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희는 많은 의료기구들을 들고 들어왔다. 이때 이승하는 이미 방을 나갔다. 주서희가 약도 갈아주고 링거도 놔주는 모습을 보자 서유는 난처하기도 하면서 미안해했다.그때 주서희가 서유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서유 씨는 정말 복이 많네요.”이승하가 서유에게 남달리 잘해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잘해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불쌍해서 동정하는 걸지도 모른다.두 사람은 5년 동안 함께 지냈고 이승하는 갑자기 서유가 심장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관심하고 동정할 것이다.주서희는 서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몰랐다. 그녀는 테이프로 주사 바늘을 붙인 후 약 몇 갑을 꺼내어 서유에게 건네주었다.“서유 씨는 복도 있고 운도 있어요. 마침 해외에서 심부전 말기 치료 약을 구입했어요. 이 약들은 비록 목숨을 살릴 수는 없지만 서유 씨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서유는 그 약들을 보고 마음이 뭉클해졌다. 비록 주서희는 이승하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의사로서의 덕목과 따뜻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서유는 약을 받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그러자 주서희도 빙그레 웃으며 푹 쉬라고 당부한 뒤 약상자를 들고 자리를 떠났다.이때 이승하는 소파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여러 대의 업무용 휴대폰과 노트북으로 바삐 회의하고 있었다.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도 여전히 집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그 이유는 방에 있는 아픈 서유 때문이다. 주서희가 보기에 그녀는 이승하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이승하가 모든 화상 회의를 끝내고 나서야 주서희는 뚜벅뚜벅 그쪽으로 걸어갔다.“대표님, 서유 씨는 아직 조금 더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제가 제시간에 링거를 놓아주러 올게요.”이승하는 주서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말을 마친 주서희가 바로 떠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여전히 자리에 서서 머
문틈으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와 서유의 귀에 들어갔다. 이승하의 말은 서유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서유는 인제야 자신이 이승하 마음속에 어떤 존재임을 깨달았다.사실 지난 5년 동안, 그녀는 자기가 단지 이승하의 성욕을 채워주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이렇게 직접 확인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서유는 오른손을 들어 링거가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했다. 링거를 빨리 맞으면 병이 빨리 나을 것처럼 말이다.주서희가 떠난 후 이승하는 거실 쪽을 쳐다보자 방문이 닫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갑자기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거실을 향해 빨리 걸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서유가 링거 맞는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손바닥만 한 얼굴에 큰 감정 기복이 없어 보였고 예전처럼 온순하고 얌전했다. 이승하가 들어오자 서유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제야 이승하는 의심을 내려놓았다.방금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크지 않아 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이승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침대 앞에 앉았다.“좀 나아졌어?”서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많이 좋아졌어요.”그리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약간 어색하게 만들었다.이승하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서유가 끝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 제 가방 좀 찾아다 주시겠어요?”서유는 가방을 로얄 호텔 연회장에 두고 내렸고 핸드폰 같은 개인 소지품은 다 가방에 들어 있었다. 정가혜가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이승하에게 가방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이승하는 서유가 자기를 부르는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록 에전에도 “대표님” 혹은 “승하 씨” 라고 불렀지만 그때는 크게 소외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헤어진 후 이렇게 부르니 이승하는 서유가 자신과 점점 멀어진다고 느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잡념을 뒤로하고 휴대폰을 꺼내 소수빈에
소수빈은 소유욕에 불타오르는 이승하의 눈빛을 보았다. 마치 승리를 확신한 듯 카리스마가 넘쳤다. 소수빈은 원래 서유를 김시후에게 돌려주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이런 그의 모습을 보자 하려던 말을 삼켰다.‘대표님이 서유 씨를 포기할 수 없었네. 그래서 김시후와 겨루게 된 거야.’이런 이승하의 속내를 알고 있었지만 소수빈은 아는 척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네”라고 대답을 하고 소식을 차단할 방법과 수단만 생각했다.비록 별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승하의 측근이지만 저택에 있는 큰 사모님이 움직이면 쉽게 막아낼 수 없었다. 소수빈은 이럴 때일수록 이승하를 위해 장애물을 제거해야지 서유를 포기하라고 설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방금 서재에서 있던 대화를 모르는 서유는 주태현이 자기 가방을 들고 들어오자 급히 몸을 가누며 일어나 앉았다.“서유 씨, 가방을 찾았어요.”서유는 주태현이 건네준 가방을 두 손으로 받으면서 말했다.“감사합니다.”그러자 주태현은 선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도련님께서 찾으신 겁니다. 인사는 도련님께 하세요.”서유는 예의 바르게 웃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태현도 그녀의 방에 오래 머무는 것이 불편하여 편히 쉬라고 당부하고 자리를 떠났다.주태현이 떠난 후에야 서유는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 바로 조금 전, 정가혜가 그녀에게 십여 통의 전화를 걸었다. 깜짝 놀란 서유는 급히 콜백을 하였다. 통화 연결음이 딱 한 번 울리더니 정가혜가 전화를 받았다.“서유야, 어떻게 된 일이야? 송사월이 왜 우리 집 앞에 있어?”서유가 말하기도 전에 정가혜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설마 5년 만에 복수하러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서유는 김시후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가혜야, 복수하러 온 것이 아니야.”서유는 회사에서 김시후를 접대하라고 한 일을 정가혜에게 말해줬다. 계단 어귀에 숨어 있던 정가혜는 그제야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런...’그리고 문 앞을 지키고 김시후를 슬쩍 쳐다보았다.“서유야, 그런데 얘가
“가혜 누나...”김시후가 울먹이며 외치는 그녀의 이름에 정가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정가혜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김시후가 아니라 송사월이라고 믿고 싶었다.그래서 그가 예전처럼 자신을 불렀을 때 정가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충혈된 김시후의 눈을 차갑게 바라봤다.예전에 정가혜는 서유를 데리고 부산으로 가서 김시후를 찾은 적이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김시후의 경호원에게 쫓겨났다.그 후 정가혜는 서유의 권유로 서울로 돌아갔고 김씨 가문 사람들로부터 사진을 뺏겼다. 당시 셋집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어렵게 모은 돈으로 산 가구들도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하지만 정가혜를 더욱 실망하게 한 것은 김시후가 서유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정가혜는 이런 일들을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 다시 김시후를 만났을 때 쌓여왔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죄송해요...”그는 용기를 내어 끝내 이 말을 뱉었다. 5년 늦은 사과였다. 또한 늦은 사과 때문에 그들은 5년이란 시간을 낭비하였다.“그 말은 서유한테나 해.”그가 가장 미안해야 할 사람은 서유이지 정가혜가 아니었다.“누나한테도 미안하고 서유한테도 미안해요...”그는 중얼거리면서 무의식적으로 정가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울먹거리면서 말했다.“서유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서유에게 할 말이 있어요.”비록 정가혜는 김시후를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도대체 어디가 이상한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그의 손을 밀쳐 버렸다.“며칠 뒤 찾아오겠다고 했으니 할 말 있으면 그때 다시 해.”“아니에요. 서유는 이승하에게 끌려갔어요. 이승하는 서유를 돌려보내지 않을 거예요.”이승하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는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서유가 몸을 팔아 자기를 구한 것을 알았지만 서유를 산 사람이 바로 이승하인 줄은 몰랐다.만약 이승하가 그날 자기 손에서 서유를 빼앗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이승하는 김시후보다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정가혜의 말은 김시후에게 치명타였다.“매번?”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충혈된 눈으로 정가혜를 바라보았다.“5년 동안... 서유가 계속 이승하와 함께 있었어요?”“그래.”그녀의 덤덤한 한마디가 비수처럼 김시후의 마음에 꽂혔다. 그는 서유가 한 번만 몸을 팔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승하와 5년 동안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어쩐지 이승하가 서유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소유욕으로 가득했다.‘두 사람이 5년 동안이나 함께 있었네.’김시후는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서유를 15년 동안이나 좋아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차에 치여 죽을지언정 그녀가 몸을 팔아 그를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서유가 다른 남자 품에 누워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래서 김시후는 서유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비난했다.한 번도 감당하기 힘든데 5년이라니...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끼고 사랑했던 서유가 이승하와 5년...순간 그의 심장이 경련하듯 움츠러들었고 팔다리까지 아파지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갑자기 쓰러진 김시후를 보고 놀란 정가혜는 얼른 경비원을 불러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김시후가 안정을 되찾은 뒤 그녀는 병원에서 나왔다. 이미 날이 저물었다. 정가혜는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 서유에게 문자를 보냈다.[서유야, 가능한 빨리 병원으로 와서 송사월을 만나봐. 뭔가 중요한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유는 문자를 받고 긴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급하게 자기를 찾는 이유는 뭘까?그녀는 자기 몸 상태를 살펴보았는데 비록 특효약을 썼지만 단기간에 그렇게 빨리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등에 새로 생긴 상처는 조금만 움직여도 뼈가 저릴 만큼 아팠다. 당장이라도 병원으로 가고 싶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았다.서유는 한참 고민하다가 답장했다.[알았어. 노력해 볼게.]그리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주삿바늘을 빼주고 있는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하루
서유는 상처가 조금 낫고 걸을 수 있게 되면 그때 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승하가 먼저 입을 열었으니 이 기회에 말하려고 하였다.“급한 일로 저를 찾는 것 같아서요. 대표님께서 저를 그쪽으로 데려다주실 수 있어요?”“그렇게 급해?”이승하는 우월감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과 매서운 눈빛은 조명 아래서 보는 이들을 떨리게 하였다.“네.”서유는 그런 이승하를 두려워했지만 고개를 끄덕이었다. 김시후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이승하와 연지유는 곧 약혼하게 된다. 서유가 그의 집에서 묵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이승하의 지나친 다정함에 잠시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약혼한 남자와 더 이상 엮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유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은 너무 초조했다.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눈치였다. 이승하는 이런 서유를 보자 바로 전에 복잡한 감정들이 점점 사라지고 대신 더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못 본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그렇게 보고 싶어? 다시 불같이 뜨거워졌어?”이승하가 비아냥거렸지만 서유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불쾌한 표정을 감추려 하였다. 서유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승하의 얼굴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는 점점 더 힘을 가해 서유의 턱을 잡았다.“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도대체 왜?”서유는 아픔을 꾹 참고 이승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저는 대표님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잠자리하고 애인인 척해줄 수 있어요. 그런데 왜 그 사람과 다시 만나면 안 되는데요?”첫마디에 상처받은 건지 아니면 뒤의 말에 당황한 건지 이승하는 말문이 막혔다. 서유는 슬쩍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반짝이던 그의 차가운 눈빛은 어느새 사악하게 변했다.서유는 갑자기 움찔하더니 혹시 그를 좋아하는 자기 속마음이 드러날까 봐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었다.이때 이승
그 도도한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자 서유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승하와 사이가 틀어지면 그가 사람을 보내 자기를 돌려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태현에게 그녀를 잘 돌보라고 했다.그리고 이승하는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마치 그녀를 완전히 잊은 듯했다. 주서희는 서유에게 며칠 동안 심부전을 치료하는 특효약을 먹어줬고 그러자 그녀의 몸은 점차 회복되었다.서유는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는 것만으로도 쓰러질 것 같았다. 주서희는 특효약이 통증을 완화할 수 있지만 목숨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서유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다. 그 누구도 구할 수 없었다.서유가 욕실에서 벽을 짚고 나올 때 주서희는 의료기구를 치우고 있었다. 주서희는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서유를 보자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였다.“서유 씨, 억지로 버티지 말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세요. 이러다가 큰일나요...”“괜찮아요.”서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주서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러다 대표님께 들키실 겁니다.”서유는 입술을 깨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그래서 말인데요... 주 선생님, 저를 데리고 떠나주세요. 여기를 떠나고 싶어요.”하지만 주서희는 난감하다는 듯 대답했다.“대표님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서유 씨를 데리고 떠날 수 없을 겁니다.”서유는 주서희를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않고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침대에 앉았다. 주서희는 물컵을 들어 서유에게 건네며 말했다.“아직 먹은 게 없을 텐데. 물이라도 좀 마셔요.”심부전 말기 환자는 음식을 많이 먹으면 위에서 출혈이 일어나기 쉬우므로 물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물도 마시지 못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죽음에 이른 것이다.서유는 물을 받고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하려다가 얼굴에 난 긁힌 자국을 보았다.“서희 씨, 얼굴에 상처...”방
서유는 쭈그리고 앉아 침대에 머리를 기대며 멍을 때렸다. 그때 눈 부신 헤드라이트가 창문에 반사되었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차 소리가 들렸고 코닉세그 한 대가 별장 입구에 멈춰 섰다.우산을 쓴 경호원이 뒷좌석 문을 열자 190cm 되는 남자가 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는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면서 차갑게 말했다.“들어오지 못하게 해.”경호원은 “네”라고 대답하고 그 남자를 별장으로 모셨다. 그리고 경호원은 돌아서서 대문 밖의 철문으로 향했다.서유는 창문 앞에 서서 경호원이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 봤더니 어떤 남자가 서있는 것 같았다. 너무 멀리 있고 게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아 서유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힘든 몸을 가누며 벽을 짚고 아래층 쪽으로 걸어갔다. 이승하는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싶다고 말하려고 해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오늘 이승하가 드디어 돌아왔으니 서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이승하는 막 외투를 벗어 도우미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서유가 내려온 것을 보자 그의 얼굴색은 갑자기 어두워졌고 보기 흉하게 변했다.하지만 서유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얼른 마중 나갔다.“대표님...”그녀는 이승하와 몇 마디 나누고 싶었지만 그는 그녀를 쳐다도 보지 않고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문전박대를 당한 서유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무슨 뜻이지?’서유를 집에 데려왔지만 대꾸도 안 하고 심지어 눈치를 주고 있다. 서유가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서유는 아예 이승하와 떠날 거라고 말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따라다니는 주태현을 보면서 생각을 다시 접었다. 이승하의 허락이 없으면 주태현, 도우미들과 경호원들은 계속 그녀를 주시할 것이다.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서유는 이를 악물고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린 후에야 욕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서유는 얼른 일어나 걸어갔다.“대표님, 며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