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부는 이 재벌가 사람들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연정이를 찾지 못하면 누구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구 대표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연정이를 지키지 못했어요. 제 탓입니다.”구승훈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그의 눈에는 극도로 억눌린 복잡한 감정이 묻어났다.“누가 기절시켰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봤나요?”“대표님, 저는 연정이를 안고 수풀 속에 숨어 있었는데 누군가 우산을 들고 다가와서 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구승훈은 병동에서 나와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꺼냈다.하지만 몇번이나 시도해도 불이 붙지 않자 그는 담배를 라이터와 함께 손에 움켜쥐고 힘껏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내리쳤다.“형...”구승재가 옆에서 황급히 불렀다.이마를 짚은 구승훈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구승재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형, 어떡하지? 연정이를 잃어버렸는데 이제 어떡해?”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가서 문연진이랑 구정우 전부 잡아서 때려!”구승재는 서둘러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한 뒤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시간이 1분 1초 흘렀고 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문자를 바라보았다.[일은 어떻게 됐어?][잘 안됐어? 왜 아직도 안 와?][언제 와? 기다릴게.]구승훈은 한참 동안 전화를 붙들고 있다가 답장을 보냈다.[오늘 못 갈 것 같으니까 먼저 자.]전송을 마친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구승재에게 말했다.“일단 하리가 모르게 해.”구승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휴대폰으로 보낸 메시지를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심란했다.서재를 두어번 둘러보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강하리, 네 딸 살아있는 거 알아?]강하리의 머릿속이 윙윙거렸다.몇 초가 지나서야 메시지 의미를 파악했고 거의 순식간에
강하리의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었고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물었다.“아기 어딨어? 아이 보고 싶어. 구승훈, 아이 좀 보게 해줘!”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말하지 않았다.강하리는 침묵하는 상대 때문에 마음이 답답했다.“나한테 아이 안 보여주려는 거지?”그녀가 묻자마자 구승훈 쪽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노진우 씨 가족분 있나요?”구승재는 서둘러 답했다.“선생님, 노진우 씨 어떻게 됐나요?”강하리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얼굴이 한층 더 하얗게 질렸다.“지금 병원에 있어? 구승훈 씨, 병원이야? 노진우 씨가 왜? 연정이가 우리 아이지? 구승훈 씨, 연정이는?”구승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대답했다.“그래, 병원에 있고 노진우가 좀 다쳤어. 걱정하지 마.”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그녀에게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지금 갈게.”하지만 구승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하리야, 집에서 기다려. 내가 돌아가서 다 얘기할게.”“구승훈!”“하리야, 얌전히 있어. 내가 연정이 데리고 갈게, 알았지?”강하리의 눈가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왜 우는지는 그녀도 잘 몰랐다.그녀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 기다릴게.”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운 돌로 짓누르는 듯 숨이 턱턱 막혔다.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렸다.“형, 하리 씨도 안 거야?”하지만 구승훈은 옆에 있는 응급실 문만 쳐다보며 물었다.“노진우는 어때?”구승재는 고개를 저었다.“왼쪽 다리뼈가 골절돼서 수술할 수밖에 없고 추후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른대.”“연정이 소식은?”구승재는 구승훈을 향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형, 하리 씨한테는 말하지 마. 혹시라도...”구승훈은 두 눈을 감았다.“승재야, 내가 미안할 짓을 했어.”이렇듯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신시키는 게 아닌데. 안 그러면 연이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이번에는 구승훈이 전화조차 받지 않았고 강하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구승훈이 오지 않는다면 그녀가 갈 것이다.그런데 집을 나서자마자 아파트 아래층에서 구동근이 십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녀를 막아서고 있었다.“강하리 씨, 순순히 따라갈 건가, 아니면 내가 손을 써야 하나?”하지만 강하리 옆에 있는 경호원이 앞을 막아 나섰다.“어르신, 강하리 씨는 건드리지 마세요.”구동근이 차갑게 웃었다.“감히 너희가 날 막아? 처리해!”그의 명령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곧바로 움직였고 현장은 난장판이 되었다.아파트 경비원들은 멀리서 지켜보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이쪽으로 오지도 못했다.강하리가 경찰에 신고하려는데 전화가 걸리기도 전에 경호원에게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제압당했다.구동근이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경찰에 신고하려고? 강하리, 내가 그걸 무서워할 줄 알아?”강하리는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 씨가 등 돌릴까 봐 무섭지도 않으세요?”“너 때문에 구씨 가문까지 망치는 애를 내가 왜 신경 써?”말을 마친 그가 경호원에게 눈짓했다.“데려가!”연정이의 옷을 병원에 가져와 가정부가 확인했을 땐 날이 이미 환해졌다.가정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구승훈의 가슴엔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구승재도 안타까운 눈빛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구승훈에게 말을 걸었다.“어젯밤 그 사람들 일행 아니야. 한쪽은 문연진이 보낸 게 맞는데 다른 한쪽은 확실하지 않아. 조금 전 확인했는데 구정우 쪽 사람들도 아니야. 형, 할아버지가 한 게 아닐까?”구승훈이 말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강하리 옆에 있던 경호원의 연락에 전화를 받자 그의 표정이 확 변했다.“알겠어.”그는 전화를 끊고 구동근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원하는 게 뭐에요?”구동근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왜, SH그룹을 무너뜨리겠다며? 그럼 난 강하리도 죽일 거다. 뭘 선택할지는 네가 알아서 해!”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는 연정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문연진을 바라보다가 물었다.“뭐라고?”문연진이 웃었다.“내 말 못 들었어? 그럼 다시 한번 말해줄게. 강하리, 네 아이는 죽었어. 완전히 죽었다고.”강하리는 순간 미친 듯이 달려들어 문연진의 목을 졸랐고 그녀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문연진은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강하리는 온몸의 힘을 동원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오직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아이를 위한 복수, 연정이를 위해 복수해야 한다. 문연진을 죽여야 한다!문연진은 목이 졸려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강하리는 힘이 별로 없었지만 이 순간 문연진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그녀의 얼굴을 벌겋다 못해 푸르게 변해갔다.이대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쯤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고 구승훈이 경찰과 함께 외부에서 들어왔다.안의 상황을 발견한 구승훈의 발걸음이 멈칫하다가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왔다.“하리야!”그가 부르며 앞으로 나아가 강하리의 손을 뗴어내려 했지만 이성을 잃은 강하리의 두 눈엔 증오뿐이었고 제자리에 굳어버린 듯한 손은 남자인 구승훈이 떼어내기도 버거웠다.강하리를 다치게 할까 봐 차마 힘도 쓰지 못한 채 구승훈은 옆에서 그녀를 달랬다.“하리야, 손 놔. 손 놔.”옆에 있던 류덕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이 모습을 보고 있었고 그가 다가가려는 순간 구승훈이 강하리를 품에 안았다.“하리야,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손 놔.”정신을 차린 강하리가 손에 힘을 탁 풀었고 탈진한 문연진이 바닥에 쓰러졌다.이를 본 류덕구는 급히 사람을 시켜 문연진을 데려가게 했다.“병원으로 보내.”구승훈이 류덕구를 바라봤고 류덕구가 고개를 끄덕였다.“전 어르신 상대하러 가볼게요.”류덕구가 떠난 후 강하리는 구승훈을 올려다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고 몸까지 떨리고 있었다.“구승훈 씨, 아이는? 아이는 어디 있어? 아이 데리고 나 만나러
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아이 데려갔으면 제대로 지켰어야지!”구승훈은 죄책감이 들면서도 안쓰러웠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여전히 똑같았다.“미안해. 하리야, 내가 미안해. 너한테도, 아이한테도.”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말을 꺼냈다.“구승훈, 다시는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말을 마친 그녀가 밖으로 나가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하리야.”“놔.” 강하리의 목소리가 차가웠다.“가지 마. 날 혼자 두지 마, 제발.”강하리는 눈가에 눈물이 툭 떨어지면서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고 구승훈은 곧바로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이대로 가면 영영 떠날 거라는 걸 잘 알았다.그녀를 놓아줄 용기가 없었던 그는 죽어도 보내려 하지 않았다.“다신 거짓말 안 할게. 하리야, 가지 마.”강하리는 몸부림을 치지 않고 그대로 안겨있었지만 시선을 내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엔 전혀 온기가 없었다.“구승훈, 이렇게까지 나한테 상처 준 걸로는 부족해?”구승훈의 몸이 굳어졌고 강하리는 이미 그에게서 벗어나 멀리 가버린 뒤였다.밖에서는 구동근이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강하리를 납치했던 경호원들은 경계하면서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구승훈, 할아버지한테 이런 식으로 할 거야!”구승훈은 굳어진 얼굴로 구동근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류덕구를 바라보았다.“불법 감금은 직접 보셔서 알겠고 아파트 아래에서 찍힌 영상도 보내드렸습니다. 불법 감금뿐만 아니라 대낮에 공개적으로 사람을 납치했어요. 부디 법대로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구승훈, 이 개자식!”구동근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구승훈이 경찰을 이용해 그를 상대할 줄이야.류덕구가 그를 힐끗 보았다.“어르신께서 잘못하셨죠.”말을 마친 그가 부하들에게 눈치를 줬다.“데려가.”구동근이 그렇게 잡혀갔고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밖에 있던 사람들이 다 가고 나서야 그녀도 걸음을 옮기려는데 구승훈이 다시 한번 나지막이 불렀다.“
“하리야!”깜짝 놀란 주해찬이 소리를 지르며 다가가 강하리를 부축하려 했지만 구승훈이 먼저 상대를 낚아채 품에 안았다.여자의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없이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주해찬은 별안간 참지 못하고 다가가 구승훈의 멱살을 잡았다.“구승훈 씨, 왜 자꾸 상처를 주는 겁니까!”구승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나랑 하리 일입니다. 주해찬 씨와는 영원히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은 채 차에 올랐고 주해찬은 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눈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뒤를 따랐다.강하리의 몸엔 별 이상이 없었고 단지 정신적인 충격 때문이었다.구승훈은 병실에 서서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주해찬은 병동 입구에 서 있었다.“구승훈 씨, 얘기 좀 하죠.”하지만 구승훈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주해찬 씨와 할 얘기 없습니다. 나랑 강하리 일에 당신이 끼어들 일은 전혀 없습니다.”말을 마친 그가 돌아서서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주해찬이 갑자기 길을 막았다.“구승훈 씨, 더 이상 상처 주지 말고 멀리 떨어져요. 알아들어요?”구승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며 차갑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그렇게 말한 후 그는 주해찬을 밀어내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구승재는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다가갔다.“형, 할아버지가 경찰서로 가는 길에 쓰러졌어.”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류 서장님 쪽에 의사가 없어? 아니면 내가 의사까지 불러줘야 해?”말문이 막힌 구승재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구승훈이 물었다.“문연진은 어딨어?”강하리는 문연진이 자기 입으로 연정이를 죽였다며 실토했다고 했지만 연정이를 보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연정이가 진짜로 죽었더라도 반드시 찾아낼 거다.“문연진은 유산할 뻔해서 응급실 갔다가 방금 병실로 옮겨졌어.”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연진의 병실로 향했다.이제 막 깨어난 문연진은
문 앞에 서 있던 구승재가 문연진의 말을 듣고 비웃었다.“문연진, 우리 할아버지 경찰서에 계시는데 정말 만나고 싶어?”문연진은 깜짝 놀라며 홱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봤다.“강하리 때문에 할아버지를 가뒀어?”하지만 구승훈은 눈빛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문연진이 갑자기 웃었다.“구승훈, 미쳤구나, 진짜 미쳤어. 그 여자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어?”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문연진, 진짜 미친 사람은 너지. 좋은 집안에서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는데 굳이 죽을 길을 찾아가잖아. 문씨 가문이 이렇게 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들 스스로 자초한 거야.”문연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를 잃었다.그녀도 이 결혼에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모든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만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는 눈물을 머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승훈 오빠는 애초에 내 것이었어야 해. 우린 집안 어른들이 맺어준 인연이야. 강하리가 남의 결혼 망친 나쁜 년이라고. 그래서 죽어야 하는 거야, 걔 말고 걔 아이까지도! 전부 다 죽어야 해!”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의 목을 조르고 벽에 밀쳤다.“연정이 어떻게 죽였어, 어디서 죽였어? 문연진,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줄게.”문연진은 낄낄 웃었다.“말하면 날 놔줄 거야? 구승훈, 내가 바보인 줄 알아?”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렸다.“문연진, 넌 지금 임신 중이고 정말 잘못했어도 법적으로 선처할 수 있어.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정말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멈칫하던 문연진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차에 치이고 절벽에 떨어져서 죽었어.”문연진의 말이 끝나자 구승훈의 손이 갑자기 느슨해졌다.구승재 역시 당황하며 바닥에 쓰러진 문연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강하리한테 네 손으로 연정이를 죽였다는 말이, 연정이와 노진우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다는 뜻이야?”문연진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콜록거리다가 한참 후 씁쓸하게 웃었다.“내 말 못 믿겠으면 절
주해찬은 얼굴을 찡그렸고 구승훈은 이미 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몸 상태가 안 좋아서 이틀 동안 더 지켜봐야 해.”말하며 그가 보온병을 들고 강하리 앞으로 다가왔다.“팥죽 끓여왔으니까 조금이라도 먹어.”강하리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고 고개를 돌린 얼굴은 붉게 물든 눈가와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만 보였다.구승훈이 보온병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주해찬이 그의 손을 막았다.“구 대표님, 제가 할게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주해찬 씨 참견이 지나친 것 같은데요?”그러나 주해찬은 놓지 않았다.“그쪽이 있으면 먹겠어요?”구승훈은 말문이 막혔지만 죽을 그릇에 따라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하리야, 네가 화난 건 알지만 밥은 먹어야지.”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마주한 뒤 한참이 지나서 입을 열었다.“구 대표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배고프면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가세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손가락을 들고 있던 구승훈의 손이 멈칫했다.‘구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두 사람 사이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다.그녀는 용서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 조금의 희망도 남겨두기 싫었다.구승훈은 심장의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하리야.”하지만 그녀는 답이 없었고 강하리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엔 어렴풋한 고통이 담겼다.“하리야, 나도 아기를 지키고 싶었어.”강하리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르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꼭 나한테 숨겨야만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거야?”구승훈은 말문이 막혔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든 강하리의 두 눈엔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구승훈, 당신은 처음부터 날 믿지 않았던 거지?”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조금이라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사고는 벌어졌다.“가, 다시는 오지 마.”구승훈은 가만히 앉아 있었고 강하리는 주해찬을 바라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