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두 페이지 분량의 종이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서둘러 썼다.글을 다 쓴 후 그녀는 은행 카드를 유서와 함께 편지지에 넣고 봉투에 「가혜에게」라는 네 글자를 적었다.고민 끝에 다른 편지지를 꺼내 이승하에게 무언가를 쓰려고 펜을 들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서유는 그의 이름 세 글자만 적고 펜을 내려놓고 편지지를 접어서 서랍에 넣었다.서유가 떠난 후 정가혜는 반드시 그녀의 소지품을 정리하러 와서 그녀가 남긴 것을 찾을 것이다.모든 준비를 마친 후 서유는 약을 한 움큼 집어 먹었고, 오늘 밤에 중요한 임무를 완수해야 하기 때문에 몸이 잘 버텨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약을 먹은 후 서유는 자물쇠로 잠긴 책상 서랍을 열고 열흘 정도 보관해 두었던 수면제가 들어 있는 작은 약병을 꺼냈다.미리 준비한 가짜 계약서, 작은 칼과 함께 수면제를 가방에 넣은 후,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호텔을 예약했다.임태진에게 문자 메시지로 주소를 보내기 전에 먼저 호텔에 가서 짐을 풀었다.서유는 임태진의 카카오톡을 추가하지 않았고, 그가 이전에 문자 메시지로 연락을 한 적이 있던 것이 생각나 이번에 그녀도 똑같이 문자로 주소를 보냈다.「임 대표님, 하얏트 호텔 2008호 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서유는 임태진이 문자 메시지를 보고 바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물음표로 답장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서유는 물음표를 보고 눈썹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오늘 밤에 계약서를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그녀가 의아해할 때쯤 상대방이 또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그제야 서유는 의심을 떨쳐버리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수면제를 꺼냈다.병에 담긴 약을 모두 와인 잔에 부은 후 칼을 들고 칼끝으로 약을 조금씩 가루 냈다.지난번부터 목숨을 걸고 임태진과 싸울 계획이었지만 그때는 준비가 부족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한다!서유는 그에게 놀아나고 싶지 않았고 정가혜를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임태진을 죽이는 것
심장이 떨릴 정도로 긴장한 서유는 왜 이 남자가 임태진을 사칭하며 자신에게 접근했을지 의아했다.왜 감히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왜 들어올 때 불을 다 끄는 걸까, 도대체 뭘 원하는 걸까?그녀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래 계획에 따르면 서유는 임태진만 상대하면 됐지만, 갑자기 낯선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그녀의 마음은 너무 불안해서 심장이 격렬하고 뛰고 있었지만 표정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이 사람이 누구든 이 집에 들어오는 한, 그녀는 약으로 제압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이런 생각을 하며 서유는 꽉 쥔 손을 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임 대표님, 역할극을 하고 싶은 거면 불은 끄지 마세요,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요.”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더듬거리며 테이블로 가 옆에 있는 빈 와인 잔을 집어 들고 수면제가 든 와인을 따라주었다.와인의 조금 들어간 와인 잔을 집어 들고 남자에게 다가가 건넸다.“임 대표님, 먼저 와인 한 잔 마시고 기운을 차리세요.”서유는 임태진이 도착한 후 그에게 계약서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계약서를 받은 후 그는 반드시 그녀에게 수작을 부릴 것이다.그래서 이때 서유는 임태진에게 먼저 술을 마시게 해서 기분을 좋게 하고, 약효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칼로 그를 죽이려 계획을 세웠다.그런 다음 그녀는 동영상을 찍어 임태진의 범죄를 폭로하면서 그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서유는 이 모든 과정을 마친 후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고 손목을 그어 자살할 것이다.그렇게 하면 태안 그룹의 사람들은 그녀와 임태진이 감정 문제로 서로 싸우다 죽인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 정가혜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계획을 완벽하게 세웠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호텔로 온 사람이 임태진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이로 인해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이 사람을 바로 죽일 수도 없었다.아니면 임태진의 문제를 해
눈을 가린 후 그녀의 눈앞은 칠흑같이 어두워져 조금의 빛도 볼 수 없었다.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공포감은 마치 끝없는 심연에 빠진 것 같았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이 순간에야 서유는 임태진보다 더 무서운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남자는 임태진보다 상대하기 더 어려운 변태였다.두려움에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저도 모르게 다리까지 후들거렸다.눈은 가려지고 손은 묶여 있어서 주도권을 완전히 잃었다.서유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진정하고 그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 봐요.”그녀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도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그 남자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그녀를 들어 안았다.서유는 순식간에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고, 이어서 푹신한 침대에 던져졌다.그 남자가 자신을 성폭행하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옆에 앉았다.침대 앞부분이 가라앉은 것을 느낀 서유는 자신이 침대 한가운데 누워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베개 아래에 칼을 숨겨 놓았기 때문에 베개가 있는 위치로 이동하기만 하면 칼을 꺼내 케이블 타이를 끊을 수 있다.그래서 즉시 다리의 힘을 이용해 몸을 위로 움직였다.머리가 베개에 닿으려는 순간, 남자가 갑자기 그녀의 몸을 눌렀다.그가 자신을 누르는 느낌과 함께 그의 쉰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임태진에게 호텔로 오라고 해놓고 와인에 약을 탔네. 이게 무슨 뜻이지?”서유는 잠시 얼어붙었다.‘지금 당장 범죄를 저지르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이런 일을 물어보는 걸까? 혹시 임태진이 계획을 알아채고 일부러 이 남자를 보내 의도를 찔러보려는 건 아닐까? 그럴 리가!’임태진의 성격에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미 누군가를 보내 그녀를 토막 냈을 것이다.“흥분하게 만드는 약일 뿐이에요.”그녀는 애써 차분한 척하며 대답했다. 이 남자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절대 그에게 진실을 말하
“알겠어요.”서유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 마디 대답했고 눈앞에 있는 남자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녀는 남자의 표정을 볼 수 없어 그저 애타게 그에게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저기요, 들으신 것처럼 지금 제 친구의 목숨이 위태로워요. 임태진을 사칭해서 저에게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지만 시간만 바꿔주세요. 오늘 밤 그 사람을 만나서 계약서를 넘겨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 친구를 죽일 거예요!”서유의 불안한 모습에 비해 그 남자는 여유로운 듯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계약서인데?”이승하와 관련된 일이라서 서유는 당연히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그냥 프로젝트 계약서예요.”그 남자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네가 명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임태진에게서 듣도록 하지.”서유는 임태진이 그녀와 자고 싶어 하는 것과 자신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계획을 세운 것,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그에게 말해야 했다.다만 임태진을 죽이려는 계획은 말하지 않고 대신 계약서에 대한 일은 간략히 설명했다.“나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 사람한테 서부 개발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그 사람을 막아야 내 친구의 결혼식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상대하기 쉽지 않아 가짜 계약서를 만들어서 설득할 수밖에 없었죠.”그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들은 후 한참 동안 침묵했다.서유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불안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선생님, 제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니 제발 저를 보내주세요!”그러나 그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불쑥 물었다.“임태진이랑 같이 잔 적은 없어?”“당연히 없죠!”서유는 너무 화가 나서 소리쳤다.“저렇게 잔인한 남자와 어떻게 같이 잘 수 있겠어요!” 서유는 임태진이 정가혜의 신혼집에 사람을 보냈다고 생각하자 이성을 잃고 날카로운 태도로 말했다.그 남자는 서유가 기겁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작은 금색 칼을 꺼내 손목의 흰 타이를 끊었다.타이가 풀리자, 서유는 서둘러 눈을
“그래도 능력은 좀 있는 것 같군.”임태진은 서유의 허리에 팔을 감고 볼에 뽀뽀하며 말했다.“말해봐, 예쁜아, 무슨 보상을 원해?”서유는 뺨을 가리고 무표정한 채 말했다.“임 대표님, 저는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으니 부하들더러 제 친구의 신혼집에서 나가게 해 주세요.”“알겠어.”임태진은 즉시 휴대폰을 꺼내 부하들에게 철수하라고 전화를 걸었다.그제야 서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서 약이 든 술잔을 집어 임태진에게 건넸다.“대표님, 제가 특별히 이 와인을 가져왔으니 함께 마셔보시죠.”“와인을 마신다고?”임태진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녀가 먼저 자신에게 술을 마시자고 할 줄은 몰랐다.다소 놀란 임태진은 서유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고 급히 그녀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왜? 이제 마음먹었어? 내가 만져도 돼?”서유는 임태진이 의심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이전의 태도와 차가운 목소리를 유지했다.“대표님,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제가 말했듯이, 대표님이랑 자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로젝트 계약서와 거래하자고 했고요. 왜 약속을 안 지키세요?”임태진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언짢아졌다.“근데 왜 술을 마시자고 한 거야?”서유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대표님, 제가 같이 와인을 마시자고 한 건, 저를 두 번 연속 봐주시고 건드리지 않으신 데다가 저를 믿어주시기까지 하셨으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저 그렇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아닙니다. 적어도 당연히 술은 같이 마실 수 있죠.”서유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칭찬하자 임태진은 자신의 이미지가 갑자기 영광스럽고 위대해졌다고 느꼈다.“그렇다면 한 잔 같이 마셔주지.”임태진은 손을 뻗어 그녀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들었다.서유는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손가락이 약간 떨렸다.그러자 임태진은 한눈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는 티를 내지 않고 술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은 채 대신 서유를 훑어보았다.서유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지만, 빠르게 올라갔
서유는 임태진이 계약서를 가진 후에도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이미 예상했었다.하지만 그건 수면제를 마셨다는 가정하에서였다. 이건 모두 화장실에 있는 그 남자 탓이다.그가 임태진으로 위장하고 한바탕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면 그녀는 손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지 않았을 것이고 임태진에게도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이 상황에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임태진과 같이 자게 될까?불안감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휴대폰 진동 소리가 임태진의 더듬거리는 손을 멈추게 했다.“임 대표님, 전화 왔으니 먼저 받으세요.”서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임태진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임태진은 그녀가 오늘 밤 어떤 식으로든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의 태도에 따지지 않았다.그는 핸드폰을 꺼내어 스크린에 뜬 번호를 보고는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서유는 임태진이 전화를 받자마자 말투가 지극히 공손해지고 안절부절못하며 아첨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그래서 임태진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거물일 것이라 짐작했지만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눈앞에 들이닥친 골치 아픈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했다.임태진은 전화를 받으면서 계약서를 들여다보고 말했다.“문제가 있나요? 저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는데요?”서유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임태진이 곧이어 말했다.“지금 말입니까?”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그가 가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자 서유는 더 조급해 났다. 만약 오늘 밤 임태진을 해결하지 못하고 내일 입찰이 시작하면 그녀는 끝장날 것이다.서유는 임태진을 막고 싶었지만 그는 곧바로 계약서를 들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얼굴에 키스했다“예쁜아, 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해결하러 가야 하니까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그가 다시 돌아온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서유는 막지 않
서유는 자신이 낯선 사람에게 성폭행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게다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른다.그녀는 더 없이 절망했다.이제 진짜 더러워졌다.아마도 이승하는 그녀를 혐오할 것이다.이승하, 이승하, 이승하…서유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그의 이름을 외쳤고, 눈가에서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남자는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턱을 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누구 때문에 우는 거야?!”서유는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넥타이를 적셨다.그녀의 침묵은 남자를 언짢게 만들었다.“넌 내 것이어야만 해!“남자는 서유의 붉은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그러고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놓아주었다…서유의 몸은 이미 힘이 풀린 지 오래되었고 전에 마셨던 수면제를 탄 와인 때문에 머릿속이 흐리멍덩했다.남자는 그녀의 몸을 침범하자마자 바로 떠나지 않고 그녀를 안아서 욕조에 내려주었다.온수로 깨끗이 씻긴 후 공주 안기로 침대까지 데려갔다.부드러운 침대에 눕자 서유는 바로 잠이 들 것 같았다.하지만 임태진이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하자 혀를 깨물며 정신을 차리려고 버텼다.입 안에서 피 맛을 느낀 후에야 정신이 좀 들었다.”이제 저를 놓아주겠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무조건 죽여버릴 것이다.남자는 옷을 입는 듯했지만 서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서유는 화가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잠까지 자놓고 설마 날 죽이려는 거예요?“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는 다시 몸으로 그녀를 눌렀다.그는 서유의 붉은 입술에 살짝 입맞춤하고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너 위조 계약서로 임태진을 속였잖아. 너한테 보복할까 봐 두렵지 않아?“”그러든 말든 당신이랑 뭔 상관이야!“서유는 울부짖듯 말했다.이미 강간을 당했으니 더 잃을 게 없어 더 이상 이 남자가 무섭지 않았다.그러자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그녀를 가만히 쳐다
서유는 칼도 빼앗기고 손도 남자에게 붙잡혀서 움직일 수 없었다.이런 피동적인 느낌은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그래서 아예 주저앉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울지마.”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위로했다.하지만 그 말은 서유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떠나갈 듯 울부짖었는데 그 모습은 더없이 비참했다.남자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면서 주저앉아 서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녀가 손을 뿌리치자 남자는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한순간 나도 모르게 참지 못했어. 미안해.”보고 싶었다고?그럼 이 변태 자식이 갑자기 발정난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소리야?임태진을 사칭해서 그녀에게 문자를 보낸 것을 보면 그녀가 임태진이 마음에 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임태진이 서유를 자기 여자라고 선포한 것은 그날 밤 나이트 레일에서였다.서유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날 밤 확실히 이렇게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가 있긴 했다.이승하와 이연석 외에도 다른 부잣집 도련님들이 많았다.이씨 가문의 형제는 그녀를 얕잡아 보기 때문에 절대 이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임태진이 데려온 사람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그는 임태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녀가 전화를 걸어서 확인할 때 임태진이 회의 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하자 서유의 머릿속 생각들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임태진과 어울려 지내는 사람만이 이런 짓을 벌일 것이다.그러다 갑자기 조금 전 이 남자가 자신을 잠시 풀어주었을 때 자신이 모든 계획을 알려준 것을 생각하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만약 이 남자가 임태진에게 그 계획들을 전부 알려준다면, 임태진을 해결하는 것은 둘째 치고 그전에 그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서유는 겁이나 몸을 떨었고 절망이 덮쳐와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남자는 떨어진 칼을 집어 들고 서유가 위장 계약서로 임태진을 속인 다음 무엇을 하려고 했을지 짐작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
이하준은 그 순간, 이승하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마치 성인처럼 빛나는 그 모습에 그는 아버지가 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한순간에 완전히 압도당한 이하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이승하의 품에서 낮게 말했다.“아버지가 알고 있는 걸 전부 가르쳐 주신다면, 그때는 진심으로 인정할게요.”작은 아이를 상대로 주도권을 쥔 이승하는 이하준이 자신의 능력을 배우고 나중에 자신을 압도하려는 속셈임을 눈치챘다.하지만 미안하지만 이미 그가 아들을 길들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하준이 다시는 반격할 수 없을 것이다.이승하는 이하준을 내려놓고 그의 눈앞에서 컴퓨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프로그램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지능 문제가 모여 있어. 이 모든 문제를 풀어낸다면, 그때 가서 다른 걸 가르쳐 줄게.”그 말을 남기고 이승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섰다. 이하준은 뒤따라가며 물었다.“근데 아버지는 문제 푸는 것 말고도 다른 걸 할 줄 아세요?”이승하는 걸음을 멈추고, 작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하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너도 곧 알게 될 거야.”그 당시 이하준은 아버지가 무엇을 더 할 줄 아는지 몰랐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이승하의 도박 실력, 사격과 검술, 컴퓨터 및 AI 개발, 그리고 탁월한 경영 능력을 직접 목격한 후에야 그는 아버지의 진짜 능력을 깨달았다.지금의 이하준은 오직 하나의 목표만 가지고 있었다. 바로 프로그램 속의 모든 난제를 풀어내고 아버지를 압도한 뒤, 주도권을 되찾는 것이다.그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문제를 풀고 있는 동안, 이승하는 욕실 문 앞에 기대 서 있었다. 서유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서유는 깜짝 놀라 물었다.“저녁 먹으러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이승하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몸을 들어 올리며 가슴에 밀착시켰다.“고픈 건... 배가 아니야.”머리카락이 축축한 서유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만해요. 하준이가
‘저 멍청이한테 사과하라니, 이건 내 지능에 대한 모욕이야.’하지만 영구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도, 이하준은 결국 입을 열었다.“미안.”오뚝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손가락 사이로 살짝 눈을 뜨고 떠나가는 이하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형, 귀신 들린 거야?”이하준은 눈을 굴리며 대꾸도 하지 않고 거실로 돌아와서 이승하 앞에 섰다.“이미 사과했어요. 문제는요?”이승하는 우아하게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일어섰다.“서재로 따라와.”이하준은 투덜대며 따라갔다. 아버지는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책상에 앉아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의자 가져와.”화를 꾹 참고 이하준은 하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의자 등을 붙잡고 있는 힘껏 끌었다. 그리고 힘겹게 의자를 책상 앞으로 옮기고 자리에 앉았다.그제야 이승하는 컴퓨터를 켜고 몇 가지 문제를 불러온 후, 화면을 이하준 쪽으로 돌렸다.“총 여섯 문제야. 수학, 컴퓨터, 천문학, 반중력, 철학, AI 각각 한 문제씩.”이하준은 이게 어린애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말했다.“반중력이 뭔지도 모르는데...”이승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그렇게 잘난 척했으면서 반중력이 뭔지도 몰라?”궁지에 몰린 이하준은 이를 악물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승하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한 시간 줄게. 못 풀면 깨끗이 인정해.”이하준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자존심 때문에 아버지와 한판 승부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아이는 손을 뻗어 컴퓨터를 받아 들고 작은 얼굴을 들고는 화면에 떠 있는 문제를 응시했다.이승하는 문제마다 프로그램을 설정해 두었다. 하나를 풀어야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첫 번째 문제부터 막힌 이하준은 점점 초조해졌다.책을 읽고 있던 이승하는 아이가 초조해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미소를 살짝 지었다.“못 풀겠으면 그냥 포기해.”이하준은 질 수 없다는 듯이, 이리저리 공식을 떠올리며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역시 천재답게, 즉석에서 배운 것도 금세 활용했다.하지만 이건 세계
갓 거실에 들어선 이승하는 이하율의 울음소리를 듣고 넥타이 매듭을 풀던 손을 잠시 멈췄다. 차가운 시선이 곧장 주방 문가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작은 실루엣으로 향했다.“이하준.”이승하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하준은 몸이 순간 굳었다. 눈에 띄던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이제 막 재킷을 벗어 집사에게 건네는 남자와 마주했다.“이리 와.”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묘하게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소 안하무인이고 건방진 이하준도 그 미묘한 압박감에 발걸음을 옮겨 얌전히 다가갔다.이승하는 넥타이를 풀어 집사에게 건넨 후, 짙은 속눈썹을 내리며 자신 앞에 무표정으로 서 있는 이하준을 바라보았다.“하율이에게 사과해.”스스로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 이하준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여전히 이승하에게 말 한마디 없이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행동으로 자신의 반항심을 드러내고 있었다.“문지기가 되고 싶다면 계속 서 있어.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바로 하율이에게 사과해야 해.”이승하의 차가운 한마디는 이하준을 진퇴양난의 상황에 몰아넣었다.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이승하를 노려보았지만, 키 크고 외모가 빼어난 이 남자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신발을 갈아 신고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그 모습에 이하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작은 주먹을 꽉 쥐고는 억울함에 이를 악물었다.한편, 울며 엄마를 찾고 있던 이하율은 이하준이 벌서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을 그쳤다. 소매로 얼굴에 잔뜩 묻은 치즈를 닦고는 이하준 앞으로 뛰어가 통통한 코를 손으로 눌러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메롱~!”이하준은 이런 이하율을 멍청이라고 하는 것조차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하준은 어리석은 자와 논쟁할 필요 없다고 판단해 눈을 감고 이하율을 무시하기로 했다.정가혜가 있기에 이승하는 후원에 있는 서유를 찾지 않고 샤워를 마친 후, 서유가 보낸 IQ 테스트 결과를 확인했다. 한동안 꼼꼼히 살펴보다가 문
서유의 하소연을 듣고, 정가혜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눈썹을 찡그렸다.“아주버님은 꽤 똑똑해 보이던데. 머리도 좋을 테니 그분이 아이를 이끌면 되잖아.”그 말에 서유는 어쩐지 쑥스러워 고개를 숙였다.“그이야 회의 끝나면 돌아와서 신경 쓰겠다고는 했지만, 몇 년째 마음을 아이에게 쏟은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아마 크게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아.”정가혜는 서유의 셔츠 아래로 드러난 목과 어깨에 남은 짙은 흔적들을 보고 굳이 묻지 않아도 이승하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참 대단하다. 하루하루 어떻게 그렇게 정력이 넘치지?”정가혜가 최근 이연석과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이런 농담을 서슴없이 하게 된 덕에, 서유는 더더욱 얼굴이 붉어졌다.“나만 붙잡고 있는 건 아니야. 회사 일도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어.”정가혜는 그녀를 힐끔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결정이 어려운 일이나 재무 회의 같은 걸 제외하고는 거의 집에만 있던데?”서유는 얼굴의 절반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아 가혜야, 넌 나를 도우러 온 거야? 아니면 날 놀리러 온 거야? 제발 다른 이야기 좀 하자.”정가혜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난 너를 도울 방법이 없어. 내 머리로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간신히 상대할 정도지, 네 천재 아들은 도저히 감당이 안 돼.”정가혜가 숙모로서 이하준의 신임을 얻은 건 그가 어릴 적 그녀의 모유를 먹은 적이 있어서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격 까칠한 이하준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그래도 걱정하지 마. 이 대표가 있잖아. 하준이가 잘못된 길로 갈 리 없을 거야.”사실 이승하가 아이에게 무심했던 건, 머릿속에 심어진 칩 때문에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온 신경을 서유에게 쏟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서유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그이가 아이를 가르친다 해도 선생님 몇 명을 붙여서 공부만 시키고 끝나버려. 정작 아이와 소통은 전혀 하지 않아.”정가혜는 웃음을 터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