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수가 대답이 없는 사이, 상대는 아기 고양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양 대표님, 제 조건이 마음에 드시나요?]양혁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첫인상 말이에요.]최근 몇 년간 양지원이 소개해 준 여자 친구는 한둘이 아니었다. 체형도 성격도 제각각이었지만, 이렇게 핸드폰에 이력서를 보내고 단 3초 만에 만족 여부를 묻는 경우는 처음이었다.면접도 이렇게까지 빠르지는 않지 않은가?양혁수는 말문이 막혔다.그러나 허예나는 거침이 없었다.[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뭐가 그렇게 급하세요?][네. 제가 좀 급해요.]“...”여자는 연이어 몇 개의 메시지를 보냈다.[양 대표님이 제가 마음에 들고 계속 알아갈 의향이 있으시다면 정말 좋겠어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거든요.]양혁수는 무표정으로 메시지를 읽었다.상대가 곤란해지는 건 양혁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그래서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두고 차가운 음료수를 하나 따서 마시며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 앉아 머리를 말렸다.그러나 소파에 내려놓은 핸드폰 화면이 계속해서 깜빡였다.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아까 봤던 사진이 문득 떠올랐다.마음이 조금 흔들린 양혁수는 몸을 앞으로 숙여 본능적으로 담배를 찾으려다 갑자기 양지원의 말이 떠올렸다.“방에서는 최대한 담배 피우지 마. 그리고 이젠 슬슬 끊을 생각해.”핸드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밝아졌다.양혁수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이번에는 꽤 긴 메시지가 와 있었다.[죄송해요, 양 대표님. 이렇게 보이는 게 좀 무례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저는 며칠 전 양 대표님 사진을 봤고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제 아버지는 저에게 최대한 양 대표님께 잘 보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결혼까지 이어가라며 신신당부하셨어요. 만약 결혼까지 가지 못한다면, 최소한 안정적인 관계라도 유지하라고 했죠.][물론, 양 대표님께서 저를 마음
위층에서.변여름은 책상 앞에 앉아 채팅 기록을 처음부터 읽었고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그때, 영상 통화가 걸려 왔고 상대가 노지혜이자 변여름은 덤덤하게 수락 버튼을 눌렀다.카메라 속 변여름은 무표정이었고 검은 긴 생머리를 자연스레 내렸는데 한쪽에는 나비 모양의 머리핀을 꽂고 있었다.노지혜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너 그 나비 머리핀 어디서 샀어?”“길거리 작은 가게에서요.”노지혜가 혀를 차며 감탄했다.변여름은 아무렇지도 않게 핀을 떼어내며 무심하게 말했다.“완벽하게 캐릭터 몰입해야 하니까요.”“...”‘어떤 의미로 참 대단해.’‘스크린 너머에서 양혁수가 볼 것도 아닌데 말이야.’“그래서 허예나는 어떻게 처리했어?”“돈 좀 쥐여줬어요. 당분간은 얼굴 보이지 않을 거예요.”“히익? 왜 바로 처리하지 않았어? 후환을 완전히 없애야지, 여름아.”“지금 저한테 살인을 사주하는 거예요? 이따 우리 오빠한테 고자질할 거예요.”당황한 노지혜는 황급히 화제를 바꿔 질문했다.“그래서 다음 공략은 뭐야?”“추천할 만한 방법 있어요?”그 말을 듣자, 노지혜는 눈을 반짝였다.“많지.”“예를 들면요?”“네가 밥을 챙겨주는데 거기에 식욕을 돋우는 약을 살짝 섞는 거야. 자꾸 먹다 보면 중독돼서 네가 해준 밥만 먹고 싶어질 거야. 이쪽 문화에서는 남자를 사로잡으려면 먼저 입맛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하잖아?”“그리고요?”“음... 최면도 괜찮지. 그래도 약간의 약물이 있으면 효과가 더 좋을 거야.”“너 지금 그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거지? 밤에 깊이 잠들면 슬쩍 약을 먹이고, 그다음 자연스럽게 첫 관계를 만들면 돼.”“근데 용량 조심해야 해. 과하면 차차 임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변여름은 자신이 참 순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세상은 넓고 또라이도 많았다.변여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우리 오빠한테 말 좀 전해 줘요. 나 며칠 뒤에 집에 다녀올 거예요.”“엥? 갑자기 왜?”“우리 오빠 건강검진
친구 추가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점심을 먹으려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책상 위에 핑크색 보온 도시락 두 개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이건 뭐죠?”비서가 대답했다.“허예나 씨가 사람을 시켜 보낸 겁니다. 상대방이 양 회장님께 받은 명함을 가지고 있어, 안내 데스크에서 바로 접수했어요.”허예나?양혁수가 핸드폰을 확인하니, 역시 허예나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양 대표님, 오늘 회사에서 식사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집에서 직접 만든 간단한 가정식 도시락을 보냈어요. 갑자기 보내 실례가 되진 않을까 걱정되지만, 괜찮으시면 한 번 드셔 보세요.][훈제 오리와 치킨은 만들기가 좀 까다롭네요. 입맛에 잘 맞지 않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비서는 미리 양혁수의 점심을 준비해 두었다. 회사 고위 임원 전용 도시락으로, 플레이팅도 깔끔하고 정갈했다.양혁수가 보온 도시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비서는 도시락 안의 음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차렸다.계란말이, 잡채, 그리고 훈제 오리와 치킨이 들어있었다.한눈에 보기에도 치킨은 탄 부분이 있었다.양혁수는 오전 내내 일하느라 피곤했고, 방금도 골치 아픈 늙은이 한 분과 신경전을 벌였던 터라 기분이 좋지 않아 입맛도 별로 없었다.평소 제공되는 점심은 일반적으로 영양 균형이 잘 잡힌 건강식이었다.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뻔히 예상되는 그런 맛이었다.별다른 감흥 없이 양혁수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책상 모서리에 한 손을 걸친 채 무표정으로 훈제 오리를 한입 먹었다.예상보다도, 더 맛이 없었다.퍽퍽하고 간도 제대로 배지 않았다.‘이 정도 실력으로 음식을 보낼 생각을 한다니, 대체 무슨 배짱이지?’비서는 눈치를 챈 듯 말했다.“모양새가 조금 별로네요.”그리고 살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적어도 본인이 직접 만든 음식이란 건 느껴져요.”“...”‘그렇긴 하지.’비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전의 맞선 상대들을 깎아내렸다.“전에 만나셨던 분들은 전부 조리된 음식을 세팅만 해서 보냈었죠
양지원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맞선 상대에 관해 물어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양혁수는 한 번쯤 그 허예나라는 아이를 만나볼까 생각했다.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결혼할 마음도 없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거리감을 유지하는 게 가장 좋았으며 허예나는 집안 사람들에게는 알아가는 중이라고 둘러대고, 양혁수 역시 허예나를 이용해 양지원을 적당히 피할 수 있었다. 이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합의였으며 적어도 한동안 귀찮은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후 한 달이 넘는 동안, 양혁수가 사무실에서 식사하면 허예나는 늘 정확한 시간대에 음식을 보내왔다. 욕심을 내어 강한 입맛을 고집하지도 않았고 가끔은 정성스럽고 창의적인 요리를 곁들였다.평소에 입맛이 없다가도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에 양혁수는 절로 젓가락이 갔다. 평범한 식사가 질릴 때쯤이면 점심에는 새로운 요리가 등장했다. 이렇게 횟수가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둘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졌다.그날도 점심시간에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도 책상 위에 보온 도시락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의아해하는 순간, 비서가 커다란 보온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전골냄비를 설치했다.“오늘은 허예나 씨가 곱창전골을 준비했습니다. 미리 조리하면 식감이 떨어질까 봐 직접 요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드린다고 하네요.”점점 커지는 스케일에 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비서가 하는 대로 내버려뒀다.식사하려고 보니, 오늘의 삼각김밥에는 평소처럼 웃는 얼굴이 아니라 울상 짓는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비서가 그걸 보더니 슬쩍 웃으며 말했다.“이건 오늘 허예나 씨의 기분이 아닐까요? 뭔가 속상한 일이 있나 보네요.”양혁수가 고개를 들어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입을 다물고 전골에 집중했다.양혁수는 휴대폰을 꺼내 삼각김밥을 찍어 허예나에게 보냈고 곧바로 답장이 왔는데, 오른손 검지에 붕대를 감은 사진이었다.양혁수는 젓가락을 내려두고 메시지를 확인했다.[고기 썰다가 손을 베었어
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팔찌를 골랐고 또 루비 목걸이도 눈여겨보았다.“둘 다 포장해 줘요.”“네.”두 선물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양혁수는 집사에게 큰 케이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집사는 눈치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여름 씨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미리 전화해 보는 게 어떨까요?”양혁수는 의아했다.“매일 집에 돌아왔던 거 아니었어요?”“대표님이 집에 계실 때만 돌아옵니다. 그 외에는 연구실에서 지내세요.”“내가 없을 땐 하루도 안 왔어요?”“대표님이 출장 가셨던 첫날엔 집에 돌아왔지만, 대표님이 없다는 걸 안 다음 날부터는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적어도 대표님이 돌아오실 때까지는 안 오셨습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참 낯설게 느껴졌다. 어릴 때는 양혁수와 무척 가깝게 지냈는데, 몇 년 사이에 말수도 줄고 성격도 많이 바뀐 것 같았다.양혁수는 곧바로 변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연구실 데이터에 문제가 생겨서 모두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혁수 오빠,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요.”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혁수에게 있어 변여름은 어릴 때부터 커가는 걸 지켜봤던 동생이라 감정이 남달랐다. 특히 변백호가 직접 부탁을 했으니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다.양혁수는 케이크를 포장하고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목걸이는 허예나가 말했던 그 요양센터로 보내라고 집사에게 지시했다.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동안 공짜 밥을 얻어먹었으니 보답 인사 정도라 할 수 있었다.변여름이 지내는 연구실 근처에 도착한 양혁수가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변여름이 달려 나왔다.여름바람이 선들거리는데 변여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나타났으며 여전히 머리끈 하나로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양혁수가 경적을 울리자 변여름은 미소를 지으며 조수석에 올랐다.“오빠가 무슨 일로 여길 왔어요?”양혁수가 변여름에게 고개를 뒤로 돌려보라고 하자, 변여름은 케이크와 선물을 보고 곧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오빠가 말해준
양혁수는 슬쩍 시선을 돌렸을 뿐이지만 변여름은 잔뜩 긴장해 버렸다.양혁수가 보낸 메시지를 하나라도 놓칠까 변여름은 허예나 명의의 핸드폰을 가지고 다녔고 지금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잠시 뜸을 들인 변여름은 자연스레 핸드폰을 끄고 다른 메시지인 척 연기했다.어차피 양혁수는 절대로 변여름과 허예나가 같은 사람일거라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변여름이 잠자코 가만히 있는데 양혁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 자리에서 케이크 먹는 거 안 불편해? 우리 근처 레스토랑이라도 갈까?”변여름은 침착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지금도 편해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핸드폰으로 관심을 돌렸다.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으나 허예나는 받지 않았다.집사가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직접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려다 미리 허예나에게 말을 하지도 않았고, 어머니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그래서 집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선물은 데스크에 두고 이만 돌아가세요. 이따가 본인이 찾아가라고 전할게요.”“네. 알겠습니다.”통화를 끊자 변여름이 케이크를 한 입 먹기 좋게 건네왔다.양혁수는 케이크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이렇게 작은 한 입이라면 맛봐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그래서 한 입 베어 물었고 변여름이 질문했다.“누구 선물 준비했어요?”“응. 친구 선물.”양혁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묵묵히 케이크를 먹었다.차 안은 아주 조용했고 양혁수가 물었다.“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동안 어디에서 지낸 거야?”“오피스텔이요.”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답했다.“연구실 부근에 있는 오피스텔인데 학교에서 마련해준 거예요.”“그렇게 작은 공간이 적응은 돼?”“아니요.”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왜 집으로 안 돌아왔어?”“오빠가 집에 없으니까 안 그래도 큰 집이 더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호텔에서 지내는 것처럼 재미도 없고. 그래도 오피스텔
비 오는 날, 검은색 벤틀리 뒷좌석에서.차 안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남자의 허리춤을 휘감고 있는 여자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간지럽고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튕기면서 눈앞의 사람이 빨리 끝내길 바랐다.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읍!”안시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몸짓을 멈추었다.“처음이야?”안시연은 몸을 불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잇따라 허전한 기분이 들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더 단단히 감아 들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정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여자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긴장 풀어.”차 안의 온도가 급상승했다.정신은 흐릿했지만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했다.안시연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더니 어금니를 깨물고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그녀는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두 달 전, 그녀는 주지혁의 팔짱을 끼고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연정훈은 성진대학교의 우수 졸업자 겸 학부 특임 교수로서 그 동문 모임에 참석했는데 두 사람에게 선남선녀라며 칭찬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주지혁은 바람을 피워 곧 명문 가문 아가씨와 결혼한다.그리고 그녀는 연정훈의 아래에 누워 그가 순결을 앗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경인시에서의 연씨 가문은 권력이 대단했다.연정훈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정인 그룹을 맡았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경인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해 보이더니 이런 일을 할 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안시연을 사정없이 괴롭혔다.안시연은 하마터면 그의 차에서 숨이 멎을 뻔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일이 끝난 후, 그녀는 옷을 꼭 껴안고는 힘이 풀린 채
안시연은 경찰서에 세 시간의 취조를 받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때 주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어금니를 깨물다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지혁 씨,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요. 굳이 내 인생을 망칠 생각인가요?”그 8억은 분명 그가 그녀에게 직접 전화해 빼내라고 한 것이다.주지혁은 그녀의 분노를 예상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시연 씨,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면 안 되었어요.”“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안 꺼내면 당신이 어떻게 조이현 씨를 안을 수 있겠어요?”안시연이 비꼬며 말했다.주지혁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이 뻔뻔스럽게 말했다.“나 다음 달에 이현이와 약혼해요. 하지만 난 이현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시연 씨, 3년만 기다려요. 3년 뒤면 내가 이혼하고 꼭 시연 씨와 결혼할게요.”안시연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3년 동안 나는 어떡하라고요.”“외국으로 유학 보내줄게요.”뻔뻔스럽네!명문 가문 출신인 조이현과 결혼은 해야겠고, 또 그 돈으로 안시연을 ‘내연녀’로 만들게 하다니, 어떻게 이런 염치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안시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지만 난 이미 다른 남자와 잤어요.”주지혁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농담은 하지 마요. 나 화나게 만들면 시연 씨에게 좋을 것 없어요.”안시연이 심호흡하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나 찾으러 와요. 내가 시연 씨 외국 보내줄게요.”“꿈 깨요!”주지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시연 씨, 만약 내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시연 씨는 돈의 행방을 모두 찾아내는 것으로 결백을 증명해야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나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8억이면 시연 씨 감옥에서 10년 갇히고도 더 남아요. 시연 씨가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외할머니를 돌보겠어요?”안시연에게 힘이 남아돌았다면 진작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내가 정말
양혁수는 슬쩍 시선을 돌렸을 뿐이지만 변여름은 잔뜩 긴장해 버렸다.양혁수가 보낸 메시지를 하나라도 놓칠까 변여름은 허예나 명의의 핸드폰을 가지고 다녔고 지금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잠시 뜸을 들인 변여름은 자연스레 핸드폰을 끄고 다른 메시지인 척 연기했다.어차피 양혁수는 절대로 변여름과 허예나가 같은 사람일거라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변여름이 잠자코 가만히 있는데 양혁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 자리에서 케이크 먹는 거 안 불편해? 우리 근처 레스토랑이라도 갈까?”변여름은 침착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지금도 편해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핸드폰으로 관심을 돌렸다.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으나 허예나는 받지 않았다.집사가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직접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려다 미리 허예나에게 말을 하지도 않았고, 어머니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그래서 집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선물은 데스크에 두고 이만 돌아가세요. 이따가 본인이 찾아가라고 전할게요.”“네. 알겠습니다.”통화를 끊자 변여름이 케이크를 한 입 먹기 좋게 건네왔다.양혁수는 케이크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이렇게 작은 한 입이라면 맛봐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그래서 한 입 베어 물었고 변여름이 질문했다.“누구 선물 준비했어요?”“응. 친구 선물.”양혁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묵묵히 케이크를 먹었다.차 안은 아주 조용했고 양혁수가 물었다.“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동안 어디에서 지낸 거야?”“오피스텔이요.”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답했다.“연구실 부근에 있는 오피스텔인데 학교에서 마련해준 거예요.”“그렇게 작은 공간이 적응은 돼?”“아니요.”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왜 집으로 안 돌아왔어?”“오빠가 집에 없으니까 안 그래도 큰 집이 더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호텔에서 지내는 것처럼 재미도 없고. 그래도 오피스텔
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팔찌를 골랐고 또 루비 목걸이도 눈여겨보았다.“둘 다 포장해 줘요.”“네.”두 선물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양혁수는 집사에게 큰 케이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집사는 눈치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여름 씨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미리 전화해 보는 게 어떨까요?”양혁수는 의아했다.“매일 집에 돌아왔던 거 아니었어요?”“대표님이 집에 계실 때만 돌아옵니다. 그 외에는 연구실에서 지내세요.”“내가 없을 땐 하루도 안 왔어요?”“대표님이 출장 가셨던 첫날엔 집에 돌아왔지만, 대표님이 없다는 걸 안 다음 날부터는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적어도 대표님이 돌아오실 때까지는 안 오셨습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참 낯설게 느껴졌다. 어릴 때는 양혁수와 무척 가깝게 지냈는데, 몇 년 사이에 말수도 줄고 성격도 많이 바뀐 것 같았다.양혁수는 곧바로 변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연구실 데이터에 문제가 생겨서 모두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혁수 오빠,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요.”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혁수에게 있어 변여름은 어릴 때부터 커가는 걸 지켜봤던 동생이라 감정이 남달랐다. 특히 변백호가 직접 부탁을 했으니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다.양혁수는 케이크를 포장하고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목걸이는 허예나가 말했던 그 요양센터로 보내라고 집사에게 지시했다.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동안 공짜 밥을 얻어먹었으니 보답 인사 정도라 할 수 있었다.변여름이 지내는 연구실 근처에 도착한 양혁수가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변여름이 달려 나왔다.여름바람이 선들거리는데 변여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나타났으며 여전히 머리끈 하나로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양혁수가 경적을 울리자 변여름은 미소를 지으며 조수석에 올랐다.“오빠가 무슨 일로 여길 왔어요?”양혁수가 변여름에게 고개를 뒤로 돌려보라고 하자, 변여름은 케이크와 선물을 보고 곧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오빠가 말해준
양지원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맞선 상대에 관해 물어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양혁수는 한 번쯤 그 허예나라는 아이를 만나볼까 생각했다.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결혼할 마음도 없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거리감을 유지하는 게 가장 좋았으며 허예나는 집안 사람들에게는 알아가는 중이라고 둘러대고, 양혁수 역시 허예나를 이용해 양지원을 적당히 피할 수 있었다. 이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합의였으며 적어도 한동안 귀찮은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후 한 달이 넘는 동안, 양혁수가 사무실에서 식사하면 허예나는 늘 정확한 시간대에 음식을 보내왔다. 욕심을 내어 강한 입맛을 고집하지도 않았고 가끔은 정성스럽고 창의적인 요리를 곁들였다.평소에 입맛이 없다가도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에 양혁수는 절로 젓가락이 갔다. 평범한 식사가 질릴 때쯤이면 점심에는 새로운 요리가 등장했다. 이렇게 횟수가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둘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졌다.그날도 점심시간에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도 책상 위에 보온 도시락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의아해하는 순간, 비서가 커다란 보온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전골냄비를 설치했다.“오늘은 허예나 씨가 곱창전골을 준비했습니다. 미리 조리하면 식감이 떨어질까 봐 직접 요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드린다고 하네요.”점점 커지는 스케일에 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비서가 하는 대로 내버려뒀다.식사하려고 보니, 오늘의 삼각김밥에는 평소처럼 웃는 얼굴이 아니라 울상 짓는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비서가 그걸 보더니 슬쩍 웃으며 말했다.“이건 오늘 허예나 씨의 기분이 아닐까요? 뭔가 속상한 일이 있나 보네요.”양혁수가 고개를 들어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입을 다물고 전골에 집중했다.양혁수는 휴대폰을 꺼내 삼각김밥을 찍어 허예나에게 보냈고 곧바로 답장이 왔는데, 오른손 검지에 붕대를 감은 사진이었다.양혁수는 젓가락을 내려두고 메시지를 확인했다.[고기 썰다가 손을 베었어
친구 추가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점심을 먹으려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책상 위에 핑크색 보온 도시락 두 개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이건 뭐죠?”비서가 대답했다.“허예나 씨가 사람을 시켜 보낸 겁니다. 상대방이 양 회장님께 받은 명함을 가지고 있어, 안내 데스크에서 바로 접수했어요.”허예나?양혁수가 핸드폰을 확인하니, 역시 허예나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양 대표님, 오늘 회사에서 식사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집에서 직접 만든 간단한 가정식 도시락을 보냈어요. 갑자기 보내 실례가 되진 않을까 걱정되지만, 괜찮으시면 한 번 드셔 보세요.][훈제 오리와 치킨은 만들기가 좀 까다롭네요. 입맛에 잘 맞지 않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비서는 미리 양혁수의 점심을 준비해 두었다. 회사 고위 임원 전용 도시락으로, 플레이팅도 깔끔하고 정갈했다.양혁수가 보온 도시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비서는 도시락 안의 음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차렸다.계란말이, 잡채, 그리고 훈제 오리와 치킨이 들어있었다.한눈에 보기에도 치킨은 탄 부분이 있었다.양혁수는 오전 내내 일하느라 피곤했고, 방금도 골치 아픈 늙은이 한 분과 신경전을 벌였던 터라 기분이 좋지 않아 입맛도 별로 없었다.평소 제공되는 점심은 일반적으로 영양 균형이 잘 잡힌 건강식이었다.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뻔히 예상되는 그런 맛이었다.별다른 감흥 없이 양혁수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책상 모서리에 한 손을 걸친 채 무표정으로 훈제 오리를 한입 먹었다.예상보다도, 더 맛이 없었다.퍽퍽하고 간도 제대로 배지 않았다.‘이 정도 실력으로 음식을 보낼 생각을 한다니, 대체 무슨 배짱이지?’비서는 눈치를 챈 듯 말했다.“모양새가 조금 별로네요.”그리고 살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적어도 본인이 직접 만든 음식이란 건 느껴져요.”“...”‘그렇긴 하지.’비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전의 맞선 상대들을 깎아내렸다.“전에 만나셨던 분들은 전부 조리된 음식을 세팅만 해서 보냈었죠
위층에서.변여름은 책상 앞에 앉아 채팅 기록을 처음부터 읽었고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그때, 영상 통화가 걸려 왔고 상대가 노지혜이자 변여름은 덤덤하게 수락 버튼을 눌렀다.카메라 속 변여름은 무표정이었고 검은 긴 생머리를 자연스레 내렸는데 한쪽에는 나비 모양의 머리핀을 꽂고 있었다.노지혜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너 그 나비 머리핀 어디서 샀어?”“길거리 작은 가게에서요.”노지혜가 혀를 차며 감탄했다.변여름은 아무렇지도 않게 핀을 떼어내며 무심하게 말했다.“완벽하게 캐릭터 몰입해야 하니까요.”“...”‘어떤 의미로 참 대단해.’‘스크린 너머에서 양혁수가 볼 것도 아닌데 말이야.’“그래서 허예나는 어떻게 처리했어?”“돈 좀 쥐여줬어요. 당분간은 얼굴 보이지 않을 거예요.”“히익? 왜 바로 처리하지 않았어? 후환을 완전히 없애야지, 여름아.”“지금 저한테 살인을 사주하는 거예요? 이따 우리 오빠한테 고자질할 거예요.”당황한 노지혜는 황급히 화제를 바꿔 질문했다.“그래서 다음 공략은 뭐야?”“추천할 만한 방법 있어요?”그 말을 듣자, 노지혜는 눈을 반짝였다.“많지.”“예를 들면요?”“네가 밥을 챙겨주는데 거기에 식욕을 돋우는 약을 살짝 섞는 거야. 자꾸 먹다 보면 중독돼서 네가 해준 밥만 먹고 싶어질 거야. 이쪽 문화에서는 남자를 사로잡으려면 먼저 입맛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하잖아?”“그리고요?”“음... 최면도 괜찮지. 그래도 약간의 약물이 있으면 효과가 더 좋을 거야.”“너 지금 그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거지? 밤에 깊이 잠들면 슬쩍 약을 먹이고, 그다음 자연스럽게 첫 관계를 만들면 돼.”“근데 용량 조심해야 해. 과하면 차차 임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변여름은 자신이 참 순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세상은 넓고 또라이도 많았다.변여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우리 오빠한테 말 좀 전해 줘요. 나 며칠 뒤에 집에 다녀올 거예요.”“엥? 갑자기 왜?”“우리 오빠 건강검진
양혁수가 대답이 없는 사이, 상대는 아기 고양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양 대표님, 제 조건이 마음에 드시나요?]양혁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첫인상 말이에요.]최근 몇 년간 양지원이 소개해 준 여자 친구는 한둘이 아니었다. 체형도 성격도 제각각이었지만, 이렇게 핸드폰에 이력서를 보내고 단 3초 만에 만족 여부를 묻는 경우는 처음이었다.면접도 이렇게까지 빠르지는 않지 않은가?양혁수는 말문이 막혔다.그러나 허예나는 거침이 없었다.[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뭐가 그렇게 급하세요?][네. 제가 좀 급해요.]“...”여자는 연이어 몇 개의 메시지를 보냈다.[양 대표님이 제가 마음에 들고 계속 알아갈 의향이 있으시다면 정말 좋겠어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거든요.]양혁수는 무표정으로 메시지를 읽었다.상대가 곤란해지는 건 양혁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그래서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두고 차가운 음료수를 하나 따서 마시며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 앉아 머리를 말렸다.그러나 소파에 내려놓은 핸드폰 화면이 계속해서 깜빡였다.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아까 봤던 사진이 문득 떠올랐다.마음이 조금 흔들린 양혁수는 몸을 앞으로 숙여 본능적으로 담배를 찾으려다 갑자기 양지원의 말이 떠올렸다.“방에서는 최대한 담배 피우지 마. 그리고 이젠 슬슬 끊을 생각해.”핸드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밝아졌다.양혁수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이번에는 꽤 긴 메시지가 와 있었다.[죄송해요, 양 대표님. 이렇게 보이는 게 좀 무례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저는 며칠 전 양 대표님 사진을 봤고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제 아버지는 저에게 최대한 양 대표님께 잘 보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결혼까지 이어가라며 신신당부하셨어요. 만약 결혼까지 가지 못한다면, 최소한 안정적인 관계라도 유지하라고 했죠.][물론, 양 대표님께서 저를 마음
변여름이 말했다.“저 의학 공부하고 있어요.”양혁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변씨 가문은 무기를 제작해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는 일을 했다. 그런데 변여름이 갑자기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니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하지만 별다른 질문 없이 양혁수는 변여름이 지낼 공간을 만들어줬다.과거 양혁수와 변여름이 어떤 사이었던지를 막론하고, 변백호와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양혁수는 변 여름을 친동생처럼 챙겼다.“오빠 집이니까 제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고.”변여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보니 변여름은 과거에 비해 말수가 적어진 것 같았다.양혁수는 변여름과 함께 주방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같이했고 오늘따라 밥맛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예전에는 키우던 허스키만 자신의 옆자리를 지켰지만 오늘엔 변여름이 그 자리에 앉았다.허스키는 제 지정석에 다른 누군가가 앉은 것에 불만을 느끼고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었다.이에 변여름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자 허스키는 바로 깨갱거리고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멋쩍은 듯 코를 핥다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아무 일도 아니니까 천천히 드세요.’양혁수는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웃음이 터졌다.“너희 오빠는 요즘 어때?”“똑같죠 뭐. 지혜 씨 주변만 뱅뱅 맴돌고 지내요.”“지혜 씨 아직도 네 오빠한테 안 질렸어?”“그럴 리가요. 아이도 둘이나 낳겠다고 아우성이에요.”‘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양혁수는 미래 변백호의 아이를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개구쟁이 아이가 둘이나 생긴다면 변씨 가문도 곧 망할 것이다.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모르는 번호에서 문자를 보내왔다.양혁수는 이 번호를 아주 꽁꽁 숨겨왔고 알고 지내는 사람도 열을 넘기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가족과 가장 친한 친구들뿐이었다.[양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허예나라고 합니다. 양 회장님이 번호를 넘겨주셨는데 서로 좋은 인연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하셨어요.]양혁수는 그제야 며칠 전 양
6, 7년 전 한강시에서 양혁수의 지위가 양석진과 양지원에 엇비슷했을 때, 양혁수에게 달라붙던 여자와 남자의 수는 셀 수가 없었다.그러니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지는 이제 눈을 감아도 알 수 있었다.여자는 울먹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고, 불우한 가정사와 험난했던 인생사를 읊으며 자신을 그곳에서 꺼내 준 것에 보답하겠다고 말했다.그 뜻인즉슨 양혁수만 좋다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하겠다는 의미였다.너무 뻔한 스토리에 앞 좌석 기사도 작게 하품했다.“전에 그 무서운 사람이 또다시 날 찾아올까 봐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몰라요.”그리고 또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양혁수는 아무 말도 없었고 여자는 조심스럽게 점점 더 다가갔다.서른 살이 넘는 남자가 돈과 권력을 가졌다면 외모에 큰 하자가 있어도 그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 남자는 외모도 준수했고 신이 실수로 빚은 완벽한 사람 그 자체였다. 다들 양혁수가 어렸을 때는 소문 난 바람둥이라 했지만 여자는 그게 모두 소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헐벗은 여자들이 가득하던 그 방에서도 흰 셔츠를 입은 양혁수는 그들에게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그러자 여자는 다시 한번 결심을 하고 말을 꺼내기로 했다.그런데 양혁수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비웃듯 이런 말을 했다.“넌 네가 엄청 예쁜 것 같지?”여자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고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양혁수는 이미 얼굴의 미소를 모두 지워버렸다.“남자 친구 있고?”꽤 확신에 찬 말투에 여자는 많이 당황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부정을 했다.양혁수는 더 들어줄 인내심이 없었고 눈짓을 해 경호원더러 여자를 떨어뜨리게 했다.“운전해요.”“네.”검은색 차량은 천천히 주차장에서 벗어났고 여자의 부름 소리도 차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양혁수는 차에 앉아 지나가는 네온 불빛을 멍하니 바라봤고 방금 그 여자가 참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그동안 예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 걸까?’‘정말 멍청하긴.’그
늦여름, 거리에는 이름 모를 꽃잎이 흩날리고 달빛과 도시의 네온 등이 반짝였다. 밤에는 그래도 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반짝이는 이 도시에서도 가장 화려한 이곳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한강시에서 제일 큰 지엔 카지노는 로맨틱한 해안가에 자리를 잡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건 낭만이 아니라 돈과 권력이었다.누군가는 평생 가진 걸 모두 걸어 겨우 입장권 하나를 얻었지만 누군가는 출발선부터 달라 가장 위층에서 그들이 돈을 벌고 또 잃는 장면을 내려다봤다.그때, 가장 꼭대기에서 빛이 반짝였고 누군가 1번 방에 입장을 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 방의 입장 비용은 시작부터 20억이었다.모두가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봤고 대체 어느 유명 인사가 찾아왔는지 수군거렸다.그러나 다들 알지 못했던 사실은... 그 상대는 사실 이곳 카지노 주인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빌고 빌어 초대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가장자리에 앉은 사람은 이곳에는 관심이 없는 듯 따분해 보이기도 했다.결국 주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양 대표님, 일단 게임부터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양혁수는 나른하게 자리에 기대앉아 눈가를 꾹꾹 눌렀고 자신을 향해 말하는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나이로 보면 아버지뻘로 보이는 카지노 주인이 굽신거리며 아부를 맞추고 있었다.양혁수는 말 대신 손을 뻗어 담배를 손에 쥐었다.그러자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빠르게 담뱃불을 붙여줬다.빨간 불빛이 일렁이고 양혁수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예상과는 달리 익숙한 얼굴이었다.양혁수는 불필요한 친절이라 생각했지만 아무 말 없이 다시 자리에 기대앉았다.“장 회장님, 장사가 점점 커지더니 간도 점점 커지나 봐요?”장형철은 양혁수가 입장한 순간부터 불법 프로젝트를 일곱 개 정도 나열했고 그 내용은 차마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그리고 양혁수가 말을 자르자 장형철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양혁수는 더 이상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헛수고라고 생각해 절반 피운 담배를 끄고 사람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