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일이야?”막 말을 꺼내던 그녀가 멈칫했다.그녀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잠겨 있었고 손연지는 순식간에 그녀의 상황을 알아차렸다.“쯧, 못 들은 걸로 해. 잘 지내나 보다.”강하리는 누가 봐도 갈라진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그, 내가 감기 기운이 좀 있어. 뭐라고 했어?”손연지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만해. 외박하고 이런 목소리를 내는데 누가 모를 줄 알아?”강하리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뭐라고 했어? 구승훈이 왜?”그러자 손연지가 본론으로 들어갔다.“누가 죽이려 하는 거 몰랐어?”놀란 강하리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해갔고 손연지가 망설이며 말을 이어갔다.“인터넷에서 그러더라. 네가 직접 가서 물어봐.”강하리가 입술을 축였다.“그래, 알았어. 고마워, 연지야.”통화를 마친 강하리는 인터넷에 들어가서야 오늘 하루 종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구명진이 구승훈을 죽이려 했다는 기사를 보며 마음이 아려왔다.저 개 같은 남자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강하리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고 구승훈은 뒤를 돌아보다가 맨발로 부엌문 앞에 서 있는 강하리를 발견했다.“왜 맨발로 여기 왔어?”그가 다가가 강하리를 안아주려는데 그녀가 물었다.“당신 아버지가 당신 죽이려고 했어?”구승훈이 멈칫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인터넷에 떠도는 헛소문 믿지 마.”“구승훈!” 강하리는 타는 듯한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왜 나한테 말 안 했어?”구승훈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에 내려주었다.“속상해?”강하리가 시선을 돌렸다. 속상했다.이 망할 남자가 대체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걸까?“속상하면 밤에 힘들다고 하지 마.”멈칫한 강하리가 발로 그의 배를 차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발목을 잡은 뒤 몸을 숙여 키스했다.“걱정하지 마. 인터넷 얘기는 사실이 아니야. 사실 차를 보내 나를 미행하다가
구승재는 한숨을 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형, 강하리 씨랑 두 사람 조심해.”구승훈이 답했다.“너도.”구승재는 미소 지었다.“난 괜찮아. 나한테까지 어쩌진 못해.”대답을 마친 구승훈이 전화를 끊었고 강하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고마워.”이번 구승훈의 행동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구승훈은 그녀의 코를 꼬집었다.“고맙다는 인사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야.”강하리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밀어냈다.이 개자식은 빈틈만 보이면 어떻게든 이득을 취하려고 들었다.“당신이 위험해진 거야?”강하리가 나지막이 묻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위험했으면 구씨 가문 떠났을 때부터 일이 생겼겠지. 문제는 너야, 하리야. 네 옆에 힘 좋은 사람 둘 정도 붙이는 거 어때?”강하리는 거절하지 않았다.구동근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자신의 곁을 지켜줄 사람을 찾고 싶었다.그녀가 흔쾌히 동의하는 모습에 구승훈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안으며 입을 맞추었다.“강 대표님 이젠 얌전하네. 그땐 가시 곤두세운 고슴도치 같더니.”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밀어낸 뒤 부엌으로 향했다.“뭐 먹고 싶어?”구승훈은 그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왔다.“뭐든 만들어주는 대로 먹을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냉장고를 열어 그가 좋아하는 음식 몇 가지를 꺼내 고개를 숙이고 요리를 시작했다. 한편 통화를 마친 구승재가 구동근에게 다가갔다.구승훈이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구동근은 또다시 화가 나서 쓰러질 것 같았다.“그 망할 놈이 정말 구씨 가문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거야?”구승재는 옆에서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지. 그러게 누가 뭐에 홀려서 그렇게 훌륭한 며느리를 받아주지 말랬나.’구동근이 구승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지만 구승훈은 이미 번호를 차단한 상태였고 화가 난 구동근이 전화기를 바닥에 내리쳤다.막 안으로 들어선 여초연은 눈앞에서 망가진 휴대폰을 발견했고 여초연을
연정이가 열이 난다는 소식을 들은 구승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둘러 노민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문 앞에 서 있던 문연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구승재의 표정이 좋지 않아 강하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엿듣고 싶었는데 이게 뭘까.그녀가 지금 뭘 들었지? 아이? 구승훈과 강하리의 아이?그게 아니면 구승재가 저렇게 초조해할 이유가 없었다.아이가 열이 나는데 급히 노민준에게 연락해 병원 특수 통로까지 열어달라고 한다니.전화 상대는 노진우인데 한낱 경호원인 노진우가 뭐라고?‘하지만 어떻게?’분명 구승훈과 강하리의 아이는 죽었고 그때 병원 사람들도 전화해서 아이가 죽었다고 했다.순간 그녀는 문원진의 말이 떠올랐다.‘아이가 죽지 않은 걸까? 죽지 않고 구승훈이 숨긴 걸까?’문연진의 손톱이 살을 깊숙이 파고들며 머릿속에 수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그 아이를 절대 그냥 둘 수가 없다.만약 노진우 아이라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게 누가 강하리를 지키라고 했나.하지만 그 아이가 강하리와 구승훈의 아이였다면 더더욱 죽여버려야 한다.문씨 가문은 두 사람 때문에 풍비박산 났는데 무엇 때문에 그 아이는 멀쩡히 살아 있단 말인가!문연진은 주먹을 꽉 쥔 채 살기 어린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갑자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여초연이 보였다.문연진의 눈에 머금었던 불길한 독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입꼬리를 올리며 상대를 불렀다.“어머님.”여초연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문연진 씨, 더 이상 승훈이랑 하리 양 방해하지 마세요. 두 사람 해치는 일도 하지 말고요.”문연진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제가 강하리보다 못한 게 뭐에요? 전 모든 면에서 강하리에게 뒤처지지 않아요.”여초연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가 유난히 부드러웠다.“승훈이가 그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죠.”순간 문연진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지만 금세 다시 억지로 미소를 지었
같은 시각 노진우는 연정이를 데리고 검진에 호흡기치료까지 받은 뒤 병원을 나섰고 그들이 막 떠나자 여러 대의 차량이 뒤따라갔다.노진우는 시종일관 매끄럽게 차를 몰았고 연정이는 가정부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노진우가 백미러를 통해 뒤를 살펴보면서 차 안의 온도를 올리는데 고개를 드는 순간 갑자기 표정이 확 변했다.반대편에서 오던 밴 차량이 통제 불능 상태로 이쪽으로 돌진했다. 노진우가 급하게 핸들을 잡았지만 뒤차가 쾅 소리를 내며 차 뒷부분을 들이받았다.아주머니가 비명을 지르고 노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연정이 꽉 안으세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한 다음 곧바로 액셀을 밟고 차를 몰고 나갔다. 동시에 손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뒤에 따라오는 차 알아서 처리해.”그는 말을 마친 후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원래 그를 따라나섰던 두 대의 경호 차량도 재빨리 이쪽으로 다가왔다.노진우는 정신을 꽉 부여잡았다. 현재 뒤따라오는 차가 최소 대여섯 대가 되는데 그는 이번에 네 사람만 데리고 나왔다.머릿수로는 상대에게 밀리기에 속도로 경쟁해야 했다.가정부는 뒤에서 연정이를 꼭 붙잡고 있었는데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노진우 씨, 대체 무슨 일이에요?”노진우는 대답하지 않고 액셀을 한 번 더 밟았다.그는 교외로 달리고 싶지 않았지만 코너를 돌려고 할 때마다 교차로를 막고 있는 차가 나타났다.노진우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고 뒤에 있는 가정부와 연정이를 힐끗 바라보았다.“제가 지금 최대한 저 사람들과 거리를 벌려서 앞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일부러 수풀로 들어갈 테니까 속도 늦추면 연정이랑 차에서 내려요. 그리고 옆 수풀에 숨어서 구승재 씨가 도착할 때까지 나오지 마세요. 알겠어요?”가정부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럼 노진우 씨는...”“내 말 알겠냐고요!”가정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고 노진우는 침묵했다.“제발 연정이 지켜주세요. 부탁드립니다.”말을 마친 그는 다시 한번 한계에 이른 속도로 달렸다.지금 구승훈에게 전
노진우의 전화를 받은 구승재는 순간 당황했다가 서둘러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뛰어가며 그는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구승훈과 강하리가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오자 구승훈은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먼저 씻어.”그가 강하리에게 말하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갈아 신고 화장실로 향했다.강하리가 화장실에 들어간 후에야 구승훈이 전화를 받았다.“형, 노진우와 연정이가 쫓기고 있어.”구승훈의 표정이 확 했다.“뭐? 무슨 일이야?”구승재도 잘 몰랐기에 노진우의 말을 구승훈에게 반복할 뿐이었다.“지금 저쪽으로 가고 있으니 서둘러 와.”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재빨리 화장실로 향했다.“나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강하리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무슨 일인데?”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괜찮아,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그렇게 말한 후 그는 곧장 문밖으로 나갔고 강하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구승훈 씨.”구승훈의 걸음이 멈칫했고 강하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빨리 와.”고개를 끄덕인 구승훈은 더 지체하지 않았고 위층에서 내려오기 바쁘게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더 이상 노진우 측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구승훈은 휴대폰을 옆으로 던지고 액셀을 밟으며 달려 나갔다.그가 도착했을 때 구승재도 막 도착했고 수풀 근처 차량 흔적이 지나치게 선명해 두 사람은 굳이 애를 쓰지 앟아도 노진우가 스쳐 지나간 곳을 찾았다.하지만 두 사람이 다가갔을 땐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가정부만 보였고 연정이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던 구승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급히 가정부를 향해 달려갔다.“형, 누가 약물을 주사한 것 같아.”구승훈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찾아!”구승재는 서둘러 대답한 뒤 부하들을 이끌고 주변을 둘러보았다.구승훈은 서리가 내린 듯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 서 있었고 구승재는 돌아서는 순간 그의 손이 떨리고 있다
가정부는 이 재벌가 사람들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연정이를 찾지 못하면 누구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구 대표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연정이를 지키지 못했어요. 제 탓입니다.”구승훈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그의 눈에는 극도로 억눌린 복잡한 감정이 묻어났다.“누가 기절시켰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봤나요?”“대표님, 저는 연정이를 안고 수풀 속에 숨어 있었는데 누군가 우산을 들고 다가와서 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구승훈은 병동에서 나와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꺼냈다.하지만 몇번이나 시도해도 불이 붙지 않자 그는 담배를 라이터와 함께 손에 움켜쥐고 힘껏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내리쳤다.“형...”구승재가 옆에서 황급히 불렀다.이마를 짚은 구승훈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구승재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형, 어떡하지? 연정이를 잃어버렸는데 이제 어떡해?”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가서 문연진이랑 구정우 전부 잡아서 때려!”구승재는 서둘러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한 뒤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시간이 1분 1초 흘렀고 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문자를 바라보았다.[일은 어떻게 됐어?][잘 안됐어? 왜 아직도 안 와?][언제 와? 기다릴게.]구승훈은 한참 동안 전화를 붙들고 있다가 답장을 보냈다.[오늘 못 갈 것 같으니까 먼저 자.]전송을 마친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구승재에게 말했다.“일단 하리가 모르게 해.”구승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휴대폰으로 보낸 메시지를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심란했다.서재를 두어번 둘러보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강하리, 네 딸 살아있는 거 알아?]강하리의 머릿속이 윙윙거렸다.몇 초가 지나서야 메시지 의미를 파악했고 거의 순식간에
강하리의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었고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물었다.“아기 어딨어? 아이 보고 싶어. 구승훈, 아이 좀 보게 해줘!”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말하지 않았다.강하리는 침묵하는 상대 때문에 마음이 답답했다.“나한테 아이 안 보여주려는 거지?”그녀가 묻자마자 구승훈 쪽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노진우 씨 가족분 있나요?”구승재는 서둘러 답했다.“선생님, 노진우 씨 어떻게 됐나요?”강하리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얼굴이 한층 더 하얗게 질렸다.“지금 병원에 있어? 구승훈 씨, 병원이야? 노진우 씨가 왜? 연정이가 우리 아이지? 구승훈 씨, 연정이는?”구승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대답했다.“그래, 병원에 있고 노진우가 좀 다쳤어. 걱정하지 마.”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그녀에게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지금 갈게.”하지만 구승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하리야, 집에서 기다려. 내가 돌아가서 다 얘기할게.”“구승훈!”“하리야, 얌전히 있어. 내가 연정이 데리고 갈게, 알았지?”강하리의 눈가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왜 우는지는 그녀도 잘 몰랐다.그녀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 기다릴게.”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운 돌로 짓누르는 듯 숨이 턱턱 막혔다.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렸다.“형, 하리 씨도 안 거야?”하지만 구승훈은 옆에 있는 응급실 문만 쳐다보며 물었다.“노진우는 어때?”구승재는 고개를 저었다.“왼쪽 다리뼈가 골절돼서 수술할 수밖에 없고 추후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른대.”“연정이 소식은?”구승재는 구승훈을 향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형, 하리 씨한테는 말하지 마. 혹시라도...”구승훈은 두 눈을 감았다.“승재야, 내가 미안할 짓을 했어.”이렇듯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신시키는 게 아닌데. 안 그러면 연이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이번에는 구승훈이 전화조차 받지 않았고 강하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구승훈이 오지 않는다면 그녀가 갈 것이다.그런데 집을 나서자마자 아파트 아래층에서 구동근이 십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녀를 막아서고 있었다.“강하리 씨, 순순히 따라갈 건가, 아니면 내가 손을 써야 하나?”하지만 강하리 옆에 있는 경호원이 앞을 막아 나섰다.“어르신, 강하리 씨는 건드리지 마세요.”구동근이 차갑게 웃었다.“감히 너희가 날 막아? 처리해!”그의 명령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곧바로 움직였고 현장은 난장판이 되었다.아파트 경비원들은 멀리서 지켜보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이쪽으로 오지도 못했다.강하리가 경찰에 신고하려는데 전화가 걸리기도 전에 경호원에게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제압당했다.구동근이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경찰에 신고하려고? 강하리, 내가 그걸 무서워할 줄 알아?”강하리는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 씨가 등 돌릴까 봐 무섭지도 않으세요?”“너 때문에 구씨 가문까지 망치는 애를 내가 왜 신경 써?”말을 마친 그가 경호원에게 눈짓했다.“데려가!”연정이의 옷을 병원에 가져와 가정부가 확인했을 땐 날이 이미 환해졌다.가정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구승훈의 가슴엔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구승재도 안타까운 눈빛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구승훈에게 말을 걸었다.“어젯밤 그 사람들 일행 아니야. 한쪽은 문연진이 보낸 게 맞는데 다른 한쪽은 확실하지 않아. 조금 전 확인했는데 구정우 쪽 사람들도 아니야. 형, 할아버지가 한 게 아닐까?”구승훈이 말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강하리 옆에 있던 경호원의 연락에 전화를 받자 그의 표정이 확 변했다.“알겠어.”그는 전화를 끊고 구동근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원하는 게 뭐에요?”구동근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왜, SH그룹을 무너뜨리겠다며? 그럼 난 강하리도 죽일 거다. 뭘 선택할지는 네가 알아서 해!”말을 마친 그는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