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플랜 B, 그녀의 남자를 훔쳐라: Chapter 1 - Chapter 10

70 Chapters

제1화

오서린은 어렸을 때부터 예쁘장한 외모로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그녀가 연두색 나비 무늬 원피스를 입고 등장하자마자 시끌벅적하던 룸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다들 주변에 모여들어 아부하기 급급했고,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기대했던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누군가 이를 보고 농담을 건넸다.“강지후 찾아?”오서린이 부인하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마도 지금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을 거야.”“서프라이즈?”상대방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오서린은 어리둥절했다.“무슨 서프라이즈?”“몰랐어?”인형처럼 정교한 이목구비와 생기발랄한 느낌의 원피스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줬으며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똑같은 옷을 입는다고 해도 분위기만큼은 흉내 낼 수 없다는 사실은 속으로 뻔했다.비록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이따 강지후가 와서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오늘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라고 했거든. 서린아, 혹시 무슨 얘기인지 알아?”오서린이 고개를 저었다.“오늘 서린이 생일인데 뻔하지 않겠어? 프러포즈하려고 준비하는 거겠지.”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서린은 깜짝 놀라더니 심장이 점점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사실 이번 생일 파티도 강지후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심지어 오늘 오후 전화까지 와서 저녁에 예쁘게 꾸미라고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서프라이즈가 곧 프러포즈일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다.소꿉친구인 두 사람은 철이 들어서 서로 알고 지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며 오랜 시간 함께해온 만큼 인생의 동반자로 굳게 믿고 있었다.그런데 며칠 전 강지후의 어머니께서 얼른 혼인신고 하라고 했더니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었다.오서린은 그가 아직 결혼이 부담스러워서 거절한 줄 알았다.그런데 몰래 준비하고 있었다니?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신이 나서 휴대폰을 꺼냈다. 절친인 임다정에게 희소식을 전하며 언제 오냐고 물었다.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혹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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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클럽.진태하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만 자리를 비우려고 일어섰다.정혁수가 깜짝 놀랐다.“이제 9시인데 벌써 가요?”“별로 재미없어.”“왜요? 예쁜 여자들이 이렇게나 많잖아요. 병원에서 야간 근무하는 것보다 백 배 낫지!”이내 벌떡 일어나 그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댄스 플로어에서 춤을 추고 있는 젊은 남녀를 가리켰다.“저 행복해하는 표정 보이죠? 정녕 하나도 안 부러워요?”진태하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싸늘한 눈빛으로 어깨를 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이거 놔.”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정혁수는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진태하가 동기 중에서 얼굴 담당이라 어쩔 수 없었다.만약 오늘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이성의 연락처조차 따지 못했을 것이다.정혁수의 말투가 한결 누그러졌고 애처로운 얼굴로 부탁했다.“형, 저 이제 27살이에요. 엄마가 올해도 솔로라면 지금 사는 집을 팔아버리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설마 쫓겨나는 꼴을 마냥 지켜볼 정도로 매정하진 않겠죠?”“그러니까! 저도 혼기가 꽉 차서 이번에도 여자 친구를 못 만나면 설에 돌아오지도 말라고 했어요.”“나도 연애하고 싶어요. 형,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다른 사람도 질세라 한 마디씩 보탰다.진태하는 눈살을 찌푸려다.정혁수가 말을 이어갔다.“이게 다 형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심지어 저보다 한 살이 더 많은데 어머님께서 얼마나 손자를 보고 싶어 하겠어요?”정혁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 시대 사람은 대를 잇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아들이 하루라도 빨리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돈을 아등바등 모아 고향에 있는 집까지 팔아서 하성시에 10억짜리 30평 아파트를 사주었다.결국 은행에서 대출받은 4억을 갚는 신세까지 갔다.부모님만 떠올리면 안쓰러운 마음에 서로를 헤아릴 줄 아는 반쪽을 만나 인생 제2막을 함께하고 싶은 건 매한가지였다.“돌아가서 잘래.”의사한테 가장 부족한 게 바로 수면이다.물론 이는 정혁수도 공감하는 바이다.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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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삼촌이라 부른다고 해서 진짜 날 조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제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오서린은 간신히 욕조에서 기어 나왔다.그동안 다정하게 챙겨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호텔에 같이 온 자체가 실수였다.“그런 꼴로 나간다고?”등 뒤로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문을 열자마자 발걸음을 멈춘 그녀는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었다. 여름 원피스는 원단이 얇아 몸에 찰싹 달라붙어 불편했을뿐더러 속옷 패드까지 비뚤어져 특정 부위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이런 모습으로 밖에 나가는 건 말이 안 되었다.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고, 다른 손으로 가슴을 가린 다음 문을 벌컥 열었다.물론 가만히 서서 싸늘한 목소리로 진태하를 쫓아냈다.“얼른 나가요. 이제 그만 잘래요.”진태하는 주머니에서 라이터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이리 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봐.”안 그래도 기분이 씁쓸한데 하필이면 아픈 곳을 찌르다니.지금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의욕이 당최 없었다. 특히 진태하 앞에서 더더욱.그의 얼굴만 봐도 임다정이 떠올랐고, 대신 진태하에게 연애편지를 전해줬던 기억까지 되살아났다.당시 물과 불처럼 상극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임다정을 위해 자존심마저 기꺼이 내려놓았다.그런데 어찌 뒤통수를 칠 수 있단 말이지?오서린은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어느덧 술기운이 점점 올라왔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자 임다정을 4년 동안이나 짝사랑하고도 끝내 마음을 얻지 못한 건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임다정이 그녀의 남자친구를 빼앗았으니 진태하와 관계를 하면 보란 듯이 한 방 먹이는 셈이지 않은가?충동에 휘말리는 건 찰나였다.오서린은 욱한 마음에 문을 닫고 손을 내린 뒤 진태하를 향해 걸어갔다.물에 젖은 원피스는 여자의 굴곡진 몸매를 여실히 드러냈다.22살이면 이제 꽤 성숙했다고 볼 수 있다.진태하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눈앞의 유혹적인 광경에도 꿈쩍하지 않고 똑바로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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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진태하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오서린은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10시까지 질질 끌었다.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체크아웃 시간이 되었다고 찾아오는 직원도 없었다.지금쯤이면 떠나지 않았을까?이내 방문 앞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고 심호흡한 뒤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밖에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는데 눈앞에 희뿌연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고개를 돌리는 순간 칠흑 같은 눈동자와 맞닥뜨렸다.진태하는 손에 든 담배를 비벼껐다.“조식 먹으러 가자.”그러고 나서 앞장서서 걸어갔다.오서린은 입만 달싹였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갔다.1층에 있는 식당에 도착하자 직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다가왔다.오서린은 대충 주문하고 다시 돌려주었다.방 안에서 가방을 찾지 못해 휴대폰으로 시간을 때우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이내 뻘쭘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창밖의 분수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한편, 주문을 마친 진태하는 직원이 자리를 피하고 나서야 맞은편에 앉은 무심한 표정의 여자를 유심히 살폈다.그리고 한참 후에 기괴한 침묵을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책임질게.”오서린의 동공이 문득 커졌고 고개를 홱 돌리더니 말까지 더듬었다.“뭐라고요? 책임이 웬 말이죠?”진태하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네가 술 취한 틈을 타서 저지른 일이니까 만약 책임을 묻는다면 뭐든지 할게.”마지못해 대답한다는 말뜻을 어찌 모르겠는가?비록 자기 잘못처럼 얘기했지만 따지고 보면 어젯밤 먼저 생떼를 부린 사람은 그녀였다.그냥 해본 말까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특히, 진태하의 약속이면 더더욱.오서린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테이블 밑에 놓인 손가락을 불끈 움켜쥐고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니요. 필요 없어요.”진태하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어차피 원나잇이잖아요. 다 큰 어른인데 이해해요.”그리고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어갔다.“어제 취했거든요. 태하 씨도 내가 술 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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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오서린은 카페를 나서는 임다정을 바라보았다.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종업원에게 계산을 부탁하고 일어나서 자리를 떠났다....택시에서 내리자 휴대폰이 울렸고 낯선 번호였다.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받기 싫어서 그냥 끊어버렸다.그리고 휴대폰을 가방에 넣자마자 벨 소리가 다시 울렸고 아까 그 번호였다.결국 짜증이 나서 전화를 받고 한 소리 하려던 찰나 상대방이 먼저 쏘아붙였다.“오서린! 네가 다정이한테 헤어지라고 얘기한 거야?”강지후는 웬만해서 풀네임을 부르지 않았다.아침에 확인한 문자만 보더라도 그녀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했다.하지만 지금은 임다정을 위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오서린은 심장이 따끔거렸고, 아파트 정문에 멈춰서서 눈을 질끈 감았다.“강지후, 앞으로 임다정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헤어지든 말든 알아서 해. 나랑 상관없으니까 더 이상 연락하지 마.”“다정이가 널 만났다고 했어!”강지후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지금 이런 모습이 눈에 진짜 거슬리는 거 알아? 네가 상처받을까 봐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결혼을 강요하는 거야? 난 단지 여동생으로...”“여동생?”또다시 언급하자 오서린은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눈을 뜨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강지후, 여동생한테 스킨십하는 오빠를 본 적 있니? 대체 어떤 남매가 키스하지? 어제는 내 체면을 생각해서 사람들 앞에서 참고 넘겼지만 감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모욕해?”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지더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찌 됐든 너랑 결혼할 생각은 없어. 다정에게 사과하고 이제부터 남매로 지내자, 예전처럼 널 챙겨줄게.”“내가 왜 사과해야 하지? 그리고 넌 또 무슨 낯짝으로 명령하고?”“지금 우리 집에 살고 있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볼 텐데 꼭 그렇게 서로 얼굴을 붉히며 지내야겠어?”오서린은 머뭇거리다가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이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리고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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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오서린은 다시 주은채의 집으로 돌아왔다.거실 한쪽에 캐리어를 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한참이 지나서 휴대폰이 울리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발신인을 확인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고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아줌마, 왜요?”“서린 씨, 그게... 도련님이 방을 확인해보라고 했는데 옷과 액세서리가 없어진 것 같다고 하네요. 그리고 악어가죽 가방 두 개가 사라졌대요. 당장 돌려주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해서라도 받아낸다고...”장순묘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고 누가 봐도 마지못해 하는 말이었다.오서린도 충격을 금치 못했다. 강지후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곧이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씩씩거리며 말했다.“전 가져간 적이 없어요. 캐리어도 확인했잖아요. 본인이 직접 목격하기라도 했대요?”“서린 씨, 진정하세요. 도련님이 너무한 건 사실이지만 제가 보기에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길 원하는 듯싶어요. 밖이 아무리 좋아도 제집만큼 하겠어요? 굳이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잖아요. 도련님 때문에 화가 났다면 사모님이 돌아온 다음 말씀드려 보세요. 대신 한 바탕 화풀이해주실 거예요.”“거긴 우리 집이 아니거든요?”그녀는 자신이 한 말이 장순묘에게 상처를 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강지후와 어머님이 사는 집에서 어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이좋게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겠는가?게다가 강지후가 저지른 행동 때문에 역겨울 정도였다.“아줌마! 대체 언제 물건 돌려준대요?”휴대폰 너머로 강지후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오서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전 가져간 적이 없으니까 경찰에 신고하라고 해요.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있어야죠. 태생이 바른 사람인데 그따위 물건을 왜 탐내겠어요?”말을 마치고 나서 전화를 뚝 끊었다.그리고 휴대폰을 소파에 내동댕이친 다음 얼굴을 감싼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곧이어 무언가를 떠올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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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늦은 밤.사람들이 모여서 포커를 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이번에도 망한 패가 걸린 강지후는 미간을 찌푸렸고, 옆에서 담뱃갑을 집어 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하도윤이 힐긋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금연한다더니, 왜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강지후는 묵묵부답했고, 누군가 농담을 건넸다.“그러니까, 금연한다고 하지 않았어? 담배 냄새가 잔뜩 배어서 집에 갔다가 서린한테 문전 박대당하면 어떡해?”“젠장! 조용히 있으면 어디 덧나냐?”버럭 외치는 소리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하도윤이 발로 농담한 친구를 걷어차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지후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 여자 친구의 귀에 흘러 들어가면 속상해할지도 모르니까 앞으로 입 조심해.”다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 사이가 돈독한 편이었다. 평소에 허물이 없을 정도로 친했기에 서로를 비웃는 일이 잦아도 대개 농담으로 여기고 그냥 넘기곤 했다.강지후가 이토록 화를 낸 건 처음이었다.남자는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상황인지 속으로 뻔한 하도윤은 게임을 재개하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오늘 단톡방에서 한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았어?”강지후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내 일에 신경 꺼.”“어차피 얘기해줘도 안 듣잖아. 가까운 사이일수록 선을 지켜야지, 설령 여자 친구를 만난다고 해도 어떻게 임다정과 사귀냐? 서린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가다가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면 어떡하려고?”“닥치고 포커나 해. 왜 이렇게 말이 많지?”강지후는 카드를 내동댕이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떠나기 전에 옆에 있는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 누구랑 사귀든 내 맘이야. 걔가 뭐라고 동의까지 받아야 해?”“이게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잖아.”하도윤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그나저나 서린이 진짜 남자친구 생겼어?”강지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언제까지 지껄일래?”하도윤이 양도준을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도준이가 서린을 좋아하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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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오전 진료 마지막 환자를 보낸 후 진태하는 가운을 벗고 손을 깨끗이 씻은 뒤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금방 갈게.”이내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고 정혁수가 목청을 높였다.“형, 전 이미 식당에서 밥 먹고 있어요. 조카가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던데 모처럼 왔으니 맛있는 거나 사줘요.”휴대폰을 들고 걸어가 손잡이를 잡는 순간 진태하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눈살을 찌푸렸다.“조카?”“네, 그저께 밤에 클럽에서 만난 예쁜 여자요. 형을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았어요?”정혁수는 밀지 말라고 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형한테 알려주려고 했는데 괜찮다네요. 일하는 데 방해될까 봐 밖에서 기다린다며, 어찌나 철이 들었는지.”“이제 제 차례가 왔으니 이만 끊어요. 얼른 조카 데리고 밥 먹으러 가요. 점심때 식당들이 대기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서둘러요.”그러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진태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살을 찌푸렸다.문을 열자 휴게실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오서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인스타를 다시 다운 받아서 한창 눈팅하던 중이었다. 오전에 파파라치가 임다정과 강지후의 연애 소식을 폭로하고 당사자가 직접 인정까지 하자 네티즌들은 두 사람의 과거를 파헤치며 지지글을 올리기 시작했다.소꿉친구, 찰떡궁합, 천생연분...오서린은 목격담을 보고 나서야 작년 크리스마스에 강지후가 임다정과 함께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은 출장 간다고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광고 촬영이 있다고 해서 당시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임다정이 올린 로맨틱한 저녁 식사 사진 속 남자는 손목에 그녀가 선물한 아르마니 시계를 차고 있었다.오서린은 화가 나서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이때, 늘씬한 다리가 시야에 들어왔고 고개를 들자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를 발견했다.그는 오늘 검은색 셔츠를 입고 바지도 같은 계열의 색상을 매치했으며 단추는 목 끝까지 채웠다. 무미건조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자체만으로 남성미를 물씬 풍겼다.진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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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남자의 얼굴에 짜증과 무관심이 고스란히 묻어났다.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서린은 괜스레 기가 죽었다. 누가 봐도 단물만 빨아먹고 안면박대하는 모습이지 않은가? 자칫 그녀가 들러붙을까 봐 선을 긋기 급급했다.자존심 때문이라도 매달리지 말아야 했지만 강지후와 임다정이 작년에 몰래 만났던 일을 떠올리면 도무지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진태하는 임다정이 4년 동안 좋아했지만 끝내 이어지지 못한 사람이었다.게다가 모든 면에서 강지후를 능가했다. 친구들은 그녀가 밀당한다고, 더 좋은 남자친구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따라서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진태하와 꼭 사귀어야만 했다.“연락처 알려줘요.”오서린이 휴대폰을 건네주었고, 싸늘한 눈빛으로 가만히 서서 쳐다보는 진태하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핑계를 댔다.“나한테 옷 사줬잖아요. 카톡으로 돈 보내줄게요.”진태하는 그제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카톡을 열었다.“송금하려면 친구를 추가해야 하거든요.”이내 휴대폰을 내밀자 오서린은 재빨리 추가했다. 나름대로 성과가 있는 식사 자리인지라 속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태하의 말을 듣고 의기소침해졌다.“160만이야.”“네?”오서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영수증.”진태하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오서린에게 보여줬다.그녀는 평소에 브랜드 제품은 사지 않았다. 특히 옷이나 신발 같은 소모품은 오랫동안 방치하면 색이 바래거나 유행이 지나기에 큰돈을 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물론 경제력이 달리는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모임에 나가면 귀동냥으로 비싼 브랜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강지후도 꼭 집어 얘기했었다.“돈 갚는다며?”남자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오서린은 울컥했지만 이를 악물고 송금해주었다.옷값에 밥값까지 더하면 이번 달 월급을 탕진했고, 심지어 비상금까지 탈탈 털렸다.상대방이 잽싸게 수락하자 가슴이 미어질 지경이었다.“볼일 끝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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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어제 뭐라고 대답했는지 벌써 까먹었어?”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어찌 잊겠는가?다만 그녀도 이렇게 빨리 후회할 줄은 몰랐다.당시에 동의했더라면 이제 와서 난처할 일이 없었을 텐데.“단순히 책임감 때문에 마지못해 저랑 있겠다고 하는 게 싫었을 뿐이에요.”오서린은 말을 이어가면서 무릎 위에 놓은 가방을 꼭 움켜쥐었다. 비록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진태하는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잠시 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래서 책임지지 말라는 거야?”만약 수긍한다면 어물쩍 넘어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게 뻔했다.이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금 여자 친구가 없다고 들었어요. 마침 저도 솔로라서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때요?”“됐어. 아직은 혼자가 좋아.”진태하는 휴대폰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힐긋 쳐다보았다.“문 닫을 거야.”이만 가보라는 뜻이었다.화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뾰족한 수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대시한 적이 이번이 처음이었고 찰거머리처럼 매달리는 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받은 수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오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꼬리를 올렸다.“물론 거절할 수는 있어도 나를 막을 자격은 없죠. 태하 씨한테 대시하는 건 내 마음이자 자유이기도 해요.”진태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뜻인즉슨 나도 거절할 자격은 있다는 거네?”희미한 미소에 씁쓸함이 묻어났다.오서린이 입을 삐죽거렸다.“지금은 거절할지언정 나중에 받아줄지도 모르잖아요? 어차피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게다가 그건 제 첫 경험이란 말이에요. 워낙 보수적인 성격이라 시작과 끝을...”“처음이라고?”진태하의 눈빛이 의미심장했고 당최 속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비아냥거렸다.“예상외로 남자 꼬시는 데 도가 텄군.”오서린의 볼이 후끈거리더니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그녀를 바라보던 진태하는 입가에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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