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강하리가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하자 나문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고마우면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지 마요. 솔로인 사람 서러워서 살겠어요?”“...”그녀는 나문빈을 바라보며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안예서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나문빈은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았고 두 사람은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밖으로 나온 나문빈이 조용히 말했다.“대양그룹 시스템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정양철이 어지간히 경계하나 봐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못 들어가면 됐어요. 들키지만 마세요.”짧게 대꾸한 나문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동안 병원에 머물다가 자리를 떴다.두 사람이 나간 직후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자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진 선생님, 왜 그러세요?”여자 옆에 있던 간호사가 묻자 진시연은 두 사람의 실루엣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는 사람을 봐서요. 가요, 환자 봐야죠.”진시연은 간호사를 따라 병동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이 이제 막 병실에 들어섰을 때 문 앞까지 걸어간 구승훈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왜 그래?”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아무것도 아니야.”두 사람은 병원에서 돌아와 짐을 싸서 연성으로 돌아갔다.공항에서 나왔을 때 이미 픽업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구승재가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강하리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구승재가 대답하기 전에 구승훈이 짐을 그에게 건네고 강하리를 차 쪽으로 끌어당겼다.“바쁘면 먼저 가 봐요. 난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구승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강하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고 더구나 꽤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끌고 곧장 차로 향했다.“강 대표님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내가 말 안 했나?”강하리가 입술을 꾹 다물다가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이 그녀의 허리를 꼬집었다.“
구승재의 표정이 변하며 핸들을 급하게 꺾었지만 그런데도 차의 뒷부분은 여전히 그 차와 세게 부딪혔다.쾅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갑자기 뒤에서 손을 뻗은 구승훈이 핸들을 잡았다.“앞으로 가.”밤이라 도로에 다른 차는 없었고 부딪혔는데도 차는 달릴 수 있었다.구승재는 망설임 없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고 자연스럽게 뒤에 있던 차도 재빨리 뒤따랐다.두 대의 차는 교외까지 달렸다.그런데 도시를 막 벗어났을 때 구승훈이 갑자기 말했다.“브레이크 밟아.”구승재는 당황했다.“형...”“밟아.”구승훈은 여전히 두 글자를 뱉었고 구승재는 더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다.그리고 구승재가 브레이크를 밟는 동시에 구승훈이 핸들을 홱 돌리자 어두운 밤 타이어에 불길이 치솟았고 차가 유려하게 미끄러지며 방향을 돌렸다.“엑셀 밟고 들이받아.”구승재는 놀란 것도 잠시, 액셀을 밟아 뒤에서 추격해 오던 차를 들이받았다.뒤차는 갑자기 상대가 방향을 틀어 충돌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당황한 운전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구승재의 차가 바로 앞에 와 있었다.차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들이받았고 앞부분이 일그러진 데다 운전자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로 핸들 위에 쓰러져 있었다.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밖을 내다보다가 휴대전화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끝나고 나서야 구승재가 나지막이 물었다.“또 큰아버지가 한 건 아니겠지?”구승훈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일단 돌아가.”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충 그의 짐작이 맞는 것 같았다.큰아버지가 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자기 아들인데!얼굴을 찡그리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구승훈이 생각에 잠긴 채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한 시간 뒤, 구승훈의 차가 구씨 가문 저택으로 들어왔고 집사는 그의 차를 보고 순간 굳어버렸다.“큰 도련님, 이게 대체...”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요.”
구승훈이 웃었다.“정말 그 여자가 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그럴듯한 핑계가 필요하니 정말 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세요?”“구승훈, 무슨 소리야!”구동근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나갔던 구정우가 돌아와 입을 열었다.“형, 도우미는 그 여자 말을 들은 죄밖에 없는데 왜 모함해? 그리고, 그 여자가 정말 좋은 사람이 맞긴 해? 구씨 가문을 저격할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어. 이번에 일어난 일도 그 여자 짓이겠지? 그 여자는 구씨 가문과 문씨 가문이 망하길 바라는데 할아버지를 해치려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어? 형, 할아버지는 구씨 가문과 형을 위해 이러시는 건데 왜 할아버지 마음을 속상하게 해?”구승훈은 그를 슬쩍 보고는 차갑게 웃었다.“구정우, 오늘 나를 죽이려고 사람 보낸 게 너야?”그의 말에 구정우가 당황했다.당연히 그가 아닌 아버지의 짓이었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구승훈이 이렇게 대놓고 언급할 줄은 몰랐다.이 말이 나오자 당연히 구동근의 관심도 곧바로 이쪽에 쏠렸다.“누가 널 노렸어?”구승훈이 짧게 대꾸했다.“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있었어요. 내가 돌아오는 걸 원치 않거나 이 일로 인해 저와 할아버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길 바라는 사람이겠죠.”구동근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구승훈이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여자 때문에 반기를 든 것에 화가 났지만 그래도 구승훈은 여전히 그가 가장 아끼고 중히 여기는 후계자였다.구정우를 슬쩍 보던 구동근이 곧바로 그의 뺨을 때렸다.“네 아비한테 가서 구씨 가문에 남기 싫으면 일찌감치 나가라고 해!”얼굴을 감싼 구정우의 눈빛이 번뜩였다.“할아버지, 아버지는 잘못 없어요.”이 장면을 지켜보던 구승훈의 눈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구동근의 방에서 나온 그는 곧장 도우미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안에서 구승유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구승유는 구승훈을 보고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오빠, 여긴 왜 돌아왔어?”구승훈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네가 왜
구승재는 순간 깜짝 놀랐다.“형, 승유는 아닐 거야.”구승유는 그들 중 막내이자 가장 단순한 사람이기도 했다.방금 밖에서 그렇게 물어보긴 했지만 구승유가 정말로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죽어가고 있는 저쪽 도우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순진할수록 이용당하기 쉽지.”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손연지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강하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어떻게 됐어? 팔찌에 관해 물어봤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팔찌가 망가져서 업체에 맡겼어.”손연지가 당황했다.“뭐? 멀쩡한 팔찌가 왜 망가져?”팔찌 얘기에 강하리는 다소 침울한 표정이었지만 한숨을 내쉬며 손연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했다.“미친, 고이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땐 송유라에게 이용당하다가 이젠 문연진이야? 생각이란 걸 하긴 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 때론 목 위의 것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긴 하지.손연지는 분노에 가득 차서 무슨 말을 하려다가 문득 상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세상에, 누가 보면 그 개자식이 평생 여자라곤 못 만나본 사람인 줄 알겠어!”강하리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어찌 됐든 이번엔 그녀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간 거다.그녀가 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손연지가 쫄래쫄래 따라왔다.“둘이 화해한 거야?”사실 그녀는 다소 내키지 않았다.구승훈 그 개자식 주위엔 여자들이 끊이지 않고 집안일도 복잡한데 강하리는 그와 만나고 거듭 상처만 받았다. 어머니에 이어 아이까지 잃었으니까.그런 남자는 멀리하는 게 상책이었다.아무리 잘난 남자라고 해도 결국 상처만 준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그동안 강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손연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친구로서 그녀의 곁을 지킬 수는 있어도 인정하긴 싫지만 강하리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건 구승훈 그 개자
“그리고 노민우는 처음부터 단순히 엔조이 상대야. 내가 진지해지는 순간 그게 불행의 시작인 거지.”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가 피식 웃었다. 때론 이렇듯 이성적인 손연지가 부러웠다.“알았어, 그러면 이제부터 노민우 얘기는 하지 말자.”손연지 웃었다.“그게 맞지. 내 친구는 날 힘들게 하지 않아.”두 사람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연지가 방으로 돌아갔고 샤워를 마친 강하리는 업무를 처리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어느새 넋이 나갔다.오늘 떠날 때 구승훈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걸 보아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원래는 묻고 싶지 않았다.둘 사이에는 언제나 서로에게 조금의 공간을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특히 이렇듯 애매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문득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일이 있으면 그녀도 그와 함께 짊어지고 싶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뜨는 구승훈의 이름을 바라보았지만 한참을 고민하다 포기했다.그녀는 컴퓨터를 닫고 무의식적으로 수면제를 먹으려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움직임을 멈췄다.잠시 후, 그녀는 일어나서 밖에 있는 술장으로 다가가 와인 한 잔을 따른 뒤 창문에 기대어 느긋하게 마셨다.구승훈이 구씨 가문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도우미는 구동근에게 숨이 겨우 붙어 있을 정도로 맞았지만 여전히 강하리만 언급했다.구승훈도 손을 썼지만 원하는 답은 얻지 못했다.검은색 마이바흐는 밤새 소리 없이 달렸고 구승훈은 정처 없이 운전하다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차를 몰고 강하리의 집 밑으로 와버렸다.멀리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그는 차 옆에 서서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이고 가볍게 한 모금 들이마신 후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숨을 뱉었다.한입 가득 연기를 내뿜으면서 고개를 드는 순간 4층 발코니에서 작은 불빛 아래 드리워진 실루엣을 발견했다.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천천히 와인을 홀짝이며 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었다.구승훈의 움직임
남자의 말을 들은 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그녀의 마음속 어딘가 요란하게 흐트러지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날 재워주려고 온 거 맞아?”구승훈의 말에 담담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그렇다면 내려올래?”강하리는 전화기를 꽉 움켜쥐고 대답하지 않다가 잠시 후 침실로 들어가 패딩을 뒤집어쓰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달빛 아래 남자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고 그의 눈빛에는 부드러움이 묻어났다.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하며 고요함을 깨뜨렸다.“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구승훈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며 성큼성큼 강하리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보고 싶어서 왔어. 또 잠이 안 와?”강하리가 입술을 다물고 웃었다.“아니, 이제 막 자려고.”구승훈이 나지막이 웃었다.“내가 재워줄게.”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구승훈 씨, 무슨 일 있지?”멈칫한 구승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는 늘 똑똑하고 예리하다.하지만 이번 일은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말하기 싫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고통받게 할 수는 없었다.“아니, 별일 없으면 너 보러 오지도 못해?”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구승훈이 갑자기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들었다.“하리야, 달빛이 이렇게 예쁜데 진지한 얘기나 해야겠어?”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곧바로 강하리를 차 뒷좌석에 내려놓았다.“구승훈....”강하리가 겨우 이름만 부르는데 남자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패딩 안에는 얇은 잠옷만 입고 있었고 구승훈의 큰 손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허리를 문지르자 강하리는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구승훈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잘 느끼네.”강하리가 힘껏 그의 허리를 꼬집었다.“허튼짓 하지 마.”“한밤중에, 그것도 예쁜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어떤 남자가 가만히 있어?”“당신...”구승훈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옷깃을
구승훈은 강하리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맞춤하고는 나지막이 그녀를 달랬다.“하리야, 괜한 생각 말고 그냥 다 잘될 거라고 믿어.”강하리는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더니 미소를 지었다.“응.”믿을 수 없대도 어쩌겠나.하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구승훈 씨, 당신이 어떻게 연정이 사진을 갖고 있어?”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구승재가 얘기하다가 보내준 거야. 네가 연정이 좋아하는 거 알고 너 기쁘게 해주려고 보냈지.”강하리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괜한 생각이겠지.“아파트로 가서 잘까? 이렇게 늦었는데 손연지 씨 방해하지 말고.”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자 구승훈이 웃었다.“걱정하지 마, 가서 아무 짓도 안 하고 그냥 너 재워주기만 할게. 내일 아침 일찍 연정이 선물 사러 가자.”연정이 얘기에 강하리는 끝내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구승훈은 말하면 말한 대로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강하리를 안은 채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 침실 밖으로 나오니 구승훈이 부엌에서 죽을 끓이고 있었다.아침 햇살이 그의 몸에 쏟아지자 강하리는 문득 아늑함을 느꼈다.“뭐 하는 거야?”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 대표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팥죽이지.”강하리는 웃으며 부엌문으로 다가가 문틀에 고개를 옆으로 기댄 채 남자의 느긋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감상하고 있었다.“계속 보면 나 죽 못 끓여.”문득 구승훈의 잠긴 목소리가 들리며 그가 다가와 강하리를 안고 테이블에 올리자 강하리가 웃으며 밀어냈다.“하지 마. 연정이 선물 사러 가야 하잖아.”구승훈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보다 연정이가 더 중요해?”강하리는 여전히 두 눈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몰랐어?”그녀는 구승훈을 밀어낸 뒤 밖으로 나갔고 구승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언젠가 강하리가 연정이가 자기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소홀히 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도우미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세 남자가 굳어버렸고 구승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연정이가 강하리를 닮은 건 사실이었다.막 태어났을 때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는데 이제 커서 얼굴이 뚜렷해지면서 이목구비가 어딜 보나 강하리와 닮아 있었다.하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쉽게 발견할 수는 없는 부분인데 도우미가 이를 입 밖에 꺼냈다.“예쁜 여자만 보면 연정이가 닮았다고 하네요. 얼마 전엔 연정이가 배우 누구더라, 심청아 닮았다고 했잖아요.”노진우의 말에 도우미가 웃었다.“우리 연정이가 예쁘니까 그러죠.”노진우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신경 쓰지 마세요.”강하리는 입꼬리를 당기며 미소를 지었지만 시선은 연정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실제로 연정이가 자신을 닮았다는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도우미가 닮았다고 말하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졌다.진작 지워버렸던 짐작들이 이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떠올라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개를 들어 옅은 미소를 머금은 구승훈의 얼굴을 보니 어색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그가 강하리에게 다가가 말했다.“괜한 생각 마.”하지만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내려 연정이를 바라보기만 했다.‘괜한 생각인 걸까?’왜 연정이에게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는 걸까, 왜 연정이만 보면 마음속에 행복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지는 걸까?강하리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들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했다.하지만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할 때 그 의심들은 저만치 사라져갔다.구승훈은 연정이를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고 연정이를 대하는 그의 태도도 무심했다.연정이가 그들의 아이라면 구승훈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다정함을 보여야 맞는데 그러지 않았다.그는 연정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연정이가 우유를 먹고 잠이 들자 도우미 아주머니는 강하리의 품에서 연정이를 떼어내 방으로 돌려보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여전히 정신이 팔렸다는 것을 알았고 구승재가 계속해서 주의를 끌려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