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잠시 멈칫했다.“어떻게 된 거야?”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그제야 말했다.“어깨가 좀 아파. 별거 아니니까 가서 약 바르면 돼.”나문빈도 그제야 이를 떠올렸다.“참, 그 여자가 야구 방망이로 강하리 씨 어깨를 때렸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그는 강하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심각한 거 아니야.”어깨는 아팠지만 뼈나 근육이 다친 건 아닌 것 같았다.고이선이 독하게 내리치긴 했어도 힘은 작았다.지금 그녀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이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을 연루시킨 것도 모자라 정서원이 그녀에게 남겨준 팔찌까지 부러뜨렸다는 사실이었다.“심 변호사님 전화 왔어?” 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구승훈은 이를 무시한 채 곧장 강하리를 치료실로 끌고 들어갔다.강하리는 그가 화가 났다는 걸 알았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사가 강하리의 어깨를 감싼 옷을 치우자 구승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원래 하얗고 부드러웠던 어깨는 이제 멍이 들어 보라색으로 변했다.의사도 덩달아 얼굴을 찡그렸다.“뼈가 무사한지 사진 찍어봐야겠어요.”구승훈은 대답을 하고 강하리를 영상의학과 쪽으로 이끌었다.강하리가 들어가서 사진 찍는 동안 심준호가 도착했다.“강하리 씨 다쳤어?”“어깨 좀 다쳤어.” 구승훈은 표정이 어두웠고 심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고이선이 요 며칠 문연진과 연락하더니 이번 일도 그쪽에서 남의 손을 빌려 건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 고이선 일당은 내가 처리할게.”심준호가 구승훈을 슬쩍 보았다.“문씨 가문 쪽엔 네가 해. 준비한 증거들로 이미 충분하잖아?”구승훈은 여전히 굳어진 표정으로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그래.”강하리의 진단 결과가 나왔고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구승훈은 천아름에게 연락했고 안예서에게 간병인을 찾아준 뒤 강하리를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다.그날 밤, 강북 시장을 꾸준히 장악하던 문씨 가문은 갑자기
원래는 저쪽에서 돈을 벌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자를 메우고 싶었는데 갑자기 일이 터져버린 거다.반면 상대방은 현재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었다.밖에서 경찰이 사무실 문을 두드릴 때까지 문영호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 전화를 계속 걸었다.문원진은 인터넷을 통해 문영호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뉴스를 본 순간 머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더니 눈앞이 캄캄해지며 다시 한번 기절했다.문씨 가문이 수천억의 공금을 횡령하고 둘째가 불법 자금 세탁에 연루되었다는 뉴스는 하룻밤 사이에 화제를 불러 모았고 동시에 문원진이 외국 무기 밀매상과 결탁해 대량의 폭발물을 구입했다는 소식까지 인터넷에 퍼졌다.이 뉴스는 보도되자마자 큰 파장을 일으켰다.문씨 가문이 돈을 세탁하든 적자가 나든 그것까지는 문씨 가문 내부의 일이고 기껏해야 이사회를 소집해 해결하면 그만이었다.네티즌들이 떠들어대도 기껏해야 잠깐의 관심일 뿐인데 폭발물 구매는 공공의 안전과 관련된 문제였기에 여론은 순식간에 공격적으로 바뀌었다.문원진은 실신 후 뇌출혈 진단을 받고 바로 수술실로 이송되었는데 수술실로 이송되자마자 문 앞에서 경찰이 대기했다.나오면 바로 데려갈 기세였다.이 장면을 지켜보던 문연진은 그제야 문씨 가문이 정말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수십 년 동안 B시에서 버텨온 문송그룹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같았다.강북 시장 역시 하루아침에 최하영에게 삼켜져 버렸다.구정우도 인터넷 뉴스를 보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전에는 문씨 가문이 아무리 그를 우습게 여겨도 문연진과 실질적인 관계만 발생하면 그쪽에서 문연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와 결혼시킬 것 같았다.문씨 가문은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니까.그런데 문연진이 시집오기도 전에 문씨 가문이 무너졌고 구정우가 너무 화가 나서 집안 곳곳을 부수자 밖에 있던 도우미가 서둘러 들어왔다.“도련님, 문연진 씨 전화입니다.”구정우가 다가가서 전화를 받았다.“구정우, 우리 좀 도와줘. 문씨 가문 좀 도와줘, 응?”구정우는 비웃었다.“이제
인터넷은 문씨 가문 이야기로 떠들썩했지만 호텔 방은 유난히 조용했다.강하리가 창문 앞에 서서 B시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구승훈이 밖에서 약을 들고 들어왔다.“아직도 어깨가 아파? 내가 약 발라줄게.”강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손에 쥔 팔찌를 내려다보기만 했다.구승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이미 연락했으니까 팔찌는 고칠 수 있을 거야. 내일 바로 가져가자.”팔찌의 부러진 쪽을 만지던 강하리의 손가락이 살짝 하얗게 변했다.“문씨 가문 쪽은 어떻게 됐어?”원래 문씨 가문 쪽에 그렇게 빨리 손을 쓸 생각은 없었다.그 정도로 큰 가문은 단번에 눌러버리지 않으면 앞으로 두고두고 위험할 테니까.그런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구승훈은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 알았다.“걱정하지 마, 이번엔 문씨 가문이 절대 재기하지 못할 거야. 우리뿐만 아니라 준호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아.”강하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심준호에게 온 전화였다.강하리가 전화를 받자 심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준호 말로는 너 다쳤다던데?”강하리의 가슴에 갑자기 따스한 기운이 흘렀다.“할아버지,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상대가 허허 웃었다.“걱정하지 마. 이 할아버지가 반드시 혼내줄게!”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할아버지한테 뭔 예의를 차려? 네 몸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해.”강하리가 대답하자 상대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넋이 나간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강하리가 이렇게 웃는 모습을 오랫동안 본 적이 없었다.사실 그와 만나면서 강하리는 별로 웃지 않았고 전에는 그의 차갑고 냉담한 성격 때문일지 몰라도 나중엔 아기 일로 그녀가 웃는 일이 거의 없었다.그나마 그녀가 많이 웃었던 때가 아마 그들이 다시 만났던 그 잠깐의 시간이었을 거다.구승훈은 옆에서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가 잠시 후 갑자기
“내가 널 지켜주지 못했어.”문연진이든 고이선이든 전부 그 때문에 강하리를 찾아온 거다.그리고 오늘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그녀가 수없이 받은 상처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구승훈의 입맞춤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고 강하리는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씨, 그럼 이제부터 날 보호해 줄... 읍...”강하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승훈의 입술은 이미 강하리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강하리는 갑작스러운 그의 키스에 당황하다가 이내 발끝을 들고 그에게 화답했다.구승훈은 눈에 띄게 당황하다가 빠르게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강하리는 뜨거운 그의 열기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구승훈은 행동을 멈추고 강하리를 안은 채 욕실 밖으로 데려와 그녀를 침대로 덮쳤다.“강 대표님, 또 원하는 건가?”강하리는 민망한 듯 그의 시선을 피했고 구승훈이 낮게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일단 참아. 다 나으면 그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응?”강하리의 얼굴이 갑자기 화끈거리며 자기 위에 있는 남자를 밀어냈다.“당장 소파로 가서 자!”구승훈이 웃으며 몸을 일으키자 강하리가 이불을 끌어당기며 수면제에 손을 뻗으려는데 구승훈이 다시 돌아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침대에 눕혔다.강하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차가운 연구가 어깨에 닿았고 고개를 돌리니 구승훈이 조심스럽게 약을 바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큰 손으로 연고를 부드럽게 문지른 후 돌아서서 욕실로 들어가서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안에서 나왔다.그는 강하리의 머리를 말리는 것을 도와주더니 곧바로 강하리를 품으로 끌어안았다.“약 먹지 말고 그냥 이렇게 자. 잠이 안 오면 얘기하자, 하리야. 약 그만 먹어.”강하리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샌가 그렇게 잠이 들었다.어슴푸레 날이 밝아질 무렵 구승훈은 연민이 가득한 눈빛으로 품 안에서 잠든 여자를 바라보았고 고개를
강하리는 욕실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잠에서 깼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일어났다.전에도 수면제를 먹지 않으려고 시도한 적은 있지만 매번 밤새 잠들지 못했는데 어젯밤엔 편히 잠이 들었다.“무슨 생각해?”구승훈은 타월만 허리에 감고 있었는데 이 순간 남자의 완벽한 몸매가 모두 드러나 있었다.그가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말리는데 어깨에 맺힌 물방울이 가슴 근육을 타고 내려가 복근까지 미끄러져 수건 속으로 떨어졌다.일어나자마자 이런 모습이라니.강하리도 아찔한 모습이 유혹적이라는 건 인정했다.고개를 들어 남자의 시선을 마주하자 어젯밤 화장실에서 나눴던 격정적인 키스가 떠올랐다.문씨 가문이 무너져서일까, 구승훈이 했던 말 때문일까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그동안 줄곧 버티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그의 따뜻함과 그가 주었던 편안함을 그리워하고 있었다.“구승훈.”강하리는 침대에 기대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저쪽에서 누가 봐도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이리 와.”그녀가 말하자 구승훈의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순간 얼어붙더니 그의 시선이 갑자기 짙어졌다.남자의 목울대가 두 번 움찔거리다가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몸을 숙여 강하리를 덮쳤다.“아침부터 남자를 유혹하면 안 되는 거 몰라?”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그래서 싫어?”구승훈 그의 눈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싫냐고?그걸 질문이라고 하나.싫을 리가 있을까.그녀가 임신한 이후 지금까지 딱 한 번 했다.“어깨는 버릴 거야? 후유증이라도 남고 싶어?”강하리의 어깨는 어제보다 더 아팠지만 그래도 그녀는 손을 들어 남자의 목에 둘렀다.“당신이 조심해.”구승훈은 숨이 턱 막혔다. 이래도 참으면 남자가 아니지.그렇게 달아오른 방안의 열기는 점심이 되어서야 사그라들었고 구승훈은 그녀의 어깨를 건드릴까 봐 내내 조심하며 움직였다.모든 게 끝나고 그가 나지막이 물었
구승훈이 그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하지만 그가 움직이는 순간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져 불현듯 기억을 떠올렸다.야릇하고 축축하지만 극강의 부드러움으로 그녀에게 최고의 쾌락을 선사했다.“하리야, 좋아?”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강하리의 얼굴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마음에 들어?” 하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물었고 강하리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어깨를 물었다.“조용히 해. 그만 물어봐.”“하리야, 방금 날 몇 번이나 불렀는지 알아?”강하리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밀어냈고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옷 갈아입고 나가서 밥 먹자.”문 뒤에서 강하리는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서서히 마음을 진정시켰다.역시 뻔뻔함으로는 구승훈을 이기지 못한다.강하리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구승훈은 이미 식사를 차려놓은 상태였다.식탁은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가득 찼다.하지만 두 사람이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고 구승훈은 전화가 걸려 온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일부러 그녀를 피해 전화 받는 것을 알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솔직히 말해서 조금 애매했고 확실히 정해진 게 없었다.사업적으로는 숨기는 것 없이 말하라고 했지만 사적인 일은 그렇게 할 자격이 없었다.전화를 받고 돌아온 구승훈의 얼굴에는 어두운 기색이 감돌았다.할아버지가 깨어나서 직접 가정부에게 캐물었지만 가정부는 여전히 강하리를 지목했다.그는 서늘한 눈가로 차갑게 웃었다. 강하리가 그렇게 독한 마음을 품었다면 지금 그들은 아이도 둘이나 낳았을 텐데 아내도 없이 그가 이렇게 지낼 리가 있겠나.강하리가 지시했다는 건 터무니없는 소리였고 어떻게 된 건지는 그가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구승훈이 예약한 액세서리 가게로 향했고 강하리는 조심스럽게 반으로 쪼개진 팔찌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팔찌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10년 가까이 가게를 운영
점원은 깜짝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팔찌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했다.“팔찌에 문제라도 있나요?”남자는 고개를 저었다.“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이 물건을 보니 아는 사람이 떠올라서.”그는 기억에 사로잡힌 듯 손에 쥔 팔찌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점원은 감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나지막이 대꾸했다.“강씨 성을 가진 아가씨가 가져온 거예요. 참, 오늘 특별히 저한테 맞이하라고 지시한 구 대표님도 계셨어요.”남자는 당황했다.“구승훈이 가져온 거라고?”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한 생각이겠지.이 팔찌는 소재나 품질로 봐도 보기 드문 최상품인데 구씨 가문이라면 이런 재질의 팔찌를 갖고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잠시 생각하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심준호에게 전화가 왔다.그는 점원에게 눈치를 주었다.“제대로 고쳐.”말을 마친 그가 전화를 받았다.“준호야, 무슨 일이야?”심준호는 웃으며 말했다.“다음 달이 엄마 생신인데 물건 좀 준비해 줘. 시간 나면 가지러 갈게.”남자가 웃었다.“그래.”...강하리와 구승훈은 가게에서 나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안예서의 부상은 크지 않았지만 의사는 하루 정도는 입원해 있으라고 했다.강하리와 구승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안예서는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거즈를 목에 두른 채 큰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문씨 가문을 욕하고 있었다.강하리와 구승훈 사이를 알게 된 이후 안예서는 송유라를 한바탕 욕하고는 문연진이 벌인 짓까지 알고 문연진을 저주하기 시작했다.특히 어젯밤 문연진이 고이선을 종용해 룸에서 난동을 부리게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더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문씨 가문 그 역겨운 것들은 진작에 벌을 받았어야 했어요. 쌤통이에요, 아주! 게다가 폭발물까지 숨겨놓다니, 차라리 그게 터져서 확 죽어버리지. 그리고 문연진은 미친 거 아니에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놓고 어디서
“고마워요.”강하리가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하자 나문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고마우면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지 마요. 솔로인 사람 서러워서 살겠어요?”“...”그녀는 나문빈을 바라보며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안예서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나문빈은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았고 두 사람은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밖으로 나온 나문빈이 조용히 말했다.“대양그룹 시스템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정양철이 어지간히 경계하나 봐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못 들어가면 됐어요. 들키지만 마세요.”짧게 대꾸한 나문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동안 병원에 머물다가 자리를 떴다.두 사람이 나간 직후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자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진 선생님, 왜 그러세요?”여자 옆에 있던 간호사가 묻자 진시연은 두 사람의 실루엣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는 사람을 봐서요. 가요, 환자 봐야죠.”진시연은 간호사를 따라 병동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이 이제 막 병실에 들어섰을 때 문 앞까지 걸어간 구승훈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왜 그래?”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아무것도 아니야.”두 사람은 병원에서 돌아와 짐을 싸서 연성으로 돌아갔다.공항에서 나왔을 때 이미 픽업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구승재가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강하리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구승재가 대답하기 전에 구승훈이 짐을 그에게 건네고 강하리를 차 쪽으로 끌어당겼다.“바쁘면 먼저 가 봐요. 난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구승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강하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고 더구나 꽤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끌고 곧장 차로 향했다.“강 대표님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내가 말 안 했나?”강하리가 입술을 꾹 다물다가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이 그녀의 허리를 꼬집었다.“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