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여전히 두 눈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서늘함이 배가 되었다.“손 말고 또 어디를 만진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 한 달 동안 시간 주기로 했잖아.”구승훈은 부드럽게 웃었다.“나도 말했잖아, 그 자식이랑 멀리하라고. 하리야, 너도 내가 주해찬한테 손대는 건 원하지 않잖아. 안 그래?”강하리는 눈가에 분노가 가득 찬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이렇게 말했다.“오늘은 어쩔 수 없었어.”구승훈이 그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주해찬은 너에 대한 마음 접은 적 없어. 하리야, 넌 주해찬이 그렇게 착한 사람으로 보여?”강하리는 그와 눈을 마주했다.“구승훈, 약속은 지켰으면 좋겠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손을 빼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내려.”구승훈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기대어 앉았다.“내 딸 보러 갈 거야.”강하리는 그를 슬쩍 보고 차를 출발시켰다.두 사람은 가는 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가 차를 세우고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그의 짙은 다크써클에 시선이 갔다.구승훈은 그새 많이 야위어 있었다.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매번 그녀가 물어볼 때마다 남자는 그저 말을 돌리기 바빴다.강하리는 시선을 돌리고 좌석에 몸을 뒤로 젖히고는 차에서 내리지도, 구승훈을 깨우지도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뒷좌석에서 담요를 가져왔다.구승훈은 많이 피곤했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긴장이 풀린 건지 담요를 덮어줘도 깨지 않았다.강하리는 한동안 침묵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구승훈의 속눈썹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강하리가 심호흡하며 차에서 내리려는 찰나 뒤에서 남자의 손이 감겨와 허리를 감쌌다.“잠깐만 나랑 같이 있어 줘.”구승훈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잠깐만.”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한참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구승훈은 낮은
강하리는 구승훈의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적어도 한 달 동안은 구승훈과 정상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어쨌든 주해찬이 깨어났고 돌봐주든 곁에 있어 주든 그와 함께 있어야 했기에 구승훈의 성격상 계속 그녀의 곁에 있다 보면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줄곧 구승훈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강조했었는데 지금 구승훈의 피곤한 눈빛을 보니 왠지 모르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오늘 밤은 소파에서 자.”말을 마친 강하리는 그를 밀어내고 차에서 내렸다.구승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이 여자가 독할 땐 참 독한데 마음이 약해지면 참 쉽게 속아 넘어간다.원래 그도 그녀와 거리를 두고 싶었지만 주해찬이 자꾸 수작을 부리니 다른 남자가 자기 여자에게 손대는 걸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별장 안에서 진태형은 연정이를 안고 드레스 입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까르르 웃는 걸 보니 연정이는 드레스가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진태형은 연정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맘에 들어? 마음에 들면 할아버지가 또 사줄게.”연정이가 까르르 웃으며 진태형을 끌어안고 얼굴에 침을 잔뜩 묻히며 깨물었다.하지만 진태형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크게 웃었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이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진태형은 강하리를 뒤따라오던 구승훈을 보고는 웃던 얼굴이 굳어버렸다.그런데 정작 구승훈은 친아버지를 만난 듯 살갑게 불렀다.“아버님.”진태형의 입꼬리가 눈에 띄지 않게 파들 떨리더니 속으로 중얼거렸다.‘망할 자식.’품에 안겨 있던 연정이는 구승훈을 보자마자 잔뜩 신이 나서 구승훈에게 안아달라며 조르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진태형의 굳은 표정을 못 본 듯 곧장 다가와 연정이를 안아주었다.연정이가 치마를 끌어 올리며 구승훈에게 옹알이하는 걸 보니 새 치마를 자랑하는 게 분명했다.강하리는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의 모순과 엉킨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
진태형이 한숨을 쉬더니 손을 들어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바보야, 아빠는 하나도 힘들지 않아.”심미현을 지키지 못했으니 딸이라도 무슨 수를 쓰든 지켜야만 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문 채 미소를 지었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승훈의 시선은 살짝 흔들렸다.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구승훈은 강하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으로 끌어당겼다.“강 대표님, 이사 갈 생각은 없어?”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밀어냈다.“구승훈, 여기서 자고 싶으면 함부로 손대지 마.”구승훈은 못 들은 척했다.“나가 살자, 응?”강하리는 다소 격앙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목덜미에 비비적거렸다.“한 달 후에 나가 살자. 난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강 대표님, 안 될까?”남자의 말투엔 애교까지 담겨 있었고 강하리는 그런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이 개자식은 대체 어쩌면 이렇게 뻔뻔하게 애교를 부리는 걸까.여자인 자신도 그런 말투로 말하지 못하는데 남자가 어떻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런 말을 뱉는지.강하리는 씩씩거리며 남자를 밀쳐냈다.“둘만의 시간은 무슨. 연정이는 어떡하고?”구승훈이 눈썹을 치켜들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아버님께서 연정이 무척 예뻐하시던데 며칠 같이 지내게 하면 아주 좋아할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귀에 대고 말했다.“자기야, 우리 안 한 지 너무 오래돼서 그때 가서 내가 널 괴롭히면 연정이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 같은데.”강하리의 머릿속이 윙윙거렸다.이 개자식은 하루 종일 이런 생각밖에 안 하는 걸까.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갑자기 방문이 열렸고 문 앞에 서 있던 백아영이 순간 당황하다가 이내 뒤돌아 가버렸다.강하리는 황급히 구승훈을 밀어내고 화장실로 향했다.화장실에서 강하리는 거울 앞에 서서 다소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거울 속 여자의 뺨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눈꼬리까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녀의 손가락은 꽉 말아쥐었다.조금 전 구승훈의 크지도 작
휴대폰 벨 소리에 강하리는 번뜩 정신이 들어 구승훈을 밀어낸 뒤 그를 노려보고는 휴대폰을 꺼냈다.주해찬.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고 그녀가 나지막이 불렀다.“선배.”곧 구승훈의 키스가 다시 그녀를 덮쳐왔다.깜짝 놀란 사이 구승훈이 이로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전화 받아야지, 자기야.”구승훈의 목소리에 약간 비릿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마치 복수를 하려는 듯 그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완전히 감추지는 않았다.주해찬이 들을까 봐 걱정하면서도 일부러 듣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셔츠 단추를 뜯어내며 쇄골부터 아래로 키스를 이어갔다.큰 손이 그녀의 허리를 타고 아래쪽으로 향했다.강하리는 몇 번 힘겹게 몸부림쳤지만 감히 큰 소란을 피우지는 못했다.전화기 너머 주해찬도 구승훈의 목소리를 듣고 멈칫했다.“하리야, 통화 가능해?”그동안 주해찬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거의 하지 않았고 강하리는 그가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그녀는 구승훈을 밀어내며 말했다.“선배, 말해요.”그런데 그녀의 말을 들은 구승훈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거침없이 손을 밀어 넣었다.“하리야, 오늘 간병인이 일이 있다고 해서 오늘 밤에 와줄 수 있...”“네, 구승훈...!”주해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가 비명을 질렀고 주해찬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그제야 그는 전화기 너머 미심쩍은 상황이 벌어진다는 걸 알았고 구승훈은 앞으로 다가와 강하리의 귓불을 깨물었다.“기분 좋아, 자기야?”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발을 들고 구승훈을 걷어찼다.하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발목을 잡은 뒤 온몸으로 강하리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강하리는 서둘러 주해찬에게 말을 건넨 뒤 전화를 끊었고 끊자마자 구승훈이 다시 입을 맞춰왔다.강하리는 거침없이 그의 입술을 콱 깨물었고
“하지만 앞으로 또 이런 짓을 한다면...”구승훈은 강하리를 품에 안았다.“또 이러면 앞으로 매일 샤워하고 잠자리에 드는 거 내가 다 도와줄게, 어때?”그의 말에 강하리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자존심도 없어?”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에 입맞춤했다.“진작 버렸어.”“...”그녀는 구승훈을 밀어내고 옷을 정돈한 뒤 밖으로 나갔다.주해찬과 이미 약속했으니 그건 지켜야 했다.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물었다.“병원으로 가?”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방금 전화하는 거 들었잖아.”구승훈은 콧방귀를 뀌었다.“주씨 가문은 간병인 하나 구하지 못할 정도로 돈이 없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사실 그녀도 주해찬이 일부러 부른다는 걸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애초에 그녀가 약속한 일이었다.“최대한 거리 둘 거야.”구승훈은 믿지 않았다.주해찬은 줄곧 그녀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녀를 불러낸 이상 절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인간이 아니었다.“내가 데려다줄게.”구승훈은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강하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래층으로 내려가 백아영에게 말을 전한 뒤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려 했다.백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강하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할머니, 왜 그러세요? 연정이 돌보기 불편하세요?”백아영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불편한 건 아니고, 그냥...”그녀는 구승훈을 슬쩍 보고는 이내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조심히 가.”강하리는 그녀가 더 말하지 않자 굳이 묻지 않았다.차에 도착해서야 강하리의 휴대폰이 울렸다.[하리야, 제왕절개 후 3년 안에 임신하면 안 돼. 피임 잘해.]강하리는 백아영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 얼굴이 타는 듯이 화끈거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노려보았고 구승훈은 살짝 당황했다.“왜 그래? 아직도 화났어?”하지만 강하리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이 곧장 손을
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차 문에 기댄 채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이는 남자의 얼굴은 차갑고 어두웠다.준봉이 어디선가 나타나 구승훈 옆에 섰다.“주해찬 상황은 확인했어?”구승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묻자 준봉은 고개를 끄덕였다.“감각이 돌아온 건 맞지만 일어서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의사 측에서는 주해찬 씨가 특별히 강하리 씨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해서 매번 물어볼 때마다 둘러대며 넘어간 것 같습니다. 검사도 강하리 씨가 없을 때만 진행하고요.”구승훈은 침울한 눈빛으로 담뱃재를 툭툭 털어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번에는 주해찬이 자신과 강하리 사이에 끼어들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대표님, 그냥 강하리 씨한테 말하지 그래요? 주해찬이 자기 몸 상태를 이용해 강하리 씨를 곁에 붙잡아두려는 거잖아요.”구승훈은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주해찬이 강하리에게 숨길 생각이라면 끝까지 숨기게 둘 거다.나중에 어떻게 수습할지 두고 볼 심산이었다.“지금은 말하지 마. 의사 지켜보다가 적절한 시기가 되면 사실대로 털어놓게 만들어.”준봉이 서둘러 대답했다.구승훈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입원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강하리는 입원 병동에 들어섰지만 바로 주해찬의 병실로 향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입력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구승재는 강하리로부터 전화를 받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왜 전화하셨어요?”“보고 싶어서요. 안 돼요?”구승재는 멈칫하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절대 형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고 구승재는 곧바로 연정이에 관해 물었다.“연정이 보러 가도 돼요?”강하리가 웃었다.“물론이죠.”이렇게 말한 후 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었다.“구승재 씨, 요즘 그쪽 형 왜 그러는지 알아요?”사실 구승훈의 말을 믿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가 여전히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내뱉었다.이 여자를 어떡하면 좋을까.그렇게도 그를 믿지 못하는 건가.하지만 구승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구승재에게 지시한 뒤 전화를 끊었다.강하리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서도 계속 휴대폰을 바라보았다.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원래는... 오늘 밤 그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는데 주해찬 때문에 또다시 버리고 왔다는 생각에 문득 죄책감이 밀려왔다.이건 그녀가 구승훈에게 잘못한 게 맞았다.그녀가 옅은 숨을 내쉬며 전화를 걸려는 순간, 길고 가느다란 손이 엘리베이터 문을 막았고 곧이어 구승훈이 밖에서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강하리는 멈칫했다.“왜 또 왔어?”구승훈은 피식 웃었다.“왜일까? 자기야, 내가 한밤중에 널 다른 남자 곁에 둘 만큼 너그럽지 않잖아.”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구승재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하지만 막상 듣기 좋은 말로 남자를 달래려고 하니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오늘 밤에 또 안 잘 생각이야?”구승훈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지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강하리에게 다가왔다.“강 대표님이 날 재워 주시면 잘 수 있을 것 같은데.”강하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정말 재워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구승훈의 눈가에 머금은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강 대표님이 재워주시면 우리 둘은 같이 자겠지.”강하리는 발을 들어 그의 다리를 걷어차면서도 이렇게 말했다.“이따가 어디 가서 눈 좀 붙여.”구승훈이 그녀의 손가락을 가져와 빈틈없이 맞잡았다.“나랑 같이 잘 거야?”강하리는 그의 손아귀에서 자기 손을 곧장 빼냈다.“구승훈, 여기 병원이야.”이 개자식은 정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구승훈이 뭐라 말하려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강하리가 그를 노려보았다.“이따가 얌전히 있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주해찬의 병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그녀가
주해찬의 말이 나오자 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점점 더 살벌해지자 강하리는 심호흡하고 구승훈을 밀어냈다.“일단 여기서 기다려.”그런데 구승훈이 단번에 강하리의 손을 잡았고 미간을 찌푸린 강하리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구승훈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주해찬 씨는 간병인이 부족해요? 한밤중에 여자를 불러내 곁에 있어 달라네. 주씨 가문에서 간병인 하나도 못 구하면 내가 대신 10명이라도 구해드릴게요.”주해찬은 잠시 침묵했다.“이건 저와 하리 사이의 일이지 구 대표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강하리가 그의 입을 막았다.“됐어, 그만해!”구승훈은 멈칫하더니 놀랍게도 정말 입을 다물었다.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던 그는 마치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걸 알아달라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그를 노려보며 주해찬을 향해 걸어갔다.주해찬은 자연스럽게 구승훈의 입을 가리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가슴이 조금 씁쓸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그에겐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태도로 말한 적 없이 늘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이번에도 어머니의 역겨운 행동에도 그의 곁에 머물며 빚진 건 꼭 갚으려 하는 모습에 주해찬은 쓴웃음을 지었다.구승훈과도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따질까?강하리는 다가와 주해찬을 밀고 방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을 따라갔고 주해찬은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구 대표님께서는 제 간병인이 되어주시려고 남아 계시는 건가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못 할 것도 없죠. 주해찬 씨가 제 보살핌을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죠.”구승훈은 말하며 진짜로 행동에 옮길 기세로 다가왔다.“안아서 침대에 올려드릴까요?”주해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살짝 굳어지자 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로 밖으로 밀어냈다.구승훈은 방 밖으로 밀려나는 순간 바로 강하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난 진심으로 챙겨주려는 거야.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