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팔찌를 골랐고 또 루비 목걸이도 눈여겨보았다.“둘 다 포장해 줘요.”“네.”두 선물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양혁수는 집사에게 큰 케이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집사는 눈치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여름 씨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미리 전화해 보는 게 어떨까요?”양혁수는 의아했다.“매일 집에 돌아왔던 거 아니었어요?”“대표님이 집에 계실 때만 돌아옵니다. 그 외에는 연구실에서 지내세요.”“내가 없을 땐 하루도 안 왔어요?”“대표님이 출장 가셨던 첫날엔 집에 돌아왔지만, 대표님이 없다는 걸 안 다음 날부터는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적어도 대표님이 돌아오실 때까지는 안 오셨습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참 낯설게 느껴졌다. 어릴 때는 양혁수와 무척 가깝게 지냈는데, 몇 년 사이에 말수도 줄고 성격도 많이 바뀐 것 같았다.양혁수는 곧바로 변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연구실 데이터에 문제가 생겨서 모두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혁수 오빠,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요.”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혁수에게 있어 변여름은 어릴 때부터 커가는 걸 지켜봤던 동생이라 감정이 남달랐다. 특히 변백호가 직접 부탁을 했으니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다.양혁수는 케이크를 포장하고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목걸이는 허예나가 말했던 그 요양센터로 보내라고 집사에게 지시했다.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동안 공짜 밥을 얻어먹었으니 보답 인사 정도라 할 수 있었다.변여름이 지내는 연구실 근처에 도착한 양혁수가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변여름이 달려 나왔다.여름바람이 선들거리는데 변여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나타났으며 여전히 머리끈 하나로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양혁수가 경적을 울리자 변여름은 미소를 지으며 조수석에 올랐다.“오빠가 무슨 일로 여길 왔어요?”양혁수가 변여름에게 고개를 뒤로 돌려보라고 하자, 변여름은 케이크와 선물을 보고 곧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오빠가 말해준
양혁수는 슬쩍 시선을 돌렸을 뿐이지만 변여름은 잔뜩 긴장해 버렸다.양혁수가 보낸 메시지를 하나라도 놓칠까 변여름은 허예나 명의의 핸드폰을 가지고 다녔고 지금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잠시 뜸을 들인 변여름은 자연스레 핸드폰을 끄고 다른 메시지인 척 연기했다.어차피 양혁수는 절대로 변여름과 허예나가 같은 사람일거라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변여름이 잠자코 가만히 있는데 양혁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 자리에서 케이크 먹는 거 안 불편해? 우리 근처 레스토랑이라도 갈까?”변여름은 침착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지금도 편해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핸드폰으로 관심을 돌렸다.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으나 허예나는 받지 않았다.집사가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직접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려다 미리 허예나에게 말을 하지도 않았고, 어머니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그래서 집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선물은 데스크에 두고 이만 돌아가세요. 이따가 본인이 찾아가라고 전할게요.”“네. 알겠습니다.”통화를 끊자 변여름이 케이크를 한 입 먹기 좋게 건네왔다.양혁수는 케이크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이렇게 작은 한 입이라면 맛봐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그래서 한 입 베어 물었고 변여름이 질문했다.“누구 선물 준비했어요?”“응. 친구 선물.”양혁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묵묵히 케이크를 먹었다.차 안은 아주 조용했고 양혁수가 물었다.“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동안 어디에서 지낸 거야?”“오피스텔이요.”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답했다.“연구실 부근에 있는 오피스텔인데 학교에서 마련해준 거예요.”“그렇게 작은 공간이 적응은 돼?”“아니요.”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왜 집으로 안 돌아왔어?”“오빠가 집에 없으니까 안 그래도 큰 집이 더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호텔에서 지내는 것처럼 재미도 없고. 그래도 오피스텔
변여름은 양혁수의 성의를 봐서 바로 팔찌를 착용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고리가 아닌 건지 몇 번의 시도를 해도 착용이 쉽지 않았다.이에 양혁수가 말했다.“내가 해줄게.”그러자 변여름은 냉큼 팔을 그쪽으로 내밀었다.양혁수는 한 손으로 변여름의 가녀린 팔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팔찌의 고리를 맞췄다.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팔찌가 변여름의 손목에 걸어졌다.그때 양혁수의 시선이 변여름의 팔 안쪽에 머물렀다. 최소 3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상처가 눈에 띄었다.“이거 어떻게 된 거야?”변여름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몇 년 전에 큰오빠랑 공장에 내려갔을 때 생긴 상처예요. 제품 하나가 문제를 일으켜 폭발했고 그 파편에 긁혔어요.”변여름이 말한 제품이란, 당연히 군사 무기를 가리킬 것이다.변씨 가문이 해외에서 이 업계를 운영하는 것은 합법이었지만, 워낙 강경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집안이라 주변엔 적들이 많았다.양혁수는 애초에 변여름이 이 사업에 끼어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몇 년 전, 변백호 역시 변여름을 가문의 사업에서 멀어지게 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해 버렸다.변여름이 워낙 영리하고 재능이 뛰어나기에 부모와 형제들이 변여름의 능력을 낭비할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하지만 이미 발을 들인 변여름이 왜 다시 그 사업에서 빠져나왔는지, 그리고 변씨 가문 사람들이 왜 허락을 했는지 궁금해졌다“네 오빠는 알고 있어?”양혁수의 질문에 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아직 말 안 했어요.”양혁수는 대충 짐작은 했었다.그리고 마지막 한 입 남은 케이크를 입에 털어 넣고 차에서 내려 쓰레기통에 버렸다.“여기에서 공부가 끝나면 뭘 할 생각이야?”“병원에 취직해 의사해야죠.”양혁수는 더 의아해졌다.“네 가족이 허락할 것 같아?”“당연하죠. 다들 허락했어요.”정말 이상하다 싶었지만 양혁수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시간이 지나고 이쯤이면 됐다 싶은 변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며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집엔
요양센터 쪽은 변여름이 미리 사람을 배치해 두었고, 양혁수가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물건은 이미 변여름 손에 전달되었다.그리고 실험실 건물 아래에 앉은 변여름이 양혁수와 나눈 메시지를 훑어보며 디테일을 체크했다. 보통 젊은 남녀가 메시지를 주고받는 방식은 대체로 이러했던 것 같았다. 노지혜도 그렇고, 연구실 다른 동료들도 그러했다. 그래서 변여름은 자신이 보통 연애를 꽤 비슷하게 따라 했다고 생각했다.변여름의 옆에는 두 개의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온통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팔찌였고, 다른 하나는 루비 목걸이였다. 세밀하게 조각된 루비는 그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뜨거운 태양 같았다. 그리고 두 개를 나란히 비교해 보니, 화려한 붉은 색감이 더욱 생동감 있고, 더 정성을 들여 고른 선물로 보였다.변여름은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물건을 정리한 뒤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허예나가 선물을 받는 데 걸릴 시간을 계산한 후, 변여름은 따로 준비해 둔 작은 상자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섰으며 목적지는 대나무 숲길 근처였다.한편, 양혁수가 막 책상에 앉으려던 찰나, 휴대폰 화면이 반짝였다. 뜻밖에도 영상 통화 요청이었으며 상대는 허예나였다.식사도 여러 번 같이했고 대화도 자주 나눴지만 영상 통화는 처음이었다. 양혁수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별생각 없이 통화를 받았다.영상은 연결되었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양혁수는 카메라를 자신에게 맞추지 않았고, 상대 화면에서도 허예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화면은 온통 어둡기만 했고, 마른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어디야?”양혁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어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이에요.”양혁수는 허예나의 평소 말투를 떠올려 보았다. 허예나 성격상 말끝을 길게 늘이며 이야기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차분했다.“돌아가는 길에 가로등 없어?”“고장 났는데 좀 무서워서 전화했어요.”양혁수는 대답 없이 휴대폰을 한 손에 쥐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이 길
두 사람 사이 정적이 흐르자 허예나가 양혁수를 불렀다.양혁수는 어이가 없었지만 말없이 화면을 전환하여 제 얼굴을 드러냈다.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허예나 한 사람에게 더 보여준다고 덧나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변여름은 양혁수가 갑자기 얼굴을 보일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방금 실물로 본 사람이 갑자기 화면으로 보이자 깜짝 놀라버렸지만 아까보다 훨씬 차가운 얼굴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리고 왠지 가슴 언저리가 시큰거렸다.‘오빠는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이랑 영상 통화도 하는구나.’‘어휴.’‘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오빠도 당하기 참 좋은 사람이네.’“아직도 선물 박스 못 열었어?”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변여름은 서둘러 목걸이를 꺼내 손에 쥐었다.“이거 루비죠? 너무 예뻐요.”“응.”“오빠가 직접 고른 건가요?”“브랜드 매니저가 고른 거야...”“아... 네...”그러자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고 그 모습이 꽤 웃기기도 했다.그러나 이대로 굽혀질 변여름이 아니었다.“그럼 내일에는 빨간 국물로 준비해 볼게요. 얼큰하고 시원하게 말이에요.”바로 음식 채널로 전환해버렸다.양혁수는 저녁을 따로 챙겨 먹지 않고 디저트만 먹었으니 얼큰한 국물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벌써 내일 점심 메뉴가 기대되었다.“매일 요리할 시간은 돼?”양혁수의 목소리는 한껏 다정해졌다.이를 눈치챈 변여름은 눈치껏 말을 지어냈다.“매일 엄마를 보살피는 것 외엔 별다른 일정도 없어요. 오빠 밥도 하고 엄마 밥도 챙기는 거죠.”“참, 내일은 안 되겠네요. 엄마는 매운 음식 드시면 안 되니까 오빠만을 위한 도시락을 따로 차려야겠어요.”그 말에 양혁수는 잠시 멈칫했다.“너무 애쓸 필요 없어.”“알아요.”변여름은 벌써 어떤 요리를 할지 구상을 마친 뒤였다.변여름은 매일 2인분씩 요리를 했고 그 뜻인즉 두 사람은 매일 점심을 같은 메뉴로 먹었다는 말이었다.노지혜는 변여름에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러한 행동이 참 변태처럼 보인다며
선물을 받고 허예나는 계속 양혁수에게 점심 도시락을 보냈고 가끔은 저녁에도 도시락을 보냈다.양혁수는 저녁 늦게 돌아와도 도우미더러 따로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그리고 어느 날 점심시간.해외 파견을 갔던 차장이 돌아왔고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다. 직급이 있다고 하지만 두 사람은 오랜 친구 같은 사이었고 해외에서도 좋은 성과를 따냈기에 양혁수는 흔쾌히 차장의 점심 약속에 응했다.허예나는 매일 점심시간에 맞춰 도시락이 입에 맞는지 물었고 오늘에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러나 약속에 정신이 팔린 양혁수는 대충 대답을 했다.[맛있었어.][갈비도 맛이 잘 들었던가요?][그래.]짧은 말 한 마디에 허예나는 한참 침묵했고 양혁수는 왠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그리고 이어 슬퍼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이 우수수 쏟아졌다.“...”[오늘 내가 한 건 계란국이거든요!]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오빠, 설마 지금까지 먹지도 않고 날 속였던 건 아니죠?][먹었어.]그러자 허예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오늘만 못 먹은 거야.][왜요?][요즘 들어 음식이 입에 잘 안 맞았어요? 왜 안 먹었어요?][설마... 질린 거예요?][지금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 먹고 있는 거죠?]“...”여러 임원과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양혁수는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해보려 했지만 허예나는 놓아주지 않았다.[레스토랑 셰프가 만든 거야.][왜 레스토랑 가신 건데요...][누가 밥을 사줘서.][오늘 일정에 없던 약속인데 혹시 개인적인 약속이에요? 설마 여자?]양혁수는 가끔 여자의 육감이 소름이 끼친다고 생각했다.오늘 점심을 함께 한 차장은 확실히 성별이 여자가 맞았으며 나이도 어린 편이었다.양혁수는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임원들과 얘기하다가도 고개를 숙여 타자를 했다.[남자야.]그러나 허예나는 또 울상인 이모티콘을 보냈다.‘겨우 도시락 한 번 챙겨 먹지 않았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저녁에 꼭 먹을게.][다 식어버렸을 텐데요.][다시
양씨 가문과 허씨 가문은 일로 엮인 적이 없었고 양혁수 역시 허씨 가문에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그러나 허예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속인다면 자신이 받은 재산의 90%를 넘겨준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이런 이윤이라면 양혁수 쪽에서는 절대 손해를 볼 장사가 아니었으며 고작 좋은 말 몇 마디 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그래서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회의실로 안내하세요.”“네. 알겠습니다.”허씨 가문은 최근 10년 동안 계속 내리막길만 걸었고 이건 허현무 본인과 큰 상관이 있었다.양혁수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다. 술과 유흥에 절어 퀭한 눈빛을 한 채, 불룩한 배를 내밀고 앉아 있는 허현무가 정말 허예나 같은 딸을 낳을 수 있었단 말인가?두 사람은 나이 차가 꽤 있었지만 허현무는 양혁수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흐릿한 눈빛에 순간적으로 빛이 도는 걸 보니, 딱 봐도 흥미로운 제안을 품고 나온 모양이었다.형식적인 인사가 오간 후, 허현무는 말을 빙빙 돌리며 슬쩍 양혁수의 속내를 떠보려 했다.“우리 예나는 어릴 때부터 제 엄마랑만 지냈어요. 내가 사업한다고 정신이 없어서 가족을 제대로 못 챙겼죠. 그래도 애가 정말 착하고 부모한테 효도도 잘하고, 마음씨도 고운 아이예요.”‘그래서, 이제 와서 그 착한 애를 돈으로 바꿔보겠다는 건가.’양혁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허현무를 바라봤다. 양혁수는 이런 부류의 인간을 제일 혐오했다. 그래서 별 대꾸 없이 차만 한 모금 마시며, 허현무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허현무는 양혁수의 반응을 살피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튕겼다. 그런데 분위기가 썰렁해질 즈음, 양혁수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허예나 씨 대학은 졸업했죠?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그 질문에 허현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딸이 뭘 했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허현무가 알 리가 없었다.연예계 루머라면 실시간으로 꿰고 있겠지만, 정작 자기 딸의 근황은 아예 모르고 있었다.“예나가 원래 좀 독
변여름이 허예나를 중개자로 선택해 이 비열한 일을 맡긴 것은 단순히 양지원이 마침 허예나와 접촉한 적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허예나가 오랫동안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솔직히 말해 어느 날 허예나가 세상을 떠나도 그녀의 친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그래서 그녀의 사진을 보정 후 허예나의 모든 신분증 정보를 바꿔치기해도 양혁수를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사실 허예나는 양시연과 전혀 닮지 않았다.설령 양혁수가 의심하더라도 그가 허예나의 친오빠인 변백호에게 직접 조사를 맡기지 않는 이상 쉽게 밝혀낼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변백호의 성격을 고려하면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재미 삼아 모른 척할 가능성이 컸다.허예나가 허 회장과 통화한 기록을 보며 변여름의 표정은 냉담하고 무표정했다.원래 그녀는 직접 도청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불법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었고 매년 변여름에게 허용하는 불법 행위의 한도가 정해져 있었다. 올해는 그 한도를 아껴 써야 했다.조용히 기다린 끝에 마침내 허예나가 전화를 걸어왔고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변여름 씨, 대단해요. 어떻게 양혁수 씨가 이렇게 빨리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죠?”변여름은 당황했다.???‘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몸을 바로 세우고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현재로선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을 들으니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허예나 씨, 아버님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그녀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허예나에게 물었다.허예나는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알려주며 기쁜 듯 말했다.“우리 아빠가 양혁수 씨를 찾아갔어요. 양혁수 씨가 나 아니 당신한테 조금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빠 생신 잔치에 참석하기로 했어요. 아빠가 기분이 좋아서 요즘 엄마를 보러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