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청에서 나오면서 부승희는 여유롭게 다음에 어디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지 생각하고 있었다.이승우는 그녀의 혼인신고서를 받아 조심스럽게 서랍에 넣고 집에 가서 금고에 보관할 생각이었다.“어디 가서 먹을까?”“한우빈이 찻집을 새로 열었는데 거기 가서 한번 먹어보자.”“사람 많아서 안 갈래.”“사람 많으면 그만큼 맛있다는 거지.”이승우가 운전기사에게 주소를 말하며 부탁하자 부승희는 그를 째려보며 웃었다.그가 사람 많은 곳에서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유치해.’그들은 그 업계에서 결혼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 중 가장 늦게 결혼한 커플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2년 전 한우빈은 한독 혼혈인 대기업 아가씨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솔로이거나 일찍 결혼했다.부승희가 결혼식을 할 때 신부 들러리 자리를 채우지 못했다.다행히 그녀는 신부 들러리가 결혼했는지 아닌지에 신경 쓰지 않았기에 배여진이 돌아와서 신부 들러리를 해줬다.결혼식은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진행되었고 대형 스크린에 어린 시절의 영상이 비추어지자 많은 사람이 눈시울을 붉혔으며 부승원과 연정훈도 깊이 감동하였다.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청춘은 이미 어제의 일이 되었다.다행히 그들 옆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 사람들이다.부승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이승우가 이 몇 년간의 일을 말할 때 몇 번 눈물이 나기도 했다.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자기 생이 끝날 때까지 오직 부승희만 사랑하겠다고 그들의 사랑을 증명하겠다고 말했다.물론 만약 죽어서 귀신이 되어도 이승우는 역시 오직 부승희만 사랑할 거라고 약속했다.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부승희의 감정은 그의 농담에 흐려졌다. 그녀는 부케를 던지며 그를 바라보았다.정성껏 준비된 결혼식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고 그날 밤 이승우는 부승희를 안고 술기운에 취해 저녁 수다를 떨었다.한밤중 술이 깬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어두운 방을 바라보았다. 그때 위에서 익숙하지 않은 조명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날씨는 이미 시원해졌다.양시연은 부승희 집의 목장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연정훈은 집 뒷마당에 작은 목장을 만들어 주었다.일요일 오후 양시연은 부승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연정훈은 맞은편의 정교하게 꾸며진 작은 집에서 태양이 숙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태양이는 다섯 살이 넘었지만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일을 열심히 하는 성격이었다.숙제를 끝낸 그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연정훈에게 가져가 보여주었다.예상대로 모든 문제를 맞혔다.그는 이미 만점을 충분히 모았고 오늘은 연정훈과의 약속을 실현할 차례였다.양시연은 멀리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를 들었고 자주 ‘여동생’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것을 들었다.부승희도 그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태양, 또 아빠한테 여동생 달라고 하는 거야?”태양은 어깨를 축 처뜨리고 힘이 빠진 듯 보였고 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엄마한테 말해. 엄마가 괜찮다고 하면 아빠는 아무 반대도 안 해.”“당신은 매번 반대 안 하잖아요.”태양은 연정훈의 가정 내 위치에 대해 의심이 가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하얀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머리는 깔끔하게 다듬어졌으며 하얗고 예쁜 얼굴은 부모님의 외모를 완벽하게 물려받았다.그는 연정훈 옆에서 뛰어나와 양시연 쪽으로 달려갔다.“엄마, 여동생 갖고 싶어요.”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머리가 아파졌고 연정훈을 보았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그를 째려보며 그의 무능함에 대해 불평했다.“이미 여동생이 있잖아?”양시연은 태양을 달래며 말했다.“예지가 바로 여동생이야.”태양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어른 흉내를 내며 이마를 문질렀다.“엄마, 내가 여러 번 말했잖아요. 예지는 예지고 여동생은 여동생이에요.”양시연은 웃으며 부승희를 보았고 부승희는 바로 이해했다.부예지는 확실히 태양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동생과는 천차만별이었다. 태양이 원하는 여동생은 모찌처럼 세상에서
큰 거위는 어디론가 끌려갔다.양시연은 목욕을 거부하며 도망 다니는 꼬마 예지를 씻기려 했지만 예지는 요리사를 졸졸 따라다니며 떼를 썼다.“거위 삶아줘요. 근데 고추장은 넣지 마요. 매워서 못 먹어요.”‘푸.’텐트 아래에서 차를 마시던 부승희는 예지의 엉뚱한 사투리에 그만 뿜을 뻔했다.양시연은 피식 웃으며 예지에게 물었다.“이 말 누가 가르쳐줬어?”예지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발목에 걸친 슬리퍼를 벗어 잔디밭에서 툭툭 털었다.“승주.”서슴없이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분명 반우희를 따라 배운 게 틀림없었다.양시연은 꼬질꼬질해진 예지를 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목욕하면 거위 고기 줄게. 안 씻으면 못 먹어.”그러자 예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거위를 끌고 간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지금이라도 쫓아가서 직접 구워 먹겠다는 기세였다.하지만 거위는 이미 저 멀리 사라졌고 결국 예지는 할 수 없이 목욕부터 하기로 했다.“그래야 착한 아기지.”양시연은 예지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가느다란 어깨끈을 살짝 잡아끌며 집으로 데려갔다.그때 마침 이승우가 막 밖으로 나오던 참이었다. 부승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부승희는 이승우를 보며 예지를 이렇게까지 꼬질꼬질하게 만들었다고 타박했다.잠시 후 말끔하게 씻긴 예지가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텐트 안에 ‘짠' 하고 나타났다.“고모.”부승희는 예지의 우렁찬 목청에 살짝 찡그리며 포동포동한 배를 쓸어 올렸다.이승우는 예지와 유독 잘 통하는 편이었다. 그는 예지를 기꺼이 무릎에 앉히고 다정하게 오후에 소를 보러 갈 거냐고 물었다.“갈래요.”예지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응...예지가 소에게...우유 만들어 줄 거예요.”예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생각보다 정확하게 문장을 이었다.이승우는 웃으며 부드럽게 정정해 주었다.“우유를 만드는 게 아니라 짜는 거야.”“우류 짜.”“우유.”“우유! 예지 말할 수 있어요.”부승희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예
태양은 동생을 원했고 연정훈도 딸을 갖자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예지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은 십중팔구 사라졌다.“삼촌, 뭐해요?”“삼촌은 일하고 있어.”“예지에게 보여줘요.”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잡지를 예지에게 건넸다.자기가 일하는 중이니 예지가 다른 사람과 놀러 가기를 바랐지만 예지는 발돋움해서 잡지를 힐끗 보더니 통통한 손가락으로 잡지에 실린 여성 분석가의 사진을 가리키며 양시연에게 말했다.“삼촌, 예쁜 여자 보고 있어요.”연정훈은 당황했다.“???”양시연은 어리둥절했다.그것을 깨달은 양시연은 예지의 영리함에 감탄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예지가 어떻게 그런 걸 알았는지 궁금했고 게다가 삼촌이 예쁜 여자를 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신기했다.그런데 예지는 연정훈이 화내지 않자 입술을 쭉 내밀고 연정훈의 의지와 상관없이 연정훈과 책상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연정훈의 무릎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예지를 안아 올렸다.“너 평소에 집에서 낮잠 자니?”연정훈이 태양이와 이야기하듯 묻자 예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정훈을 올려다보았다.“자요...”연정훈은 예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착한 아기는 낮잠 자야지.”예지는 깔깔 웃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연정훈은 다시 물었다. “예지는 착한 아기 맞지?”“네.”“그러면 예지는 지금 자야 해 자지 말아야 해?”“싫어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옆에서 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고 연정훈의 뒤에서 살짝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아직도 예지를 속이려고? 예지 똑똑해.'예지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답은 할 수 있지만 질문 간의 논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고 따라서 연정훈을 반항하는 것이 아니었다.오히려 예지는 연정훈을 좋아했다.예지는 우유를 반쯤 마시다가 갑자기 배고프다고 말했고 연정훈은 기뻐하며 예지가 밥을 먹는 동안 달래서 보내려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지는 연정훈에게 찰싹 달
세상은 그저 2초 동안 침묵에 빠졌다.양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태양을 데리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연정훈은 손에 있던 개구리가 펄쩍 뛰는 걸 보고 순간 얼어붙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그런 그를 향해 예지는 가방을 꼭 끌어안고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삼촌, 맘에 들어요?”연정훈은 말이 없었다.“...”잠시 침묵하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징그러운 연체동물에 대한 혐오감을 애써 누르며 평정을 유지한 채 개구리를 예지의 작은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시연과 태양은 속으로 동시에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하다.’그런데 예지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삼촌?”연정훈은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개구리는 유익한 동물이야. 잡으면 안 돼.”예지는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갑자기 가방에서 개구리를 다시 꺼냈다. 연정훈이 손을 내밀지 않자 예지는 주저하지 않고 개구리를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아빠가 말했는데 이건 두꺼비래요.”연정훈은 당황했다!양시연과 태양은 반사적으로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맞은편에서 이승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부승희는 그런 이승우를 툭툭 치며 생각했다.‘너무 못됐어.’그러나 정훈은‘두꺼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그는 서서히 시선을 내리깔아 무릎 위의 작은 생물을 확인했다.“예지야, 이건 개구리야.”“개구리 맞아요?”“응.”그러자 예지는 안심했다.개구리는 유익한 동물이고 유익한 동물은 좋은 삼촌과 함께 있어야 한다.예지는 앞으로 다가가 개구리를 잡아 연정훈의 바지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다.“삼촌, 개구리 줄게요.”“괜찮아. 삼촌은 개구리 싫어해.”“개구리는 유익한 동물이에요.”맞은편에서 예지에게 밀려 계속 자리를 옮기는 연정훈네 가족을 보며 이승우는 부승희를 꼭 껴안은 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너무 웃어서 얼굴이
“예지야, 지금 누가 제일 좋아?”이승우가 소리쳐 물었다.예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삼촌.”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고 부승희는 양시연에게 말했다.“연정훈은 아이들한테 꽤 인내심이 많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이 예지와 눈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인내심 있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사실 예지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그 옆에 있던 태양은 어른스럽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망했어.'그는 아마도 귀여운 막내 여동생을 얻기 어려울 것 같았다.집 앞에서 부승희는 예지를 안고 있는 연정훈에게 두세 마디 말을 건넸다. 그러다 갑자기 ‘아이고’라는 소리가 나왔다.양시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괜찮아요. 배가 갑자기 묵직해진 것 같아요.”“아기 찬 거 아니에요?”“그런 것 같아요.”부승희는 곧 출산 예정이라 작은 움직임에도 이승우는 바로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어디 불편해?”“아니야.”“빨리 앉아서 좀 쉬어.”이승우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고 양시연은 그에게 제안했다.“위층에 올라가서 좀 쉬는 게 어때요?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요.”부승희는 답답해서 밖으로 나왔지만 올라가기 싫었다. 그렇지만 이승우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니 어쩔 수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오후에는 소에게 우유를 짜는 일이었기에 연정훈과 양시연은 태양과 예지를 데리고 함께 갔다.예지는 그저 장난으로 생각하며 장난치는 것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태양은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양시연과 연정훈은 학업 외에도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려고 했다. 그들은 세 사람 모두 진지하게 협력하며 일을 했다.드디어 해가 지기 전 큰 우유 통 몇 개를 채웠다.양은 직접 짠 우유를 담아 집으로 가져가 양시연에게 요구르트를 만들어 주려고 했다.연정훈은 저녁에 일이 있었기에, 그들은 예지를 목장 휴양 시설로 데려가 평소 예지를 돌보던 가정부에게 맡기고 세 식구는 집으로 돌아갔다.그들이 떠난 직후 부승희는 예지를 데리러 오려고 했지만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뭔가
예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도 채애정이 돌아오자마자 슬쩍 다가가 조용히 일러바쳤다.“아빠는 엄마한테만 라즈베리를 사주고 나한테는 안 사줘요.”채애정은 예지의 말에 맞장구치며 일부러 화난 척하고 예지의 편을 들어 주었다.“고모가 아기 낳고 나면 할머니가 예지한테 잔뜩 사줄게.”“엄청 많이 사줘야 해요!”“알았어...”그제야 예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예지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다. 라즈베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두 개 이상 먹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단지 평소처럼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었다.한편 맞은편에는 반우희와 부승원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부승원은 벽에 기대앉아 반우희를 흘깃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얼굴 하나 안 빨개지네? 반만 남겨 두라고 했는데 한 입도 안 남겼잖아.”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마지막 라즈베리 케이크였어요. 당신이 사준 거지만 나 혼자 먹기에도 모자랐다고요.”부승원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아직 철이 덜 들었네.”“뭐라고요? 나 오늘 혼자 소송해서 이겼거든요.”이야기가 나오자 부승원은 그녀를 다시금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법정에서의 그녀는 그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고 그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부승원은 속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이미 그녀를 위한 축하 선물로 무엇을 준비할지 머릿속에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한편 병실에서는 부승희가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이승우에게 머리를 감겨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차분히 출산을 준비했다.그러나 몇 시간을 기다려도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새벽이 지나고 피곤함이 몰려오던 그때 갑작스럽게 진통이 시작됐다.이승우는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그녀를 부축해 분만실로 향했고 그는 옆에서 조용히 응원을 건넸다.부승희가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휴대폰 만지다가 걸리면 죽는 줄 알아.”이승우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휴대폰을 볼 정신이 있긴 해? 내 손바닥에
“너, 시도 알아?”부승희는 이승우를 놀리며 말했다.“그만해. 갑자기 그러면 무서워.”“먼저 나를 놀리지 말고 들어봐.”“그럼 말해 봐.”“동쪽에서는 해가 뜨고 서쪽에서는 비가 내리네. 완전히 맑다고 할 순 없지만 그 안에 맑음이 숨어 있지.”부승희는 눈썹을 한껏 올렸다.“이동하?”이승우는 침묵했다.“...”“이유하.”부승희는 잠시 멈칫하며 생각에 잠겼고 이승우는 턱을 쭉 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이름 예쁘지 않아?”이쁜 건 둘째 치고 부승희는 이 시구절이 가진 다른 의미가 마음에 들었다.“하늘은 흐린 듯하지만 그 안에 맑음이 스며 있고. 차가워 보이지만 속에는 따뜻한 정이 흐른다.”“여름을 뜻하는 한자 ‘하’를 쓸 거야?”그녀가 이승우에게 물었다.“응. 우리 아이가 평생 여름 날씨처럼 맑고 비바람 없이 햇살만 가득한 삶을 살기를 바래.”이승우는 의자를 끌어당기며 얼굴에 웃음을 가득 지었고 어젯밤보다 훨씬 더 기뻐 보였다.“내가 애칭도 생각해 뒀어.”부승희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본명은 네가 지었으니 애칭은 내 차례야.”“알아. 난 그냥 이름 후보를 추천하는 거야. 본명도 그렇듯이 넌 거부할 권리가 있잖아.”부승희는 마지못해 동의하며 고개를 들었다.“그럼 말해 봐.”“미소, 어때?”“미소?”부승희는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미소가 얼마나 좋은데. 항상 행복하게 웃으며 살면 좋잖아.”“…”그녀는 본명에는 꽤 만족했다. 애칭도 몇 가지 고민해 두었지만‘미소’만큼 마음에 드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없었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아기의 이름을 불러 보았고 아기는 여전히 냠냠 먹으며 멈추지 않았다.이승우가 장난스레 말했다.“봐, 미소도 반대 안 하잖아.”부승희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미소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야 부승희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집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고 많은 친구가 찾아와 축하를 건넸다.그날 아침 이승우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부승희와 딸을 차에 태웠다.이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