청에 연정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나섰다.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라 서재로 갔다.그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프린터는 작동하기 시작했다.“고마워요.”그녀는 또 고맙다고 말했다.연정훈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서 대답하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았다.안시연은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눈치 있게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