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구승훈을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하지만 곧, 최하영의 말이 떠올랐다.“모두가 구씨 집안이 대단하다고 하고 모두가 구승훈 씨를 부러워해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꿈일까요? 하지만 구씨 집안 같은 곳은 사람을 삼키고 뼈 한 조각도 남기지 않는 곳이에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도 몰라요. 어쨌든, 저는 그가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그 말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여초연이 복수를 견디며 그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강하리의 마음속에 다시금 연민을 불러일으켰다.하지만 지금, 그 연민은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실감이 나지 않는다기보다, 차라리 무뎌졌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그런데도 구승훈을 바라보는 순간, 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 역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이라는 것을.오늘 이 자리는 전적으로 천아름이 강요한 것이었다.구승훈은 갑작스럽게 굳어버렸고 강하리는 여전히 문 앞에 선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그걸 본 천아름이 성큼 다가와 그녀를 홱 잡아당겼다.“뭐 해? 왜 안 들어와? 설마, 두 사람 마주치는 게 어색해서 이러는 거야?”그녀는 강하리를 억지로 끌어 구승훈 옆자리에 앉혔다.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묵묵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방 안은 숨이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그때, 강하리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천아름이었다.[구승훈 몸이 안 좋았대. 구승재 말로는 지금 치료도 불가능하대. 너랑 연정이를 위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니까 두 사람 얘기 좀 해봐. 이 문제, 어쩌면 함께 해결할 수도 있을지 몰라.”강하리는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천아름은 이미 방을 나간 뒤였고 남겨진 공간에는 오직 그녀와 구승훈 둘뿐이었다.긴 침묵을 깨고 구승훈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일은 잘돼?”강하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둘 사이의 거리는 거의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지만 더
아쉽게도 구승훈이 방에서 나올 때 표정이 좋지 않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그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강하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가 이렇게 변해버린 건지.오늘 최하영에게 들은 여초연에 관한 이야기와 방금 천아름에게 받은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이어졌다.여초연이 품은 증오심이 얼마나 깊은지는 그녀가 연정이를 납치했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그런 여자가 복수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단순히 구승훈을 잠 못 이루게 할 정도로 가벼운 방식으로 끝냈을까?아니, 그럴 리 없었다.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인정하기 싫어도 상관없어. 난 지금 당신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어. 당신, 아직도 나와 연정이를 원해?”그가 원한다는 말한 한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그러나 구승훈은 갑자기 웃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목을 감싸듯 쓸어내렸다.움직임은 부드러웠고 천천히 강하리를 진정시키려는 것 같았지만 그의 말은 차가웠다.“네 상상력은 여전히 풍부하구나.”강하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그래? 내가 너무 나를 과대평가했나 봐.”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구승훈의 넥타이를 단숨에 잡아당겼다.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지금이라면 누구든 살짝만 움직여도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수 있을 정도였다.구승훈의 숨이 잠시 멎는 듯했지만 그는 여전히 냉정을 유지했다.그는 중간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여초연과의 싸움은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문제였고 무엇보다 강하리와 연정이가 그 분쟁에 휘말리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뭐 하는 거야? 이러면 나중에 임희주 씨에게 어떻게 설명하라고...”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갑자기 입을 맞췄다.항상 구승훈이 주도하던 키스였다.하지만 오늘,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
바의 조명은 여전히 화려하게 빛났고 무대 위의 폴댄스는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고 음악과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공간을 가득 채웠다.천아름은 바 카운터에 홀로 앉아 마치 세상과 단절된 사람처럼 조용한 표정이었지만 강하리가 방에서 나오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어떻게 됐어?”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의 눈가에 아직 남아 있는 눈물을 발견했다.“잘 안된 거야? 구승훈이 뭐라고 했는데?”강하리는 입술을 살짝 올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 마음만 헛고생하게 만든 것 같아.”천아름은 술잔을 내려놓고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분명, 둘이 오해를 풀기만 하면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낼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너무 단순했던 모양이다.“네가 화해하기 싫었던 거야? 아니면 구승훈이 화해하려 하지 않은 거야?”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 연정이 데리러 가야 돼. 먼저 갈게.”천아름은 다시 한번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어쨌든, 사랑 문제는 내가 더 이상 참견할 일이 아니야.’강하리는 바에서 나와 문 앞에 멈춰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혔다.사실 오늘 이런 결과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노력해 보고 싶었다.매번 그 남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약해졌다.아무리 단단히 결심해도 막상 마주하면 마음속에 남는 건 결국 그리움뿐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떤 관계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이어질 수 없는 법이다.그녀는 더 이상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더 이상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구승훈에게 사정이 있다는 걸 알지만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방을 나서며 그녀가 남긴 말처럼 여전히 그를 도울 것이고 그가 원한다면, 연정이를 위해서라도 언제든지 기꺼이 나설 것이다.그가 연정이의 아버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때 그
임희주는 정신과 의사로서 타인에게 발끈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열등감 때문에 그만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당신이 뭘 알아요? 강하리 씨, 지금 그 남자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나만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요. 알아들어요? 나만 도와줄 수 있다고!”강하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그러니까 그쪽이 여초연 사람이라는 거죠?”임희주가 멈칫하며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강하리가 덧붙였다.“애초에 그 사람을 해치려고 온 거예요? 여초연이 주사한 약물은 뭐죠? 이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쪽도 치료할 방법이 없는 거죠? 그 남자는 지금 당신을 이용해 여초연을 찾으려는 거예요. 그렇죠?”강하리가 말하며 한 걸음씩 다가오자 임희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몸이 벽에 심하게 부딪혔을 때쯤 정신을 차렸다.“강하리 씨, 미쳤어요?”강하리는 비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택시를 향해 걸어갔다.임희주는 그런 강하리의 등 뒤에서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구승훈에게 매달리면서 이혼하지 않는 게 재밌어요? 그 남자는 이제 당신에게 관심도 없어요.”강하리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없이 무심하게 대꾸했다.“나랑 그 사람 일에 그쪽이 끼어들 자격은 없어요.”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택시에 올라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이 시간에도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도시는 여전히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잠시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노 선생님, 구승훈 씨 약 아직 연구개발 중인가요?”노민준은 예상치 못한 강하리의 질문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숨길 생각은 없었다.“네.”“어디까지 진행되었죠?”“아직 멀었어요.”강하리는 심호흡했다.“해외에 있는 몇몇 의학 전문가에게 연락해 협조하라고 할게요.”노민준은 당황했다.“잘됐네요. 승훈이가 다 얘기했어요? 두 사람 화해한 거예요?”강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연정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하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잠시 망설이다가 침대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서랍 안에는 반지 두 개가 담긴 벨벳 상자가 있었는데 그다지 화려하지 않고 심지어 조금은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이는 그녀가 차근차근 천아름에게 배워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전부 직접 한 것이었다.원래는 구승훈에게 생일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이젠 서랍 속에 넣어둔 채 열어보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한 물건이 되어버렸다.손가락으로 반지를 쓰다듬으며 강하리의 시선이 텅 빈 약지로 향했다.잠시 후, 그녀는 다시 상자를 닫아 서랍에 넣어두었다.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연정이가 강하리의 손을 잡고 놔주려 하지 않자 옆에 있던 가정부가 한숨을 쉬었다.“애들은 가끔 특별할 때가 있어요. 아마 연정이도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걸 느끼고 더 매달리는 거예요. 그날 밤에 계속 울면서 아빠를 찾는 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세수하던 강하리가 멈칫하며 옆에서 세면대에 엎드려 홀로 물을 떠서 세수하는 연정이를 보았다. 마음속에 가득 찬 죄책감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엄마가 오늘 하루 종일 연정이랑 같이 있어 줄까?”연정이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강하리를 바라보며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아빠.”강하리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으며 연정이의 얼굴을 꼬집었다.“그래,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자.”연정이의 작은 얼굴에 금세 미소가 번졌다.연정이를 씻긴 뒤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임희주가 받을 줄이야.강하리는 조용히 시간을 확인했다.아침 7시.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썼다.“구승훈 씨한테 할 말 있어요. 휴대폰 넘겨주세요.”임희주의 목소리에 능글맞은 웃음이 묻어났다.“승훈 씨 샤워 중이니까 할 말 있으면 저한테 해요. 제가 전달할게요.”휴대폰을 쥔 강하리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며 그녀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쪽 형 어디 있어요?”강하리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강하리가 역겹다는 단어까지 뱉을 정도로 독하게 말해도 옆에 있던 남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그녀는 구승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제가 역겨워요?”구승훈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본인이 더 잘 알 텐데요.”임희주는 이를 악물었다.“구승훈 씨,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무시한 채 연정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바보, 아빠 보고 싶었어?”“아빠, 보고 싶어.”구승훈의 마음이 녹아내리며 며칠 동안 굳어있던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드리웠다.임희주는 그런 다정한 모습을 볼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씨, 내가 그날 밤에 말한 조건 받아들일 건가요?”마침내 구승훈의 걸음이 멈추며 차갑게 웃고는 고개를 돌려 임희주를 바라보았다.“임희주 씨,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됐습니까? 그쪽이 여초연과 연락이 닿는 게 아니라면 나한테 그런 수작을 부려놓고 지금껏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어요?”임희주는 숨이 막히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수작을 부리다니요? 처음엔 치료를 이용해 그 쪽에게 손을 쓰려고 했던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것도 여초연이 몰아붙여서 어쩔 수가 없었던 거고, 그쪽도 결국엔 다 거절했잖아요.”설명을 마친 그녀는 그저 구승훈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날 밤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걸 구승훈이 알아낼 리 없다.구승훈의 약을 건드린 사람 역시 제때 처리했기 때문에 증거가 남을 리 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구승훈에게 그렇게 과감하게 거래를 제안하지도 못했을 거다.하지만 구승훈이 말하기도 전에 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이미 오래전부터 임희주가 못마땅했던 그는 송유라만큼이나 그녀가 혐오스러웠다.그녀를 이용해 여초연을 끌어내는 것만 아니면 진작 그의 선에서 처리했을 거다.주제도 모르고 감히 본인을 형수님과 비교하다니.“임 선생은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은 다 바보로 생각하나 봐요? 그쪽 말고 우리 형의 병과 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게 아니면
강하리가 연정이를 데리러 왔을 때 구승훈은 연정이를 데리고 길거리 디저트 가게에서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연정이의 머리에는 작은 사슴 머리핀이 있었는데 살짝 곱슬곱슬한 머리를 구승훈이 두 갈래로 묶어주었다.원래 입었던 옷도 갈아입은 채 작은 케이크를 들고 신나게 베어 물고 있었다.하도 급하게 먹어 콧등에도 크림이 묻었다.강하리가 오자 연정이는 들떠서 방방 뛰었다.“엄마, 엄마.”구승훈은 유리창 너머로 밖에서 그들 부녀를 바라보는 강하리를 보았다.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유난히 짙었고 두 사람의 귀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강하리는 문득 씁쓸함이 밀려왔다.두 사람이 만나는 동안 구승훈도, 그녀도 한 번도 제대로 된 생일을 보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연정이마저 온전한 생일 한번 쇠어준 적이 없었다.구승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강하리에게 고정된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하지만 강하리의 시선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뒤돌아 디저트 가게로 들어갔다.연정이의 코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고 연정이의 손과 얼굴까지 다 닦고 나서 그녀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아빠한테 인사해.”디저트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는 구승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연정이도 이별이라는 걸 알았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짝 웃고 있었지만 어느새 코끝이 붉어지기 시작했다.그래도 꿋꿋이 구승훈을 향해 손을 흔든 아이는 강하리의 품에 안겨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강하리도 연정이의 서글픈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한때는 연정이에게 온전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애썼던 그녀였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녀에게 희망 고문만 남겨둔 채 매정하게 외면했다.강하리는 가슴 속 울분을 억누르고 연정이를 안은 채 뒤돌아 문을 나섰다.구승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강하리.”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췄다.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왜?”자리에서 일어난 구승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연정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며칠 후면 연정이 생
“우리 층에 누가 임신했나 봐요!”“어떻게 알았어요?”“화장실 쓰레기통에 글쎄 임신 테스트기가 있더라니까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는 두 명의 인턴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인턴들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곧장 일하러 갔다. 그래서 그녀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핸드폰은 오늘따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이런 가십거리가 가장 환영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강하리는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내가 소홀했어. 적어도 종이에 잘 싸서 버려야 하는 건데. 만약 구승훈 대표님이 알게 된다면...’끔찍한 상상에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때 구승훈의 비서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부장님, 대표님께서 찾으세요.”강하리는 책상 아래에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강 부장님?”“네, 들었어요.”...대표이사실 앞에 멈춰 서서 강하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담 비서 신도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대표이사실에는 우드 향 향초를 태우고 있었다. 점심부터 협력사 임원과 술 한 잔 마신 듯한 구승훈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반듯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방탕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도, 여유롭게 힘 풀린 몸도,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았다.강하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이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끊기지 않지. 어느 여자가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거절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몸매도, 능력도... 적어도 겉으로는 흠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오직 강하리만 그
강하리가 연정이를 데리러 왔을 때 구승훈은 연정이를 데리고 길거리 디저트 가게에서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연정이의 머리에는 작은 사슴 머리핀이 있었는데 살짝 곱슬곱슬한 머리를 구승훈이 두 갈래로 묶어주었다.원래 입었던 옷도 갈아입은 채 작은 케이크를 들고 신나게 베어 물고 있었다.하도 급하게 먹어 콧등에도 크림이 묻었다.강하리가 오자 연정이는 들떠서 방방 뛰었다.“엄마, 엄마.”구승훈은 유리창 너머로 밖에서 그들 부녀를 바라보는 강하리를 보았다.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유난히 짙었고 두 사람의 귀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강하리는 문득 씁쓸함이 밀려왔다.두 사람이 만나는 동안 구승훈도, 그녀도 한 번도 제대로 된 생일을 보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연정이마저 온전한 생일 한번 쇠어준 적이 없었다.구승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강하리에게 고정된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하지만 강하리의 시선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뒤돌아 디저트 가게로 들어갔다.연정이의 코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고 연정이의 손과 얼굴까지 다 닦고 나서 그녀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아빠한테 인사해.”디저트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는 구승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연정이도 이별이라는 걸 알았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짝 웃고 있었지만 어느새 코끝이 붉어지기 시작했다.그래도 꿋꿋이 구승훈을 향해 손을 흔든 아이는 강하리의 품에 안겨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강하리도 연정이의 서글픈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한때는 연정이에게 온전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애썼던 그녀였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녀에게 희망 고문만 남겨둔 채 매정하게 외면했다.강하리는 가슴 속 울분을 억누르고 연정이를 안은 채 뒤돌아 문을 나섰다.구승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강하리.”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췄다.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왜?”자리에서 일어난 구승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연정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며칠 후면 연정이 생
강하리가 역겹다는 단어까지 뱉을 정도로 독하게 말해도 옆에 있던 남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그녀는 구승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제가 역겨워요?”구승훈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본인이 더 잘 알 텐데요.”임희주는 이를 악물었다.“구승훈 씨,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무시한 채 연정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바보, 아빠 보고 싶었어?”“아빠, 보고 싶어.”구승훈의 마음이 녹아내리며 며칠 동안 굳어있던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드리웠다.임희주는 그런 다정한 모습을 볼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씨, 내가 그날 밤에 말한 조건 받아들일 건가요?”마침내 구승훈의 걸음이 멈추며 차갑게 웃고는 고개를 돌려 임희주를 바라보았다.“임희주 씨,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됐습니까? 그쪽이 여초연과 연락이 닿는 게 아니라면 나한테 그런 수작을 부려놓고 지금껏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어요?”임희주는 숨이 막히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수작을 부리다니요? 처음엔 치료를 이용해 그 쪽에게 손을 쓰려고 했던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것도 여초연이 몰아붙여서 어쩔 수가 없었던 거고, 그쪽도 결국엔 다 거절했잖아요.”설명을 마친 그녀는 그저 구승훈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날 밤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걸 구승훈이 알아낼 리 없다.구승훈의 약을 건드린 사람 역시 제때 처리했기 때문에 증거가 남을 리 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구승훈에게 그렇게 과감하게 거래를 제안하지도 못했을 거다.하지만 구승훈이 말하기도 전에 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이미 오래전부터 임희주가 못마땅했던 그는 송유라만큼이나 그녀가 혐오스러웠다.그녀를 이용해 여초연을 끌어내는 것만 아니면 진작 그의 선에서 처리했을 거다.주제도 모르고 감히 본인을 형수님과 비교하다니.“임 선생은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은 다 바보로 생각하나 봐요? 그쪽 말고 우리 형의 병과 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게 아니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연정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하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잠시 망설이다가 침대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서랍 안에는 반지 두 개가 담긴 벨벳 상자가 있었는데 그다지 화려하지 않고 심지어 조금은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이는 그녀가 차근차근 천아름에게 배워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전부 직접 한 것이었다.원래는 구승훈에게 생일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이젠 서랍 속에 넣어둔 채 열어보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한 물건이 되어버렸다.손가락으로 반지를 쓰다듬으며 강하리의 시선이 텅 빈 약지로 향했다.잠시 후, 그녀는 다시 상자를 닫아 서랍에 넣어두었다.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연정이가 강하리의 손을 잡고 놔주려 하지 않자 옆에 있던 가정부가 한숨을 쉬었다.“애들은 가끔 특별할 때가 있어요. 아마 연정이도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걸 느끼고 더 매달리는 거예요. 그날 밤에 계속 울면서 아빠를 찾는 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세수하던 강하리가 멈칫하며 옆에서 세면대에 엎드려 홀로 물을 떠서 세수하는 연정이를 보았다. 마음속에 가득 찬 죄책감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엄마가 오늘 하루 종일 연정이랑 같이 있어 줄까?”연정이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강하리를 바라보며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아빠.”강하리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으며 연정이의 얼굴을 꼬집었다.“그래,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자.”연정이의 작은 얼굴에 금세 미소가 번졌다.연정이를 씻긴 뒤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임희주가 받을 줄이야.강하리는 조용히 시간을 확인했다.아침 7시.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썼다.“구승훈 씨한테 할 말 있어요. 휴대폰 넘겨주세요.”임희주의 목소리에 능글맞은 웃음이 묻어났다.“승훈 씨 샤워 중이니까 할 말 있으면 저한테 해요. 제가 전달할게요.”휴대폰을 쥔 강하리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며 그녀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쪽 형 어디 있어요?”강하리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임희주는 정신과 의사로서 타인에게 발끈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열등감 때문에 그만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당신이 뭘 알아요? 강하리 씨, 지금 그 남자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나만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요. 알아들어요? 나만 도와줄 수 있다고!”강하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그러니까 그쪽이 여초연 사람이라는 거죠?”임희주가 멈칫하며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강하리가 덧붙였다.“애초에 그 사람을 해치려고 온 거예요? 여초연이 주사한 약물은 뭐죠? 이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쪽도 치료할 방법이 없는 거죠? 그 남자는 지금 당신을 이용해 여초연을 찾으려는 거예요. 그렇죠?”강하리가 말하며 한 걸음씩 다가오자 임희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몸이 벽에 심하게 부딪혔을 때쯤 정신을 차렸다.“강하리 씨, 미쳤어요?”강하리는 비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택시를 향해 걸어갔다.임희주는 그런 강하리의 등 뒤에서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구승훈에게 매달리면서 이혼하지 않는 게 재밌어요? 그 남자는 이제 당신에게 관심도 없어요.”강하리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없이 무심하게 대꾸했다.“나랑 그 사람 일에 그쪽이 끼어들 자격은 없어요.”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택시에 올라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이 시간에도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도시는 여전히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잠시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노 선생님, 구승훈 씨 약 아직 연구개발 중인가요?”노민준은 예상치 못한 강하리의 질문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숨길 생각은 없었다.“네.”“어디까지 진행되었죠?”“아직 멀었어요.”강하리는 심호흡했다.“해외에 있는 몇몇 의학 전문가에게 연락해 협조하라고 할게요.”노민준은 당황했다.“잘됐네요. 승훈이가 다 얘기했어요? 두 사람 화해한 거예요?”강
바의 조명은 여전히 화려하게 빛났고 무대 위의 폴댄스는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고 음악과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공간을 가득 채웠다.천아름은 바 카운터에 홀로 앉아 마치 세상과 단절된 사람처럼 조용한 표정이었지만 강하리가 방에서 나오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어떻게 됐어?”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의 눈가에 아직 남아 있는 눈물을 발견했다.“잘 안된 거야? 구승훈이 뭐라고 했는데?”강하리는 입술을 살짝 올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 마음만 헛고생하게 만든 것 같아.”천아름은 술잔을 내려놓고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분명, 둘이 오해를 풀기만 하면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낼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너무 단순했던 모양이다.“네가 화해하기 싫었던 거야? 아니면 구승훈이 화해하려 하지 않은 거야?”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 연정이 데리러 가야 돼. 먼저 갈게.”천아름은 다시 한번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어쨌든, 사랑 문제는 내가 더 이상 참견할 일이 아니야.’강하리는 바에서 나와 문 앞에 멈춰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혔다.사실 오늘 이런 결과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노력해 보고 싶었다.매번 그 남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약해졌다.아무리 단단히 결심해도 막상 마주하면 마음속에 남는 건 결국 그리움뿐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떤 관계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이어질 수 없는 법이다.그녀는 더 이상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더 이상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구승훈에게 사정이 있다는 걸 알지만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방을 나서며 그녀가 남긴 말처럼 여전히 그를 도울 것이고 그가 원한다면, 연정이를 위해서라도 언제든지 기꺼이 나설 것이다.그가 연정이의 아버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때 그
아쉽게도 구승훈이 방에서 나올 때 표정이 좋지 않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그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강하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가 이렇게 변해버린 건지.오늘 최하영에게 들은 여초연에 관한 이야기와 방금 천아름에게 받은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이어졌다.여초연이 품은 증오심이 얼마나 깊은지는 그녀가 연정이를 납치했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그런 여자가 복수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단순히 구승훈을 잠 못 이루게 할 정도로 가벼운 방식으로 끝냈을까?아니, 그럴 리 없었다.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인정하기 싫어도 상관없어. 난 지금 당신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어. 당신, 아직도 나와 연정이를 원해?”그가 원한다는 말한 한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그러나 구승훈은 갑자기 웃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목을 감싸듯 쓸어내렸다.움직임은 부드러웠고 천천히 강하리를 진정시키려는 것 같았지만 그의 말은 차가웠다.“네 상상력은 여전히 풍부하구나.”강하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그래? 내가 너무 나를 과대평가했나 봐.”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구승훈의 넥타이를 단숨에 잡아당겼다.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지금이라면 누구든 살짝만 움직여도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수 있을 정도였다.구승훈의 숨이 잠시 멎는 듯했지만 그는 여전히 냉정을 유지했다.그는 중간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여초연과의 싸움은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문제였고 무엇보다 강하리와 연정이가 그 분쟁에 휘말리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뭐 하는 거야? 이러면 나중에 임희주 씨에게 어떻게 설명하라고...”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갑자기 입을 맞췄다.항상 구승훈이 주도하던 키스였다.하지만 오늘,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
강하리는 구승훈을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하지만 곧, 최하영의 말이 떠올랐다.“모두가 구씨 집안이 대단하다고 하고 모두가 구승훈 씨를 부러워해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꿈일까요? 하지만 구씨 집안 같은 곳은 사람을 삼키고 뼈 한 조각도 남기지 않는 곳이에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도 몰라요. 어쨌든, 저는 그가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그 말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여초연이 복수를 견디며 그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강하리의 마음속에 다시금 연민을 불러일으켰다.하지만 지금, 그 연민은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실감이 나지 않는다기보다, 차라리 무뎌졌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그런데도 구승훈을 바라보는 순간, 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 역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이라는 것을.오늘 이 자리는 전적으로 천아름이 강요한 것이었다.구승훈은 갑작스럽게 굳어버렸고 강하리는 여전히 문 앞에 선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그걸 본 천아름이 성큼 다가와 그녀를 홱 잡아당겼다.“뭐 해? 왜 안 들어와? 설마, 두 사람 마주치는 게 어색해서 이러는 거야?”그녀는 강하리를 억지로 끌어 구승훈 옆자리에 앉혔다.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묵묵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방 안은 숨이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그때, 강하리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천아름이었다.[구승훈 몸이 안 좋았대. 구승재 말로는 지금 치료도 불가능하대. 너랑 연정이를 위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니까 두 사람 얘기 좀 해봐. 이 문제, 어쩌면 함께 해결할 수도 있을지 몰라.”강하리는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천아름은 이미 방을 나간 뒤였고 남겨진 공간에는 오직 그녀와 구승훈 둘뿐이었다.긴 침묵을 깨고 구승훈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일은 잘돼?”강하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둘 사이의 거리는 거의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지만 더
“여씨 집안은 30년 전까지만 해도 연성시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어요. 특히 미인들이 많았죠. 시어머니도 직접 보셨을 테고요. 그런데 옛말에 ‘미인은 화를 부른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요. 여씨 집안도 결국 시어머니 때문에 몰락했으니까요.”강하리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구승훈이 여초연이 자신에게 약을 주입했다고 고백했을 때, 그녀는 여씨 집안과 여초연을 조사했었다.하지만 찾은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기에 결국 최하영에게 직접 묻기로 했던 것이다.강하리의 놀란 표정을 본 최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구씨 집안에서는 처음부터 여초연 씨를 며느리로 들이기로 했어요. 그런데 대학 시절, 여초연 씨가 같은 학교 학생을 좋아하게 된 거죠. 그때 이미 여씨 집안은 기울어가고 있었고 구씨 집안과의 혼인만이 생존 방법이었어요. 그러니 파혼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죠.”“하지만 강제로 막는다고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결국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도망쳤어요. 무려 2년 동안요. 그리고 그 사이 여씨 집안은 완전히 무너졌어요. 구씨 집안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여초연 씨의 부모님은 연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형제들은 경제 사범으로 감옥에 갔죠. 형은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동생은 건강이 악화됐어요. 그리고 여초연 씨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이미 만삭의 몸이었어요. 배 속에는 그 남자의 아이가 있었고요.”“구씨 집안의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아시잖아요. 그녀를 곧장 병원으로 데려가 강제로 유산시켰어요. 아이를 잃고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구씨 집안은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했죠. 처음에는 누구도 가까이 못 오게 막았지만 결국 함께 도망쳤던 남자가 협박 수단이 되었어요.”“그 협박이 통했어요. 두 달 뒤, 여초연 씨는 임신했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하리 씨 남편이에요.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바로 그날, 여초연 씨의 연인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마지막 인사도 못 한 채, 그녀는 모든 게 구씨 집안의 짓이라고
강하리는 최하영과 작은 사찰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식당 문 앞에서, 강하리은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바로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요? 추억에 잠기기라도 한 거예요?”강하리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아니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식당에는 정자와 누각, 고풍스러운 회랑과 기둥이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고 있었다.구승훈과 함께 이곳에 왔던 기억이 떠오르며 그녀의 시선이 한동안 허공을 맴돌았다.이곳 분위기가 좋다는 강하리의 말에 구승훈은 환한 표정으로 앞으로 함께 자주 오자는 말을 했었다.문연진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테이블 위에 놓인 달콤한 요리를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왜 우리는 함께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걸까?’구승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심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녀가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앗아가고 있었다.천아름은 이혼을 잠시 미뤄보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미루든, 미루지 않든 결과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최하영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불러냈다.강하리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맛있어요.”최하영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말했다.“제 정보가 틀린 줄 알았네요.”강하리는 그가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묻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최 대표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최하영은 공용 젓가락으로 그녀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말했다.“안현우 일이죠? 기명제약 뒤에서 손 쓴 사람, 그 녀석 맞아요. 이제 어떻게 도와줄까요?”강하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가슴 한구석이 더욱 답답해졌다.공항까지 마중을 나간 것도, 시킨 음식이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인 것도, 그리고 지금 안현우가 뒤에서 손을 쓰고 있는 것도.최하영이 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