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재는 순간 깜짝 놀랐다.“형, 승유는 아닐 거야.”구승유는 그들 중 막내이자 가장 단순한 사람이기도 했다.방금 밖에서 그렇게 물어보긴 했지만 구승유가 정말로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죽어가고 있는 저쪽 도우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순진할수록 이용당하기 쉽지.”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손연지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강하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어떻게 됐어? 팔찌에 관해 물어봤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팔찌가 망가져서 업체에 맡겼어.”손연지가 당황했다.“뭐? 멀쩡한 팔찌가 왜 망가져?”팔찌 얘기에 강하리는 다소 침울한 표정이었지만 한숨을 내쉬며 손연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했다.“미친, 고이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땐 송유라에게 이용당하다가 이젠 문연진이야? 생각이란 걸 하긴 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 때론 목 위의 것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긴 하지.손연지는 분노에 가득 차서 무슨 말을 하려다가 문득 상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세상에, 누가 보면 그 개자식이 평생 여자라곤 못 만나본 사람인 줄 알겠어!”강하리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어찌 됐든 이번엔 그녀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간 거다.그녀가 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손연지가 쫄래쫄래 따라왔다.“둘이 화해한 거야?”사실 그녀는 다소 내키지 않았다.구승훈 그 개자식 주위엔 여자들이 끊이지 않고 집안일도 복잡한데 강하리는 그와 만나고 거듭 상처만 받았다. 어머니에 이어 아이까지 잃었으니까.그런 남자는 멀리하는 게 상책이었다.아무리 잘난 남자라고 해도 결국 상처만 준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그동안 강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손연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친구로서 그녀의 곁을 지킬 수는 있어도 인정하긴 싫지만 강하리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건 구승훈 그 개자
“그리고 노민우는 처음부터 단순히 엔조이 상대야. 내가 진지해지는 순간 그게 불행의 시작인 거지.”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가 피식 웃었다. 때론 이렇듯 이성적인 손연지가 부러웠다.“알았어, 그러면 이제부터 노민우 얘기는 하지 말자.”손연지 웃었다.“그게 맞지. 내 친구는 날 힘들게 하지 않아.”두 사람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연지가 방으로 돌아갔고 샤워를 마친 강하리는 업무를 처리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어느새 넋이 나갔다.오늘 떠날 때 구승훈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걸 보아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원래는 묻고 싶지 않았다.둘 사이에는 언제나 서로에게 조금의 공간을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특히 이렇듯 애매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문득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일이 있으면 그녀도 그와 함께 짊어지고 싶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뜨는 구승훈의 이름을 바라보았지만 한참을 고민하다 포기했다.그녀는 컴퓨터를 닫고 무의식적으로 수면제를 먹으려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움직임을 멈췄다.잠시 후, 그녀는 일어나서 밖에 있는 술장으로 다가가 와인 한 잔을 따른 뒤 창문에 기대어 느긋하게 마셨다.구승훈이 구씨 가문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도우미는 구동근에게 숨이 겨우 붙어 있을 정도로 맞았지만 여전히 강하리만 언급했다.구승훈도 손을 썼지만 원하는 답은 얻지 못했다.검은색 마이바흐는 밤새 소리 없이 달렸고 구승훈은 정처 없이 운전하다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차를 몰고 강하리의 집 밑으로 와버렸다.멀리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그는 차 옆에 서서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이고 가볍게 한 모금 들이마신 후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숨을 뱉었다.한입 가득 연기를 내뿜으면서 고개를 드는 순간 4층 발코니에서 작은 불빛 아래 드리워진 실루엣을 발견했다.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천천히 와인을 홀짝이며 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었다.구승훈의 움직임
남자의 말을 들은 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그녀의 마음속 어딘가 요란하게 흐트러지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날 재워주려고 온 거 맞아?”구승훈의 말에 담담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그렇다면 내려올래?”강하리는 전화기를 꽉 움켜쥐고 대답하지 않다가 잠시 후 침실로 들어가 패딩을 뒤집어쓰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달빛 아래 남자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고 그의 눈빛에는 부드러움이 묻어났다.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하며 고요함을 깨뜨렸다.“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구승훈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며 성큼성큼 강하리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보고 싶어서 왔어. 또 잠이 안 와?”강하리가 입술을 다물고 웃었다.“아니, 이제 막 자려고.”구승훈이 나지막이 웃었다.“내가 재워줄게.”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구승훈 씨, 무슨 일 있지?”멈칫한 구승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는 늘 똑똑하고 예리하다.하지만 이번 일은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말하기 싫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고통받게 할 수는 없었다.“아니, 별일 없으면 너 보러 오지도 못해?”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구승훈이 갑자기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들었다.“하리야, 달빛이 이렇게 예쁜데 진지한 얘기나 해야겠어?”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곧바로 강하리를 차 뒷좌석에 내려놓았다.“구승훈....”강하리가 겨우 이름만 부르는데 남자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패딩 안에는 얇은 잠옷만 입고 있었고 구승훈의 큰 손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허리를 문지르자 강하리는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구승훈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잘 느끼네.”강하리가 힘껏 그의 허리를 꼬집었다.“허튼짓 하지 마.”“한밤중에, 그것도 예쁜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어떤 남자가 가만히 있어?”“당신...”구승훈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옷깃을
구승훈은 강하리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맞춤하고는 나지막이 그녀를 달랬다.“하리야, 괜한 생각 말고 그냥 다 잘될 거라고 믿어.”강하리는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더니 미소를 지었다.“응.”믿을 수 없대도 어쩌겠나.하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구승훈 씨, 당신이 어떻게 연정이 사진을 갖고 있어?”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구승재가 얘기하다가 보내준 거야. 네가 연정이 좋아하는 거 알고 너 기쁘게 해주려고 보냈지.”강하리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괜한 생각이겠지.“아파트로 가서 잘까? 이렇게 늦었는데 손연지 씨 방해하지 말고.”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자 구승훈이 웃었다.“걱정하지 마, 가서 아무 짓도 안 하고 그냥 너 재워주기만 할게. 내일 아침 일찍 연정이 선물 사러 가자.”연정이 얘기에 강하리는 끝내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구승훈은 말하면 말한 대로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강하리를 안은 채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 침실 밖으로 나오니 구승훈이 부엌에서 죽을 끓이고 있었다.아침 햇살이 그의 몸에 쏟아지자 강하리는 문득 아늑함을 느꼈다.“뭐 하는 거야?”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 대표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팥죽이지.”강하리는 웃으며 부엌문으로 다가가 문틀에 고개를 옆으로 기댄 채 남자의 느긋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감상하고 있었다.“계속 보면 나 죽 못 끓여.”문득 구승훈의 잠긴 목소리가 들리며 그가 다가와 강하리를 안고 테이블에 올리자 강하리가 웃으며 밀어냈다.“하지 마. 연정이 선물 사러 가야 하잖아.”구승훈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보다 연정이가 더 중요해?”강하리는 여전히 두 눈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몰랐어?”그녀는 구승훈을 밀어낸 뒤 밖으로 나갔고 구승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언젠가 강하리가 연정이가 자기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소홀히 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도우미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세 남자가 굳어버렸고 구승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연정이가 강하리를 닮은 건 사실이었다.막 태어났을 때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는데 이제 커서 얼굴이 뚜렷해지면서 이목구비가 어딜 보나 강하리와 닮아 있었다.하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쉽게 발견할 수는 없는 부분인데 도우미가 이를 입 밖에 꺼냈다.“예쁜 여자만 보면 연정이가 닮았다고 하네요. 얼마 전엔 연정이가 배우 누구더라, 심청아 닮았다고 했잖아요.”노진우의 말에 도우미가 웃었다.“우리 연정이가 예쁘니까 그러죠.”노진우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신경 쓰지 마세요.”강하리는 입꼬리를 당기며 미소를 지었지만 시선은 연정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실제로 연정이가 자신을 닮았다는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도우미가 닮았다고 말하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졌다.진작 지워버렸던 짐작들이 이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떠올라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개를 들어 옅은 미소를 머금은 구승훈의 얼굴을 보니 어색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그가 강하리에게 다가가 말했다.“괜한 생각 마.”하지만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내려 연정이를 바라보기만 했다.‘괜한 생각인 걸까?’왜 연정이에게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는 걸까, 왜 연정이만 보면 마음속에 행복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지는 걸까?강하리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들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했다.하지만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할 때 그 의심들은 저만치 사라져갔다.구승훈은 연정이를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고 연정이를 대하는 그의 태도도 무심했다.연정이가 그들의 아이라면 구승훈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다정함을 보여야 맞는데 그러지 않았다.그는 연정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연정이가 우유를 먹고 잠이 들자 도우미 아주머니는 강하리의 품에서 연정이를 떼어내 방으로 돌려보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여전히 정신이 팔렸다는 것을 알았고 구승재가 계속해서 주의를 끌려
구승훈은 강하리의 두 눈에 반짝이던 빛이 사그라드는 걸 발견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내가 실례했네.”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그의 품을 떠나 돌아서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그 후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들면서 이상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구승훈은 그녀의 눈빛에서 우울함을 느낄 수 있었다.노진우의 집에서 돌아오는 내내 강하리는 넋이 나가 있었고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자 시종일관 차가운 손은 아무리 노력해도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하리야... 미안해.”강하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당신이 달래준 건데 내가 미안하지.”구승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점점 더 죄책감을 느꼈다. “하리야, 우리 사이에 왜 그런 말을 해?”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그녀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오늘 밤에 아파트로 가. 널 그냥 두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난 괜찮아.” 강하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구승훈은 계속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강하리는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다시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었다.구승훈은 조용히 시동을 걸고 차를 몰고 나갔다.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다.최하영의 전화였다.도우미 입에서 구동근의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약물의 출처를 조사해야 했다.구동근에게 탄 독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었고 구승훈은 어젯밤 집에서 나오자마자 최하영에게 전화를 걸어 독약의 출처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지금쯤 아마 결과가 나왔을 거다.“나 통화 좀 할게.”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리퍼를 갈아 신고 침실로 향했다.사실 조금 전 노진우 집에서 돌아올 때만 해도 연정이가 물었던 젖병을 몰래 갖고 와 친자 확인을 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결국 포기했다.괜히 빈틈을 노려 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강하리는 가쁜 숨을 내쉬며 가슴 속 답
구승훈은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당연히 안다.그녀가 혼자서 아이의 복수를 하려던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강하리는 절대 나약하지 않았고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하지만 아이 문제는 다른 일과 달랐다.아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아이에 관해서라면 늘 감정적으로 굴었다.구승훈은 모험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 그녀 본인도 안전하지 않았다.지난 이틀 동안 구동근이 움직이지 않았어도 언제 공격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녀를 위험에 내버려둔 것도 이미 내키지 않는데 여기에 아이까지 끌어들일 수 없었다.구승훈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고개를 돌려 강하리와 두 눈을 마주했다.“알겠어, 하리야.”강하리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며칠 전에 누가 할아버지께 독을 탔는데 독을 탄 사람이 네가 지시했다고 했어.”멈칫한 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당신 할아버지는 그걸 믿어? 내가 사람을 시켜 독살할 거였으면 그 사람은 벌써 몇 번이나 죽었어.”구승훈도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났지만 이내 어두워진 눈빛으로 말했다.“할아버지가 믿든 안 믿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걸 빌미로 무슨 짓을 하느냐는 거지. 그래서 애초에 너한테 끼어들지 말라고 한 거야. 하리야, 난 더 이상 나 때문에 네가 또 상처받는 건 원치 않아.”이번 일은 누가 지시했든 분명 그와 연관되어 있을 테고 이번에도 그가 강하리를 끌어들인 셈이었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쓴웃음을 내뱉었다.“구승훈 씨,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있어.”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아이에게 사고가 생겼을 때처럼.구승훈이 그녀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알아채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강하리는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덧붙였다.“때론 피하는 것보다 부딪치는 게 정답일 수도 있어.”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부터 이 여자가 이렇게 변한
“왜?”구승재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렸다.“문연진이 임신했어.” 구승훈의 얼굴이 살짝 구겨지다가 곧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임신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문연진이 구정우와 몇 번이나 밤을 보냈는지는 모른다.하지만 하필 문씨 가문이 몰락하는 시기에 문연진이 임신할 줄이야.“어젯밤에 문원진이 깨어나자마자 할아버지한테 연락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할아버지가 문연진과 구정우 결혼에 동의했어. 그리고 문씨 가문 도와줄 생각인 것 같아.”구승훈의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그럼 남 걱정 못하게 본인 처지부터 곤란하게 해드려야겠네. 내가 전에 시켰던 일 진행해.”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참 후 대답했다.“알겠어.”전화를 끊은 구승훈이 노진우에게 연락했고 노진우는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강하리 씨가 눈치챘나요?”“아니.”말을 마친 구승훈이 잠시 멈칫했다.“강하리 한동안 나랑 있으니까 당분간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승재한테 연락해.”노진우는 서둘러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 대표님.”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방으로 돌아갔고 그가 눕자 강하리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구승훈의 두 눈에 미소가 담기며 강하리를 품에 꼭 껴안고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춘 뒤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그날 SH그룹은 갑작스럽게 큰 사건이 터졌다.15년 전 구씨 가문 소유의 건물이 부실 공사로 인해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하룻밤 사이에 갑작스럽게 무너졌고 당시 비를 피하기 위해 건물 안에 있던 민간인 근로자 여러 명이 건물 아래에 깔렸다.당시 구씨 가문 가주였던 구명진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보상금을 줄이기 위해 모든 책임을 민간 노동자들에게 전가했고 아래층에 매몰된 인부들은 최소한의 보상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건물 붕괴에 대한 책임까지 떠안게 되었다.구명진이 직접 덮었던 이 사건이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드러날 줄이야.마침 주식시장에서 큰 변동을 겪은 구씨 가문은 다시 한번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그리
거칠게 원하던 구승훈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순간 강하리는 비틀거렸고 구승훈이 단숨에 그녀를 품에 낚아챘다.“너무 좋아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겠어?”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좋기는 개뿔!”구승훈은 웃으며 강하리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응, 나도 좋았어.”“...”개자식과 더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없었다. 뻔뻔한 걸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씻겨주고 그녀를 안아 침대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손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옷을 끌어당겨 입었고 구승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어디 가?”“연지 보러 갈 거야. 오늘 밤엔 연지랑 잘 거야.”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강하리, 넌 내 아내야.”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았다.“아직 결혼 안 했잖아.”구승훈이 그녀를 껴안았다.“그러면 내일 혼인신고 하러 갈래?”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며 문득 지난번에 구승훈이 혼인신고 하자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그러다 그녀에게 돌아온 건 심미현의 죽음과 오지 않는 구승훈이었다.강하리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구승훈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지난번 같은 일은 없어.”강하리가 그를 돌아보았다.“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기면...”구승훈의 짙고 검은 눈동자에 밝은 빛이 비쳤다.“또 그런 일이 생기면 난 고자가 될 테지만 걱정하지 마, 강 대표님. 내가 손으로도 잘 모실 수 있으니까.”“... 닥쳐!”말을 마친 그녀가 잠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다가 두 걸음도 못 가서 갑자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또 콘돔 안 썼어?”강하리는 말하며 지난번에도 구승훈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구승훈, 미쳤어? 난 지금...”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걱정하지 마, 임신 안 해.”강하리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고 구승훈은 손으로 강하리의 턱을 어루만지기만 했다.“나 묶었어.”
손연지는 식사를 마치고 잠을 청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아직 몸조리가 필요한 그녀는 도저히 찾아갈 데가 없어 결국 강하리를 찾으러 B시까지 왔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손연지는 자신이 겪은 일을 몇 마디로 설명했지만 강하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구승재도 별말 없이 바로 손연지에 대해 알아본 사실을 강하리에게 전했고 대충 손연지가 말한 내용과 거의 같았지만 몇 가지 세부적인 내용이 빠져 있었다.손연지가 병원에서 손가락질받고 있었다는 것, 노민우의 약혼녀라는 사람이 손연지를 머물 곳도 없게 궁지로 내몰았다는 것 등등...손연지는 노민우를 그냥 두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노민우의 어머니가 노민우 몰래 손연지를 노씨 가문으로 데려와 심한 모욕을 준 것뿐이었다.그래도 손연지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 성격은 아니라 노씨 가문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고 상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손연지에게 수표를 던지며 연성을 떠나라고 했다.손연지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고 노민우의 결혼을 파탄 낼 생각도 없었기에 처음엔 연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노민우의 어머니가 그녀의 부모님까지 찾아갔다.강하리는 죄책감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손연지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하리를 뒤에서 껴안았다.“나를 이렇게 걱정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어떻게 같아?”구승훈은 납득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뭐가 다른데?”강하리는 시선을 떨구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녀를 정말로 기쁘게 만드는 건 별로 없었다.어릴 적 강찬수의 가정 폭력부터 나중에 구승훈에게 받은 상처까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손연지가 곁에 있었고 그녀에게 손연지는 가족이었다.강하리는 대답이 없었고 구승훈도 더 묻지 않아 거실은 무척 조용했다.하지만 조용한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고 구승훈이 귓불을 깨물며 그녀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금 긴장한
구승훈은 강하리를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웃었다.구승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강하리를 한 손으로 잡아당긴 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오늘 밤에 보상해 줄 거야?”강하리는 순간 조금 전 당황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고 손연지가 지금 슬픈 상황에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있어.”구승훈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그러면 손으로만 하는 건?”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감싸자 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내려가선 얌전히 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내 말은 들어야지.”손연지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노민우였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는 못 본 척했지만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하지만 잠시 후 구승훈의 휴대폰도 울렸고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전화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노민우가 아닌 노민준의 전화였고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그 주사 효과가 어때?”구승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괜찮아. 지난 이틀 동안 상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노민준이 건넨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그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였다.노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말을 마친 노민준이 잠시 멈칫했다.“참, 내 동생이 할 말이 있대.”곧이어 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훈아, 손연지는 지금 어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물어봐?”“승훈아, 나도 네가 강하리 씨
강하리는 사실 자신이 꽤 한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거듭되는 상처에도 수없이 용서했다.마치 구승훈이 없으면 모든 게 그대로 멈춰버릴 듯이.구승훈이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구승훈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또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당해도 싸.”강하리는 손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손연지는 다가와 강하리를 껴안았다.“구승훈 이 개자식이 전생에 우주라도 구한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연지의 어깨에 기대었다.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위로에 가까웠다.“그러는 넌, 대체 무슨 일인데?”자기 일을 언급하자 손연지는 순식간에 흥미가 사라진 표정이었다.“별건 아니야. 사실... 하리야, 나 임신했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뭐?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아기는?”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노민우는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있었어. 노민우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사실 아이도 남길 생각 없었어. 노씨 가문이나 노민우에겐 관심 없어. 40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술하려고 했는데 그날 밤 내가 당직일 때 노민우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렸어. 병원에서도 노씨 가문에 밉보일 수 없어서 날 해고했어.”강하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러고 나서?”손연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다음 날 아이를 지웠는데 노민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낙태한 걸 알고는 나한테 화를 냈어.”강하리의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다.노민우가 약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 손연지에게 연락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멀쩡했었다.고작 얼마나 됐다고 노민우 그 개자식이 손연지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건지!“왜 나한테 말 안 했어?”손연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말해도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노민우를 그냥 두지는 않았어.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약혼까지 했는데 내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노씨 가문에 찾아가서 업무에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