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로키의 도움을 받아 몇몇 약물 전문가를 찾았다. 사실 심씨 가문의 인맥으로도 찾을 수 있지만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을 찾기엔 정계 쪽 인물이 제격이었다.우산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때마침 걸려 온 로키의 전화를 받았다.“전문가가 2시간 후에 B시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니 마중 나가요.”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강하리는 가정부를 부르고 옷을 챙겨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가로등 밑의 남자는 옆에 있는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밖으로 나온 강하리의 눈에 머리와 온몸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하얗게 물든 남자가 동상처럼 서 있고 옆에 있는 여자가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모습이 들어왔다.강하리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니 운전기사는 이미 큰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눈길이 미끄러워 그녀는 직접 운전할 생각이 없었다.강하리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저쪽의 두 사람은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강하리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아파트 앞 큰길로 걸어갔다.“사모님, 늦은 시간에 어디 가세요?”임희주가 갑자기 외쳤다.“급한 일 있어요? 아니면 누구 만나러 가는 건가요?”강하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저쪽을 바라보았다.“임 선생님께선 오지랖도 참 넓으시네요. 내연녀 주제에 무슨 자신감으로 내 앞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임희주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간 굳어지더니 이내 다시 웃었다.“사모님, 전 두 사람 사이 방해할 생각 없어요. 다만 지금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게 저밖에 없으니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도 정신과 의사니까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챙길게요.”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잘 부탁드릴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구승훈을 힐끗 보고는 뒤돌아 떠났다.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노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강 대표 외출했으니까 잘 지켜.]메시지를 보낸 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붉은 불빛이 번뜩이며 구승훈이 마침내 임희주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와
임희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구승훈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녀의 마음속엔 서늘한 감각이 일렁거렸다.‘여초연이 사람을 보내 감시하는 걸까?’구승훈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차 쪽으로 걸어가더니 쓰레기통을 지나칠 때 입고 있던 외투를 망설임 없이 벗어서 던져 넣었다.“신경 많이 쓰셨네요. 굳이 같은 걸로 사 오시고.”임희주는 입술을 벙긋하며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물론 구승훈도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터라 말을 마친 후 그대로 차를 몰고 떠났다.임희주는 구승훈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무의식적으로 다시 그늘진 곳을 바라보았다.여전히 깜깜한 밤이었지만 그녀는 저쪽에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그저 단순한 의심이었다.정신과 의사로서 이러한 심리적 작용에 휘둘려선 안 되지만 여초연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았다.원래도 충분히 사람을 보내 그녀를 감시할 만한 사람이라고 의심했는데 이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자신과 구승훈 중에 먼저 백기를 들 사람은 당연히 구승훈이라고 생각했다.그녀가 구승훈 곁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이간질하면 언젠가 강하리가 이혼을 제기할 것이고, 강하리가 이혼을 고집하는 한 구승훈은 불안할 수밖에 없으니까.초조해지면 당연히 한발 물러서 손을 잡으려 할 거다.물론 구승훈이 이혼할 의향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이다.한배를 타는 것보다 구승훈과 단단히 엮여있는 게 더 좋았다.그런데 강하리가 연성에 다녀온 이후 태도가 180도 바뀔 줄이야.강하리는 그녀가 구승훈 곁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걸 보면서도 이혼을 제기하지 않았고 임희주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황급히 어두운 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차로 뛰어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한 인물이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강하리는 도착한 전문과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가려 했다.그런데 이제 막 그들과 얘기를 끝마칠 무렵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하리야!”강하리의 걸음이 멈칫하며 다가온 상대를 보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선배?”강하리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놀라움이 묻어났다.주해찬을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랜만에 만난 주해찬은 예전의 따뜻하고 쾌활한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그는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전문가분들과 함께 온 거예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로키 선생님께 연락할 때 나도 옆에 있어서 같은 비행기 타고 왔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에게 전문가들의 경력에 대해 소개했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문득 출입구에 다다랐을 때 강하리는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주해찬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그래?”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강하리의 차가 떠난 뒤에야 구승훈은 담배를 끄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노진우가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에 따라가려 했지만 갑자기 그의 걸음이 멈추며 그가 고개를 돌렸다.“왜 날 따라와? 너한테 준 임무가 뭔지 잊었어?”남자의 목소리는 싸늘했다.조금 전 그 장면은 구승훈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노진우도 마음이 불편했다.구승훈은 그들 모녀의 안전을 위해 홀로 여초연과 싸우면서 평생 몸이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짊어지고 있는데, 정작 그녀는 주해찬을 맞이하기 위해 한밤중에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다니.원망스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어쨌든 두 사람은 아직 이혼하지 않았으니까.“대표님 모실게요.”오랫동안 구승훈 곁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노진우는 그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다.그는 말을 마친 뒤 구승훈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고집스럽게 구승훈 옆에 서 있었다.구승훈은 비웃
게다가 손에 든 보고서에 대해선 더더욱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주해찬의 입꼬리가 얕게 올라갔다.이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사실 이번에도 마침 강하리가 전문가를 찾는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찾아온 건 아니었다.이모를 통해 강하리의 결혼식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들은 그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아직도 병원에서 강하리가 망설임 없이 구승훈을 택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그녀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그 남자를 향해 달려가지만 모든 것을 내어준 뒤 또다시 깊은 상처를 받았다.이대로 무너진 그녀가 다시는 이겨내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주변에서 말려도 꿋꿋이 돌아왔다.오로지 그녀가 잘 지내는지 보기 위해.하지만... 지금 주해찬은 웃고 있다.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다.훌륭한 후배를 둔 것에 대한 뿌듯함?귀하게 자라야 할 여자가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진 것에 대한 안쓰러움?아니면 그녀에게 더 이상 자신이 필요 없는 것 같아 느껴지는 허탈한 좌절일 수도 있다.강하리는 전문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뒤 주해찬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가는 동안 주해찬은 그녀에게 유학 시절에 있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과거나 결혼식에 대해 그가 물어볼 줄 알았는데 주해찬은 일절 말이 없었다.단지 주씨 가문 앞에 차가 멈춰 섰을 때쯤 그가 말했다.“연말에 같은 과 선배가 파티를 연다는데 그때 같이 가자.”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고 주해찬은 그녀가 차를 돌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참 멀어진 뒤 문득 상대를 불렀다.“하리야.”강하리의 차가 속도를 줄이며 멈췄다.주해찬은 다가가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조심히 가.”강하리는 창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늦은 밤이라 도로가 유난히 조용했지만 도시는 여전히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운전했다.연말이 가까워진 시점이라 거리에는 아직 문을 연 가게들이 많았다.한 여자가 명품 매장에서 남자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있는데 문득 강하리가 차 속도를 늦추었다.결국 그녀는
강하리는 손목을 잡은 손을 바라보다가 다시 침착하게 시선을 들어 구승훈의 두 눈을 마주했다.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어서 기쁜 건지 화난 건지, 슬픈 건지 속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볍게 웃었다.“그게 구 대표님과 무슨 상관이죠?”구승훈은 마음이 답답했다. 그는 언제나 여자의 말 한마디에도 말문이 턱 막혔다.본인이 먼저 손을 놓아버렸으니 물어볼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여전히 강하리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단호하게 결심을 내렸던 만큼 미련이 그득했다.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벨벳 상자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생일 선물로 주려고 얼마 전에 낙찰받은 거야.”강하리의 시선이 상자로 향하며 이렇게 대꾸했다.“필요 없어.”구승훈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강하리는 손목에 전해지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그녀는 다쳐도 상관없다는 듯 그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 더 세게 몸부림쳤다.“하리야...”“구승훈!”강하리의 눈에는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애초에 그런 결정을 내렸으면 다신 날 찾아오지 마. 힘들게 마음먹고 놓아줬는데 왜 계속 날 찾아오는 거야. 나는 뭐 힘들지 않은 줄 알아? 아니면 난 이런 고통을 겪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거야? 구승훈,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둬!”강하리의 말이 떨어지자 구승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더니 강하리의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미안, 일찍 자.”말을 마친 그가 뒤돌아 가버렸고 엘리베이터가 마침 도착했다.문이 열리고 구승훈이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불과 몇십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힌 뒤에야 강하리는 힘이 풀린 듯 벽에 기대었다.그런 말을 뱉고도 마음이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하지만 그것 말고는 뭘 할 수 있겠나.차라리 구승훈이 예전처럼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면 좋겠다.그러면 무의미한 갈등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아무리
서둘러 문제를 해결하고 강하리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가볍게 미간을 누르던 그가 잠시 후 나지막이 말했다.“백화점에 가서 아무 장신구나 하나 사서 임희주에게 보내. 크리스마스에 나랑 같이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하라고 해.”준봉은 얼굴을 찌푸렸다.“하지만 대표님, B시 비즈니스 파티에는 사모님도 무조건 참석할 텐데요.”구승훈의 다리에 얹은 손이 움찔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신경 안 쓸 거야.”지금 그와 임희주가 함께 들락날락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준봉은 문득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는 밤새 서재에서 자료를 보다가 날이 밝을 무렵 가정부에게 연정이를 심씨 가문으로 보내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회사로 달려갔다.연말이 다가오면서 회사에도 일이 많아졌다.그런데 회사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 길 건너편 정안 건물에서 서둘러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각자 엎거나 들고 있었는데 심각한 다친 것처럼 보였다.보이는 얼굴마저 푸른 멍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그녀가 다가가기도 전에 구승재가 안에서 황급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그는 재빨리 문 앞에 주차된 마이바흐 차량으로 걸어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구승훈은 천천히 걸었지만 엉망진창인 모습을 감추지는 못했다.그의 몸에 걸친 옷은 어젯밤과 똑같았고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으며 항상 꼼꼼하게 손질하던 머리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강하리의 숨이 턱 막혔다.분명 새벽까지만 해도 구승훈이 멀쩡했는데 헤어진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사이에 왜 이렇게 된 걸까.강하리의 입술이 움찔하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찰나 구승훈이 갑자기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환한 아침 햇살 속에서 남자는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추운 겨울인데 강하리는 그의 얼굴에 뒤덮인 땀방울이 보였다.마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참는 것 같았다.그녀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지만 구승훈
강하리의 입꼬리가 파들 떨렸다.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웃음이 났다.조금 전 당황했던 자신이 퍽 우스웠다.“이미 결정했다면 그렇게 해.”어차피 그녀는 남자의 결정을 바꿀 수 없으니까.“그러면 오늘 오후 2시에 법원 앞에서 기다릴게.” 구승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강하리는 시선을 바닥으로 보내며 대꾸했다.“오후에 바빠. 내일 오전 10시로 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 회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고 강하리는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휴대폰을 잡은 손이 살짝 떨리더니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나중에 병원 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지만 그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러다 안예서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전했다.“대표님, 혹시 인수 때문에 연성으로 가시는 거예요? 제가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할까요?”그제야 강하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그녀는 시계를 보고 벌써 열한 시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안예서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아니야. 이번엔 개인적인 일로 가는 거야.”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짐을 챙겨 몇몇 전문가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한 후 함께 연성으로 향했다.노민준의 연구실에 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전문가들은 지체하지 않고 도착하자마자 노민준과 토론을 진행했고, 강하리는 소파에 앉아 무심코 잡지를 넘기며 저쪽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경청했다.휴대폰에 여러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지만 강하리는 슬쩍 보고는 이내 휴대폰을 치워버렸다.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임희주가 보낸 것이니 보지 않아도 내용은 뻔했다.기껏해야 그녀를 조롱하면서 과시하는 말들이겠지.강하리는 조용히 번호를 차단했다.“수고했어요.”문득 노민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강하리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그건 제가 할 말이죠. 그동안 그 사람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저는 부담만 줬네요.”노민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층에 누가 임신했나 봐요!”“어떻게 알았어요?”“화장실 쓰레기통에 글쎄 임신 테스트기가 있더라니까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는 두 명의 인턴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인턴들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곧장 일하러 갔다. 그래서 그녀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핸드폰은 오늘따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이런 가십거리가 가장 환영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강하리는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내가 소홀했어. 적어도 종이에 잘 싸서 버려야 하는 건데. 만약 구승훈 대표님이 알게 된다면...’끔찍한 상상에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때 구승훈의 비서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부장님, 대표님께서 찾으세요.”강하리는 책상 아래에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강 부장님?”“네, 들었어요.”...대표이사실 앞에 멈춰 서서 강하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담 비서 신도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대표이사실에는 우드 향 향초를 태우고 있었다. 점심부터 협력사 임원과 술 한 잔 마신 듯한 구승훈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반듯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방탕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도, 여유롭게 힘 풀린 몸도,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았다.강하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이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끊기지 않지. 어느 여자가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거절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몸매도, 능력도... 적어도 겉으로는 흠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오직 강하리만 그
강하리의 입꼬리가 파들 떨렸다.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웃음이 났다.조금 전 당황했던 자신이 퍽 우스웠다.“이미 결정했다면 그렇게 해.”어차피 그녀는 남자의 결정을 바꿀 수 없으니까.“그러면 오늘 오후 2시에 법원 앞에서 기다릴게.” 구승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강하리는 시선을 바닥으로 보내며 대꾸했다.“오후에 바빠. 내일 오전 10시로 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 회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고 강하리는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휴대폰을 잡은 손이 살짝 떨리더니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나중에 병원 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지만 그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러다 안예서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전했다.“대표님, 혹시 인수 때문에 연성으로 가시는 거예요? 제가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할까요?”그제야 강하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그녀는 시계를 보고 벌써 열한 시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안예서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아니야. 이번엔 개인적인 일로 가는 거야.”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짐을 챙겨 몇몇 전문가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한 후 함께 연성으로 향했다.노민준의 연구실에 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전문가들은 지체하지 않고 도착하자마자 노민준과 토론을 진행했고, 강하리는 소파에 앉아 무심코 잡지를 넘기며 저쪽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경청했다.휴대폰에 여러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지만 강하리는 슬쩍 보고는 이내 휴대폰을 치워버렸다.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임희주가 보낸 것이니 보지 않아도 내용은 뻔했다.기껏해야 그녀를 조롱하면서 과시하는 말들이겠지.강하리는 조용히 번호를 차단했다.“수고했어요.”문득 노민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강하리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그건 제가 할 말이죠. 그동안 그 사람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저는 부담만 줬네요.”노민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서둘러 문제를 해결하고 강하리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가볍게 미간을 누르던 그가 잠시 후 나지막이 말했다.“백화점에 가서 아무 장신구나 하나 사서 임희주에게 보내. 크리스마스에 나랑 같이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하라고 해.”준봉은 얼굴을 찌푸렸다.“하지만 대표님, B시 비즈니스 파티에는 사모님도 무조건 참석할 텐데요.”구승훈의 다리에 얹은 손이 움찔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신경 안 쓸 거야.”지금 그와 임희주가 함께 들락날락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준봉은 문득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는 밤새 서재에서 자료를 보다가 날이 밝을 무렵 가정부에게 연정이를 심씨 가문으로 보내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회사로 달려갔다.연말이 다가오면서 회사에도 일이 많아졌다.그런데 회사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 길 건너편 정안 건물에서 서둘러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각자 엎거나 들고 있었는데 심각한 다친 것처럼 보였다.보이는 얼굴마저 푸른 멍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그녀가 다가가기도 전에 구승재가 안에서 황급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그는 재빨리 문 앞에 주차된 마이바흐 차량으로 걸어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구승훈은 천천히 걸었지만 엉망진창인 모습을 감추지는 못했다.그의 몸에 걸친 옷은 어젯밤과 똑같았고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으며 항상 꼼꼼하게 손질하던 머리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강하리의 숨이 턱 막혔다.분명 새벽까지만 해도 구승훈이 멀쩡했는데 헤어진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사이에 왜 이렇게 된 걸까.강하리의 입술이 움찔하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찰나 구승훈이 갑자기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환한 아침 햇살 속에서 남자는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추운 겨울인데 강하리는 그의 얼굴에 뒤덮인 땀방울이 보였다.마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참는 것 같았다.그녀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지만 구승훈
강하리는 손목을 잡은 손을 바라보다가 다시 침착하게 시선을 들어 구승훈의 두 눈을 마주했다.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어서 기쁜 건지 화난 건지, 슬픈 건지 속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볍게 웃었다.“그게 구 대표님과 무슨 상관이죠?”구승훈은 마음이 답답했다. 그는 언제나 여자의 말 한마디에도 말문이 턱 막혔다.본인이 먼저 손을 놓아버렸으니 물어볼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여전히 강하리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단호하게 결심을 내렸던 만큼 미련이 그득했다.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벨벳 상자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생일 선물로 주려고 얼마 전에 낙찰받은 거야.”강하리의 시선이 상자로 향하며 이렇게 대꾸했다.“필요 없어.”구승훈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강하리는 손목에 전해지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그녀는 다쳐도 상관없다는 듯 그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 더 세게 몸부림쳤다.“하리야...”“구승훈!”강하리의 눈에는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애초에 그런 결정을 내렸으면 다신 날 찾아오지 마. 힘들게 마음먹고 놓아줬는데 왜 계속 날 찾아오는 거야. 나는 뭐 힘들지 않은 줄 알아? 아니면 난 이런 고통을 겪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거야? 구승훈,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둬!”강하리의 말이 떨어지자 구승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더니 강하리의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미안, 일찍 자.”말을 마친 그가 뒤돌아 가버렸고 엘리베이터가 마침 도착했다.문이 열리고 구승훈이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불과 몇십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힌 뒤에야 강하리는 힘이 풀린 듯 벽에 기대었다.그런 말을 뱉고도 마음이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하지만 그것 말고는 뭘 할 수 있겠나.차라리 구승훈이 예전처럼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면 좋겠다.그러면 무의미한 갈등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아무리
게다가 손에 든 보고서에 대해선 더더욱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주해찬의 입꼬리가 얕게 올라갔다.이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사실 이번에도 마침 강하리가 전문가를 찾는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찾아온 건 아니었다.이모를 통해 강하리의 결혼식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들은 그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아직도 병원에서 강하리가 망설임 없이 구승훈을 택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그녀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그 남자를 향해 달려가지만 모든 것을 내어준 뒤 또다시 깊은 상처를 받았다.이대로 무너진 그녀가 다시는 이겨내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주변에서 말려도 꿋꿋이 돌아왔다.오로지 그녀가 잘 지내는지 보기 위해.하지만... 지금 주해찬은 웃고 있다.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다.훌륭한 후배를 둔 것에 대한 뿌듯함?귀하게 자라야 할 여자가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진 것에 대한 안쓰러움?아니면 그녀에게 더 이상 자신이 필요 없는 것 같아 느껴지는 허탈한 좌절일 수도 있다.강하리는 전문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뒤 주해찬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가는 동안 주해찬은 그녀에게 유학 시절에 있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과거나 결혼식에 대해 그가 물어볼 줄 알았는데 주해찬은 일절 말이 없었다.단지 주씨 가문 앞에 차가 멈춰 섰을 때쯤 그가 말했다.“연말에 같은 과 선배가 파티를 연다는데 그때 같이 가자.”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고 주해찬은 그녀가 차를 돌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참 멀어진 뒤 문득 상대를 불렀다.“하리야.”강하리의 차가 속도를 줄이며 멈췄다.주해찬은 다가가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조심히 가.”강하리는 창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늦은 밤이라 도로가 유난히 조용했지만 도시는 여전히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운전했다.연말이 가까워진 시점이라 거리에는 아직 문을 연 가게들이 많았다.한 여자가 명품 매장에서 남자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있는데 문득 강하리가 차 속도를 늦추었다.결국 그녀는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강하리는 도착한 전문과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가려 했다.그런데 이제 막 그들과 얘기를 끝마칠 무렵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하리야!”강하리의 걸음이 멈칫하며 다가온 상대를 보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선배?”강하리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놀라움이 묻어났다.주해찬을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랜만에 만난 주해찬은 예전의 따뜻하고 쾌활한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그는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전문가분들과 함께 온 거예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로키 선생님께 연락할 때 나도 옆에 있어서 같은 비행기 타고 왔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에게 전문가들의 경력에 대해 소개했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문득 출입구에 다다랐을 때 강하리는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주해찬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그래?”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강하리의 차가 떠난 뒤에야 구승훈은 담배를 끄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노진우가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에 따라가려 했지만 갑자기 그의 걸음이 멈추며 그가 고개를 돌렸다.“왜 날 따라와? 너한테 준 임무가 뭔지 잊었어?”남자의 목소리는 싸늘했다.조금 전 그 장면은 구승훈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노진우도 마음이 불편했다.구승훈은 그들 모녀의 안전을 위해 홀로 여초연과 싸우면서 평생 몸이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짊어지고 있는데, 정작 그녀는 주해찬을 맞이하기 위해 한밤중에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다니.원망스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어쨌든 두 사람은 아직 이혼하지 않았으니까.“대표님 모실게요.”오랫동안 구승훈 곁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노진우는 그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다.그는 말을 마친 뒤 구승훈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고집스럽게 구승훈 옆에 서 있었다.구승훈은 비웃
임희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구승훈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녀의 마음속엔 서늘한 감각이 일렁거렸다.‘여초연이 사람을 보내 감시하는 걸까?’구승훈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차 쪽으로 걸어가더니 쓰레기통을 지나칠 때 입고 있던 외투를 망설임 없이 벗어서 던져 넣었다.“신경 많이 쓰셨네요. 굳이 같은 걸로 사 오시고.”임희주는 입술을 벙긋하며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물론 구승훈도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터라 말을 마친 후 그대로 차를 몰고 떠났다.임희주는 구승훈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무의식적으로 다시 그늘진 곳을 바라보았다.여전히 깜깜한 밤이었지만 그녀는 저쪽에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그저 단순한 의심이었다.정신과 의사로서 이러한 심리적 작용에 휘둘려선 안 되지만 여초연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았다.원래도 충분히 사람을 보내 그녀를 감시할 만한 사람이라고 의심했는데 이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자신과 구승훈 중에 먼저 백기를 들 사람은 당연히 구승훈이라고 생각했다.그녀가 구승훈 곁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이간질하면 언젠가 강하리가 이혼을 제기할 것이고, 강하리가 이혼을 고집하는 한 구승훈은 불안할 수밖에 없으니까.초조해지면 당연히 한발 물러서 손을 잡으려 할 거다.물론 구승훈이 이혼할 의향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이다.한배를 타는 것보다 구승훈과 단단히 엮여있는 게 더 좋았다.그런데 강하리가 연성에 다녀온 이후 태도가 180도 바뀔 줄이야.강하리는 그녀가 구승훈 곁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걸 보면서도 이혼을 제기하지 않았고 임희주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황급히 어두운 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차로 뛰어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한 인물이
강하리는 로키의 도움을 받아 몇몇 약물 전문가를 찾았다. 사실 심씨 가문의 인맥으로도 찾을 수 있지만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을 찾기엔 정계 쪽 인물이 제격이었다.우산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때마침 걸려 온 로키의 전화를 받았다.“전문가가 2시간 후에 B시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니 마중 나가요.”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강하리는 가정부를 부르고 옷을 챙겨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가로등 밑의 남자는 옆에 있는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밖으로 나온 강하리의 눈에 머리와 온몸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하얗게 물든 남자가 동상처럼 서 있고 옆에 있는 여자가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모습이 들어왔다.강하리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니 운전기사는 이미 큰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눈길이 미끄러워 그녀는 직접 운전할 생각이 없었다.강하리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저쪽의 두 사람은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강하리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아파트 앞 큰길로 걸어갔다.“사모님, 늦은 시간에 어디 가세요?”임희주가 갑자기 외쳤다.“급한 일 있어요? 아니면 누구 만나러 가는 건가요?”강하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저쪽을 바라보았다.“임 선생님께선 오지랖도 참 넓으시네요. 내연녀 주제에 무슨 자신감으로 내 앞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죠?”임희주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간 굳어지더니 이내 다시 웃었다.“사모님, 전 두 사람 사이 방해할 생각 없어요. 다만 지금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게 저밖에 없으니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도 정신과 의사니까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챙길게요.”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잘 부탁드릴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구승훈을 힐끗 보고는 뒤돌아 떠났다.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노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강 대표 외출했으니까 잘 지켜.]메시지를 보낸 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붉은 불빛이 번뜩이며 구승훈이 마침내 임희주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와
데리러 온 구승재에게 보이는 건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홀로 서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 구승훈이었다.그와 연정이의 생일은 불과 며칠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에 연정이의 생일을 언급함으로써 강하리에게 자신의 생일도 곧 다가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었다.강하리와 연정이가 끝을 알 수 없는 이 문제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그녀는 늘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존재였다.피식 웃던 구승훈은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서 슬픔이 느껴졌다.강하리가 정말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형.”구승재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구승훈은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야?”구승재는 잠시 침묵했다.“형,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거야? 솔직히 지금 형은 이기적인 것도 모자라 잔인하기까지 해. 게다가 임희주도 형수님이 지금까지 참은 게 용할 정도야. 우리가 처리할 수는 없는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여초연 일을 끝내고 처리해도 늦지 않아.”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임희주가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지만 형 나름대로 계획이 있을 테니 그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참, 오늘 B시 비즈니스 협회에서 초대장을 보냈는데 크리스마스에 사업가들 모임이 있대.”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차에 올랐다.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일어나서 우유 한 잔 마시려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밖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해 그녀는 우유를 손에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인월동 아래에는 인공 호수가 있었는데 연말연시가 다가오는 지금 인공 호수엔 온갖 장식을 둘러 밤에도 반짝이고 있었다.밝은 조명 아래 한 인물이 차 옆에 서 있었다.강하리는 꼭대기 층에 살았기 때문에 아래층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대는 인파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사람이었다.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을까. 그의 어깨, 머리카락이 온통 흰 눈에 덮여 있었다.강하리는
강하리가 연정이를 데리러 왔을 때 구승훈은 연정이를 데리고 길거리 디저트 가게에서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연정이의 머리에는 작은 사슴 머리핀이 있었는데 살짝 곱슬곱슬한 머리를 구승훈이 두 갈래로 묶어주었다.원래 입었던 옷도 갈아입은 채 작은 케이크를 들고 신나게 베어 물고 있었다.하도 급하게 먹어 콧등에도 크림이 묻었다.강하리가 오자 연정이는 들떠서 방방 뛰었다.“엄마, 엄마.”구승훈은 유리창 너머로 밖에서 그들 부녀를 바라보는 강하리를 보았다.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유난히 짙었고 두 사람의 귀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강하리는 문득 씁쓸함이 밀려왔다.두 사람이 만나는 동안 구승훈도, 그녀도 한 번도 제대로 된 생일을 보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연정이마저 온전한 생일 한번 쇠어준 적이 없었다.구승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강하리에게 고정된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하지만 강하리의 시선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뒤돌아 디저트 가게로 들어갔다.연정이의 코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고 연정이의 손과 얼굴까지 다 닦고 나서 그녀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아빠한테 인사해.”디저트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는 구승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연정이도 이별이라는 걸 알았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짝 웃고 있었지만 어느새 코끝이 붉어지기 시작했다.그래도 꿋꿋이 구승훈을 향해 손을 흔든 아이는 강하리의 품에 안겨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강하리도 연정이의 서글픈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한때는 연정이에게 온전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애썼던 그녀였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녀에게 희망 고문만 남겨둔 채 매정하게 외면했다.강하리는 가슴 속 울분을 억누르고 연정이를 안은 채 뒤돌아 문을 나섰다.구승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강하리.”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췄다.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왜?”자리에서 일어난 구승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연정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며칠 후면 연정이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