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심준호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두 눈이 번쩍 뜨였다.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씨 가문에서 결혼이라도 주선하게?”심준호가 헛웃음을 지었다.“우리 집이 구씨 가문이랑 같은 줄 알아?”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조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러면 뭐야?”심준호는 한숨을 쉬었다.“주씨 가문에서 하리에게 주해찬을 책임지라면서 하리한테 주해찬과 결혼하라고 강요해.”구승훈의 가슴이 내려앉았다.“강하리는? 동의했어?”심준호의 눈빛이 번뜩였다.“비슷해.”구승훈은 숨이 턱 막혔다.“비슷하다는 건 무슨 말이야?”심준호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아이는?”구승훈은 품에 안겨 잠든 말랑한 아기를 바라보며 괜한 복수심에 심준호에게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삼촌, 제 아내 좀 지켜주세요. 주해찬은 조카사위로 적합하지 않아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화를 끊고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이륙까지 얼마나 남았어?”“한 시간도 안 남았어요.”대답한 준봉이 망설이며 다시 물었다.“대표님, 몸 괜찮으세요? 지금이라도 병원에...”구승훈이 그를 쳐다보았고 준봉은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삼켰다.“돌아가서 얘기해.”준봉이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네.”구승훈은 그를 바라보며 지시했다.“가서 아기 용품 좀 사와. 가는 길에 쓸 수 있게.”준봉은 당황했다.“대표님, 저는...”“노진우는 하는데 넌 못 해?”“... 할게요!”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고 그가 떠난 뒤에야 구승훈은 다리를 슥 만졌다.그러고는 잠시 후에야 혼자서 웃음을 터뜨렸다.“여초연 여사, 이대로 날 죽게 할 생각은 아니지?”반면 석씨 가문 자매는 심씨 가문에서 나오자마자 석미란이 석연란의 손을 뿌리쳤다.“왜 날 막아?” 석미란은 석연란을 노려보았다.석연란은 답답한 표정이었다.“어르신이랑 백아영 표정 못 봤어? 그리고 심준호도. 심씨 가문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그 세 사람 건드리면 언니가 아니라 어르신이 와도
“아기 때문에?”심준호가 다시 물었다.아이 얘기가 나오자 강하리의 가슴이 아팠다.심준호는 피식 웃었다.“그러면 애가 괜찮으면?”강하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심준호를 바라보았다.“삼촌...”“만약에.”강하리의 눈에서 반짝이던 빛이 순간 사그라들었다.“그래도 안 돼요. 아이는 하나의 이유일 뿐 나랑 그 사람 사이엔 문제가 너무 많아요.”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알아서 생각해. 삼촌은 네가 억울한 일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도 네 생각 굽힐 필요 없어. 주씨 가문이든, 구승훈이든 똑같아.”강하리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감정을 추슬렀다.“삼촌, 정양철 일은 어떻게 돼가요? 그리고 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세요?”심씨 가문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누구도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정양철은 잡혔으니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네 아버지는...”심준호는 실제로 정양철의 샘플을 병원에 보낸 적이 있었다.정양철이 그렇게 말했다면 맞는지 아닌지 일단은 확인해야 했다.진태형은 정양철의 결과가 나오면 다시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아직 확인하고 있어.”강하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틀 동안 집에서 휴식을 취한 후 B시에 있는 JM 사무실로 출근했다.그녀가 막 안으로 들어서는데 비서가 계약서를 하나 내밀었다.“대표님, 외교부 측에서 저희와 협업할 의향이 있답니다.”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받아 살펴봤다.“협상 시간이 오늘 오후라고요? 제가 가볼게요.”때마침 외교부에 도착한 강하리는 현관에 서 있는 진태형을 보았다.“진 장관님.”진태형은 그녀를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여긴 어떻게 왔어요? 교통사고 났다던데.”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저는 괜찮은데 선배가...”주해찬을 언급하자 진태형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다 각자 운명이 있는 거죠. 너무 걱정 마요.”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말
진시연은 눈을 깜빡였다.“병원에서 들었어. 준호 삼촌이 강하리랑 친자 확인 검사를 했대. 강하리랑 친자 확인 검사를 하려고 정양철 샘플도 가져왔다던데. 아빠, 강하리가 미현 이모랑 정양철 딸이지?”진태형의 표정이 수시로 바뀌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말을 꺼냈다.“확실한 정보도 없이 이런 얘기는 하지 마. 미현 이모에 대한 실례야.”진시연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가 외교부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그녀는 차를 가져오지 않아 밖으로 나가 심준호에게 전화를 거는데 통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창문이 내려가며 안쪽에서 진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 씨, 내가 태워다 줄게요.”강하리의 눈빛이 번뜩였다.“고맙지만 됐어요, 진시연 씨.”하지만 진시연은 이미 차에서 내려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가요, 왜 예의를 차려요? 심씨 저택으로 가는 것 아니에요? 나도 마침 할머니랑 할아버지 뵈러 가는 길이에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한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차에 올랐다.그녀가 심씨 가문에 돌아갔다는 사실은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하지만 석씨 가문 자매들이 알기 때문에 진시연이 알고 있는 것도 놀랍지는 않았다.사교성이 좋은 진시연은 차 안에서 강하리에게 진태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강하리는 그 말을 들으면서 시선을 내린 채 웃기만 했다.진시연과 진태형은 사이가 정말 좋았고 진태형도 그녀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제가 자주 덤벙거려서 전에 F대륙에서 의료 봉사할 때 실수로 크게 다치기까지 했는데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이 구해줬어요. 안 그랬으면 진짜 죽을 뻔했어요. 그래서 아빠는 항상 제가 철이 없다고 생각해요.”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이야기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심씨 가문 별장 앞에 멈췄고 차가 멈추자마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버렸다.심씨 가문 별장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는 한 손은 주머니에 넣
강하리가 진시연을 바라보았다.“제가 신경 쓸 건 없죠. 구 대표님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그런데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하며 왠지 모르게 심장이 반 박자 늦춰진 듯싶다가 갑자기 심하게 뛰었다.마치 죽었던 것이 조용히 되살아나는 듯 그녀의 몸 옆에 늘어뜨린 손이 살짝 떨렸다.“들어가서 봐.”구승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강하리가 홱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백아영은 연정이를 품에 안고 입을 다물지 못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연정이가 젖병을 들고 분유를 힘차게 마시고 있었다.눈은 여전히 충혈되어 있었고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이 장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렸다.“연정아...”그녀는 나지막이 부르면서도 이 모습을 방해하면 다시는 딸을 볼 수 없을까 봐 두려운 듯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이리 와, 이 바보야. 왜 아직도 거기 서 있어?”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강하리를 보고 백아영은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이봐, 연정이는 네가 오니까 우유도 안 먹는다.”강하리의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이 툭 바닥에 떨어지더니 갑자기 그쪽으로 달려갔고 연정이를 만지는 손가락마저 떨렸다.연정이가 강하리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팔을 내밀었다.작은 입이 무언가를 쫑알거리자 강하리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연정이를 품에 꼭 안은 채 눈물을 계속 흘렸다.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연정이의 작은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연정이, 연정이가 돌아온 건가?연정이가 위로하듯 작은 손으로 강하리의 얼굴을 살살 두드리는 동안 강하리는 점점 더 세게 울었다.억눌린 흐느낌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고 이 순간 아무도 더 입을 열지 않았다.원래 미소를 짓고 있던 백아영도 이 순간 갑자기 감정이입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구승훈은 문간에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며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
낯익은 향기가 풍겨오자 강하리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강하리, 이제 한 번만 더 기회를 줄래?”구승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고 그의 따뜻한 숨결이 볼에 닿자 순간 머금었던 미소가 굳어졌다.강하리는 그의 숨결을 피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연정이 이불 가져와야 해.”하지만 구승훈은 놓지 않았다.그는 귓불을 살며시 깨물면서 다시 물었다.“한 번 더 기회를 줄 거야?”강하리가 멈칫하며 시선을 내리고 말했다.“밖에서 기다려.”말을 마친 그녀가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알았어, 그러면 밖에서 기다릴게.” 구승훈은 그녀의 귓가에 입 맞추고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담요를 가져와 연정이에게 덮어주고 그 안에서 평온하게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이 녹을 듯이 부드러워졌다.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생각하니 다시 얼굴에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그녀는 한참을 방 안에 서 있다가 심호흡하고 밖으로 나갔다.밖으로 나가자마자 구승훈의 다소 어두운 눈빛을 마주했다.“연정이, 어떻게 된 거야?”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속삭였다.“미안해.”강하리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엄마가 아기를 데려갔어.”강하리는 멈칫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우리 애가 사모님께 잘못이라도 했나?구승훈의 입가에는 떫은맛이 가득했다.결국 이 모든 게 그 때문이었다.그는 다가와 강하리를 품에 끌어안았다.“너랑 아이 힘들게 해서 미안해.”강하리는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구승훈을 밀쳤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더 꽉 껴안았다.“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이제 아기가 돌아왔으니까 다시 시작하자, 응?”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면서 곧바로 그를 밀어냈다.“안 돼.”강하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연정이가 돌아왔지만 구승훈과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었다.계속되는 상처에 그녀는 정말 무서웠다.앞으로는 그저 연정이와 함께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싶었다.게다가 이젠 주해찬 문제도 있었다.구승훈은 비웃으며 갑자기 앞으로 다가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강하리의 입술을 살며시 쓰다듬더니 그대로 가버렸다.복도에 서 있던 강하리는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저 개 같은 남자가 대체 뭘 하려고...’강하리는 양육권을 놓고 싸우겠다고 했으니 그가 무슨 짓이든 못 할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이 남자는 갖은 수단으로 자신을 몰아붙일 거다.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뒤돌아 들어가면서 문을 쾅 닫았다.아래층에는 이미 진시연이 떠난 뒤였다.심준호는 우울한 얼굴로 내려오는 구승훈을 보고 눈썹을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백아영 부부와 심문석은 모두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세 노인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이전까지 심준호는 이들에게 구동근에 대한 언급 없이 정양철이 심미현에게 한 짓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하지만 조금 전 진시연이 떠난 뒤, 심준호는 구동근이 한 짓까지 모두 이야기했다.강하리에게든 심미현에게든 그런 짓을 했으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심준호를 바라봤고 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이 심호흡을 하고 세 노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할아버님, 할머님, 증조할아버님, 하리와 아주머니한테 일어난 일은 전부 다 제 잘못입니다. 저 때문에 고생했으니 마음껏 때리고 욕하세요.”갑자기 무릎을 꿇은 구승훈의 행동에 세 사람은 모두 당황했지만 이내 다들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날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마. 난 자네 같은 손자도 없고 구씨 가문 사람들과는 감히 엮이지 못하겠으니까.”“할아버님...”그러나 심금천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심문석은 너무 화가 나서 지팡이를 집어 들고 그의 몸을 격하게 내리쳤다.“이놈의 자식, 하리를 얼마나 고생시켰어! 걔가 뭘 잘못했다고 몇 번이고 그런 짓을 해!”구승훈은 피할 틈도 없이 지팡이가 이마에 직격탄을 날렸고 피 한 줄기가 새어 나왔다.“증조할아버님, 할아버님, 할머님, 제가 다 보상해 줄 겁니다. 할아버지도 제가 죗값을 치르게 할 테니 저랑 하리 반대만 하지 말아
“정양철과 강하리?”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바로 마지막 페이지로 넘겼고 내용을 본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두 사람의 친자 확률은 99.99%입니다.]구승훈의 짙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확실해?”심준호는 의자에 기대었다.“심씨 가문 병원에서 한 건데 누가 감히 조작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친자확인서를 옆으로 던져버렸다.“다시 해봐. 심씨 가문 병원 말고 밖에 다른 사람 찾아서 해. 정양철이 진짜 강하리의 아버지라면 미현 이모를 해칠 이유가 없어. 게다가 강하리의 어머니가 심미현이라는 걸 우리보다 먼저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아무 말도 안 했겠어? 내 생각에 그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야.”심준호가 차갑게 웃었다.“이미 샘플 보냈어.”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강하리도 이 사실을 알아?”심준호는 고개를 저었다.“말할 생각 없어.”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말하지 마. 정양철은 어떻게 할 거야?”심준호는 만년필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어떻게 할 생각 없어. 그냥 죗값을 치르면 돼. 내 누나를 해쳤는데 누구 아버지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준봉이었다.“대표님,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요.”구승훈은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여기서 안 머물고?”심준호가 참지 못하고 묻자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일이 생겨서 연성으로 돌아가야 해.”그렇게 말한 뒤 그는 위층으로 올라갔다.닫혀있던 강하리의 방문이 구승훈이 살며시 노크하자 잠시 후 열리며 강하리가 잠옷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무슨 일이야?”구승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눈썹을 치켜올렸다.“우리 딸 보러 왔는데 괜찮아?”강하리는 거절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에 다시 삼켜버렸다.그녀가 문 옆으로 물러서자 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들어왔다.여전히 잠들어 있는 연정이는 무슨 꿈을 꾸는지 작은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구승훈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잠든 연정이를
강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구승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맙다는 말 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나.구승훈의 손가락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다.“괜찮아, 고마워할 필요 없어. 어차피 단순한 목적으로 연정이를 너한테 데려온 건 아니니까. 원래는 연정이를 연성으로 데려가서 사진만 보내려고 했어. 그러면 네가 자연스럽게 연성으로 올 테니까.”하지만 그는 강하리가 자신을 용서해 주길 바랐다.또한 그녀가 한동안 아이 때문에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이로 그녀를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왜 이렇게 비열해?”구승훈이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하리야, 난 너랑 가까워지고 싶을 뿐이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지만 이미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예전 일은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내가 하는 것 지켜봐 주면 안 돼?”강하리는 그를 외면했다.“이만 가, 나 잘 거야.”구승훈은 연정이를 바라보았다.“아마 밤에 깰 거야. 넌 원래도 잘 못 자는데 베이비시터 불러줄까?”강하리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필요 없어.”그녀는 이제 연정이를 24시간 내내 자신의 시야에 두고 싶었다.구승훈은 그녀의 거부하는 표정에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눈꼬리를 문질렀다.“주씨 가문 사람들이랑 멀리 해. 감정에 휩쓸려서 넘어가지 마. 일 끝나면 너랑... 아이 보러 올게.”강하리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나 건드리지 마!”구승훈은 웃음기를 머금은 눈으로 연정이를 바라보았다.“너희 엄마 너무 못됐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고 바로 그때 구승훈이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하리야, 나 기다려.”그렇게 말한 뒤 그는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듣고 한참이 지나서야 깊게 심호흡했다.마음이 혼란스러웠다.이 남자와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지만 하필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다.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 옷을 챙긴 뒤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별장에서 나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