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7년 전 한강시에서 양혁수의 지위가 양석진과 양지원에 엇비슷했을 때, 양혁수에게 달라붙던 여자와 남자의 수는 셀 수가 없었다.그러니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지는 이제 눈을 감아도 알 수 있었다.여자는 울먹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고, 불우한 가정사와 험난했던 인생사를 읊으며 자신을 그곳에서 꺼내 준 것에 보답하겠다고 말했다.그 뜻인즉슨 양혁수만 좋다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하겠다는 의미였다.너무 뻔한 스토리에 앞 좌석 기사도 작게 하품했다.“전에 그 무서운 사람이 또다시 날 찾아올까 봐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몰라요.”그리고 또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양혁수는 아무 말도 없었고 여자는 조심스럽게 점점 더 다가갔다.서른 살이 넘는 남자가 돈과 권력을 가졌다면 외모에 큰 하자가 있어도 그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 남자는 외모도 준수했고 신이 실수로 빚은 완벽한 사람 그 자체였다. 다들 양혁수가 어렸을 때는 소문 난 바람둥이라 했지만 여자는 그게 모두 소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헐벗은 여자들이 가득하던 그 방에서도 흰 셔츠를 입은 양혁수는 그들에게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그러자 여자는 다시 한번 결심을 하고 말을 꺼내기로 했다.그런데 양혁수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비웃듯 이런 말을 했다.“넌 네가 엄청 예쁜 것 같지?”여자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고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양혁수는 이미 얼굴의 미소를 모두 지워버렸다.“남자 친구 있고?”꽤 확신에 찬 말투에 여자는 많이 당황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부정을 했다.양혁수는 더 들어줄 인내심이 없었고 눈짓을 해 경호원더러 여자를 떨어뜨리게 했다.“운전해요.”“네.”검은색 차량은 천천히 주차장에서 벗어났고 여자의 부름 소리도 차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양혁수는 차에 앉아 지나가는 네온 불빛을 멍하니 바라봤고 방금 그 여자가 참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그동안 예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 걸까?’‘정말 멍청하긴.’그
변여름이 말했다.“저 의학 공부하고 있어요.”양혁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변씨 가문은 무기를 제작해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는 일을 했다. 그런데 변여름이 갑자기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니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하지만 별다른 질문 없이 양혁수는 변여름이 지낼 공간을 만들어줬다.과거 양혁수와 변여름이 어떤 사이었던지를 막론하고, 변백호와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양혁수는 변 여름을 친동생처럼 챙겼다.“오빠 집이니까 제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고.”변여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보니 변여름은 과거에 비해 말수가 적어진 것 같았다.양혁수는 변여름과 함께 주방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같이했고 오늘따라 밥맛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예전에는 키우던 허스키만 자신의 옆자리를 지켰지만 오늘엔 변여름이 그 자리에 앉았다.허스키는 제 지정석에 다른 누군가가 앉은 것에 불만을 느끼고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었다.이에 변여름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자 허스키는 바로 깨갱거리고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멋쩍은 듯 코를 핥다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아무 일도 아니니까 천천히 드세요.’양혁수는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웃음이 터졌다.“너희 오빠는 요즘 어때?”“똑같죠 뭐. 지혜 씨 주변만 뱅뱅 맴돌고 지내요.”“지혜 씨 아직도 네 오빠한테 안 질렸어?”“그럴 리가요. 아이도 둘이나 낳겠다고 아우성이에요.”‘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양혁수는 미래 변백호의 아이를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개구쟁이 아이가 둘이나 생긴다면 변씨 가문도 곧 망할 것이다.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모르는 번호에서 문자를 보내왔다.양혁수는 이 번호를 아주 꽁꽁 숨겨왔고 알고 지내는 사람도 열을 넘기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가족과 가장 친한 친구들뿐이었다.[양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허예나라고 합니다. 양 회장님이 번호를 넘겨주셨는데 서로 좋은 인연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하셨어요.]양혁수는 그제야 며칠 전 양
양혁수가 대답이 없는 사이, 상대는 아기 고양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양 대표님, 제 조건이 마음에 드시나요?]양혁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첫인상 말이에요.]최근 몇 년간 양지원이 소개해 준 여자 친구는 한둘이 아니었다. 체형도 성격도 제각각이었지만, 이렇게 핸드폰에 이력서를 보내고 단 3초 만에 만족 여부를 묻는 경우는 처음이었다.면접도 이렇게까지 빠르지는 않지 않은가?양혁수는 말문이 막혔다.그러나 허예나는 거침이 없었다.[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뭐가 그렇게 급하세요?][네. 제가 좀 급해요.]“...”여자는 연이어 몇 개의 메시지를 보냈다.[양 대표님이 제가 마음에 들고 계속 알아갈 의향이 있으시다면 정말 좋겠어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거든요.]양혁수는 무표정으로 메시지를 읽었다.상대가 곤란해지는 건 양혁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그래서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두고 차가운 음료수를 하나 따서 마시며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 앉아 머리를 말렸다.그러나 소파에 내려놓은 핸드폰 화면이 계속해서 깜빡였다.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아까 봤던 사진이 문득 떠올랐다.마음이 조금 흔들린 양혁수는 몸을 앞으로 숙여 본능적으로 담배를 찾으려다 갑자기 양지원의 말이 떠올렸다.“방에서는 최대한 담배 피우지 마. 그리고 이젠 슬슬 끊을 생각해.”핸드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밝아졌다.양혁수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이번에는 꽤 긴 메시지가 와 있었다.[죄송해요, 양 대표님. 이렇게 보이는 게 좀 무례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저는 며칠 전 양 대표님 사진을 봤고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제 아버지는 저에게 최대한 양 대표님께 잘 보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결혼까지 이어가라며 신신당부하셨어요. 만약 결혼까지 가지 못한다면, 최소한 안정적인 관계라도 유지하라고 했죠.][물론, 양 대표님께서 저를 마음
위층에서.변여름은 책상 앞에 앉아 채팅 기록을 처음부터 읽었고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그때, 영상 통화가 걸려 왔고 상대가 노지혜이자 변여름은 덤덤하게 수락 버튼을 눌렀다.카메라 속 변여름은 무표정이었고 검은 긴 생머리를 자연스레 내렸는데 한쪽에는 나비 모양의 머리핀을 꽂고 있었다.노지혜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너 그 나비 머리핀 어디서 샀어?”“길거리 작은 가게에서요.”노지혜가 혀를 차며 감탄했다.변여름은 아무렇지도 않게 핀을 떼어내며 무심하게 말했다.“완벽하게 캐릭터 몰입해야 하니까요.”“...”‘어떤 의미로 참 대단해.’‘스크린 너머에서 양혁수가 볼 것도 아닌데 말이야.’“그래서 허예나는 어떻게 처리했어?”“돈 좀 쥐여줬어요. 당분간은 얼굴 보이지 않을 거예요.”“히익? 왜 바로 처리하지 않았어? 후환을 완전히 없애야지, 여름아.”“지금 저한테 살인을 사주하는 거예요? 이따 우리 오빠한테 고자질할 거예요.”당황한 노지혜는 황급히 화제를 바꿔 질문했다.“그래서 다음 공략은 뭐야?”“추천할 만한 방법 있어요?”그 말을 듣자, 노지혜는 눈을 반짝였다.“많지.”“예를 들면요?”“네가 밥을 챙겨주는데 거기에 식욕을 돋우는 약을 살짝 섞는 거야. 자꾸 먹다 보면 중독돼서 네가 해준 밥만 먹고 싶어질 거야. 이쪽 문화에서는 남자를 사로잡으려면 먼저 입맛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하잖아?”“그리고요?”“음... 최면도 괜찮지. 그래도 약간의 약물이 있으면 효과가 더 좋을 거야.”“너 지금 그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거지? 밤에 깊이 잠들면 슬쩍 약을 먹이고, 그다음 자연스럽게 첫 관계를 만들면 돼.”“근데 용량 조심해야 해. 과하면 차차 임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변여름은 자신이 참 순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세상은 넓고 또라이도 많았다.변여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우리 오빠한테 말 좀 전해 줘요. 나 며칠 뒤에 집에 다녀올 거예요.”“엥? 갑자기 왜?”“우리 오빠 건강검진
친구 추가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점심을 먹으려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책상 위에 핑크색 보온 도시락 두 개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이건 뭐죠?”비서가 대답했다.“허예나 씨가 사람을 시켜 보낸 겁니다. 상대방이 양 회장님께 받은 명함을 가지고 있어, 안내 데스크에서 바로 접수했어요.”허예나?양혁수가 핸드폰을 확인하니, 역시 허예나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양 대표님, 오늘 회사에서 식사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집에서 직접 만든 간단한 가정식 도시락을 보냈어요. 갑자기 보내 실례가 되진 않을까 걱정되지만, 괜찮으시면 한 번 드셔 보세요.][훈제 오리와 치킨은 만들기가 좀 까다롭네요. 입맛에 잘 맞지 않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비서는 미리 양혁수의 점심을 준비해 두었다. 회사 고위 임원 전용 도시락으로, 플레이팅도 깔끔하고 정갈했다.양혁수가 보온 도시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비서는 도시락 안의 음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차렸다.계란말이, 잡채, 그리고 훈제 오리와 치킨이 들어있었다.한눈에 보기에도 치킨은 탄 부분이 있었다.양혁수는 오전 내내 일하느라 피곤했고, 방금도 골치 아픈 늙은이 한 분과 신경전을 벌였던 터라 기분이 좋지 않아 입맛도 별로 없었다.평소 제공되는 점심은 일반적으로 영양 균형이 잘 잡힌 건강식이었다.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뻔히 예상되는 그런 맛이었다.별다른 감흥 없이 양혁수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책상 모서리에 한 손을 걸친 채 무표정으로 훈제 오리를 한입 먹었다.예상보다도, 더 맛이 없었다.퍽퍽하고 간도 제대로 배지 않았다.‘이 정도 실력으로 음식을 보낼 생각을 한다니, 대체 무슨 배짱이지?’비서는 눈치를 챈 듯 말했다.“모양새가 조금 별로네요.”그리고 살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적어도 본인이 직접 만든 음식이란 건 느껴져요.”“...”‘그렇긴 하지.’비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전의 맞선 상대들을 깎아내렸다.“전에 만나셨던 분들은 전부 조리된 음식을 세팅만 해서 보냈었죠
양지원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맞선 상대에 관해 물어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양혁수는 한 번쯤 그 허예나라는 아이를 만나볼까 생각했다.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결혼할 마음도 없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거리감을 유지하는 게 가장 좋았으며 허예나는 집안 사람들에게는 알아가는 중이라고 둘러대고, 양혁수 역시 허예나를 이용해 양지원을 적당히 피할 수 있었다. 이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합의였으며 적어도 한동안 귀찮은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후 한 달이 넘는 동안, 양혁수가 사무실에서 식사하면 허예나는 늘 정확한 시간대에 음식을 보내왔다. 욕심을 내어 강한 입맛을 고집하지도 않았고 가끔은 정성스럽고 창의적인 요리를 곁들였다.평소에 입맛이 없다가도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에 양혁수는 절로 젓가락이 갔다. 평범한 식사가 질릴 때쯤이면 점심에는 새로운 요리가 등장했다. 이렇게 횟수가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둘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졌다.그날도 점심시간에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도 책상 위에 보온 도시락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의아해하는 순간, 비서가 커다란 보온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전골냄비를 설치했다.“오늘은 허예나 씨가 곱창전골을 준비했습니다. 미리 조리하면 식감이 떨어질까 봐 직접 요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드린다고 하네요.”점점 커지는 스케일에 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비서가 하는 대로 내버려뒀다.식사하려고 보니, 오늘의 삼각김밥에는 평소처럼 웃는 얼굴이 아니라 울상 짓는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비서가 그걸 보더니 슬쩍 웃으며 말했다.“이건 오늘 허예나 씨의 기분이 아닐까요? 뭔가 속상한 일이 있나 보네요.”양혁수가 고개를 들어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입을 다물고 전골에 집중했다.양혁수는 휴대폰을 꺼내 삼각김밥을 찍어 허예나에게 보냈고 곧바로 답장이 왔는데, 오른손 검지에 붕대를 감은 사진이었다.양혁수는 젓가락을 내려두고 메시지를 확인했다.[고기 썰다가 손을 베었어
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팔찌를 골랐고 또 루비 목걸이도 눈여겨보았다.“둘 다 포장해 줘요.”“네.”두 선물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양혁수는 집사에게 큰 케이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집사는 눈치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여름 씨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미리 전화해 보는 게 어떨까요?”양혁수는 의아했다.“매일 집에 돌아왔던 거 아니었어요?”“대표님이 집에 계실 때만 돌아옵니다. 그 외에는 연구실에서 지내세요.”“내가 없을 땐 하루도 안 왔어요?”“대표님이 출장 가셨던 첫날엔 집에 돌아왔지만, 대표님이 없다는 걸 안 다음 날부터는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적어도 대표님이 돌아오실 때까지는 안 오셨습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참 낯설게 느껴졌다. 어릴 때는 양혁수와 무척 가깝게 지냈는데, 몇 년 사이에 말수도 줄고 성격도 많이 바뀐 것 같았다.양혁수는 곧바로 변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연구실 데이터에 문제가 생겨서 모두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혁수 오빠,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요.”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혁수에게 있어 변여름은 어릴 때부터 커가는 걸 지켜봤던 동생이라 감정이 남달랐다. 특히 변백호가 직접 부탁을 했으니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다.양혁수는 케이크를 포장하고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목걸이는 허예나가 말했던 그 요양센터로 보내라고 집사에게 지시했다.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동안 공짜 밥을 얻어먹었으니 보답 인사 정도라 할 수 있었다.변여름이 지내는 연구실 근처에 도착한 양혁수가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변여름이 달려 나왔다.여름바람이 선들거리는데 변여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나타났으며 여전히 머리끈 하나로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양혁수가 경적을 울리자 변여름은 미소를 지으며 조수석에 올랐다.“오빠가 무슨 일로 여길 왔어요?”양혁수가 변여름에게 고개를 뒤로 돌려보라고 하자, 변여름은 케이크와 선물을 보고 곧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오빠가 말해준
양혁수는 슬쩍 시선을 돌렸을 뿐이지만 변여름은 잔뜩 긴장해 버렸다.양혁수가 보낸 메시지를 하나라도 놓칠까 변여름은 허예나 명의의 핸드폰을 가지고 다녔고 지금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잠시 뜸을 들인 변여름은 자연스레 핸드폰을 끄고 다른 메시지인 척 연기했다.어차피 양혁수는 절대로 변여름과 허예나가 같은 사람일거라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변여름이 잠자코 가만히 있는데 양혁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 자리에서 케이크 먹는 거 안 불편해? 우리 근처 레스토랑이라도 갈까?”변여름은 침착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지금도 편해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핸드폰으로 관심을 돌렸다.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으나 허예나는 받지 않았다.집사가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직접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려다 미리 허예나에게 말을 하지도 않았고, 어머니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그래서 집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선물은 데스크에 두고 이만 돌아가세요. 이따가 본인이 찾아가라고 전할게요.”“네. 알겠습니다.”통화를 끊자 변여름이 케이크를 한 입 먹기 좋게 건네왔다.양혁수는 케이크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이렇게 작은 한 입이라면 맛봐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그래서 한 입 베어 물었고 변여름이 질문했다.“누구 선물 준비했어요?”“응. 친구 선물.”양혁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묵묵히 케이크를 먹었다.차 안은 아주 조용했고 양혁수가 물었다.“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동안 어디에서 지낸 거야?”“오피스텔이요.”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답했다.“연구실 부근에 있는 오피스텔인데 학교에서 마련해준 거예요.”“그렇게 작은 공간이 적응은 돼?”“아니요.”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왜 집으로 안 돌아왔어?”“오빠가 집에 없으니까 안 그래도 큰 집이 더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호텔에서 지내는 것처럼 재미도 없고. 그래도 오피스텔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