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여름이 허예나를 중개자로 선택해 이 비열한 일을 맡긴 것은 단순히 양지원이 마침 허예나와 접촉한 적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허예나가 오랫동안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솔직히 말해 어느 날 허예나가 세상을 떠나도 그녀의 친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그래서 그녀의 사진을 보정 후 허예나의 모든 신분증 정보를 바꿔치기해도 양혁수를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사실 허예나는 양시연과 전혀 닮지 않았다.설령 양혁수가 의심하더라도 그가 허예나의 친오빠인 변백호에게 직접 조사를 맡기지 않는 이상 쉽게 밝혀낼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변백호의 성격을 고려하면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재미 삼아 모른 척할 가능성이 컸다.허예나가 허 회장과 통화한 기록을 보며 변여름의 표정은 냉담하고 무표정했다.원래 그녀는 직접 도청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불법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었고 매년 변여름에게 허용하는 불법 행위의 한도가 정해져 있었다. 올해는 그 한도를 아껴 써야 했다.조용히 기다린 끝에 마침내 허예나가 전화를 걸어왔고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변여름 씨, 대단해요. 어떻게 양혁수 씨가 이렇게 빨리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죠?”변여름은 당황했다.???‘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몸을 바로 세우고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현재로선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을 들으니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허예나 씨, 아버님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그녀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허예나에게 물었다.허예나는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알려주며 기쁜 듯 말했다.“우리 아빠가 양혁수 씨를 찾아갔어요. 양혁수 씨가 나 아니 당신한테 조금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빠 생신 잔치에 참석하기로 했어요. 아빠가 기분이 좋아서 요즘 엄마를 보러
변여름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양혁수가 그리웠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점심을 챙겨 먹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비서가 그녀를 위층으로 안내했고 문을 열자 이미 방 안에는 구수한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그건 바로 갈비구이 냄새였다.변여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보온 통을 바라보았다.“갑자기 여기 왜 온 거야?”양혁수가 그녀에게 물었다.변여름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자연스럽게 웃었다.“밥 얻어먹으려고요. 오빠, 나 안 반가워요?”“내가 환영 안 한다고 하면 네가 우리 회사 시스템을 무너뜨릴까 봐 두렵네.”비서는 그 말을 듣고 변여름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고 양혁수는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반찬 두 개 더 주문하고 양송이 크림수프도 추가해.”그녀는 그가 정확히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고르는 걸 보고 혀를 살짝 내밀며 가져온 차를 마셨다.“사실 반찬 추가 안 해도 돼요. 오빠랑 같은 거 먹으면 되니까요.”그녀가 테이블 위의 음식을 가리키자 양혁수는 음식을 한 번 훑어보며 말했다.“...부족해. 그리고 이 반찬은 금방 만든 게 아니라 맛없어.”“그러면 왜 먹어요?”양혁수는 귀찮은 여자 셰프와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는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둘러대는 것도 어색했다. 어차피 먹지 않으면 허예나가 눈치챌 것이었다.그는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 맞은편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쌀 한 톨 한 톨이 다 농민들이 어렵게 지은 건데 누가 알아주겠어.”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손을 뻗어 준비된 젓가락을 집었다.양혁수는 그녀의 움직임을 잠시 멈춰 바라보았다.그녀는 갈비구이 한 조각을 집어 손으로 받쳐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그러다 갑자기 먹던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양혁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변여름이 입을 열었다.“맛없어요.”“맛없다고?”양혁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젓가락을 다시 집어 들고 갈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도시의 불빛 속에서 운전하며 집으로 가는 동안 양혁수는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해졌지만 조수석에 간식을 먹고 있는 변여름이 있다는 느낌은 꽤 좋았다.집에 도착하자 둘은 각자 방으로 갔다.욕실에서 나온 양혁수는 침대에 기댄 채 앉자 변여름이 마치 그 옆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 듯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경험이 쌓인 양혁수는 차분히 카메라를 마주했다. 반대편에서 검은 화면을 보여줘도 그는 별말 없이 기다렸다.“무슨 일 있어?”‘에휴.’반대편에서 변여름은 어쩔 수 없이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혹시 일이 있어야만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는 거야?’그녀는 목소리를 조정하며 말했다.“있어요.”“뭐?”“아빠가 방금 저한테 거액의 돈을 보내줬어요.”변여름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났다.양혁수는 속으로 허 씨 아저씨도 눈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응. 그럼 좋네.”“아빠가 말씀하시길 양혁수 씨가 저한테 꽤 좋은 인상을 받으신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한테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당신을 사로잡으라고 하셨어요. 정말 안 되면 당신의 아기를 낳아도 된다고 하셨어요.”‘컥.’다행히 양혁수는 물을 마시지 않고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며 차마 이름을 붙여 불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말을 골라가면서 해.’변여름은 일부러 양혁수를 괴롭히고 있었다.그녀는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무릎에 턱을 괴며 악랄하고 교활한 눈빛을 띠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오빠, 듣고 있어요?”“...응.”“혹시 무서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말한 거예요. 저는 아빠랑 다르게 원칙이 있어요. 아빠는 돈만 밝히지만 저는 그래도 원칙이 있거든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이제 이 소녀가 점점 더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걸 알아차렸다.“얼마 보내 줬어?”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2억 원 보내 줬어요.”“2억밖에 안 보내 줬어?”양혁수는 눈살을 찌푸렸다.허씨 가문에는 엄청난 재산이
“아무도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어? 돈을 벌 때는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라고.”양혁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변여름은 그의 답장에 6점 정도를 주었고 그럭저럭 합격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오빠, 잠깐 멈춘 시간이 너무 길었어.’그녀는 침착하게 답했다.“나는 아직 어리니까 돈을 좋아하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그리고 처음부터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었다고 오빠한테 말했잖아요. 그때 오빠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죠. 만약 오빠가 나를 좋아했다면 우리 소개팅은 성공했을 테고 지금쯤 우리는 연애 중이었을 거예요.”양혁수는 입을 열려다 다시 한 번 그녀 때문에 말을 잃었다.변여름은 자신이 34세의 양혁수를 만난 덕분에 일이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10년 전의 양혁수였다면...‘하하. 내가 지금처럼 했으면 블랙리스트에 차단되었을 거야.’그녀는 역시 타이밍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양혁수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죠?”“...”“오빠 왜 말이 없어요?”“지금 바로 전화를 끊을지 말지 고민 중이야.”그는 차갑게 말했다.변여름은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태도를 맞추고 말했다.“전화 끊지 마요. 제발요.”양혁수는 답이 없었다.변여름은 오늘 하루 종일 들떠 있었다. 점심 때는 양혁수를 한바탕 놀려 주었고 이어서 허예나에게 자극받아 기분이 한껏 업되었으며 저녁에는 그와 함께 식사를 했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그녀는 항상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편이라 오늘 맛있는 것을 먹으며 보상하기로 했다.그래서 그녀는 카메라를 끄고 침대에서 일어나 양혁수가 준 루비 목걸이를 가져와 무드등을 켠 후 다시 카메라를 켰다.양혁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또 무슨 장난을 치려는지 짐작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것은 갑자기 화면에 나타난 장면이었다. 화면 속에는 소녀의 하얀 목선이 비쳤고 카메라는 그대로 쇄골까지 내려갔다. 붉은 보석이 박힌 펜던트가 쇄골 중앙선 아래쪽에 걸려 있었다.그 이
양혁수는 문득 휴대폰 건너편에 있는 변여름이 꽤 능수능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말 몇 마디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애매모호해졌다.처음 친구 추가를 했을 때는 자신이 차단할까 봐 적당히 거리를 두더니 이번엔 다시 선을 조율하듯 맞선 이야기를 꺼내며 관계를 좁혀오고 있었다.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제부터는 머리를 좀 써서 상대할 작정이었다.그런데 맞은편에서 갑자기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 혹시 여자친구 사귄 적 없어요?”양혁수는 의문스러웠다.‘?’변여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살짝 섞여 있었다.“너무 순진한 거 아니에요? 겨우 목 하나 보여줬다고 이렇게 과한 반응이라니.”양혁수는 침묵했다.“...”“오빠, 나보다 훨씬 나이 많잖아요? 그리고 오빠처럼 성공한 남자들은... 다들 그러니까... 우리 아빠처럼 여자친구나 아내가 없더라도 밖에서 여자를 두고 사는 거 아닌가요?”그녀의 말에 두 번 연속으로 말문이 막힌 그는 뜻밖에도 유치한 승부욕이 발동하는 걸 느꼈다.“내가 없다고 어떻게 확신하는데?”“있어요? 근데 제 목도 제대로 못 쳐다보면서 여자들이 많다고요?”“그게 아니라 그냥 네가 볼 게 없어서 그런 거야.”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며 가볍게 대꾸했다.“아, 그런 거군요.”양혁수는 물을 한 모금 들이키자 그녀가 말했다.“그럼 카메라 다시 켜보세요. 다른 거 보여드릴게요.”‘컥.’이번엔 정말로 물을 뿜을 뻔했다.‘뭐라고?’양혁수는 핸드폰을 쥔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뒤로 변여름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오빠, 그거 알아요? 오빠 말하는 거 내가 본 어리숙한 남자들이랑 똑같아요. 정작 여자친구 한 번도 사귀어 본 적 없으면서 괜히 허세 부리면서 여러 명 만나봤다고 하는 애들 있잖아요? 그냥 체면 차리려고. 응... 뭐라고 할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눈을 감고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이건 대놓고 양혁수를 놀리는 거였다.“...허예나.”낯선 이름이 튀어
양혁수는 속으로 변여름의 속셈을 나쁘게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마치 무기를 만드는 듯한 지능으로 그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방법을 궁리했다.그는 말했다.“시간이 되면 됐지.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잖아. 이번에는 네 운이 좋았어. 카드를 못 찾아서 이번엔 너한테 받지 않을게.”변여름은 입술을 핥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오빠, 고마워요.”“응.”어떻게 돈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양혁수는 다시 차가운 이미지로 돌아왔다.변여름은 더 이상 그를 놀리지 않기로 했다. 그가 화를 내면 아마 자신을 무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게다가 그녀의 설정은 기본적으로 착하지만 약간의 장난기가 있는 정도였기에 너무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싫어할까 봐 걱정되었고 양시연은 아주 부드럽고 여성스러워서 그쪽 이미지로 맞춰가야 할 거로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시간이 늦었으니 빨리 쉬어.”변여름은 약간 실망했다.그저 잡담이라도 좋으니 그와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시간이 늦었다고? 아직 이른데. 아니다 오빠의 나이에는 밤새우는 것이 익숙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 오빠의 말을 들어야지.’그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그러면 오빠, 잘 자요.”양혁수는 여전히 차갑게 한 마디로 답했고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변여름은 조금 불만스러웠고 다시 한번 말했다.“잘 자요.”양혁수는 잠시 멈칫했다.3초 후 변여름은 세 번째로 강조했다.“잘...자...요.”그는 혀를 차며 재미있다는 듯이 생각했다.‘꽤 고집이 세네.’잠시 전의 놀림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반격을 해볼까 고민했지만 변여름이 전한 '잘자'라는 말이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기에 전화를 끊는 것보다는 그저 웃어넘기기로 했다.게다가 잠자리에 들기 전 기분이 좋지 않으면 잡생각이 많아져 잠들기 어렵다. 그는 누구보다 잠 못 이루는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열고 대답했다.“잘 자.”변여름은 기뻤다.그녀는 먼저 전화를 끊고 싶지
어두워질 무렵 변여름의 휴대폰이 울렸고 양혁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내일 출장 때문에 너희 아버지 생신 잔치에 못 갈 것 같아.]변여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응. 선물은 내가 보내도록 할게.]변여름은 장난스럽게 답장을 보냈다.[그러면 제가 중간에서 가로챌 거예요. 오빠가 준 선물이라서 사실 아빠한테 주고 싶지 않아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출장 때문에 그는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지만 변여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집사가 조용히 말했다.“변여름 씨는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늦게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양혁수는 짧게 대답한 뒤 허예나와 변여름에게 각각 메시지를 보냈다.변여름은 동시에 두 개의 메시지를 받았고 평소 실수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작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양혁수가‘변여름’에게 집에 돌아오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녀는 실수로 허예나에게 보낼 메시지를 그대로 답장했다.[모임이 있어요.]메시지를 보낸 직후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몇 글자를 멍하니 응시하던 그녀는 다행히 중요한 정보는 흘리지 않았으니 아직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서둘러 변여름 번호로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업무가 많아서 야근해야 해요.]양혁수는 변여름에게‘안전하게 다녀오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허예나에게는 이렇게 보냈다.[오늘 밤 일찍 집에 안 돌아가도 돼?]변여름은 두 개의 메시지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비쭉 내밀었지만 어차피 혼잣말 같은 대화였기에 자신을 위로했다.그러곤 조용히 메시지를 입력했다.[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아무도 저를 반기지 않으니까요. 내일 돌아갈게요.]양혁수는 오랫동안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바쁜 건지 알 수 없었다.그사이 변여름은 연구실을 나와 선배들과 함께 어두운 거리를 걷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저 오늘 모임 있는데 남자들이랑 같이 놀 거예요.]
변여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재빨리 주위를 살폈지만 그는 없었다.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휴대폰을 꽉 쥐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아니요.”양혁수가 말했다.“반쯤 취했네.”‘응? 어떻게 알았지?’변여름은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혹시 이 기술이 술 냄새까지 전달할 수 있나 의심했다.하지만 금세 자신이 취해서 정신이 없고 판단력이 떨어져 목소리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그냥 인정했다.“네. 다들 술을 마셨는데 저만 안 마실 순 없잖아요.”“집에 갔어?”“아직이에요.”“밖에서 나한테 전화하는 거야?”그의 목소리는 불편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변여름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네. 아직 끝나지 않아서 제가 먼저 나왔어요.”그녀는 1인용 의자에 얌전히 앉아 언제든지 역할에 몰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맞아요. 누가 저한테 고백했어요. 더 이상 그 안에 있기가 민망해서 나왔어요.”반면 양혁수는 서재에 앉아 화면에 뜬 문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키보드의 엔터키를 치고 의자에 등을 기대어 뒤로 젖혔다.“갑자기 고백이라니?”“네.”변여름은 어쩔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정말 쪽팔렸어요.”‘멍청하군.’양혁수는 속으로 그런 공개적인 고백을 평가하며 이어서 물었다.“그러면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야?”“모르겠어요.”“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너무 민망해요. 하지만... 그냥 가버리면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약간 억울한 듯했다.“게다가 좀 어지러워서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어요.”변여름은 진심 반, 농담 반으로 그와 대화를 나누며 또 그가'허예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려고 했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다른 친구들은 없어?”“다른 친구들은 그 선배랑 친해서 분위기를 더 부추기며 유도했어요.”“그런 자리에 가는 건 바보짓이야.”양혁수는 드디어 독설을 내뱉었다.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