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숨을 고르고 구승훈의 손을 떼어낸 뒤 대답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친자 확인 검사 어떻게 된 거야?”방금 전 아래층에서 진시연의 행동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구승훈이 웃었다.“궁금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궁금하다고 말하면 이 남자가 분명 조건을 내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순간 입가에 차오른 말을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구승훈은 애써 입을 열지 않으려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런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건가.구승훈은 입안의 씁쓸함을 털어내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너랑 삼촌이 피를 뽑고 나서 내가 샘플을 연성으로 보냈어. 연성에서 친자 확인 검사를 했고 이곳 병원에 있는 건 두 사람 피가 아니야.”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이렇게 말했다.“고마워.”구승훈은 고맙다는 그녀의 말에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그는 눈을 내리깔고 강하리를 바라보며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난 그냥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강하리는 숨이 턱 막혀서 한참 후에야 말을 꺼냈다.“내려가서 연정이랑 놀고 있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가 돌아서서 문을 닫으려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들어와 그녀를 문에 밀쳤다.“구승훈, 뭐 하는 거야?”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그대로 입맞춤을 했다.강압적이면서도 애증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몸부림쳤지만 구승훈은 더 단단히 옭아맬 뿐이었다.남녀의 힘의 차이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강하리는 화가 나서 그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지만 구승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더 깊게 입을 맞췄다.강하리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때쯤 구승훈은 마침내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하며 구승훈의 잠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나 보고 연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지? 갈게.”강하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구승훈이 깊은 눈빛을 보냈다.“한 달 줄게, 하리야. 한 달 안에 주해찬이 회복하면 나도 별말 하
구승훈은 낮게 웃었다.“어느 아가씨? 이젠 너도 그 집안 아가씨 아니야?”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 구승훈을 밀어냈다.“내려가. 괜한 오해 사고 싶지 않아.”구승훈은 어떠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지그시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결국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나 없는 동안 조심해.”멈칫한 강하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구승훈은 이미 뒤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닫힌 문을 바라보는 강하리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찼다.분명 구승훈에게 떠나라고 한 건 그녀인데 지금은 오히려 미련이 생겨났다.피식 웃음이 났다.자신을 괴롭히는 건지, 그를 괴롭히는 건지.강하리는 위층에 오래 머물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식탁에서 진태형과 구승훈이 연정이와 놀아주고 있었다.진시연은 이미 갔는지 거실과 식당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강하리도 더 묻지 않고 부엌으로 향했다.그녀가 다가오자 움찔하던 진태형이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야, 저녁 먹고 나랑 같이 진씨 가문으로 가자, 알았지? 집에 계신 할머니가 네 존재를 아시고 널 보고 싶다고 눈물까지 흘리셔.”침묵을 지키던 강하리는 사실 다소 어색했다.아빠라는 호칭이 너무 낯설고도 가까워서 한동안 진태형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진태형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드물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면 적응할 시간이 더 필요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괜찮아요, 오늘 가요.”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와 할아버지 다 좋은 분들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그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어요.“걱정하지 마세요.”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진시연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구승훈이 옆에서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버님, 진시연 씨 일은 어떻게 처리하실 건가요?”강하리는 멈칫하며 구승훈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아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빠라고 불렀어도 아직은 그녀조차 입 밖에 내기도 어려운 호칭을 이
구승훈은 대답 없이 눈동자만 어두워졌다.요즘 들어 무척 느낌이 이상했다.특히 강하리가 석미란의 말에 동의했다는 걸 알고 다소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웠다.지난 이틀 동안 최선을 다해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짜증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휴대폰으로 노민준이 보낸 메시지를 내려다보았다.[원래 쓰던 약이 네 증상에 효력을 잃어가고 있어. 약을 다시 만들어야 해.]구승훈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쓸었다.잠시 후, 그는 별장 입구에 서 있는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선을 바닥으로 보낸 채 말했다.“가자.”준봉은 차의 시동을 걸면서 백미러로 힐끗 살폈다.뒷좌석에서 구승훈은 눈을 감고 있었고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조금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준봉은 그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대표님, 정말 강하리 씨한테 말 안 하실 거예요?”구승훈의 눈꺼풀이 살짝 들리더니 잠시 후 그가 가벼운 웃음을 내뱉었다. “말해봤자 걱정만 할 텐데.”준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말했다.“말조심해.”구승훈은 비행기에서 내려 곧장 노민준에게 향했고 노민준은 구승훈 앞에 약학 보고서 몇 장을 내밀었다.“보면 알 거야. 원래 약이 이젠 효과가 없어.”구승훈은 슬쩍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새 약을 짓는 데 얼마나 걸려?”“일주일 정도.”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노민준의 방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구승재가 도착해 있었다.구승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준봉을 바라보았고 준봉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대표님, 셋째 도련님께서 자꾸 물어보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구승재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형, 이렇게 큰일을 왜 나한테 숨겼어?”구승훈은 어두워진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다.“너한테 말해서 뭐가 달라지는데?”구승재는 할 말을 잃었다.“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단 낫지.”구승훈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여초연
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피식 웃더니 진시연의 손을 뿌리쳤다.“할아버지, 할머니, 전 오후에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곧장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진태형이 그녀를 붙잡았다.“기다려, 아빠가 데려다줄게.”진태형은 침울한 눈빛으로 진시연을 바라보았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왜 하리가 널 이렇게 대하는지 할아버지, 할머니께 직접 말씀드려. 시연아, 내가 보고 싶은 건 네 진심 어린 사과지,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니야.”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 뒤 안쓰러운 마음에 강하리의 어깨를 감싸주었다.“아빠가 미안해.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강하리가 웃었다.“괜찮아요. 두 어르신께 저는 그저 낯선 사람일 뿐이니까요.”미간을 찌푸린 진태형은 허리를 굽혀 강하리와 시선을 맞추었다.“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하리야. 넌 미현이와 내 딸이고 나한테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 알겠어?”강하리는 코끝이 시큰거리며 고개를 들어 진태형의 시선을 마주했다.“고마워요, 아빠.”진태형은 몸을 일으켜 강하리를 품에 안았다.“이제 그만 울어, 우리 공주님.”강하리는 그의 말 한마디에 오히려 눈물이 더 세게 흘렀다.그 시각 별장에 있던 이정숙은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이게 무슨 태도야? 들어와서 딱 한 마디만 하고 가는 거야? 심미현이 딸을 이렇게 키웠어?”진강석은 얼굴을 찡그리며 진시연을 바라보았다.“시연아, 대체 무슨 일이야? 네 아빠랑 강하리한테 뭐 잘못한 거야?”진시연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할머니, 전 그냥 아빠가 저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이정숙은 순간 마음이 아팠다.“바보야, 네 아빠가 널 왜 버려. 걔가 그러면 내가 때려주마!”진시연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차를 타지 않고 진태형과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진태형은 가는 길에 계속 심미현에 관해 물었고 부녀는 드물게 긴 대화를 나눴다.강하리를 심씨 가문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진태형이 물었다.“아빠랑 같이 살래?
가만히 서 있는 남자는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상반신에는 검은색 셔츠를 입었는데 셔츠 밑단을 바지에 넣지 않은 채 넓은 어깨와 얇은 허리를 자랑했다.일주일 정도밖에 못 봤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태연하게 손을 뺐다.“불편한 데 없으면 됐어요.”주해찬의 눈에 잠시 상실감이 스쳐 지나갔고 구승훈을 보는 순간 무력감으로 바뀌었다.굳이,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나타날 게 뭐람.그동안 강하리는 무척 바빴다.외교부와 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업무는 기본적으로 그녀가 직접 처리해야 했기에 병원에 올 시간도 많지 않았고 오더라도 아주 잠깐 다녀갈 뿐이었다.가끔 석미란이 있을 때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지도 않았다.겨우 오늘 강하리와 시간을 보내며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려 했는데 저 남자가 나타났다.주해찬은 다소 무력하게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구 대표님.”하지만 구승훈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시선을 강하리에게 고정하고 있었다.강하리는 잠시 입술을 다물다가 시선을 거두었고 주해찬은 그녀가 시선을 돌린 뒤에야 무심하게 주해찬을 바라볼 뿐이었다.“주해찬 씨, 좀 괜찮아요?”주해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구 대표님이 걱정해 주신 덕분에 훨씬 나아졌어요.”구승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피우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걸으면서 손에 든 담배꽁초를 근처 쓰레기통에 휙 튕겨 넣었다.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보니 구승훈의 눈동자가 한층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강하리는 주해찬이 휠체어에 앉아있는 것만 아니면 이 남자가 당장에 주먹을 휘둘렀을 거라 의심치 않았다.문득 강하리는 전에 구승훈이 주해찬과 거리를 두지 않으면 그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이 떠올라 무의식적으로 주해찬의 앞을 막았다.“구승훈, 뭐 하려고?”구승훈은 그녀의 행동에 걸음을 멈추었고 눈빛도 덩달아 어두워졌다.가까이 다가간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아무것도 안 해.”낮은 목소리에는 불쾌함을 드러내듯 약
“구 대표님은 늘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매달리나 봐요?”구승훈이 담배에 불을 붙이자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며 눈가의 서늘함을 가렸다.“주해찬 씨, 최근 치료 결과에 대해 하리한테 말했나요?”주해찬의 미소가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평소 모습대로 돌아왔다.“구 대표님께서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하리는 제 주치의와 계속 연락하고 있고 제 치료 결과에 대해선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을 텐데요.”구승훈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다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높이 들어 올리자 재가 주해찬의 다리 바로 위에 떨어졌다.“주해찬 씨, 만약 재가 아니라 이 담배꽁초가 떨어졌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휠체어에 앉은 주해찬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이내 그가 피식 웃었다.“기껏해야 화상을 입겠죠. 하지만 전 다리에 감각이 없어요. 구 대표님께서 화상을 입혀도 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으니 실망스러우시겠어요.”구승훈이 차갑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손에서 튕기자 주해찬의 다리를 스치면서 옆의 쓰레기통에 떨어졌다.주해찬의 얼굴이 굳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구승훈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구 대표님, 뭘 의심하고 계신 거죠?”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고 주해찬이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전 그 정도로 비열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랬으면 좋겠네요.”구승훈은 무심하게 한 마디를 뱉어낸 뒤 고개를 들어 입원 병동 밖으로 걸어 나오는 강하리를 바라봤다.강하리가 다가오자 주해찬은 바로 입을 열었다.“하리야, 나 들어가고 싶어.”강하리는 멈칫하다가 구승훈을 바라봤다.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것 같았다.구승훈은 그저 눈썹을 치켜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보고 싶었어.”강하리는 그를 흘깃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휠체어를 잡고 말했다.“일단 선배 데려다주고 올게.”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리지 않았다.전에 말했던 것처럼 한 달 동안 시간을 주는 거다.주해찬은 조용히 감정을 주고받는 두 사람
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나을 거예요.”짧은 그녀의 한마디에 주해찬이 뭐라고 얘기하려던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강하리가 그를 밀어주며 밖으로 나왔을 때 석미란의 모습이 보였다.강하리가 발걸음을 멈추자 주해찬이 입을 열었다.“넌 먼저 돌아가.”강하리는 저쪽의 석미란을 바라보면서 거절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내일 또 올게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직접 휠체어를 밀며 병동으로 향했다.석미란은 주해찬을 보자마자 서둘러 달려갔다.“어디 갔었어?”주해찬은 미소를 지었다.“잠깐 나갔다 왔어요.”석미란이 콧방귀를 뀌었다.“오늘 강하리 왔어?”주해찬은 곧바로 휠체어를 멈춰 세웠다.“엄마, 내가 잘되길 바란다면 앞으로 하리 힘들게 하지 마세요.”석미란은 순간 기분이 상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병동으로 돌아와서야 주해찬에게 다가와 그녀가 속삭였다.“해찬아, 너 그거 알고 있었어? 강하리가 진태형 딸이래.”주해찬은 당황했다.“몰랐어요.”석미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저 망할 년이 심씨 가문 사람인 것도 모자라 진태형 딸이래. 해찬아, 붙잡을 방법 있어? 쟤만 붙잡으면 앞으로 네가 외교부에서 승승장구하지 않겠니?”주해찬은 고개를 돌려 석미란을 바라보았다.“전 그런 비열한 수단은 쓰지 않아요.”석미란이 그 말을 듣고 서둘러 뭐라고 덧붙이려는데 주해찬은 이미 휠체어를 끌고 창가로 다가간 뒤였다.창문 너머로 아래층에 있는 강하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강하리를 붙잡을 방법을 찾겠지만 그게 그녀의 신분 때문은 아니었다.그의 앞날은 스스로 노력해서 쟁취해도 되지만 강하리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였다.주해찬은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하리야, 날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강하리는 병동에서 나와 곧장 자신의 차로 향했다.차에 도착하자마자 조수석에 앉아 있는 구승훈을 발견했다.구승훈은 극도로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강하리가 다가가는 순간 그 빨갛
구승훈은 여전히 두 눈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서늘함이 배가 되었다.“손 말고 또 어디를 만진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 한 달 동안 시간 주기로 했잖아.”구승훈은 부드럽게 웃었다.“나도 말했잖아, 그 자식이랑 멀리하라고. 하리야, 너도 내가 주해찬한테 손대는 건 원하지 않잖아. 안 그래?”강하리는 눈가에 분노가 가득 찬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이렇게 말했다.“오늘은 어쩔 수 없었어.”구승훈이 그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주해찬은 너에 대한 마음 접은 적 없어. 하리야, 넌 주해찬이 그렇게 착한 사람으로 보여?”강하리는 그와 눈을 마주했다.“구승훈, 약속은 지켰으면 좋겠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손을 빼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내려.”구승훈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기대어 앉았다.“내 딸 보러 갈 거야.”강하리는 그를 슬쩍 보고 차를 출발시켰다.두 사람은 가는 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가 차를 세우고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그의 짙은 다크써클에 시선이 갔다.구승훈은 그새 많이 야위어 있었다.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매번 그녀가 물어볼 때마다 남자는 그저 말을 돌리기 바빴다.강하리는 시선을 돌리고 좌석에 몸을 뒤로 젖히고는 차에서 내리지도, 구승훈을 깨우지도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뒷좌석에서 담요를 가져왔다.구승훈은 많이 피곤했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긴장이 풀린 건지 담요를 덮어줘도 깨지 않았다.강하리는 한동안 침묵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구승훈의 속눈썹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강하리가 심호흡하며 차에서 내리려는 찰나 뒤에서 남자의 손이 감겨와 허리를 감쌌다.“잠깐만 나랑 같이 있어 줘.”구승훈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잠깐만.”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한참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구승훈은 낮은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
구승훈은 걸음을 멈칫하며 뒤돌아 밖을 내다보았다.밖에서는 여전히 이정숙이 진시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화가 잔뜩 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승훈은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그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가상의 번호로 전송된 사진은 다름 아닌 강하리와 주해찬이 방에서 포옹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사진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걸었다.“나문빈 씨, 가상 번호 위치 좀 확인해 줘요.”나문빈은 혀를 찼다.“둘이 날 노예처럼 부려 먹기로 작정한 겁니까?”얼마 전 임명우와의 계약 때문에 화가 난 강하리는 그를 남미로 발령 보내 시장 개척에 앞장서도록 했고 며칠 동안 그는 바빠서 피를 토할 지경인데 이젠 구승훈까지 못살게 굴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아내를 화나게 했습니까?”나문빈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임명우가 특별히 강하리와 만나야한다는 조건을 걸었으니 분명 딴마음이 있다는 건데 이걸 구승훈이 알게 되면 그에게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흠, 그 번호 보내요. 이런 작은 일은 구 대표님께서 직접 연락할 필요 없이 앞으로 비서 통해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그렇게 말한 뒤 나문빈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나문빈과의 통화를 마친 뒤 고개를 들어 진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마침 고개를 돌린 진시연의 두 눈엔 억울함이 가득 차 있었고 구승훈의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진시연이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얼굴에 남아있던 서글픈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누구나 소유욕이 있다.특히 구승훈 같은 남자는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껴안고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지금은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 일은 그의 마음속 가시로 박히게 될 것이고 진시연은 이 가시가 뿌리를 내리고 썩기만을 기다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씨 가문 생일 잔치에서 벌어진 소동은 B시 전역에 퍼졌다.심씨 가문 사람들도 자연
“여사님, 못 때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아니면 지금쯤 구급차 부르셔야 했을 거예요. 제 주먹 맛보고 싶지는 않으시겠죠?”이정숙은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혔다.“구승훈, 언제부터 네가 우리 진씨 가문 일에 참견했어?”구승훈은 혀를 차며 강하리의 손을 잡아당겨 이정숙 앞에 내밀었다.“보셨죠? 결혼반지. 강하리는 이제부터 제 약혼녀입니다.”구승훈의 말에 이정숙이 당황했고 옆에 있던 진시연은 우는 것도 잊은 채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이정숙은 구승훈에게 말이 통하지 않자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하리, 난 네 할머니야!”강하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나한테 약이나 먹이는 할머니 따위 둔 적 없어요.”이정숙은 깜짝 놀라며 진시연을 흘끗 쳐다보았고 진시연이 달려와서 이정숙의 앞을 막았다.“하리 씨, 어떻게 할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강하리가 비웃었다.“진시연 씨 대신 죄도 뒤집어쓰는데 나는 말도 한 마디 못 하나요?”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리 씨, 지금 나 의심하는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피식 웃었다.“아빠도 날 의심하고 하리 씨도 날 의심하네요. 두 사람은 진짜 부녀 사이고 전 그저 사랑하고 돌봐줄 사람이 없는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냥 나를 진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싶은 거죠? 내가 나갈게요.”이정숙은 그 말에 서둘러 진시연을 껴안았다.“시연아, 그런 말 하지 마.”강하리는 눈꼴신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을 지나쳐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누구든 가만 안 둬요.”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시연을 돌아보았다.“그리고 진시연 씨, 앞으로 내 남자한테서 떨어져요. 매번 남의 약혼자한테 들러붙는데 내연녀라도 되고 싶은 거예요?”진시연의 얼굴이 창백했다.“하리 씨, 아니에요. 난 그저 F대륙에서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사람이라 구승훈 씨한테 고마울 뿐이에요. 하리 씨는 이 정도 일도 이해 못 해주는 건가요?”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미안한데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