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원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맞선 상대에 관해 물어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양혁수는 한 번쯤 그 허예나라는 아이를 만나볼까 생각했다.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결혼할 마음도 없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거리감을 유지하는 게 가장 좋았으며 허예나는 집안 사람들에게는 알아가는 중이라고 둘러대고, 양혁수 역시 허예나를 이용해 양지원을 적당히 피할 수 있었다. 이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합의였으며 적어도 한동안 귀찮은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후 한 달이 넘는 동안, 양혁수가 사무실에서 식사하면 허예나는 늘 정확한 시간대에 음식을 보내왔다. 욕심을 내어 강한 입맛을 고집하지도 않았고 가끔은 정성스럽고 창의적인 요리를 곁들였다.평소에 입맛이 없다가도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에 양혁수는 절로 젓가락이 갔다. 평범한 식사가 질릴 때쯤이면 점심에는 새로운 요리가 등장했다. 이렇게 횟수가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둘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졌다.그날도 점심시간에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도 책상 위에 보온 도시락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의아해하는 순간, 비서가 커다란 보온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전골냄비를 설치했다.“오늘은 허예나 씨가 곱창전골을 준비했습니다. 미리 조리하면 식감이 떨어질까 봐 직접 요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드린다고 하네요.”점점 커지는 스케일에 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비서가 하는 대로 내버려뒀다.식사하려고 보니, 오늘의 삼각김밥에는 평소처럼 웃는 얼굴이 아니라 울상 짓는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비서가 그걸 보더니 슬쩍 웃으며 말했다.“이건 오늘 허예나 씨의 기분이 아닐까요? 뭔가 속상한 일이 있나 보네요.”양혁수가 고개를 들어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입을 다물고 전골에 집중했다.양혁수는 휴대폰을 꺼내 삼각김밥을 찍어 허예나에게 보냈고 곧바로 답장이 왔는데, 오른손 검지에 붕대를 감은 사진이었다.양혁수는 젓가락을 내려두고 메시지를 확인했다.[고기 썰다가 손을 베었어
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팔찌를 골랐고 또 루비 목걸이도 눈여겨보았다.“둘 다 포장해 줘요.”“네.”두 선물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양혁수는 집사에게 큰 케이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집사는 눈치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여름 씨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미리 전화해 보는 게 어떨까요?”양혁수는 의아했다.“매일 집에 돌아왔던 거 아니었어요?”“대표님이 집에 계실 때만 돌아옵니다. 그 외에는 연구실에서 지내세요.”“내가 없을 땐 하루도 안 왔어요?”“대표님이 출장 가셨던 첫날엔 집에 돌아왔지만, 대표님이 없다는 걸 안 다음 날부터는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적어도 대표님이 돌아오실 때까지는 안 오셨습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참 낯설게 느껴졌다. 어릴 때는 양혁수와 무척 가깝게 지냈는데, 몇 년 사이에 말수도 줄고 성격도 많이 바뀐 것 같았다.양혁수는 곧바로 변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연구실 데이터에 문제가 생겨서 모두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혁수 오빠,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요.”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혁수에게 있어 변여름은 어릴 때부터 커가는 걸 지켜봤던 동생이라 감정이 남달랐다. 특히 변백호가 직접 부탁을 했으니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다.양혁수는 케이크를 포장하고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목걸이는 허예나가 말했던 그 요양센터로 보내라고 집사에게 지시했다.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동안 공짜 밥을 얻어먹었으니 보답 인사 정도라 할 수 있었다.변여름이 지내는 연구실 근처에 도착한 양혁수가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변여름이 달려 나왔다.여름바람이 선들거리는데 변여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나타났으며 여전히 머리끈 하나로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양혁수가 경적을 울리자 변여름은 미소를 지으며 조수석에 올랐다.“오빠가 무슨 일로 여길 왔어요?”양혁수가 변여름에게 고개를 뒤로 돌려보라고 하자, 변여름은 케이크와 선물을 보고 곧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오빠가 말해준
양혁수는 슬쩍 시선을 돌렸을 뿐이지만 변여름은 잔뜩 긴장해 버렸다.양혁수가 보낸 메시지를 하나라도 놓칠까 변여름은 허예나 명의의 핸드폰을 가지고 다녔고 지금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잠시 뜸을 들인 변여름은 자연스레 핸드폰을 끄고 다른 메시지인 척 연기했다.어차피 양혁수는 절대로 변여름과 허예나가 같은 사람일거라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변여름이 잠자코 가만히 있는데 양혁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 자리에서 케이크 먹는 거 안 불편해? 우리 근처 레스토랑이라도 갈까?”변여름은 침착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지금도 편해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핸드폰으로 관심을 돌렸다.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으나 허예나는 받지 않았다.집사가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직접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려다 미리 허예나에게 말을 하지도 않았고, 어머니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그래서 집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선물은 데스크에 두고 이만 돌아가세요. 이따가 본인이 찾아가라고 전할게요.”“네. 알겠습니다.”통화를 끊자 변여름이 케이크를 한 입 먹기 좋게 건네왔다.양혁수는 케이크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이렇게 작은 한 입이라면 맛봐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그래서 한 입 베어 물었고 변여름이 질문했다.“누구 선물 준비했어요?”“응. 친구 선물.”양혁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묵묵히 케이크를 먹었다.차 안은 아주 조용했고 양혁수가 물었다.“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동안 어디에서 지낸 거야?”“오피스텔이요.”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답했다.“연구실 부근에 있는 오피스텔인데 학교에서 마련해준 거예요.”“그렇게 작은 공간이 적응은 돼?”“아니요.”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왜 집으로 안 돌아왔어?”“오빠가 집에 없으니까 안 그래도 큰 집이 더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호텔에서 지내는 것처럼 재미도 없고. 그래도 오피스텔
변여름은 양혁수의 성의를 봐서 바로 팔찌를 착용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고리가 아닌 건지 몇 번의 시도를 해도 착용이 쉽지 않았다.이에 양혁수가 말했다.“내가 해줄게.”그러자 변여름은 냉큼 팔을 그쪽으로 내밀었다.양혁수는 한 손으로 변여름의 가녀린 팔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팔찌의 고리를 맞췄다.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팔찌가 변여름의 손목에 걸어졌다.그때 양혁수의 시선이 변여름의 팔 안쪽에 머물렀다. 최소 3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상처가 눈에 띄었다.“이거 어떻게 된 거야?”변여름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몇 년 전에 큰오빠랑 공장에 내려갔을 때 생긴 상처예요. 제품 하나가 문제를 일으켜 폭발했고 그 파편에 긁혔어요.”변여름이 말한 제품이란, 당연히 군사 무기를 가리킬 것이다.변씨 가문이 해외에서 이 업계를 운영하는 것은 합법이었지만, 워낙 강경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집안이라 주변엔 적들이 많았다.양혁수는 애초에 변여름이 이 사업에 끼어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몇 년 전, 변백호 역시 변여름을 가문의 사업에서 멀어지게 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해 버렸다.변여름이 워낙 영리하고 재능이 뛰어나기에 부모와 형제들이 변여름의 능력을 낭비할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하지만 이미 발을 들인 변여름이 왜 다시 그 사업에서 빠져나왔는지, 그리고 변씨 가문 사람들이 왜 허락을 했는지 궁금해졌다“네 오빠는 알고 있어?”양혁수의 질문에 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아직 말 안 했어요.”양혁수는 대충 짐작은 했었다.그리고 마지막 한 입 남은 케이크를 입에 털어 넣고 차에서 내려 쓰레기통에 버렸다.“여기에서 공부가 끝나면 뭘 할 생각이야?”“병원에 취직해 의사해야죠.”양혁수는 더 의아해졌다.“네 가족이 허락할 것 같아?”“당연하죠. 다들 허락했어요.”정말 이상하다 싶었지만 양혁수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시간이 지나고 이쯤이면 됐다 싶은 변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며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집엔
요양센터 쪽은 변여름이 미리 사람을 배치해 두었고, 양혁수가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물건은 이미 변여름 손에 전달되었다.그리고 실험실 건물 아래에 앉은 변여름이 양혁수와 나눈 메시지를 훑어보며 디테일을 체크했다. 보통 젊은 남녀가 메시지를 주고받는 방식은 대체로 이러했던 것 같았다. 노지혜도 그렇고, 연구실 다른 동료들도 그러했다. 그래서 변여름은 자신이 보통 연애를 꽤 비슷하게 따라 했다고 생각했다.변여름의 옆에는 두 개의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온통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팔찌였고, 다른 하나는 루비 목걸이였다. 세밀하게 조각된 루비는 그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뜨거운 태양 같았다. 그리고 두 개를 나란히 비교해 보니, 화려한 붉은 색감이 더욱 생동감 있고, 더 정성을 들여 고른 선물로 보였다.변여름은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물건을 정리한 뒤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허예나가 선물을 받는 데 걸릴 시간을 계산한 후, 변여름은 따로 준비해 둔 작은 상자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섰으며 목적지는 대나무 숲길 근처였다.한편, 양혁수가 막 책상에 앉으려던 찰나, 휴대폰 화면이 반짝였다. 뜻밖에도 영상 통화 요청이었으며 상대는 허예나였다.식사도 여러 번 같이했고 대화도 자주 나눴지만 영상 통화는 처음이었다. 양혁수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별생각 없이 통화를 받았다.영상은 연결되었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양혁수는 카메라를 자신에게 맞추지 않았고, 상대 화면에서도 허예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화면은 온통 어둡기만 했고, 마른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어디야?”양혁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어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이에요.”양혁수는 허예나의 평소 말투를 떠올려 보았다. 허예나 성격상 말끝을 길게 늘이며 이야기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차분했다.“돌아가는 길에 가로등 없어?”“고장 났는데 좀 무서워서 전화했어요.”양혁수는 대답 없이 휴대폰을 한 손에 쥐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이 길
두 사람 사이 정적이 흐르자 허예나가 양혁수를 불렀다.양혁수는 어이가 없었지만 말없이 화면을 전환하여 제 얼굴을 드러냈다.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허예나 한 사람에게 더 보여준다고 덧나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변여름은 양혁수가 갑자기 얼굴을 보일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방금 실물로 본 사람이 갑자기 화면으로 보이자 깜짝 놀라버렸지만 아까보다 훨씬 차가운 얼굴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리고 왠지 가슴 언저리가 시큰거렸다.‘오빠는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이랑 영상 통화도 하는구나.’‘어휴.’‘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오빠도 당하기 참 좋은 사람이네.’“아직도 선물 박스 못 열었어?”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변여름은 서둘러 목걸이를 꺼내 손에 쥐었다.“이거 루비죠? 너무 예뻐요.”“응.”“오빠가 직접 고른 건가요?”“브랜드 매니저가 고른 거야...”“아... 네...”그러자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고 그 모습이 꽤 웃기기도 했다.그러나 이대로 굽혀질 변여름이 아니었다.“그럼 내일에는 빨간 국물로 준비해 볼게요. 얼큰하고 시원하게 말이에요.”바로 음식 채널로 전환해버렸다.양혁수는 저녁을 따로 챙겨 먹지 않고 디저트만 먹었으니 얼큰한 국물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벌써 내일 점심 메뉴가 기대되었다.“매일 요리할 시간은 돼?”양혁수의 목소리는 한껏 다정해졌다.이를 눈치챈 변여름은 눈치껏 말을 지어냈다.“매일 엄마를 보살피는 것 외엔 별다른 일정도 없어요. 오빠 밥도 하고 엄마 밥도 챙기는 거죠.”“참, 내일은 안 되겠네요. 엄마는 매운 음식 드시면 안 되니까 오빠만을 위한 도시락을 따로 차려야겠어요.”그 말에 양혁수는 잠시 멈칫했다.“너무 애쓸 필요 없어.”“알아요.”변여름은 벌써 어떤 요리를 할지 구상을 마친 뒤였다.변여름은 매일 2인분씩 요리를 했고 그 뜻인즉 두 사람은 매일 점심을 같은 메뉴로 먹었다는 말이었다.노지혜는 변여름에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러한 행동이 참 변태처럼 보인다며
선물을 받고 허예나는 계속 양혁수에게 점심 도시락을 보냈고 가끔은 저녁에도 도시락을 보냈다.양혁수는 저녁 늦게 돌아와도 도우미더러 따로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그리고 어느 날 점심시간.해외 파견을 갔던 차장이 돌아왔고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다. 직급이 있다고 하지만 두 사람은 오랜 친구 같은 사이었고 해외에서도 좋은 성과를 따냈기에 양혁수는 흔쾌히 차장의 점심 약속에 응했다.허예나는 매일 점심시간에 맞춰 도시락이 입에 맞는지 물었고 오늘에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러나 약속에 정신이 팔린 양혁수는 대충 대답을 했다.[맛있었어.][갈비도 맛이 잘 들었던가요?][그래.]짧은 말 한 마디에 허예나는 한참 침묵했고 양혁수는 왠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그리고 이어 슬퍼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이 우수수 쏟아졌다.“...”[오늘 내가 한 건 계란국이거든요!]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오빠, 설마 지금까지 먹지도 않고 날 속였던 건 아니죠?][먹었어.]그러자 허예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오늘만 못 먹은 거야.][왜요?][요즘 들어 음식이 입에 잘 안 맞았어요? 왜 안 먹었어요?][설마... 질린 거예요?][지금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 먹고 있는 거죠?]“...”여러 임원과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양혁수는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해보려 했지만 허예나는 놓아주지 않았다.[레스토랑 셰프가 만든 거야.][왜 레스토랑 가신 건데요...][누가 밥을 사줘서.][오늘 일정에 없던 약속인데 혹시 개인적인 약속이에요? 설마 여자?]양혁수는 가끔 여자의 육감이 소름이 끼친다고 생각했다.오늘 점심을 함께 한 차장은 확실히 성별이 여자가 맞았으며 나이도 어린 편이었다.양혁수는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임원들과 얘기하다가도 고개를 숙여 타자를 했다.[남자야.]그러나 허예나는 또 울상인 이모티콘을 보냈다.‘겨우 도시락 한 번 챙겨 먹지 않았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저녁에 꼭 먹을게.][다 식어버렸을 텐데요.][다시
양씨 가문과 허씨 가문은 일로 엮인 적이 없었고 양혁수 역시 허씨 가문에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그러나 허예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속인다면 자신이 받은 재산의 90%를 넘겨준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이런 이윤이라면 양혁수 쪽에서는 절대 손해를 볼 장사가 아니었으며 고작 좋은 말 몇 마디 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그래서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회의실로 안내하세요.”“네. 알겠습니다.”허씨 가문은 최근 10년 동안 계속 내리막길만 걸었고 이건 허현무 본인과 큰 상관이 있었다.양혁수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다. 술과 유흥에 절어 퀭한 눈빛을 한 채, 불룩한 배를 내밀고 앉아 있는 허현무가 정말 허예나 같은 딸을 낳을 수 있었단 말인가?두 사람은 나이 차가 꽤 있었지만 허현무는 양혁수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흐릿한 눈빛에 순간적으로 빛이 도는 걸 보니, 딱 봐도 흥미로운 제안을 품고 나온 모양이었다.형식적인 인사가 오간 후, 허현무는 말을 빙빙 돌리며 슬쩍 양혁수의 속내를 떠보려 했다.“우리 예나는 어릴 때부터 제 엄마랑만 지냈어요. 내가 사업한다고 정신이 없어서 가족을 제대로 못 챙겼죠. 그래도 애가 정말 착하고 부모한테 효도도 잘하고, 마음씨도 고운 아이예요.”‘그래서, 이제 와서 그 착한 애를 돈으로 바꿔보겠다는 건가.’양혁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허현무를 바라봤다. 양혁수는 이런 부류의 인간을 제일 혐오했다. 그래서 별 대꾸 없이 차만 한 모금 마시며, 허현무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허현무는 양혁수의 반응을 살피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튕겼다. 그런데 분위기가 썰렁해질 즈음, 양혁수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허예나 씨 대학은 졸업했죠?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그 질문에 허현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딸이 뭘 했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허현무가 알 리가 없었다.연예계 루머라면 실시간으로 꿰고 있겠지만, 정작 자기 딸의 근황은 아예 모르고 있었다.“예나가 원래 좀 독
“여름아.”“네.”‘쯧.’“어지러우면 그렇게 크게 고개를 흔들지 마.”“네.”‘젠장, 다 소용없었군.’그는 속도를 조금 줄이며 변여름에게 의자를 더 낮추라고 말했다.변여름은 머리를 굴렸다. 버튼을 못 찾았다고 하면 차를 세워줄 테고 직접 조절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하지만 버튼이 너무 눈에 띄어 모른 척할 수 없었다.‘에휴. 디자이너가 너무 성실했네.’결국 그녀는 스스로 의자를 조절하고 얌전히 몸을 기댔다. 어차피 그가 잔소리할 거란 걸 알았고 아직 한 번도 혼난 적이 없어서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양혁수는 어이없다는 듯 숨을 들이마셨다.“...”왠지 변여름은 혼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그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네가 혼자 한강시에 왔으니 네 오빠가 널 내게 맡긴 이상 내가 책임져야 해.”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며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양혁수는 이어서 말했다.“교수님과 저녁을 먹는 건 괜찮지만 술을 마실 거라면 미리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거나 어디로 와야 할지 알려줘야 해.”그는 운전대 위로 시선을 두며 덧붙였다.“네가 천재라는 건 알지만 머리가 좋다고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야.”변여름은 정신을 가다듬고 상체를 일으켜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그녀가 집중해서 듣는 듯한 모습에 피식 웃었다.“됐어. 그냥 누워 있어. 곧 도착할 거야.”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대답했다.최근 일이 많아 활력이 넘쳤지만 버거운 나날이 이어져 그녀는 피곤했다. 거기에 술까지 더해지니 몸이 더 무거워졌고, 깊은 피로가 스며들었다.그런데도 머리는 여전히 깨어 있었고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싶었다.양혁수는 동생을 타이르는 일에는 서툴렀고 할 말을 마친 뒤엔 조용히 운전에 집중했다.그러다 몇 번 시간을 확인했다. 허예나가 요양센터에 도착했을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선 아무런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겉으로는 아무렇지
전화를 끊고 변여름은 복도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고백했던 선배가 여러 번 다가와 사과할 기회를 얻었지만 변여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머릿속은 오로지 양혁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원래는 양혁수가 요양센터에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에게서 전화가 왔다.허예나에게 걸려 온 전화가 아니라 그녀에게 직접 온 전화였다.변여름은 물을 마시며 복도를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멀리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선배는 의아해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컨디션이 회복되었음을 느끼고 미소를 지으며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다.“혁수 오빠.”양혁수는 물었다.“아직 연구실에 있어?”변여름은 잠시 생각했다.양혁수는 이어서 말했다.“내가 데리러 갈게. 일 끝났으면 문 앞으로 나와.”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변여름은 기뻤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양혁수가 자신과 허예나를 연상할 가능성은 적지만 그래도 약간의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오빠, 저 일 끝났어요. 바로 갈게요.”“응.”양혁수가 대답했다.“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나와.”“네.”변여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곧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 모두의 놀란 시선 속에서 가방을 챙겼다.지도교수가 그녀를 불렀다.“여름아...”“선생님, 오빠가 데리러 와서 먼저 가볼게요.”지도교수는 당황스러웠다.‘?’“그럼...”“교수님, 선배님, 안녕히 계세요. 내일 뵙겠습니다.”그녀는 말을 마친 후 번개처럼 사라졌다. 모두 어리둥절했다.변여름은 연구실에 온 지 오래되었고 항상 말이 적었으며 마치 로봇처럼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기에 그들은 그녀의 얼굴에 이렇게 생생한 표정이 드러난 것을 본 적이 없었다.사람들은 그녀가 오빠가 데리러 왔다고 말하며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에 놀랐다.‘기뻐? 당연히 기쁘지.’변여름은 연구실
“됐어요.”변여름의 단호한 거절이 들려오자 양혁수는 문을 열려던 손을 멈췄다.“왜?”“저를 데려다줄 친구가 있어요.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낸 진짜 친구예요.”그녀는 힘주어 말했지만 이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아까 한 말 거짓이었어요...”그녀는 먼저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양혁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고 화가 난 기색도 없었다.어차피 그녀를 마중 나온 것이 아니라 변여름을 데리러 가야 했으니까.“알았어.”그가 짧게 대답했다.변여름은 그가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벽에 기대어 한 손을 뒤로 하고 조용히 다시 한번 말했다.“죄송해요.”양혁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무심한 듯 말했다.“앞으로 그런 장난은 치지 마. 재미없어.”“네.”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잠시 뜸을 들인 후 변여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까는 오빠가... 화낼지 궁금했어요.”“내가 화내길 바랐어?”“아니요. 오빠가 질투할까 봐 그랬어요.”양혁수는 아래층에서 걸음을 멈췄고반대편에서 변여름은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오빠는 질투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죠? 누가 저한테 고백했는데 왜 질투하지 않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양혁수는 목이 약간 메마른 것을 느꼈다.휴대폰 너머로 그녀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었고 머릿속에서도 완벽하게 그려지진 않았지만 마치 작은 깃털이 마음을 간질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밖으로 걸어 나가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괜찮으면 빨리 집에 가.”“아직 대답 안 해줬잖아요.”변여름은 끈질기게 매달리며 중얼거렸다.“질투하지 않는 건 내가 싫어서 그런 거예요? 왜 저를 싫어하는 거예요? 제가 오빠를 위해 요리했는데 정말 맛있었잖아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마침내 그녀에게 대답할 말을 찾았다.“우리 집 아주머니가 해준 음식도 맛있는데 나도 아주머니를 좋아해야 해?”“그건 달라요.”마침내 변여름은 그가 처음 상상했던 것처럼 말끝을 늘이며 대답했다.
변여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재빨리 주위를 살폈지만 그는 없었다.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휴대폰을 꽉 쥐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아니요.”양혁수가 말했다.“반쯤 취했네.”‘응? 어떻게 알았지?’변여름은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혹시 이 기술이 술 냄새까지 전달할 수 있나 의심했다.하지만 금세 자신이 취해서 정신이 없고 판단력이 떨어져 목소리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그냥 인정했다.“네. 다들 술을 마셨는데 저만 안 마실 순 없잖아요.”“집에 갔어?”“아직이에요.”“밖에서 나한테 전화하는 거야?”그의 목소리는 불편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변여름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네. 아직 끝나지 않아서 제가 먼저 나왔어요.”그녀는 1인용 의자에 얌전히 앉아 언제든지 역할에 몰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맞아요. 누가 저한테 고백했어요. 더 이상 그 안에 있기가 민망해서 나왔어요.”반면 양혁수는 서재에 앉아 화면에 뜬 문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키보드의 엔터키를 치고 의자에 등을 기대어 뒤로 젖혔다.“갑자기 고백이라니?”“네.”변여름은 어쩔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정말 쪽팔렸어요.”‘멍청하군.’양혁수는 속으로 그런 공개적인 고백을 평가하며 이어서 물었다.“그러면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야?”“모르겠어요.”“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너무 민망해요. 하지만... 그냥 가버리면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약간 억울한 듯했다.“게다가 좀 어지러워서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어요.”변여름은 진심 반, 농담 반으로 그와 대화를 나누며 또 그가'허예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려고 했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다른 친구들은 없어?”“다른 친구들은 그 선배랑 친해서 분위기를 더 부추기며 유도했어요.”“그런 자리에 가는 건 바보짓이야.”양혁수는 드디어 독설을 내뱉었다.
어두워질 무렵 변여름의 휴대폰이 울렸고 양혁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내일 출장 때문에 너희 아버지 생신 잔치에 못 갈 것 같아.]변여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응. 선물은 내가 보내도록 할게.]변여름은 장난스럽게 답장을 보냈다.[그러면 제가 중간에서 가로챌 거예요. 오빠가 준 선물이라서 사실 아빠한테 주고 싶지 않아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출장 때문에 그는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지만 변여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집사가 조용히 말했다.“변여름 씨는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늦게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양혁수는 짧게 대답한 뒤 허예나와 변여름에게 각각 메시지를 보냈다.변여름은 동시에 두 개의 메시지를 받았고 평소 실수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작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양혁수가‘변여름’에게 집에 돌아오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녀는 실수로 허예나에게 보낼 메시지를 그대로 답장했다.[모임이 있어요.]메시지를 보낸 직후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몇 글자를 멍하니 응시하던 그녀는 다행히 중요한 정보는 흘리지 않았으니 아직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서둘러 변여름 번호로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업무가 많아서 야근해야 해요.]양혁수는 변여름에게‘안전하게 다녀오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허예나에게는 이렇게 보냈다.[오늘 밤 일찍 집에 안 돌아가도 돼?]변여름은 두 개의 메시지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비쭉 내밀었지만 어차피 혼잣말 같은 대화였기에 자신을 위로했다.그러곤 조용히 메시지를 입력했다.[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아무도 저를 반기지 않으니까요. 내일 돌아갈게요.]양혁수는 오랫동안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바쁜 건지 알 수 없었다.그사이 변여름은 연구실을 나와 선배들과 함께 어두운 거리를 걷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저 오늘 모임 있는데 남자들이랑 같이 놀 거예요.]
양혁수는 속으로 변여름의 속셈을 나쁘게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마치 무기를 만드는 듯한 지능으로 그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방법을 궁리했다.그는 말했다.“시간이 되면 됐지.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잖아. 이번에는 네 운이 좋았어. 카드를 못 찾아서 이번엔 너한테 받지 않을게.”변여름은 입술을 핥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오빠, 고마워요.”“응.”어떻게 돈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양혁수는 다시 차가운 이미지로 돌아왔다.변여름은 더 이상 그를 놀리지 않기로 했다. 그가 화를 내면 아마 자신을 무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게다가 그녀의 설정은 기본적으로 착하지만 약간의 장난기가 있는 정도였기에 너무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싫어할까 봐 걱정되었고 양시연은 아주 부드럽고 여성스러워서 그쪽 이미지로 맞춰가야 할 거로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시간이 늦었으니 빨리 쉬어.”변여름은 약간 실망했다.그저 잡담이라도 좋으니 그와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시간이 늦었다고? 아직 이른데. 아니다 오빠의 나이에는 밤새우는 것이 익숙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 오빠의 말을 들어야지.’그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그러면 오빠, 잘 자요.”양혁수는 여전히 차갑게 한 마디로 답했고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변여름은 조금 불만스러웠고 다시 한번 말했다.“잘 자요.”양혁수는 잠시 멈칫했다.3초 후 변여름은 세 번째로 강조했다.“잘...자...요.”그는 혀를 차며 재미있다는 듯이 생각했다.‘꽤 고집이 세네.’잠시 전의 놀림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반격을 해볼까 고민했지만 변여름이 전한 '잘자'라는 말이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기에 전화를 끊는 것보다는 그저 웃어넘기기로 했다.게다가 잠자리에 들기 전 기분이 좋지 않으면 잡생각이 많아져 잠들기 어렵다. 그는 누구보다 잠 못 이루는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열고 대답했다.“잘 자.”변여름은 기뻤다.그녀는 먼저 전화를 끊고 싶지
양혁수는 문득 휴대폰 건너편에 있는 변여름이 꽤 능수능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말 몇 마디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애매모호해졌다.처음 친구 추가를 했을 때는 자신이 차단할까 봐 적당히 거리를 두더니 이번엔 다시 선을 조율하듯 맞선 이야기를 꺼내며 관계를 좁혀오고 있었다.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제부터는 머리를 좀 써서 상대할 작정이었다.그런데 맞은편에서 갑자기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 혹시 여자친구 사귄 적 없어요?”양혁수는 의문스러웠다.‘?’변여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살짝 섞여 있었다.“너무 순진한 거 아니에요? 겨우 목 하나 보여줬다고 이렇게 과한 반응이라니.”양혁수는 침묵했다.“...”“오빠, 나보다 훨씬 나이 많잖아요? 그리고 오빠처럼 성공한 남자들은... 다들 그러니까... 우리 아빠처럼 여자친구나 아내가 없더라도 밖에서 여자를 두고 사는 거 아닌가요?”그녀의 말에 두 번 연속으로 말문이 막힌 그는 뜻밖에도 유치한 승부욕이 발동하는 걸 느꼈다.“내가 없다고 어떻게 확신하는데?”“있어요? 근데 제 목도 제대로 못 쳐다보면서 여자들이 많다고요?”“그게 아니라 그냥 네가 볼 게 없어서 그런 거야.”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며 가볍게 대꾸했다.“아, 그런 거군요.”양혁수는 물을 한 모금 들이키자 그녀가 말했다.“그럼 카메라 다시 켜보세요. 다른 거 보여드릴게요.”‘컥.’이번엔 정말로 물을 뿜을 뻔했다.‘뭐라고?’양혁수는 핸드폰을 쥔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뒤로 변여름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오빠, 그거 알아요? 오빠 말하는 거 내가 본 어리숙한 남자들이랑 똑같아요. 정작 여자친구 한 번도 사귀어 본 적 없으면서 괜히 허세 부리면서 여러 명 만나봤다고 하는 애들 있잖아요? 그냥 체면 차리려고. 응... 뭐라고 할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눈을 감고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이건 대놓고 양혁수를 놀리는 거였다.“...허예나.”낯선 이름이 튀어
“아무도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어? 돈을 벌 때는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라고.”양혁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변여름은 그의 답장에 6점 정도를 주었고 그럭저럭 합격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오빠, 잠깐 멈춘 시간이 너무 길었어.’그녀는 침착하게 답했다.“나는 아직 어리니까 돈을 좋아하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그리고 처음부터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었다고 오빠한테 말했잖아요. 그때 오빠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죠. 만약 오빠가 나를 좋아했다면 우리 소개팅은 성공했을 테고 지금쯤 우리는 연애 중이었을 거예요.”양혁수는 입을 열려다 다시 한 번 그녀 때문에 말을 잃었다.변여름은 자신이 34세의 양혁수를 만난 덕분에 일이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10년 전의 양혁수였다면...‘하하. 내가 지금처럼 했으면 블랙리스트에 차단되었을 거야.’그녀는 역시 타이밍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양혁수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죠?”“...”“오빠 왜 말이 없어요?”“지금 바로 전화를 끊을지 말지 고민 중이야.”그는 차갑게 말했다.변여름은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태도를 맞추고 말했다.“전화 끊지 마요. 제발요.”양혁수는 답이 없었다.변여름은 오늘 하루 종일 들떠 있었다. 점심 때는 양혁수를 한바탕 놀려 주었고 이어서 허예나에게 자극받아 기분이 한껏 업되었으며 저녁에는 그와 함께 식사를 했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그녀는 항상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편이라 오늘 맛있는 것을 먹으며 보상하기로 했다.그래서 그녀는 카메라를 끄고 침대에서 일어나 양혁수가 준 루비 목걸이를 가져와 무드등을 켠 후 다시 카메라를 켰다.양혁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또 무슨 장난을 치려는지 짐작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것은 갑자기 화면에 나타난 장면이었다. 화면 속에는 소녀의 하얀 목선이 비쳤고 카메라는 그대로 쇄골까지 내려갔다. 붉은 보석이 박힌 펜던트가 쇄골 중앙선 아래쪽에 걸려 있었다.그 이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도시의 불빛 속에서 운전하며 집으로 가는 동안 양혁수는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해졌지만 조수석에 간식을 먹고 있는 변여름이 있다는 느낌은 꽤 좋았다.집에 도착하자 둘은 각자 방으로 갔다.욕실에서 나온 양혁수는 침대에 기댄 채 앉자 변여름이 마치 그 옆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 듯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경험이 쌓인 양혁수는 차분히 카메라를 마주했다. 반대편에서 검은 화면을 보여줘도 그는 별말 없이 기다렸다.“무슨 일 있어?”‘에휴.’반대편에서 변여름은 어쩔 수 없이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혹시 일이 있어야만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는 거야?’그녀는 목소리를 조정하며 말했다.“있어요.”“뭐?”“아빠가 방금 저한테 거액의 돈을 보내줬어요.”변여름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났다.양혁수는 속으로 허 씨 아저씨도 눈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응. 그럼 좋네.”“아빠가 말씀하시길 양혁수 씨가 저한테 꽤 좋은 인상을 받으신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한테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당신을 사로잡으라고 하셨어요. 정말 안 되면 당신의 아기를 낳아도 된다고 하셨어요.”‘컥.’다행히 양혁수는 물을 마시지 않고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며 차마 이름을 붙여 불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말을 골라가면서 해.’변여름은 일부러 양혁수를 괴롭히고 있었다.그녀는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무릎에 턱을 괴며 악랄하고 교활한 눈빛을 띠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오빠, 듣고 있어요?”“...응.”“혹시 무서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말한 거예요. 저는 아빠랑 다르게 원칙이 있어요. 아빠는 돈만 밝히지만 저는 그래도 원칙이 있거든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이제 이 소녀가 점점 더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걸 알아차렸다.“얼마 보내 줬어?”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2억 원 보내 줬어요.”“2억밖에 안 보내 줬어?”양혁수는 눈살을 찌푸렸다.허씨 가문에는 엄청난 재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