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 입안의 사탕 절반은 안시연이 먹어치웠다.지금은 이미 한밤중이라 연정훈을 더 이상 건드리면 또 뽀뽀 세례를 당할까 봐 안시연은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화제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이 펜션이 정말 크더군요. 제가 들어올 때 길을 잃을 뻔했다니깐요.”“나중에 한가할 때 구경시켜 줄게.”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여기 정말 넓은걸요. 별구경 하기 딱이네요.”연정훈은 안시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별이 그렇게 좋아?”안시연은 부끄러운 듯 웃음만 지었다.안시연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사실 너무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별나라에 빠져들게 되었어요.”빠져들게 되었다는 말이 연정훈은 꽤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연정훈은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누구지?”안시연은 몸을 약간 일으켜 세우며 대답했다.“인터넷으로 만난 친구요.”연정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지금 인터넷으로 연애하는 거야?”안시연은 멈칫했다. 그녀도 그 상황이 연애인지는 잘 모르지만 상대방이 남자인 것만은 확신했다. 그동안 안시연은 월요일과 수요일마다 인터넷으로 상대방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었다.“아니요. 상대방은 저와 천문학에 관한 얘기만 나누고 싶어 하는걸요.”안시연이 대답했다.연정훈이 빙그레 웃었다.“원망하는 말투로 들리는데.”안시연은 그를 한 번 힐끗 보았다.연정훈의 얼굴에는 재미있어하는 표정만 있을 뿐 질투의 기색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안시연은 입을 오므리며 마음속 한구석에서 섭섭한 느낌을 받았다.과거의 일일 뿐인데 연정훈은 한마디 더 물어봤다.“그 뒤로 어떻게 됐어?”안시연은 연정훈의 가슴에 얼굴을 붙이며 흥미 잃은 표정으로 대답했다.“그 뒤로 갑자기 사라졌어요. 저를 무시한 채 저를 삭제했으니까요.”“무례를 범한 건 아니고?”안시연은 고개를 쳐들며 해명했다.“아니에요! 그분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어요. 매번 대화가 끝나면 저에게 문제를 남겨주셨어요. 인터넷
“정훈 씨, 그만...”안시연은 무언가를 위해 사정할 때 연정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남자는 안시연의 어깨를 누르며 거역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녀의 귓가로 다가가 속삭였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었다.그녀의 몸은 연정훈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웠다.연정훈은 천천히 생각하다가 문제들을 묻기 시작했다.“태양계에서 가장 온도가 높은 행성은 어디지?”“은하계에서 어느 행성이 가장 클까?”“태양의 부피는 지구의 몇 배나 된다고 생각해?”마지막 물음은 안시연은 기억나지도 않았다.연정훈이 그녀의 마지막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안시연은 답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볍게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에게 허리를 눌렸다.그리고...“정훈 씨...”어찌할 바가 없었다.연정훈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가로 들려왔다. 그녀는 저항할 힘도 없었다. 다만 연정훈이 너무 심하게 운동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니면 내일 아침에 정말 일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얼굴을 돌려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답을 모른다고?”말하는 동안에도 그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안시연은 울듯 말듯 한 소리로 대답했다.“잊어버렸어요.”“130만 배거든.”“알겠어요. 음...”“선생님이 가르쳐 주었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안시연은 입을 꽉 깨물었다.그녀를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안시연은 단지 2초만 망설였을 뿐이지만 연정훈은 동작에 더 힘을 주었다.안시연은 참다못해 이내 투항했다.“고마워요. 교수님, 고마워요.”연정훈은 가볍게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혹적이고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안시연의 온몸이 뜨거워 났다.앞서 두 번의 운동에서 그녀는 자신이 녹아버릴 것 같았는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가볍게 흐느꼈다.장본인은 뒤에서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깨무는 입술을 누르며 달랬다.“착하지? 물지 말고 편하게 있어.”안시연은 머리마저 간간이 저려났고
김세연은 실언을 자각하고 있었는지 바로 웃으며 양지원을 가볍게 밀어냈다.“뭘 긴장하고 그래요. 친오빠도 아닌데.”양지원은 그제야 자신의 과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의식하며 눈살을 찌푸렸다.김세연은 양지원을 힐끗 쳐다보더니 또 말을 이었다.“이번에도 또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거 맞죠?”양석진에 관한 말이 나오자 양지원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저도 잘 몰라요.”김세연이 입을 삐쭉거렸다.양석진이 십여 년 동안 경주를 장악해 왔는바 그가 이번에 이 바닥에 진입하여 위로 더 올라간다면 분명 수천억에 가까운 재산을 가진 재벌가로 될 것이다.이것이 바로 김세연이 양민아를 맘에 들어 했던 이유였다. 양석진은 반평생이 지나도록 홀로 살았기에 아들딸이 없었다.분위기가 싸늘해지자 김세연은 화제를 돌렸다.“참, 생김새로 말하자면 소현정 그 여우도 당시 지원 씨 닮은 얼굴로 성호 씨와 어울렸던 것 아니에요? 그 여우는 아직도 성호 씨 곁에서 맴도는 건가요?”남편과 남편 내연녀 얘기가 나오자 양지원은 헛웃음을 지었다.“사이가 엄청 좋은걸요.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요!”김세연이 쯧쯧 하며 말을 이었다.“지원 씨도 성격이 너무 좋군요. 몇 년 동안이나 참다니!”“혁수와 재산 때문이 아니라면 진작 제 손으로 처리했을 겁니다!”“듣는 바에 의하면 소현정과 죽은 남편 사이에 아이가 한 명 있다고 하더군요.”김세연이 말했다.양지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딸이에요. 양혁수 또래인데 태어나자마자 다른 집안으로 보내졌대요.”김세연이 경각성을 높였다.“정말로 그 여우 남편의 유복자 맞아요? 만에 하나...”양지원이 콧방귀를 뀌었다.“요 몇 년 동안 성호 씨가 저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어요. 아이가 만약 성호 씨 혈육이라면 그 여우를 분명 보내지 못할 테니까요.”김세연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김세연은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양지원은 피곤한 표정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누워버렸다.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누워서 몇 마디 더 얘기했다.“글쎄요. 우리
여덟 시.안시연이 머리를 말리고 나올 때 연정훈은 이미 옷을 다 차려입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콧등에 금테 안경을 건 모습이 조금 전 침대 위 모습과는 달리 매우 고급스럽고 우아해 보였다.연정훈은 냉정하고 침착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아침은 어디서 먹고 싶어?”안시연이 의아해하면서 물었다.“장소를 옮길 수 있어요?”연정훈의 눈빛은 부드러워졌다.“홀에 가서 먹어도 돼. 그곳은 지대가 높아 경지도 좋거든.”안시연이 잠시 생각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다른 사람이 우리를 봐도 괜찮을까요?”연정훈은 패드를 들고 그 위로 몇 번 손가락을 휘둘렀다.“내가 다른 집안 사모님을 데려온 것도 아니고 시연이를 데리고 다니는 건데 뭐가 안 괜찮다는 거지?”안시연이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그냥 물어본 거예요.”그녀는 돌아서서 방 안으로 들어가 허리를 굽혀 이불을 개었다.“웨이터가 치울 거야.”연정훈이 말했다.“알고 있어요.”안시연은 대답하면서 여전히 침대 시트를 바꿨다. 그리고 어제 깔았던 그 시트를 안고 밖으로 나가서 버렸다.돌아온 안시연이 연정훈 곁을 지났고 연정훈은 진지하게 차를 마시다가 문득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안시연이 입술을 오므리다가 멈칫 놀라더니 바로 연정훈에 의해 그의 다리 위로 끌려갔다.안시연은 부끄러워 했고 연정훈은 일부러 그런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어디 가서 먹을래?”“교수님 생각대로요...”“내 생각대로?”연정훈은 눈살을 치켜들었다.“내 생각대로 하면 또 이것도 맘에 안 드네, 저것도 맘에 안 드네 할거면서.”안시연은 멈칫 놀랐다.그리고 그제야 반응했다.어젯밤, 연정훈이 그녀에게 그런 것들을 하려고 했지만 안시연은 여전히 몸을 비비 꼬며 싫다고 했었다.연시아는 얼굴이 빨개져서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연정훈은 바로 연시아의 손을 잡아당기며 그 손가락들을 감상했다.어젯밤 침대에서는 불이 꺼져서 그나마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침 햇살이 비쳐 그와 이렇게 친밀한
조이현은 지난번 연정훈이 주지혁을 크게 혼내준 일을 알고 있었고 그 일로 인해 그녀와 주지혁의 혼담이 깨질 뻔했었는데, 다행히 그녀가 임신 중이어서 그녀의 아버지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으셨다.조이현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넨 것은 주지혁에 대한 연정훈의 태도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그래서 연정훈이 먼저 묻자, 그녀는 속으로 은근히 기뻤다.“그래요, 저의 아버지께서 일부러 시련을 시킨 것이죠.”연정훈은 의자에 기대어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말했다.“주 대표님은 안목이 독특하셔서 앞날이 기대되네요.”그가 무슨 의도로 일부러 주지혁의 안목을 칭찬했는지 주지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지금 남보다 한 수 아래여서, 좋아하는 사람이 연정훈의 손아귀에 있는 것을 거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는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고 이후에 꼭 이겨서 빼앗아 오겠다고 맹세했다.“대표님이 기대하는 앞날은 보장 못 하겠으나 그래도 대표님께서 한 번 기회를 주시기를 바랍니다.”“주 대표님은 너무 겸손하시네요.”연정훈은 짧게 한마디 내뱉고 머리를 돌려 안시연의 뺨 옆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그녀가 두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대추차를 보며 부드럽게 타일렀다.“조금 더 마셔.”안시연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주위의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둘만의 세상에 푹 빠진 그들의 모습을 보며 조이현은 더 이상 머물 생각이 없었고, 약혼 신랑도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여 그녀는 몇 마디 하고는 즉시 사람을 끌고 나갔다.그들이 가자마자 안시연은 연정훈을 한 눈 쳐다보았다.연정훈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 보고 있었다.“교수님, 일부러 그러셨어요?”“뭘?”연정훈은 그녀의 말뜻을 순순히 이어주지 않았다.그러자 안시연은 고개를 숙여 그릇에 담긴 대추 몇 알을 숟가락으로 모두 골라내어 재빨리 남자의 입술에 갖다 댔다.연정훈이 잠시 멍때릴 시간 안시연은 이미 빠르게 숟가락을 밀어 넣었고, 눈 깜빡할 사이에 또 숟가락을 그의
안시연은 요즘 따라 연정훈이 지금까지 아예 여자를 만나 본 적이 없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그날 밤 이후로 연정훈은 마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발견한 것처럼 일주일 내내 밤낮으로 그녀의 몸을 뒤척이며 못살게 굴었고, 그들의 이런 나날을 방탕하다고 형용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그는 그녀의 몸을 여러 가지 방식, 각도, 또 다양한 힘으로 보이는 곳부터 안 보이는 곳까지 샅샅이 뒤져보듯 탐색하였다.매일 밤 어슴푸레한 등불 아래서, 그녀의 나른한 신음이 은은하게 들려왔다.자극적인 쾌감은 그녀가 모든 것을 잊게 했다.가장 뜨거웠던 적은, 햇볕이 한창 쨍쨍 내리쬐고 있는 오후, 그녀는 연정훈에 의해 대기실 침대 위에 눌려 그런 일을 하고 있었고 침대 머리맡의 전용선이 계속 깜박거리고 있었지만, 연정훈은 못 들은 척했다.그녀는 몸을 꼬아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이불 위에 엎드려 간신히 말을 꺼냈다.“어... 어서 받아...”그녀가 겨우 말을 마치자 또 새로운 부딪치는 쾌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연정훈은 뒤로부터 그녀에게 키스하며 동시에 전화기를 스피커폰으로 눌렀다.그녀는 신경이 극도로 곤두서서 아무 소리도 감히 내지 못했다.비서의 목소리가 조리 있고 차분하게 들려왔다.연정훈은 아쉬운 듯 여인의 입술에서 떠나 몸을 일으키며 절제된 목소리로 대답했다.안시연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은 계속되고 있었다.연정훈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침착한 태도로 전화선까지 늘려 그녀의 고통을 무한대로 연장했다.마침내 비서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놓는 순간 안시연이 비명을 질렀다.그리고 더 격렬하고 치명적인 부딪힘을 견뎌야 했다.드디어 끝난 후 그녀는 베개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행동이 너무 올바르지 못하다고 느꼈다.연정훈은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남녀가 사랑하면 이런 일은 당연한 거야.”“하지만...”“다음엔 안 올라올 거야?”남자가 되 물자 안시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그
안시연은 그들의 무리에 잘 어울리지 못해서 원래 연정훈의 친구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연정훈이 말했다.“앞으로 이런 자리에 자주 데리고 나올 테니 너도 슬슬 익숙해져야 해.”그들의 관계를 모든 사람에게 다 알릴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그가 무심코 내뱉은 이 말은 왠지 모르게 그녀를 모든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그 때문에 안시연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어떤 스케일이죠? 제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요?”“드레스요?”“아니면 그냥 치마?”그녀는 연신 물으며 또 화장대를 가리켰다.“액세서리도 해야 하나요?”연정훈은 그녀가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금치 못했다.그는 대답 대신 오히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아무거나 입어.”“네?”“옷은 결국 사람이 받쳐 주는 거야. 시연이가 자신감을 가져야지.”그는 문 앞에서 몸을 돌려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넌 해진 치마를 입어도 눈에 띄게 예뻐.”안시연은 두 손을 등 뒤로 한 채 그의 말에 조금 기뻤다.그녀는 줄곧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쁘다고 칭찬을 받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그녀는 그를 따라 문밖으로 배웅해 주고 발꿈치를 들어 그의 턱에 가볍게 입맞춤했다.“저녁에 봐요.”‘교수님.’연정훈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안시연은 간단히 정리를 하고 서둘러 회사로 달려갔다.장가희는 그녀의 피곤한 안색과 감출 수 없이 새어 나오는 미묘한 여성스러운 느낌을 빠르게 눈치채고 장난치듯이 말했다.“요즘 밤 생활이 아주 행복했나 보네요.”안시연은 얼굴을 붉혔다.때마침 주임이 그들에게 함께 본사 빌딩에 계약서를 보내러 가라고 했다.아래층을 지날 때 마침 연정훈이 사람들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모두 길을 비켜주었고 안시연도 고개를 숙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연정훈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장가희는 감탄하듯이 말했다.“연 대표님은 저희랑 거리가 정말 머네요. 항상
병실 안.점심에 간호사가 잠시 볼일이 생겨서 할머니에게 휴가를 신청했다.할머니께서도 기분이 좋았던 참이라 어서 가보라고 했다.간호사가 금방 떠나고 얼마 안 있어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할머니는 어리둥절해하며 입을 열었다.“들어오세요.”병실 문이 열리더니 나이와는 다르게 관리가 엄청나게 잘 된 한 중년 여인이 들어섰다.들어온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고 할머니는 잠시 멍해 있더니 곧 벼락을 맞은 듯 깜짝 놀라 심장 박동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소현정은 비록 몇 년 동안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건강 상태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둘러 병실 안으로 들어와 어머니를 다독여 주었다.“어머니, 괜찮으세요?”몇 년 만에 다시 듣게 되는 “어머니”라는 말에 할머니는 정신이 어질어질해 쓰러질 뻔했다.한참 동안 가까스로 숨을 돌린 후에야 할머니는 침대 옆 가드레일을 움켜쥐고 격동된 어조로 그녀에게 소리쳤다.“이제 돌아와서 어쩌자는 거냐!”어머니의 늙고 병든 모습을 보면서 소현정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가슴이 아파졌다.“그동안 죄송했어요.”“나한테 죄송해할 거 없고 네 딸내미한테는 미안하지도 않냐?!”안시연을 언급하자 소현정은 눈살을 약간 찌푸리더니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다.“일단 물 한 잔 따라드릴게요.”아무래도 친딸이라 그런지 어르신네는 더 쌀쌀하게 굴지 못했다.그러다 보니 분위기가 점차 누그러졌다.그 두 모녀는 서로 눈물을 훔치며 이 몇 년 동안의 사정을 이야기했다.“네가 어떻게 지내든 상관없다. 그런데 네 딸 시연이가 곧 결혼이잖니. 돈이라도 좀 마련해 두거라.”“결혼이라니?”소현정은 잠깐 멍해졌다.“누구랑요?”할머니가 말했다.“시연이 대학 동기라는데 참 노력하는 아이여.”말만 들어도 평범한 사람인 것 같았는데 소현정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좋네요.”“때가 되면 집 한 채를 선물로 보내드리죠.”그녀는 담담하고 여유롭게 말했으나 할머니는 듣더니 눈살을 찌푸렸다.그해 소현정은 안시연의 아버지와
“멀쩡히 밥을 먹다가 굳이 이렇게 태클을 걸어 가족 모두가 기분이 망쳐야 하겠어?”연호민이 언짢은 듯 말했다.“시연이도 괜찮다고 하지 않느냐!”연정훈은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시연이가 괜찮다고 말한 건 예의를 차려 한 말이에요. 그걸 악용해 괴롭히라는 의미가 아니라고요.”“누가 악용을 하고 괴롭혔다고 그래?”민수희도 참지 못하고 말했다.“집에 식재료도 없는 요리 하나로 이렇게 상을 뒤엎어야겠어? 너희들이 온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한 음식인데 네가 직접 봐봐. 어느 요리가 평범하고 무난한 요리이지?”“자세히 보면 시연이가 좋아하는 요리는 하나도 없는걸요.”민수희는 말문이 막혔다.연정훈이 냉소를 터뜨렸다.“결혼한지 이튿날 양가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요. 양씨 가문 사람들은 차를 끓여도 내 입맛이 뭔지 물어봤어요.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시연이가 좋아하는 음식은커녕 모든 가족이 할머니 입맛대로 건강식을 먹어야겠어요?”그 말에 민수희가 화를 내기도 전에 연재혁과 표세연이 고개를 갸웃했다.‘정말?’‘네 장모님이 그렇게 잘 챙겨줬다고?’‘지어낸 거지?’양시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마른기침했다.가끔 연정훈이 이렇게 안색 한번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할 때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탁!이번에는 연호민이 수저를 큰 소리로 내리쳤다.민수희는 남편이 제 편을 들어주는 줄 알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너희들이 오늘 이 집을 찾은 이유가 나와 네 할아버지에게 태클을 걸기 위해서였구나! 결혼한 지 둘째 날부터 가문에서 주름을 잡으려는 거지!”연정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강하게 나갈 생각이었다.양시연은 앞접시에 놓인 반찬을 젓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불쌍한 척 어깨를 구겼다.분위기가 어느새 살벌해지고 연재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어머니, 정훈이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번만 봐주세요.”“정훈이는 입이 없는 거니?”민수희가 냉소를 터뜨렸다.“네 아들이 이사회에서 이사진들을 말로 아주
“시연이가 좋아하지 않는 요리는 치우면 되죠. 그게 뭐가 대수라고.”표세연이 덤덤하게 말하자 정 할머니는 잠시 주춤하다가 얌전히 순대를 가지고 나갔다.그러나 아직 공기 중에 남은 냄새에 양시연은 여전히 속이 불편했다.다행히 다른 요리는 아주 담백했고 모두 입에 맞았다.빨리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 다른 걸 챙겨 먹으면 된다는 생각에 양시연은 말을 아꼈다.연정훈이 제육을 집어 밥 위로 올려주며 물었다.“먹고 싶은 거 있어?”식사 자리가 조용해졌다.국을 마시던 민수희는 조용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양시연은 젓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연정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눈치를 챘다.“사케 푸아그라가 먹고 싶네요. 어제 식장에 수성시에서 온 셰프가 만든 게 입에 맞더라고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 할머니를 향해 말했다.“이 셰프한테 사케 푸아그라를 준비해달라고 하세요.”“이미 점심 시간대도 지났고 이 셰프도 쉬는 시간이 아니겠느냐?”민수희가 입을 열었다.“굳이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있겠어?”정 할머니가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도련님, 우리 집에 푸아그라는 없어요. 그렇게 잔혹한 식재료는 인간적으로 먹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없으면 사 오세요.”연정훈이 젓가락을 내려 두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경인시에 없는 게 어디 있어요?”정 할머니는 말문이 막혔다.정 할머니가 움직이기도 전에 연정훈이 말했다.“제가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제 말은 자꾸 무시하시네요.”“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서둘러 주방에 알리지도 않으시고.”연정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정 할머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연재혁은 먼저 예상했던 일이란 듯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그리고 그 옆의 표세연은 아들이 두 사람을 상대하는 걸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구경했다.민수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연호민이 연정훈을 향해 무덤덤하게 말했다.“정 할머니도 이 집안의 어른인데 예의를 차리거라.”“그럴 수는 없죠.”연정훈의
짧은 대화를 통해 양민아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양시연이 몰래 감탄하는데 차량이 연씨 저택 부근에 도착했다.연씨 가문은 역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답게 저택에서도 그 오랜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양지원은 널찍한 시야와 해가 잘 드는 걸 좋아해 양씨 저택은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이 많았다.그러나 연씨 가문은 풍수지리를 아주 중요히 여겨 정원부터 뒤뜰까지 거의 빈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거실도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훌륭한 배치를 가졌다.양시연은 오늘 은색 빛이 도는 원피스를 입고 7센티미터가 되는 하이힐을 신었다. 그리고 머리를 반듯하게 올렸는데 햇빛 아래 피부가 투명하게 빛이 돌았다.거실에는 연재혁 표세연 부부를 제외하고 연호민, 민수희도 함께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창가 자리에 앉아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멀리서 보면 꽤 화목해 보였다.연정훈과 양시연이 안으로 들어오자 표세연이 활짝 웃으며 양시연을 반겼다.양시연은 창가의 두 사람을 향해 계산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민수희의 표정도 확인하지 않고 몸을 휙 돌려 표세연의 옆으로 앉았다.“...”표세연은 기분이 퍽 좋아 보였다. 아들이 드디어 결혼한 것도 기쁜 일인데 이렇게 훌륭한 아내를 맞다니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표세연이 양시연의 손을 잡고 강남시티의 집은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채워 넣거라. 구하기 힘든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그러면 내가 바로 구해줄게.”양시연은 왠지 적응되지 않아 예의상 미소만 지었다.그러나 표세연은 개의치 않고 도우미를 시켜 차를 내오게 했다.이어지는 인사 순서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시작되었다.조금 의외였던 건 민수희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지만 일부러 양시연을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인사를 건네고, 절을 하고, 용돈을 받는 내내 민수희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이어 연정훈의 부모님 차례가 되고 부부는 활짝 웃은 채로 여러 덕담을 건넸다.“시연이랑 정훈이가 여기까지 오도록 많은 고생을
연정훈이 양석진을 아버님이라 호칭하자 점수를 제대로 따게 되었다.별수 없어진 양지원은 몰래 연정훈을 슬쩍 노려보았다.‘이 녀석이!’그러나 연정훈은 표정 변화 한번 없이 양석진과 대화를 이어갔다.양석진은 기분이 좋아져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또 연씨 저택으로 가는 시간이 늦어질까 재촉했다.그러자 양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을 살폈다.이번에는 연정훈이 한 발 더 빨랐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아무도 시연이 괴롭히지 못하게 제가 지킬 겁니다.”“...”‘눈치 한번 빠르네.’양지원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이만 가봐.”그 옆의 양시연은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그러다가 싸늘한 표정의 양지원과 시선이 마주치고 마른기침을 해댔다.양지원이 양시연을 잠시 째려보았다.‘이런 속없는 딸내미.’양시연은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고 집을 나서기 전 양지원에게 애교를 부렸다.그렇게 두 사람을 떠나보내고 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양석진과 두 눈이 딱 마주치고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시선을 슬쩍 피했다.양석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곧 공항으로 갈 거지?”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백호가 통화에서는 혁수가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했는데 너무 걱정돼서 가봐야겠어요.”“참.”양지원이 양석진을 향해 말했다.“오늘 볼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시간이 이렇게 지체되었는데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괜찮아.”양석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먼저 공항으로 바래다줄게.”양지원은 몰래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집을 떠나지 않을 걸 보아 자신을 바래다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그러나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양석진이 양지원을 힐끗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쳐들었다.“그래. 나도 알아.”“그럼...”“그래도 그냥 바래다주고 싶어서 그래.”양석진은 닭살 돋는 말도 참 무덤덤하게 뱉았다. 방금 연정훈이 아버님이라고 말하던 모습보다도 더 덤덤해 보였다.그동안 양석진과 양지원은 대낮에
이어 부모님 차례가 되자 양홍두는 자연스레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지원이 가장자리에 앉았고 양석진은 그 옆의 소파에 앉아 있었으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양시연은 거실의 다른 사람을 살폈다. 집사는 양씨 집안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그래서 낮은 소리로 양석진에게 말했다.“엄마 옆으로 가서 앉으세요. 그러면... 우리가 인사하기 편해요.”양지원이 빠르게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 연정훈이 표정 변화가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양지원을 향해 눈짓하고 있었다.“옆에 앉아도 될까?”“...”‘그걸 왜 나한테 물어!’‘평소에 내가 엄청 깐깐하게 구는 줄 알고 오해하면 어떡해!’게다가 연정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기에 잠시 고민하던 양지원이 양석진에게 말했다.“그래요 오빠, 여기로 와서 앉아요. 같이 인사를 받는 건데 뭐 어때요?”“...”연정훈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도 꾹 다물었다.양시연은 이런 연정훈을 몰래 살피고 있었다. 양지원이 소용없는 짓을 하는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그때, 양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지원의 옆자리에 앉았다.자리에 앉자 양지원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빳빳이 펴고 긴장한 듯 두 손을 무릎 위로 모았다.양시연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이어 두 사람은 또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양지원은 양홍두와 달리 덕담 대신 잔소리를 늘여놨다.“시연이는 정훈이 네가 온갖 고생을 해서 겨우 얻은 아내니까 꼭 잘해줘야 해. 네가 우리 시연이 속상하게 하면 절대 체면 따위 봐주지 않고 되갚아 줄 거니까 명심해.”“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네 할머니 쪽도 네가 잘 처리해야 해.”“네 알겠습니다.”“네 엄마가 아이를 재촉하지는 않겠지?”“절대 그럴 일 없어요.”양지원은 한참 꼬치꼬치 캐물으며 사위 앞에서 주름을 잡았다.양석진은 그 옆에 앉아 양지원이 악독 장모님을 연기하는 걸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러자 양지원은 하던 말도 멈추고 양석진을 노려보았다.‘
양시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말했다.“일반적으로 누굴 괴롭히는 스타일이 아니에요.”“만약 날 괴롭힌다면?”“그럼 정훈 씨가 그럴 만한 일을 했나 보죠.”“...”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표정을 살폈다. 연정훈이 따로 말이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양지원과 양석진의 관계는 비밀까지는 아니었지만... 보아하니 연정훈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에이 됐어.’‘이미 결혼까지 한 사이인데 연정훈 위치에서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일이잖아.’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맞은편의 연정훈이 양시연이 까준 달걀에서 노른자위만 빼고 다시 양시연의 앞접시에 내려놓았다.고개를 드니 연정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먹어.”“네.”양시연은 고개를 숙여 밥을 한 큰술 떠먹다가 흰자위를 입에 넣었다.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부부는 바로 양씨 저택으로 떠날 생각이었으나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와 어젯밤 너무 힘들어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고 조금 늦게 오라고 했다.“정훈 씨 집에도 연락해요. 우리 점심시간에 맞춰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파에 앉아 잡지를 뒤적였다.9시 30분, 두 사람은 양씨 저택으로 떠났다.양씨 저택은 어제 걸어 놓은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입구에 도착하자 집사가 환히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집사부터 도우미까지 감히 아무도 연정훈을 양지원처럼 무시할 수가 없었고 공손히 거실로 모셨다.집안으로 들어서고 두 사람은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건넸다. 그러나 양석진과 양홍두만 보일 뿐 양지원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양석진이 양시연에게 말했다.“너희 엄마는 아직 메이크업이 끝나지 않았어, 금방 내려올 거야.”양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난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양석진이 연정훈을 힐끗 바라보다가 양시연에게 물었다.“어젯밤엔 우리 집이 아닌 곳에서 보낸 밤인데 적응은 돼?”양시연은 잠시 고민했다.‘이 질문은 아마도 연정훈이 잘 챙겨주는지 물어보는 거 맞겠지?
따뜻한 햇살이 방안을 비추고 양시연이 두 눈을 뜨자 잘생긴 외모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은 마침 아침 8시가 되었다.이어 나른하게 기지개를 켠 양시연은 늦장을 부리기 위해 연정훈을 툭툭 밀었다.“오늘 양가 부모님 뵈러 가야 하는데...”눈을 뜬 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봤다. 양시연은 바로 자신의 옆자리에 꼭 붙어있었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었다.연정훈은 고민도 하지 않고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양시연은 얼떨결에 그 품에 안기게 되었다.눈을 깜빡이던 양시연이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연정훈도 고개를 숙여 양시연과 시선을 마주했다.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연정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 눈에 뭐 있어.”‘눈에?’‘아침 댓바람부터 눈에 뭐가 있다고... 설마 눈곱?’양시연은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고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남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이를 악문 양시연은 이미지 신경 쓸 겨를 없이 손을 뻗어 연정훈의 볼을 잡아당겼다.“나만 있고, 정훈 씨는 없는 줄 알아요?”“난 없어.”“고개 돌려봐요. 한 번 보게!”연정훈은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양시연의 손을 잡고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그러자 양시연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얼굴을 제 앞으로 당겼다.연정훈은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이어갔다. 한편으로 피하며 다른 한편으로 양시연의 두 손을 꼭 쥐었다.양시연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자신 있으면 피하지나 말던가요!”“이젠 일어나서 씻어야 하니까 장난은 여기까지.”“쳇. 누구 마음대로. 빨리 고개 돌려봐요! 한 번만 보게!”“양! 시! 연!”아침 일찍 식사 준비를 하던 도우미가 그 소란에 참지 못하고 위층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른 도우미와 몰래 눈짓을 주고받았다.‘신혼이 좋긴 좋네.’위층의 연정훈은 빠르게 일어나 화장실로 도망갔고 서둘러 세수했다.양시연은 치사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이어
부승원은 집에 도착해 샤워를 마쳤다.도우미가 부승원을 찾아와 물었다.“도련님, 소파 위의 때 묻은 가방을 가져올 가요?”‘때 묻은 가방?’부승원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저도 모르게 꼭 끌어안고 있던 두 남녀가 떠올랐다.그래서 부승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버려요.”‘네?’도우미는 의아했지만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버릴 쓰레기였다면 왜 고이 갖고 온 거지? 완전 헛수고잖아.’도우미가 가방을 들고 버리려고 가는데 아직 그곳에 남아 있던 부승희와 마주쳤다.“아가씨.”부승희가 가방을 받아 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따가 만약 오빠가 가방에 관해 묻는다면 마당에 있는 큰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하세요.”도우미는 어리둥절했지만, 또 고개를 끄덕였다.부승원은 워커홀릭이었지만 그래도 12시가 되면 잠에 들었다. 그러나 오늘에는 업무가 많은 편인 건 지 12시가 넘어도 방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12시 30분경, 핸드폰이 울렸다.반우희가 걸어온 전화였는데 부승원은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한참 뒤, 반우희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수신 거부.그러다가 반우희는 조심스레 문자 한 통을 남겨 이유를 설명했다.벨 소리가 거의 끊어지려는데 부승원이 굳은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변호사님?”반우희는 코를 훌쩍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부승원이 인상을 찌푸렸다.‘울었어?’“무슨 일이야?”“제 가방... 혹시 변호사님한테 있는 건가요?”부승원은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쓰레기인 줄 알고 버렸어.”그 말에 핸드폰 너머가 조용해졌다.“아...아...”반우희는 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작게 탄식을 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탄식 사이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알겠습니다...”반우희는 서둘러 통화를 종료하려 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창피하게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았다.그때 부승원이 혼을 내기 시작했다.“본인이 잃어버린 물건인데 운다고 뭐가 달라져?”“그게 아니라...”“근무일에 결혼식 한번 다녀와 실컷 먹고 놀고 했더니
부승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또 부승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라보는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담겼다.부승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집으로 운전해요.”기사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우희 씨 가방은...”“성인이 되어서 제 물건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건 본인이 알아서 책임져야죠. 내일 서류 제출하지 못하면 숙제는 두 배로 늘어날 테지만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에요.”“...”‘부승원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이곳으로 돌아오라고 한 것도 부승원인데. 쯧, 기름 아깝게.”기사가 유턴하려고 하자 부승희는 그 틈을 타 반우희를 부르려 했다.부승원이 바로 손을 내밀어 부승희를 잡아당기는 동시에 차창을 올렸다.“...”부승희는 굳은 얼굴로 부승원을 바라봤다.“오빠 점점 이상하게 변하는 거 알지?”부승원은 못 들은 척 제 자리에 앉았고 얼굴을 굳힌 채로 말을 잇지 않았다.기사는 천천히 유턴했다.다른 한편, 아래층의 반우희와 장서진은 한참 서로를 끌어안다가 겨우 서로를 마주 보았다.“날 찾아온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한데 그동안 대체 왜 말을 하지 않았던 거야!”장서진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너한테는 세 동생도 있고 나보다 더 힘들게 뻔한데 어떻게 내 짐까지 나누겠어.”“아무리 힘들어도 예서가 아픈 것보다 큰일인 건 없어.”반우희도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우린 어릴 때부터 같이 크면서 빵 한 조각도 나눠 먹었잖아. 그런 네가 힘들다는데 내가 모른 척할 리가 없잖아.”그 말에 장서진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눈물을 흘리는 장서진에 반우희도 눈물 꼭지가 틀어졌다.같은 보육원 출신인 두 사람은 남들보다 고달픈 삶을 살았다. 하지만 하느님은 항상 힘든 사람에게 더 많은 시련을 주는 것 같았다. 장서진이 동생을 만나 같이 지낸 건 겨우 몇 년뿐인데 그 동생이 큰 병에 걸렸다고 한다. 보험 회사에서 절반 비용을 부담한다고 해도 남은 비용은 장서진에게 큰 부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