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그저 2초 동안 침묵에 빠졌다.양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태양을 데리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연정훈은 손에 있던 개구리가 펄쩍 뛰는 걸 보고 순간 얼어붙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그런 그를 향해 예지는 가방을 꼭 끌어안고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삼촌, 맘에 들어요?”연정훈은 말이 없었다.“...”잠시 침묵하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징그러운 연체동물에 대한 혐오감을 애써 누르며 평정을 유지한 채 개구리를 예지의 작은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시연과 태양은 속으로 동시에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하다.’그런데 예지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삼촌?”연정훈은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개구리는 유익한 동물이야. 잡으면 안 돼.”예지는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갑자기 가방에서 개구리를 다시 꺼냈다. 연정훈이 손을 내밀지 않자 예지는 주저하지 않고 개구리를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아빠가 말했는데 이건 두꺼비래요.”연정훈은 당황했다!양시연과 태양은 반사적으로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맞은편에서 이승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부승희는 그런 이승우를 툭툭 치며 생각했다.‘너무 못됐어.’그러나 정훈은‘두꺼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그는 서서히 시선을 내리깔아 무릎 위의 작은 생물을 확인했다.“예지야, 이건 개구리야.”“개구리 맞아요?”“응.”그러자 예지는 안심했다.개구리는 유익한 동물이고 유익한 동물은 좋은 삼촌과 함께 있어야 한다.예지는 앞으로 다가가 개구리를 잡아 연정훈의 바지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다.“삼촌, 개구리 줄게요.”“괜찮아. 삼촌은 개구리 싫어해.”“개구리는 유익한 동물이에요.”맞은편에서 예지에게 밀려 계속 자리를 옮기는 연정훈네 가족을 보며 이승우는 부승희를 꼭 껴안은 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너무 웃어서 얼굴이
“예지야, 지금 누가 제일 좋아?”이승우가 소리쳐 물었다.예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삼촌.”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고 부승희는 양시연에게 말했다.“연정훈은 아이들한테 꽤 인내심이 많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이 예지와 눈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인내심 있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사실 예지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그 옆에 있던 태양은 어른스럽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망했어.'그는 아마도 귀여운 막내 여동생을 얻기 어려울 것 같았다.집 앞에서 부승희는 예지를 안고 있는 연정훈에게 두세 마디 말을 건넸다. 그러다 갑자기 ‘아이고’라는 소리가 나왔다.양시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괜찮아요. 배가 갑자기 묵직해진 것 같아요.”“아기 찬 거 아니에요?”“그런 것 같아요.”부승희는 곧 출산 예정이라 작은 움직임에도 이승우는 바로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어디 불편해?”“아니야.”“빨리 앉아서 좀 쉬어.”이승우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고 양시연은 그에게 제안했다.“위층에 올라가서 좀 쉬는 게 어때요?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요.”부승희는 답답해서 밖으로 나왔지만 올라가기 싫었다. 그렇지만 이승우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니 어쩔 수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오후에는 소에게 우유를 짜는 일이었기에 연정훈과 양시연은 태양과 예지를 데리고 함께 갔다.예지는 그저 장난으로 생각하며 장난치는 것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태양은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양시연과 연정훈은 학업 외에도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려고 했다. 그들은 세 사람 모두 진지하게 협력하며 일을 했다.드디어 해가 지기 전 큰 우유 통 몇 개를 채웠다.양은 직접 짠 우유를 담아 집으로 가져가 양시연에게 요구르트를 만들어 주려고 했다.연정훈은 저녁에 일이 있었기에, 그들은 예지를 목장 휴양 시설로 데려가 평소 예지를 돌보던 가정부에게 맡기고 세 식구는 집으로 돌아갔다.그들이 떠난 직후 부승희는 예지를 데리러 오려고 했지만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뭔가
예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도 채애정이 돌아오자마자 슬쩍 다가가 조용히 일러바쳤다.“아빠는 엄마한테만 라즈베리를 사주고 나한테는 안 사줘요.”채애정은 예지의 말에 맞장구치며 일부러 화난 척하고 예지의 편을 들어 주었다.“고모가 아기 낳고 나면 할머니가 예지한테 잔뜩 사줄게.”“엄청 많이 사줘야 해요!”“알았어...”그제야 예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예지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다. 라즈베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두 개 이상 먹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단지 평소처럼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었다.한편 맞은편에는 반우희와 부승원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부승원은 벽에 기대앉아 반우희를 흘깃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얼굴 하나 안 빨개지네? 반만 남겨 두라고 했는데 한 입도 안 남겼잖아.”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마지막 라즈베리 케이크였어요. 당신이 사준 거지만 나 혼자 먹기에도 모자랐다고요.”부승원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아직 철이 덜 들었네.”“뭐라고요? 나 오늘 혼자 소송해서 이겼거든요.”이야기가 나오자 부승원은 그녀를 다시금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법정에서의 그녀는 그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고 그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부승원은 속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이미 그녀를 위한 축하 선물로 무엇을 준비할지 머릿속에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한편 병실에서는 부승희가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이승우에게 머리를 감겨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차분히 출산을 준비했다.그러나 몇 시간을 기다려도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새벽이 지나고 피곤함이 몰려오던 그때 갑작스럽게 진통이 시작됐다.이승우는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그녀를 부축해 분만실로 향했고 그는 옆에서 조용히 응원을 건넸다.부승희가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휴대폰 만지다가 걸리면 죽는 줄 알아.”이승우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휴대폰을 볼 정신이 있긴 해? 내 손바닥에
“너, 시도 알아?”부승희는 이승우를 놀리며 말했다.“그만해. 갑자기 그러면 무서워.”“먼저 나를 놀리지 말고 들어봐.”“그럼 말해 봐.”“동쪽에서는 해가 뜨고 서쪽에서는 비가 내리네. 완전히 맑다고 할 순 없지만 그 안에 맑음이 숨어 있지.”부승희는 눈썹을 한껏 올렸다.“이동하?”이승우는 침묵했다.“...”“이유하.”부승희는 잠시 멈칫하며 생각에 잠겼고 이승우는 턱을 쭉 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이름 예쁘지 않아?”이쁜 건 둘째 치고 부승희는 이 시구절이 가진 다른 의미가 마음에 들었다.“하늘은 흐린 듯하지만 그 안에 맑음이 스며 있고. 차가워 보이지만 속에는 따뜻한 정이 흐른다.”“여름을 뜻하는 한자 ‘하’를 쓸 거야?”그녀가 이승우에게 물었다.“응. 우리 아이가 평생 여름 날씨처럼 맑고 비바람 없이 햇살만 가득한 삶을 살기를 바래.”이승우는 의자를 끌어당기며 얼굴에 웃음을 가득 지었고 어젯밤보다 훨씬 더 기뻐 보였다.“내가 애칭도 생각해 뒀어.”부승희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본명은 네가 지었으니 애칭은 내 차례야.”“알아. 난 그냥 이름 후보를 추천하는 거야. 본명도 그렇듯이 넌 거부할 권리가 있잖아.”부승희는 마지못해 동의하며 고개를 들었다.“그럼 말해 봐.”“미소, 어때?”“미소?”부승희는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미소가 얼마나 좋은데. 항상 행복하게 웃으며 살면 좋잖아.”“…”그녀는 본명에는 꽤 만족했다. 애칭도 몇 가지 고민해 두었지만‘미소’만큼 마음에 드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없었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아기의 이름을 불러 보았고 아기는 여전히 냠냠 먹으며 멈추지 않았다.이승우가 장난스레 말했다.“봐, 미소도 반대 안 하잖아.”부승희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미소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야 부승희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집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고 많은 친구가 찾아와 축하를 건넸다.그날 아침 이승우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부승희와 딸을 차에 태웠다.이
다음 해가 되었다.알람이 울리자 문 밖에서 태양의 발소리가 제시간에 들려왔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고 웃음을 터뜨렸다.“얘는 왜 이렇게 부지런해요? 초등학교 다니는 게 그렇게 재밌을까요?”연정훈은 자세를 바꿔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았다. 동시에 침대 옆 램프를 켰다.“신기해서 그렇지. 며칠만 지나면 지겨워질 거야. 예전에 유치원 갈 때도 그랬잖아.”양시연은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아직 시간이 있고 아침 식사는 누군가 준비해 줄 거라서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 옆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물었다.“어디 아픈 곳은 없어?”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무렇지도 않아요.”이틀 전 검사 결과를 받았고 양시연은 둘째를 임신했다. 아직 태양에게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그녀가 처음 임신했을 때부터 벌써 6, 7년이 흘렀다. 연정훈은 그때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녀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썼다.“내 생각에는 집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그는 돌려 말했다.양시연은 아직 배가 많이 나온 것도 아닌데 집에서 쉬면 오히려 답답할 것 같아 거절했다.“걱정 마요. 조심할게요.”연정훈은 아직도 양시연을 설득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재촉을 받아 일어섰다. 그는 4년 전에 원래 근무지에서 떠나 지금은 서운시에서 일하고 있었고 예전보다 더 조심해야 했다.“태양 오늘 생일인데 정시에 퇴근할 수 있겠어요?”양시연이 물었다.“응. 요즘은 별일 없어.”연정훈은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일어나지 말고 좀 더 자. 내가 아침 챙겨줄게.”“괜찮아요.”양시연은 일어나서 뒤에서 연정훈을 끌어안고 말했다.“어제 태양한테 침대에서 먹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오늘 내가 침대에서 먹으면 양심이 좀 찔릴 것 같아요.”“그냥 배 속에 여동생이 있어서 여동생이 침대에서 먹고 싶다고 하면 태양은 분명히 괜찮다고 할 거야.”양시연은 웃었다.“아니요. 그냥 나중에 말해줘요. 태양이에게 서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태양이 너무 일찍 어른스러워지려 한다며 투덜거렸지만 부씨 가문은 온 가족이 꼬마 악당에게 휘둘려 진이 빠진 상태였다.새벽부터 온 가족이 예지를 둘러싸고 유치원 갈 옷을 입히려 분주했다.이승우의 아들 라온도 곧 돌을 맞이했고 예지는 세 살이 되었다. 채애정은 예지가 또래 친구들과 더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최고의 사립 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 유치원은 주 4일 운영되며 매일 오전 9시에 등교해 오후 2시에 하원하는 시스템이었다.그런데도 예지는 유치원에 가기 싫어했고 아침마다 울음을 터뜨렸다.“예지야 착하지? 할머니 들어봐. 유치원 정말 재미있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은서 선생님도 계시잖아.”“싫어요. 싫어요.”예지는 치마를 입으려 하지 않고 바지를 입은 채 머리도 헝클어진 채로 기회만 있으면 아빠 품에 안겼다.“예지는 유치원 안 갈래요. 할머니가 가요.”채애정은 머리가 아팠다.부승원이 예지를 안아 올리며 달래는 모습을 보니 유치원에 가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채애정은 부승원에게 눈짓을 보내며 겨우 깨웠는데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아빠.”예지는 부승원의 목을 꼭 껴안고 훌쩍이며 울었다.“예지를 유치원에 보내지 마세요.”“유치원이 싫어?”“싫어요. 싫어요.”부승원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소파로 데려갔다.채애정은 굳이 맞힐 필요도 없이 그의 말을 미리 짐작했다.“그러면 오늘은 가지 말자.”채애정은 먼저 말했다“이번 주에 이미 두 번이나 결석했어.”일주일은 7일인데 2일만 다니고 5일은 쉬는 셈이었고 이건 도저히 안 되는 일이었다.부승원은 채애정을 흘끗 보며 다른 손으로 예지를 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예지가 다섯 살에 유치원 가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뭘 배우고 싶으면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하면 된다고 여겼다.하지만 부모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고 그는 아이의 성장을 놓치는 게 두려웠다.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부승원이 ‘안 간다’는 말을 하지 않자 예지는 불안해하며 부승원
반우희는 이불 속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며 즐거워하고 있었다.문밖에서는 예지가 할머니와 화해하고 채애정이 예지를 치마를 입혀 줄 때 얌전하게 있으면 방과 후의 일정을 짜고 있었다.“태양 오빠랑 놀러 가요.”“알았어. 태양 오빠랑 놀자.”반우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태양이랑 같이 놀러 간다니. 그건 진짜 놀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태양을 괴롭히겠다는 거잖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한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뒷목을 쥐었다.“안 일어날 거야?”반우희는 콧방귀를 뀌고 문밖을 힐끗 살펴보았다. 채애정이 예지를 안고 내려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서 침대에 앉아 있던 부승원에게 달라붙었다.“안 일어날 거예요. 당신도 날 달래줄 수 있어요?”그녀는 예지에게 질투하는 일상이었지만 부승원은 재미있어하며 입꼬리를 올리고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달래주면 네가 어린이집 갈 때 데려다줄까?”“좋아요.”반우희는 잠시 눈을 돌려 생각한 후 그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나 선생님 할 거예요. 우희 선생님.”그녀는 그의 뒤쪽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그 특유의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말 안 들으면 벌주겠어요.”부승원은 즉시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그녀의 역할 놀이를 떠올렸다.역시 반우희는 이어서 그를 불렀다.“어린이?”아침 일찍 모든 것이 자라기 쉬운 시간 부승원은 아무렇지 않게 숨을 고르고 얼굴을 옆으로 돌려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일부러 그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갔다.부승원은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없었고 이제 막 옷을 입고 일을 보러 갈 시간이었기에 그녀를 다루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는 그저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볼을 살짝 쥐었다.“다시 말해 볼래?”반우희는 그의 꾸짖음에도 이미 익숙해져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를 품에 파고들었다.부승원은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점점 이끌려 가고 싶었지만 다행히 아래층에서 꼬마 악마의 하이톤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예지는 어릴 때 우유를 먹으며 하얗고 통통하게 자랐다. 반우희가 걱정하자 채애정은 우유를 끊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그리고 이유식을 시작하고 나서도 예지는 여전히 하얗고 통통한 모습이었다. 그때도 채애정은 이제 밥을 먹기 시작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결국 이 아이는 정말 편식을 하지 않았다. 밥을 먹기 시작한 후로는 음식에 가리지 않고 흰쌀밥이나 잡곡밥도 잘 먹었다. 다른 아이들은 밥을 먹이려고 애를 쓰거나 간식과 보조식을 먹여야 하는데 예지는 기분이 좋을 때만 먹고 싶어 했다. 보통은 혼자서 밥을 들고 앉아 한참 동안 조용히 먹었다.부씨 가문은 아침이 풍성했지만 작은 아이는 아무거나 먹지 않았다. 매일 아침은 꼭 죽을 먹었고 죽의 종류와 반찬만 달랐다.그렇게 계속 먹다 보니 작은 얼굴이 점점 둥글어졌다.지금은 어리니까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반우희는 몇 년 후 예지가 더 자라면 비만이 될지 걱정했다. 그래서 드물게 제대로 부승원에게 예지의 식사를 너무 방치하지 말고 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예지는 식탁에서 아빠와 엄마가 한 속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지가 반우희에게 양보할 기미가 없자 울지 않고 고개를 돌려 작은 통통한 손으로 만두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반우희는 그 모습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부승원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채애정과 부형석은 즐겁게 웃었다.다행히도 예지는 작은 만두 하나만 먹고는 금세 자리를 떠났다.여러 일이 끝난 후 드디어 출발할 준비가 되었고 차에 오르기 전에 사람들에게 한 바퀴 인사를 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채애정은 할 일이 있어 나가야 했고 반우희는 사람들을 배웅하고 나서 한숨 돌리며 기지개를 켰다.‘다시 자야지.’...태양의 생일이 다가오고 양시연은 오후 일찍 집에 돌아와 이웃을 초대했다. 마침 부승희와 이승우도 시간이 나서 미소를 데리고 왔다.물론 제일 먼저 온 건 예지였고 예지는 방금 학교가 끝나자마자 부승원과 함께 집에 왔다.부승원은 정말 인내
양혁수가 어제 에든베타에 가고 싶었던 건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린 탓이었고 실은 아직 그곳으로 향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지금 그냥 떠나는 것은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변여름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그는 어른이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무엇보다 순간적인 충동에 휘말렸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변여름은 아침 일찍 나간 뒤 몇 시간째 돌아오지 않았다.떠나겠다고 해놓고도 한낮이 되도록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이 양혁수는 조금 어색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집을 비운 둘째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했다.한 상 가득 차려진 식사 자리였지만 변여름만 보이지 않았다.마크가 갑자기 양혁수의 왼쪽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함은화가 곧바로 타일렀다.“삼촌이라고 불러야지.”“삼촌, 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마크는 즉시 호칭을 바꾸었다.양혁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침묵했다.“...”잠시 후 그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추워서.”“집은 안 추운데요.”하니가 반대쪽에서 다가와 그를 유심히 살폈다.“땀까지 나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하니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천천히 드세요.’라고 한 마디 남기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거실 창가로 향했다.두 꼬맹이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다 마크가 마침내 그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다쳤어요.”하니도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보라색이에요. 엄청 커요.”양혁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멀리서 변백호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엄격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불렀다.식탁에서 함은화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행히 너희들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속상해하지 않으시겠네.”변여름의 셋째 형수는 외
새벽 두 시를 넘긴 침실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양혁수의 셔츠는 변여름의 겉옷과 뒤엉킨 채 침대 옆 바닥에 나른히 놓여 있었다.거실의 시곗바늘이 똑똑 소리를 내며 양혁수의 심장과 신경을 조여 왔다.양혁수는 자신이 형편없는 놈이라며 N 번째로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변여름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순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키스하려 다가왔다.양혁수는 약간 불편해서 변여름의 양 볼을 잡았다.“뭐 하려고 그래?”그는 깊은 만족 뒤에 밀려오는 나른함 속에서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변여름은 살짝 눈을 굴리더니 능숙하게 고개를 돌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마치 뜨거운 물건을 만진 듯 무의식적으로 손을 뗐다.변여름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도 자극으로는 그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기며 조용히 속삭였다.“오빠, 나 졸려요.”양혁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몸을 돌려 이불을 끌어당겨 둘을 덮었다.“자.”지금 변여름을 돌려보낸다 한들 헛수고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변여름은 그의 속내를 알아챈 듯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는 양혁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달콤하게 눈을 감았다.양혁수는 그녀의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섬세한 얼굴 위로 연분홍빛이 감돌았고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그는 머리가 아파졌다.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변여름을 방 안으로 들인 자신을 주저 없이 없애버리고 싶었다.지금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양혁수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아무리 되짚어 봐도 도대체 어느 순간 문제가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확실한 건 이 모든 일이 결국 변여름의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이었다.‘아니면 정말 변여름이 말한 대로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 이렇게 쉽게 넘어간 걸까?’양혁수는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한강시에서만 몇 년을 지내며 수많은
변여름이 두 번째로 양혁수에게 키스하자 그는 여전히 피하려 했지만 마치 작은 마녀의 마법에 걸린 듯 저항은 미약했다.그녀는 투피스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언제 풀었는지 겉옷 단추가 풀려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끈 나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는 잠시 눈길을 돌렸을 뿐인데 그녀의 가슴 라인이 스쳐 지나갔다. 오른쪽에 분홍색 만화 꽃이 그려져 있었고 그 모습이 그녀의 행동과 대조되어 양혁수는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입술이 닫히자 변여름은 그의 목을 감싸며 손끝으로 뒷머리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돌려 무심한 듯 두 번 당겼다. 그 작은 통증이 오히려 자극되어 그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이번에는 더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양혁수의 입술을 따라갔다. 중간에 멈추어 그의 표정을 살펴보며 그가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는’모습을 보고는 살짝 미소 지으며 다시 그의 턱에 입맞춤을 했다. 그 후 더 애정을 담아 양혁수의 목젖에 부드럽게 입술을 옮겼다.양혁수는 자신이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가만히 있으며 그녀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게 두었다.심장 박동과 호흡이 서로 경쟁하는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아래로 눌러 내려가며 누가 먼저 참지 못할지 시험하려는 듯했다.그는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등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녀가 그를 껴안고 무심하게 척추를 쓸어내리자 날카로운 전류가 온몸을 타고 내려가 배까지 흘러갔다.변여름이 양혁수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며 그의 옆얼굴에 가만히 입맞췄다.“오빠, 이런 거 좋아해요? 좋아하면 저한테도 이렇게 해도 돼요…아니면 오빠가 다른 걸 원해도 뭐든 저한테 해도 괜찮아요.”변여름의 태도는 바닥까지 내려앉아 마치 겸손해 보였지만 양혁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 같은 사람들이 가장 자주 쓰는 약탈 방식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결과만이 전부였다.그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녀의 덫에 걸려들어 단단히 붙잡힐 테고 다시는 벗
“바디워시에요.”“변여름.”변여름은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로 우유 향이 나는 바디워시에요.”양혁수는 방금 그 순간 특히 그녀의 눈과 마주쳤을 때 그리고 그녀가 그의 손을 핥던 단 몇 초 동안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말도 안 돼.’그는 분명 그녀의 향기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변여름이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의 은은한 향이 퍼지더니 이상하게도 양혁수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변여름이 키스하려 하자 그는 마치 폭발할 것 같았다.변여름은 그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며 미동도 없이 침착했다.“오빠, 어디 불편해요?”“네가 그 이유를 더 잘 알잖아.”“...?”변여름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가빠진 호흡과 붉어진 귀 끝을 보고는 눈을 깜빡였다.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 흥분 수치가 급격히 상승했다.“오빠, 제가 오빠한테 약이라도 먹였다고 생각해요?”양혁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슴이 요동쳤고 침묵이 곧 대답이 되었다.변여름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진짜 아니에요.”“오빠는 경험이 부족해서 딥 키스 한 번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양혁수는 순간 멍해졌다.???방금 키스 때조차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굳었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리려는 본능을 꾹 참으며 조용히 손을 빼려 했다.그러나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또 멋대로 움직이면?”변여름은 가늘게 신음하며 눈에 희미한 물기를 맺었다.“오빠, 아파요.”양혁수는 변여름이 꾀병을 부린다고 90% 확신했지만 그녀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풀었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변여름은 손을 빼냈다.양혁수는 얼굴에 서리가 낀 듯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경계했고 변여름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잠시 팽팽한 정적이 흐른 후 변여름은 애원하는 듯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