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희처럼 과한 리액션을 취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시연도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부승희는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이승우와 한판 붙으려 했다.이승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촌스럽긴. 키스도 아니고 볼에 뽀뽀한 거로 그러는 거야? 안시연 옆에 앉았기 망정이지 나도 너한테 뽀뽀 안 해.”“한번 제대로 맞아볼래!”두 사람은 위아래로 뛰어다니며 아웅다웅 싸워댔다. 안시연은 이승우가 워낙 개방적인 스타일이라며 자신을 다독이며 연정훈이 있는 곳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연정훈의 안색은 어두워 보였으며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또 어쩌면 처음부터 이쪽에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양민아는 술잔을 들고 연정훈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연정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안시연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부승희의 빈자리를 보며 안시연은 심심해졌다. 그래서 지루한 마음으로 기둥에 몸을 기댔다.가만히 서킷장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사람들 사이로 서킷복으로 무장한 사람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두 사람 사이 많은 인파가 모여있었지만 상대의 시선이 본인을 향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양혁수라는 것도 알아차렸다.“내가 초대할 땐 오지 않더니 연정훈이 초대하면 오는 거야?”질투가 났다는 걸 전혀 숨기지 않는 모습이었다.안시연은 어이가 없었지만 양혁수가 곧 경기에 참여할 거라는 생각에 대충 변명을 하기로 했다.“옆 연습장에서 운전 연습하고 있는데 부승희 씨가 초대해서 온 거에요.”틀린 말은 아니었다.“그 말 믿어볼게.”“이번 경기에서 이기면 상품은 선배 줄게.”안시연은 경기에 참여한 선수들을 보며 양혁수가 이길 가능성이 미약하다고 생각했다.“그래요. 열심히 해봐요.”그때, 특별석 룸 문이 열리고 웨이터 해산물 파스타를 들고 안시연 앞으로 걸어갔다.“맛있게 드세요.”안시연이 멈칫했다.“저는 주문하지 않았는데요...”그 말을 마
파스타를 입에 넣으려던 안시연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부승희에게 물었다.“양혁수 씨는 F1을 예전부터 했던 거예요?”“프로 선수야.”부승희의 말에 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아까 경기에서 우승하면 상품을 자신에게 주겠다는 양혁수의 말이 떠올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양혁수가 우승하면 안 되는데.’안시연은 다시 침착하게 파스타를 입에 넣었는데 떨리는 동공에 마음이 들켜버렸다.연정훈은 이런 그녀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옆자리에서 부승희와 양민아는 또 말다툼하며 서로 비아냥거렸다.“유치한 사람이 위험한 스포츠에 빠지는 거예요.”“사람마다 추구하는 게 다른 거예요.”부승희는 양민아에게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정훈 오빠가 제일 대단해요. 어릴 때부터 이런 경기에는 관심도 없고 사람이 늘 진중하고 성숙하고 말이에요.”그 점에 대해서는 양민아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양민아가 연정훈을 가장 좋아하는 점이 바로 진중한 모습이었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연정훈은 어떤 일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천문을 좋아했지만 깔끔하게 포기하고 전과를 했다.소현주를 사랑했지만 헤어지고 미련조차 가지지 않았다.과감하고 진중하고 냉정한 연정훈만이 양민아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안시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사람들은 연정훈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진짜 연정훈은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남들보다 조금 더 감정을 잘 숨길 뿐이었다.천문을 포기했다고 해도 서재의 반 이상의 서적은 천문에 관한 내용이었다.소현주와 헤어졌다고 해도 소현주를 위해 제작한 목걸이는 아직도 서랍 깊숙이에 남아있었다.보기에 우아하고 멀쩡한 사람 같아 보여도 울타리에 가둬놓은 안시연에게만은 사리사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그러니 한마디로 정리하면 연정훈은 의관을 갖춘 짐승에 불과했다.그 생각에 안시연은 입꼬리가 꿈틀거렸다.고개를 들자 연정훈이 가만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어쩐지 자신의 속마음을 그에게 모두
안시연은 어젯밤 양민아가 자신을 난처하게 만든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왠지 그녀에게 도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포크를 접시에 두자마자 후회했다.정말 한심하기도 하지. 연정훈이 자신이 남긴 파스타를 먹어야 도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일이었다.안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후회막심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연정훈은 바로 그녀가 내려둔 포크를 손에 쥐었다.안시연이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봤고 양민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부승원은 예상했다는 듯 덤덤해 보였다.관중석에는 자동차 엔진소리가 귀를 찔러왔으나 이곳 특별석의 분위기는 조금 색달랐다.연정훈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안시연은 그제야 안심했으나 긴장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그때 연정훈이 고개를 들었는데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살피며 중얼거렸다.“조금 매울 텐데...”연정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벨을 눌러 웨이터를 불러왔다.그는 토마토스파게티, 과일샐러드와 기타 간식을 주문했다.음식이 도착하고 부승희가 가장 먼저 감자칩을 들고 갔다.“누가 시킨 거야? 날 너무 잘 아네.”부승원이 대답했다.“네 정훈 오빠가 주문한 거야.”“정말?”부승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다가 쯧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역시 열애 중인 남자는 달라.”그리고 감자칩을 가지고 홀연히 자리에서 벗어났다.부승원은 말없이 눈치껏 감자튀김과 같은 간식을 안시연 앞으로 옮겨줬다.안시연은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보며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연정훈이 날 위해 주문한 건가?’다른 한편 양민아는 이곳을 슬쩍 보다가 심호흡을 하며 몸을 돌려세웠다.부승원은 양민아가 멀어진 걸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에 연정훈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승희가 좋은 오빠를 뒀네.”부승원이 덤덤하게 말했다.“좋은 오빠인지는 잘 모르겠고 하나뿐인 동생이 당하고 있는 걸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부승희의 말에 안시연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하마터면 테이블이 엎어질 뻔했다.연정훈은 이런 그녀를 뼛속까지 들여다본 듯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뭘 하려는 거야?”안시연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화... 화장실 다녀올게요.”연정훈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천천히 말했다.“문을 나서서 왼쪽으로 돌면 보일 거야.”“네...”안시연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으로는 당황해 미칠 노릇이었다.양혁수와 알고 지낸 시간이 긴 편은 아니었으나 그의 성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하고 싶은 걸 모두 하고 살았던 도련님인 터라 그 어떤 자리에서도 원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더구나 공개적인 관중석에서 상품을 건넨다면 아마 모든 사람이 유언비어를 터뜨릴 게 뻔했다.안시연이 미치지 않은 이상 연정훈에게 이런 상처를 줄 리가 없었다.권력이 상당한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은 아주 바보 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안시연과 같은 신분의 사람은 더더욱.안시연은 급하게 문밖으로 나서고 줄행랑을 쳤다.이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던 양민아가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여전히 무덤덤해 보였는데 곧 굉장한 일이 생길 거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상관없는 걸까?’‘아니면 안시연을 감싸려고 모르는 척하는 걸까?’안시연이 문밖으로 나서는 걸 보며 양민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다른 한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양혁수가 안시연을 꿰차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연정훈에게 안시연도 소현주와 같은 여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자리는 적합하지 않았다. 양씨 가문, 연씨 가문의 명성에 금이 가서는 안되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연정훈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정훈아, 어디가?”“화장실.”남자는 덤덤하게 말했고 상대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다.양민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특별석 밖.안시연은 밖으로 나서자마자 빠르게 화장실로 뛰어갔다.행여나 양혁수를 마주칠까 안에서
양혁수가 자신을 왜 찾는지 뻔히 알면서 묻는 연정훈이 미웠다.자신은 연정훈의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이렇게 줄행랑을 친 건데 비아냥거리다니.“그 자리에서 선물 받으려 했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계획을 망친 거예요.”안시연이 그의 말에 되받아쳤다.교수님.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호칭이었다.그런데 오늘 그의 말에 대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연정훈은 코웃음 치며 그녀의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열려고 했다.“내가 괜한 짓을 했나 보네.”그런데 안시연이 빠르게 몸을 돌려 그의 손을 막았다.두 눈이 마주쳤다.“왜 선물 필요 없어?”“...”할말을 잃은 안시연이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해하는데 누군가 문을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문이 심하게 흔들렸고 한 번 더 걷어차면 열릴 것 같았다.그래서 문 쪽으로 감히 몸도 기대지 못하고 연정훈이 무언가 해주길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연정훈은 덤덤하게 안시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안시연은 연정훈과 더 이상 말다툼할 겨를이 없었고 양혁수가 두 번 문을 걷어차기 전에 손을 잡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는 몸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녀에게 이끌려 아래층으로 뛰었다.계단은 어두컴컴했고 안시연은 그의 손을 꼭 잡고 허겁지겁 뛰었다.뛰는 내내 연정훈은 안시연의 호흡 소리와 옅은 불빛에 반짝이는 그녀의 긴 머리에 정신이 팔렸다.양혁수 그 “미친놈”이 정말 연정훈 앞에서 고백한다면 안시연은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을 생각이었다.그래서 연정훈과 숨이 차게 달려 아래층까지 내려왔으나 다른 층의 문은 잠겨 있었다.그러나 다행히 1층 문은 열려있었다.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과 거의 동시에 위층의 문이 펑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마 누군가 강제로 걷어차 열어진 것 같았다.안시연은 조금도 지체하지 못하고 연정훈을 이끌고 또 뛰기 시작했다.그런데 더는 참지 못한 연정훈이 자리에 뚝 멈춰 섰다.“왜 뛰는 거야!”안시연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숨이 너무 가빠 말 대신 손을 휘휘 저었다.
다행히 안시연이 빠르게 통화를 종료했다.그러나 숨을 돌리기도 전에 양혁수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이번에는 안시연이 움직이기 전에 연정훈이 먼저 수신 버튼을 누르고 길옆에 차를 세웠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힐긋 살폈다.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 등을 기대며 안시연과 시선을 마주했다.“얘기해.”“...”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양혁수는 정말 안시연에게 숨 쉴 구멍도 남겨주지 않을 생각인 듯싶었다.“안시연?”안시연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저예요.”양혁수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야?”“운전 연습이 끝나서 이만 돌아가 보려고요.”“위치 보내줘. 내가 바래다줄게.”“이미 차에 탔어요.”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나 피하는 거야?”“아니에요.”“내가 연정훈의 앞에서 상품을 건네 그 사람 체면이 구겨질까 봐 그래?”안시연은 양혁수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입 좀 다물어.’연정훈의 눈치를 살피며 안시연이 말했다.“도련님, 상품은 도련님이 챙기세요. 그렇게 의미 있는 물건은 직접 소장하셔야죠.”양혁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상품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네가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고. 그런데 요즘 생각 정리를 마친 게 있어서 직접 얼굴 보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안시연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전에 나한테 시집와도 되냐고 물었잖아. 생각해 보니 안될 건 없더라고.”???‘내가 언제 그런 걸 물었다고 그래?’눈을 커다랗게 뜬 안시연이 연정훈을 살폈다.연정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고 있었다.“도련님, 그런 장난하지 마세요. 제가 언제 그런 말을?”“네가 아니라고 해도 난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양혁수는 점점 더 대담한 소리를 했다.“어때? 양씨 부인하고 싶은 마음 있어?”안시연은 머릿속이 윙윙 울리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양혁수가 뱉은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구별한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오늘 밤 죽었다는 생각뿐이었다.입을 열려는데 귓가에 차가운
차 안에서는 한참 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양혁수가 먼저 도발했다.“왜 그래요 형? 아쉬워요?”“형이 포기하지 못할까 봐 내가 더 초조해요.”“난 안시연과 결혼할 거예요.”“입만 열면 허풍은.”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왜 형한테 허풍을 치겠어요? 내일 아침 9시 구청에서 만나요. 안시연이 오면 바로 혼인신고서 작성할 거예요.”안시연이 참다못해 외쳤다.“도련님!”“나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여전히 농담 섞인 말투였다.“내일 혼인신고서 작성하려는데 올래?”안시연은 심호흡하며 말했다.“이런 농담 다시 하지 마세요.”“농담 아니야.”양혁수는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오기만 해. 그럼 결혼하자.”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그 말에 심장이 절로 쿵쿵 뛰었다.“형. 어떻게 생각하세요?”양혁수가 연정훈에게 재차 물었다.안시연 손을 잡았던 손의 힘이 풀리고 연정훈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내일 아침 9시, 내가 직접 바래다줄 테니 자신 있으면 제시간에 오든지.”양혁수가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절대 늦지 않을게요!”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안시연은 혼이 반쯤 나간 상태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연정훈이 너무 힘을 준 건지 손자국이 빨갛게 남았다.안시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대표님, 저도 독립적인 생명체라고 생각되는데요.”‘왜 내 혼인은 제 멋대로 결정하고 아침 일찍 바래다준다고 하는 거야?’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졌다.그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애써 기분을 억눌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또 네가 기뻐할 줄 알았지.”‘결혼이 간절해 내가 아니면 양혁수를 찾아갈 줄 알았어.’안시연은 고개를 돌렸다.“기뻐하든 아니든 그건 제 일이 구요. 제 혼인도 저만 결정할 수 있어요.”연정훈이 침묵했다.한참 조용하던 차 안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안경을 벗어 앞으로 내던졌다.“양혁수가 결혼하자는 말이 진심
안시연은 억울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집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둘은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같은 방에 있어도 두 사람은 서로를 공기처럼 여겼다.안시연은 옆방에서 자겠다고 마음먹고 이불과 베개를 챙기며 물었다.“오늘 할 거예요? 안 하면 잘래요.”그 말투는 듣는 이의 화를 돋웠다. 마치 내일 양혁수가 무조건 구청에서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 단정하는 말투였다.연정훈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내일이면 제수가 될 사람한테 그러면 내가 뭐가 되겠어?”“...”안시연은 이불을 안고 몸을 돌렸고 옆방으로 돌아가 펑 하고 문을 닫았다.연정훈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고 손목시계를 풀어 탁자에 내리쳤다.내일 아침 9시, 12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하지만 연정훈은 조금도 급한 마음이 없었다.내일 아침 대체 누가 체면을 구길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그러한 생각에 잠긴 채로 방을 걷다가 연정훈은 실수로 탁자 모서리에 다리를 찍었다.우당탕!갑자기 들려오는 소란에 안시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방을 나가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다시 마음을 고쳐 자리에 앉았다.어차피 이런 일로 연정훈의 목숨이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악독한 마음을 먹은 사람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안시연은 이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잠이나 자자!’...양씨 저택.양민아는 서킷장에서 양혁수를 만나지 못해 내내 전전긍긍했다.자유로운 성격의 양혁수가 정말 엉뚱한 짓이라도 한다면 양민아 본인도 연루될 게 뻔했다.급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양혁수는 보이지 않았다.양씨 본가는 경인 시에 있었으나 최근에는 경남 쪽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양지원이 자주 집을 비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그러니 남매마저 집을 비우면 본가는 방치될 것이다.“아가씨.”집사가 양민아에게 인사를 올렸다.양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도련님은요?”“큰아씨의 서재에 계십니다.”양지원은 거의 반백 살이 되어가도 집사는 그녀를 큰아씨라고 불렀다.양민아는 이미 적응이 된 터라 대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