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야!”깜짝 놀란 주해찬이 소리를 지르며 다가가 강하리를 부축하려 했지만 구승훈이 먼저 상대를 낚아채 품에 안았다.여자의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없이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주해찬은 별안간 참지 못하고 다가가 구승훈의 멱살을 잡았다.“구승훈 씨, 왜 자꾸 상처를 주는 겁니까!”구승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나랑 하리 일입니다. 주해찬 씨와는 영원히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은 채 차에 올랐고 주해찬은 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눈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뒤를 따랐다.강하리의 몸엔 별 이상이 없었고 단지 정신적인 충격 때문이었다.구승훈은 병실에 서서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주해찬은 병동 입구에 서 있었다.“구승훈 씨, 얘기 좀 하죠.”하지만 구승훈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주해찬 씨와 할 얘기 없습니다. 나랑 강하리 일에 당신이 끼어들 일은 전혀 없습니다.”말을 마친 그가 돌아서서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주해찬이 갑자기 길을 막았다.“구승훈 씨, 더 이상 상처 주지 말고 멀리 떨어져요. 알아들어요?”구승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며 차갑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그렇게 말한 후 그는 주해찬을 밀어내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구승재는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다가갔다.“형, 할아버지가 경찰서로 가는 길에 쓰러졌어.”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류 서장님 쪽에 의사가 없어? 아니면 내가 의사까지 불러줘야 해?”말문이 막힌 구승재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구승훈이 물었다.“문연진은 어딨어?”강하리는 문연진이 자기 입으로 연정이를 죽였다며 실토했다고 했지만 연정이를 보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연정이가 진짜로 죽었더라도 반드시 찾아낼 거다.“문연진은 유산할 뻔해서 응급실 갔다가 방금 병실로 옮겨졌어.”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연진의 병실로 향했다.이제 막 깨어난 문연진은
문 앞에 서 있던 구승재가 문연진의 말을 듣고 비웃었다.“문연진, 우리 할아버지 경찰서에 계시는데 정말 만나고 싶어?”문연진은 깜짝 놀라며 홱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봤다.“강하리 때문에 할아버지를 가뒀어?”하지만 구승훈은 눈빛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문연진이 갑자기 웃었다.“구승훈, 미쳤구나, 진짜 미쳤어. 그 여자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어?”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문연진, 진짜 미친 사람은 너지. 좋은 집안에서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는데 굳이 죽을 길을 찾아가잖아. 문씨 가문이 이렇게 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들 스스로 자초한 거야.”문연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를 잃었다.그녀도 이 결혼에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모든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만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는 눈물을 머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승훈 오빠는 애초에 내 것이었어야 해. 우린 집안 어른들이 맺어준 인연이야. 강하리가 남의 결혼 망친 나쁜 년이라고. 그래서 죽어야 하는 거야, 걔 말고 걔 아이까지도! 전부 다 죽어야 해!”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의 목을 조르고 벽에 밀쳤다.“연정이 어떻게 죽였어, 어디서 죽였어? 문연진,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줄게.”문연진은 낄낄 웃었다.“말하면 날 놔줄 거야? 구승훈, 내가 바보인 줄 알아?”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렸다.“문연진, 넌 지금 임신 중이고 정말 잘못했어도 법적으로 선처할 수 있어.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정말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멈칫하던 문연진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차에 치이고 절벽에 떨어져서 죽었어.”문연진의 말이 끝나자 구승훈의 손이 갑자기 느슨해졌다.구승재 역시 당황하며 바닥에 쓰러진 문연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강하리한테 네 손으로 연정이를 죽였다는 말이, 연정이와 노진우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다는 뜻이야?”문연진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콜록거리다가 한참 후 씁쓸하게 웃었다.“내 말 못 믿겠으면 절
주해찬은 얼굴을 찡그렸고 구승훈은 이미 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몸 상태가 안 좋아서 이틀 동안 더 지켜봐야 해.”말하며 그가 보온병을 들고 강하리 앞으로 다가왔다.“팥죽 끓여왔으니까 조금이라도 먹어.”강하리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고 고개를 돌린 얼굴은 붉게 물든 눈가와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만 보였다.구승훈이 보온병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주해찬이 그의 손을 막았다.“구 대표님, 제가 할게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주해찬 씨 참견이 지나친 것 같은데요?”그러나 주해찬은 놓지 않았다.“그쪽이 있으면 먹겠어요?”구승훈은 말문이 막혔지만 죽을 그릇에 따라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하리야, 네가 화난 건 알지만 밥은 먹어야지.”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마주한 뒤 한참이 지나서 입을 열었다.“구 대표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배고프면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가세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손가락을 들고 있던 구승훈의 손이 멈칫했다.‘구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두 사람 사이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다.그녀는 용서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 조금의 희망도 남겨두기 싫었다.구승훈은 심장의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하리야.”하지만 그녀는 답이 없었고 강하리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엔 어렴풋한 고통이 담겼다.“하리야, 나도 아기를 지키고 싶었어.”강하리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르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꼭 나한테 숨겨야만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거야?”구승훈은 말문이 막혔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든 강하리의 두 눈엔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구승훈, 당신은 처음부터 날 믿지 않았던 거지?”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조금이라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사고는 벌어졌다.“가, 다시는 오지 마.”구승훈은 가만히 앉아 있었고 강하리는 주해찬을 바라
주해찬이 말했다.“구승훈 씨, 이번엔 더 이상 당신이 하리에게 상처 주게 두지 않을 겁니다.”말을 마친 그가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고 주해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동자에 고통이 번뜩였다.“형, 하리 씨한테 연정이가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왜 말 안 했어?”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옆에서 물었다.그렇게 말하면 강하리의 태도도 달라지지 않을까?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다음엔? 연정이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면 또다시 이걸 겪게 하라고?”말문이 막힌 구승재는 순간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가 정말 형을 용서하지 않으면 어떡해?”구승훈은 시선을 바닥으로 보낸 채 한참 후에야 말했다.“난 놓지 않을 거야.”주해찬이 음식을 사서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울음을 그친 뒤였다.그녀는 죽을 들고 조금씩 말끔히 먹어 치웠고 다 먹은 후에는 다시 조용히 누웠다.주해찬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강하리는 그 앞에서조차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주해찬은 밤새워서 지키는 대신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제야 손연지는 강하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고 도착했을 때 강하리는 이미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손연지가 다가가 살며시 손을 잡자 강하리의 눈가가 시큰해지며 눈물이 베개에 스며들었다.그녀는 눈을 뜨고 손연지를 바라보았고 손연지도 그런 그녀를 마주 보았다.“좀 자. 내가 옆에 있을게.”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그 누구도 편히 잠들 수 없는 밤이지만 아무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다음 날 아침, 병실 문을 연 손연지가 문 앞에 있는 구승훈을 발견하고 멈칫했다.“좀 어때요?”손연지가 그를 힐끗 보았다.“어떨 것 같은데요?”구승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손연지에게 손에 든 아침 식사를 건네주었다.“부탁할게요.”손연지는 받지 않고 조그마한 문틈을 열어 보였다.방 안에서 강하리는 죽 한 그릇을 손에 들고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바로 옆에 있던 주해찬은 입
문연진을 바라본 강하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당신이 여긴 왜 왔어?”문연진이 뉴스에 나오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교도소나 구치소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나타날 줄이야.문연진이 피식 웃었다.“왜, 이 병원이 당신 거라도 돼? 당신은 오는데 나는 못 와? 강하리, 봤지? 난 지금 감옥에 가지 않을뿐더러 승훈 오빠가 매일 사람을 보내 날 지켜주고 있어.”강하리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한 여성이 다가와 문연진을 밀쳤다.“문연진 씨, 얼른 가지 않고 뭘 꾸물거리고 있어요?”문연진은 강하리를 비웃으며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강하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쫓아가려고 문 앞까지 다가가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 구승훈, 저 여자는 연정이를 죽였어. 연정이를 죽였다고!”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문연진은 지금 임신 중이라 아기 때문에 병원에서 조사받고 있어. 지금은 데려가서 문원진 폭탄 테러 사건 때문에 수사하는 거야.”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강하리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저 여자가 우리 아이를 죽였는데 임신해서 법적으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거야?”구승훈이 설명했다.“지금 잠깐만 그런 거야.”문원진의 폭탄 테러 사건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문연진도 처리할 생각이었다.당시 연정이가 차 안에 없었다고 해도 노진우를 절벽에서 떨어뜨리게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것만으로도 문연진을 보내기에 충분했다.그리고 지금 보석으로 병원에 있는 건 단지 그녀의 입을 열기 위한 꾸며낸 상황에 불과했다.무서울 게 없어야 입을 열 테니까.그런데 강하리가 피식 웃었고 구승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말리려던 찰나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그래, 알겠어.”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하리야, 연정이는
“내가 어떻게 말했는데요?”손연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상대와 싸웠다.얼마 전 출장을 갔다가 돌아와서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노민우가 손연지의 목소리를 듣고는 순간 멈칫하며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짜 손연지일 줄이야.손연지가 남자에게 괴롭힘당하는 것을 본 순간 그도 참을 수 없었다.“당신 같은 덩치 큰 남자가 여자랑 왜 다투는 거야?”가까이 온 노민우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고 손연지는 노민우를 노려보았다.“너랑 상관없잖아.”“...”손연지, 네가 왜 우리 병원에 있어? 어디 아파? 어디가 안 좋아? 그리고 이 남자는 누구야?”손연지가 퉁명스럽게 흘겨보았다.“난 하리 옆에...”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당황했다.“하리야?”그녀와 다투던 상대의 얼굴도 다소 일그러진 채 서둘러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연락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미간을 꾹 눌렀다.“알겠어.”전화를 끊은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뱉어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모습에 류덕구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교차로 주위 모든 방향에 있는 카메라를 돌려보면서 그 차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씩 확실하게 수사 중이고 아이도 최선을 다해 찾고 있으니 요 며칠은 푹 쉬세요.”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었다.아내와 아이가 없는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겠나.그도 이제야 강하리가 말했던 고통을 경험했다.이번엔 그가 정말 틀렸을 수도 있다.그녀와 상의 없이 아기를 떠나보내서는 안 됐고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이런 이별을 겪게 해서는 안 됐다.강하리는 아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아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았을 때는 또 어땠을까.돌려받았다가 또다시 뺏긴 감정은 아이를 잃었을 때보다 백 배는 더 고통스럽지 않았을까?구승훈은 심장을 관통하는 고통을 느꼈다.“어떻게 하면 완전히 실망한 여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요?”말을 꺼낸 구승훈이 또다시 쓴
구승훈의 눈동자가 움츠러들었다.거리가 너무 짧아서 피하고 싶어도 이미 너무 늦었다.“하리야!” 그가 차를 향해 소리쳤지만 강하리의 차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가속 페달을 밟았다.강하리가 구승훈을 노려보는 것 같아도 그녀의 시야는 진작 눈물로 흐려졌다.하지만 구승훈을 치기 직전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가 구승훈 바로 앞에서 멈췄다.구승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순간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강하리만 바라보았다.조금 전 강하리가 정말로 그를 차로 쳐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하리야.”구승훈이 낮게 부르며 그녀에게 가려는데 그가 막 차 앞을 벗어난 순간 강하리가 다시 액셀을 밟더니 그를 스쳐 지나며 달려갔다.당황한 구승훈이 저쪽을 향해 소리쳤다.“다들 비켜!”문연진을 지키고 있던 몇 명의 경찰이 문연진을 끌어당겨 옆으로 피했지만 문연진은 너무 느렸고 강하리는 지나치게 빨랐다.문연진은 몇 발짝도 뛰지 못하고 쾅 소리와 함께 그대로 부딪혔다.차에 앉아 핸들을 잡고 있던 강하리의 손이 덜덜 떨렸고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성큼성큼 차로 다가온 구승훈이 밖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리야, 내려.”“하리야, 차 문 열어.”“하리야, 차에서 내려, 응?”반면 강하리는 들리지 않는 듯 혼자서 운전대에 엎드린 채 울기만 했다.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구승훈조차도.아이의 복수는 그녀가 할 것이다.그 대가가 그녀 본인이라고 해도 말이다.밖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고 차에 부딪힌 문연진의 하체에서 선홍빛 액체가 흘러나왔다.류덕구는 서둘러 사람을 시켜 그녀를 병원으로 보냈고 구승훈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강하리를 달래고 있었다.하지만 강하리는 문을 열어주지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사고 현장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동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류덕구를 바라보았다.“저 영상 좀 처리 부탁드립니다.”류덕구가 인상을 찌푸렸다.“창
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하리야, 브레이크가 고장 났고 넌 몸에 이상이 있었어. 문연진이 도망가려고 했던 거야, 알겠어? 알겠냐고?”강하리가 웃었다.“예전에 송유라도 이런 식으로 법의 심판을 받지 않게 도와준 거지?”구승훈은 말문이 막혔다.“하리야...”강하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구승훈, 이제부터 내 일에 신경 쓰지 마.”말을 마친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훈의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강하리를 끌어당겼다.“내가 신경 끄면 누가 신경 쓰는데, 주해찬?”강하리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결국 밀어냈다.앞으로 그 사람이 누가 되든 구승훈은 아닐 것이다.주해찬은 손연지, 노민우와 함께 서둘러 달려왔고 세 사람이 도착했을 때 구승훈은 유치장 바깥을 지키고 있었고 강하리는 바깥을 등진 채 앉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마치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것 같았다.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걸음을 멈칫했다.강하리를 구해주지 않는 구승훈 때문에 화가 났지만 강하리가 한 짓을 알고는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하리야.”강하리는 손연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뒤를 돌아보았다.그녀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거짓말해서 미안해.”손연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하리야, 너 바보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연지야, 내가 하지 않으면 평생 불안할 것 같았어.”“하리야...” 손연지의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팠다.“그럼 넌 이제 어떡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참 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난 이대로도 괜찮아.”정말 형을 선고받는다고 해도 원망할 건 없었다.“그런 말 하지 마! 하리야, 넌 아직 할 일도 많고 나이도 젊잖아. 아주머니 가족도 있고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살아 계시면서 네가 돌아오길 기다릴 수도 있잖아, 아니야? 이대로 널 포기하면 안 돼!”강하리는 눈가가 촉촉해진 채 한참이 지난 후 말했다.“나한테 가족이 있을까?”“있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