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으로 들어가니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여기저기에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정혁수는 오서린을 데리고 음식을 가지러 갔고 이곳은 셀프 식당이었다. 고기반찬과 야채 반찬은 모두 가격이 같았으며 중량에 따라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고기반찬은 대부분 다 떨어진 상태였고 야채 요리만 남아 있었다. 정혁수가 말한 그 맛있는 고기볶음 요리도 없었고 통닭 요리에는 닭고기가 별로 없이 닭 날개뿐이었다.오서린은 가지 요리와 브로콜리 그리고 생선 요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밥값을 계산하고 그들은 테이블로 향했다. 한 테이블에는 의자가 네 개 있었고 정혁수랑 진태하가 나란히 앉았다.오서린은 정혁수의 맞은편에 앉았고 그녀의 옆에는 빈자리가 하나 더 있었는데 이미 음식이 담긴 식판이 놓여 있었다. “김 선생님은 어디 갔어요?”정혁수가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저기요.”오서린은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김지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김지안이 뜨거운 국수 한 그릇을 들고 와서 진태하의 앞에 놓아주었다.“선배, 이거 먹어요.”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오서린의 옆에 앉았다.“왜 태하 형만 챙겨줘요? 나도 국수 먹고 싶은데. 장 선생님,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정혁수의 놀림에 익숙한 듯 김지안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선배는 위가 안 좋아서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안 돼요. 정 선생님은 선배랑 다르잖아요. 오늘도 식판에 엄청 담아왔네요 뭘.”오서린은 진태하와 정혁수의 식판을 번갈아 보았다. 진태하의 식판에는 야채 반찬과 밥만 있었고 정혁수의 식판에는 고기반찬이 가득 쌓여 있었다. 진태하처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이런 구내식당의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위가 나쁜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서린 씨, 이것밖에 안 가져왔어요? 이거 먹고 배부르겠어요? 국수라도 한 그릇 가져다줄까요?”이때, 정혁수의 물음에 오서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오서린의 진열장에는 대부분 몇만 원짜리 액세서리였고 가격이 비싸지 않아 마음에 들어 하는 고객이 있다면 동료들이 그녀를 도와 팔기도 했었다. 그러나 비취 같은 건 가격이 몇백만 원을 호가하기 때문에 동료들도 선뜻 팔 수가 없었다.비취 업계는 내막이 복잡하고 이윤도 비교적 많았다. 똑같은 품질의 비취라고 해도 판매하는 사람에 따라 최소한 몇백만 원의 차이가 날 수 있었다. 오서린은 자금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몇십만 원에서부터 2, 3백만 원짜리의 액세서리들만 들여왔다. 그것들은 다시 되팔면 5, 6십만 원 정도 벌 수 있었고 가끔은 80만 원, 100만 원까지도 이윤이 남을 때가 있었다.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액세서리들보다 이윤이 더 높았다.게다가 어제의 일 때문에 오늘은 본전을 5, 6십만 원 정도 돌려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마친 오서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로 향했다. 가게 입구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아직이에요? 안 오면 그냥 갈 거예요.”“죄송해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지금 오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한 번 더 전화해 보겠습니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익숙한 두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동료는 그녀를 보자마자 들뜬 표정을 지었다.“서린 씨, 왔어요?”“왜 이제야 와?”온몸에 명품을 휘감고 있는 두 여인이 소파에서 우아하게 일어섰다.“두 사람이 여긴 어쩐 일이야?”“어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네 얼굴 좀 보러 왔어. 네가 일하는 곳도 겸사겸사 볼 겸 해서.”오서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진열장으로 향했다.“비취 팔찌를 사겠다고?”두 사람은 앞으로 다가와 무심하게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저것 좀 꺼내서 보여줘.”“난 이거.”그녀는 비취 팔찌 두 개를 진열장에서 꺼낸 뒤, 그녀들에게 핸드크림을 발라주고 팔찌를 끼워주었다.“이건 얼마야?”“760만 원.”“그럼 이건?”“그건 720만 원.”두 사람은 가격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별로 좋은 것 같지
동료들과 저녁을 먹고 난 뒤, 오서린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사거리에서 빨간 신호등에 택시가 멈췄고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던 그때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하도윤이라는 이름을 보고 오서린은 사실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박연아가 한 말이 떠오른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당장 1997 클럽으로 와.”거절하려는데 하도윤이 급히 입을 열었다.“주은채한테서 방금 전화가 왔었어. 강지후가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는데...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걱정돼.”“알았어. 금방 갈게.”그 순간, 신호등이 바뀌었고 오서린은 운전기사한테 클럽으로 가자고 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클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10여분 뒤, 택시가 클럽 앞에 멈춰 섰다. 1997 클럽은 하성에 있는 고급 클럽이자 강지후와 그 무리들의 아지트로 거의 모든 모임을 이곳에서 가졌다. 며칠 전, 오서린의 생일 파티도 이곳에서 열렸다. 그녀 또한 이 클럽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클럽 안의 직원들은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익숙하게 룸을 찾았고 입구에서부터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이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은채.”오서린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주은채가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았다. 하도윤과 양도준은 그녀가 나타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저놈들이 너한테 연락한 거지?”주은채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하도윤과 양도준을 흘겨보았다. 양도준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아니야.”“하도윤, 너야?”주은채는 분노가 가득 찬 눈빛으로 하도윤을 쳐다보았다.어색한 미소를 짓던 하도윤이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네가 다 때려 부술까 봐 그래. 소문이라도 나면 오서린한테 좋은 일도 아니야. 안 그래?”“강지후 저 인간이 서린이한테 잘못한 거잖아. 나쁜 놈. 어떻게 바
정혁수는 곧 그녀에게 답장하였고 진태하가 음식을 깨끗하게 다 먹었다고 했다. 그 말에 오서린은 꽤 의외였다. 사실은 그가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릴 줄 알았다.이내 정혁수한테서 다시 문자가 왔다.[진태 형이 그렇게 잘 먹는 모습을 처음 봐요. 어느 식당에서 포장해 온 거예요? 나도 내일 주문해야겠어요.]진태하의 마음을 얻는 것에 자신이 없었지만 정혁수의 말을 듣고 나서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다.[내가 만든 거예요.]정혁수는 한껏 놀란 눈치였다.[서린 씨가 만든 거라고요?]오서린은 득의양양한 표정의 이모티콘을 보냈고 정혁수는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대화창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가 한참이 지나서야 문자를 보내왔다.[태하 형은 왜 조카인 서린 씨한테까지 요리를 시켜요? 이건 서린 씨를 괴롭히는 거 아니에요?]그녀는 자신이 지금 진태하의 마음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고 그냥 대충 둘러댔다.[며칠 전에 도와준 적이 있어서요. 그래서 감사의 의미로 도시락을 준비한 거예요. 위가 안 좋아서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하니까... 마침 나도 평소에 요리를 자주 하는 편이고 그냥 하는 김에 도시락을 싼 거예요.]이렇게 말하면 나중에 또 도시락을 갖다주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오서린은 이내 또 문자 하나를 보냈다.[직접 요리를 하면 깨끗하고 돈도 절약하잖아요. 병원과도 가까워서 오가기도 편리하고요.][서린 씨는 정말 내가 본 여자들 중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인 것 같아요.]그 말에 오서린은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혁수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의도가 있었으니까. [난 먹을 복이 없는 것 같네요. 그런 좋은 솜씨를 맛볼 수가 없으니.]진태하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의 동료인 정혁수와도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면 내일은 혁수 씨 도시락도 싸다 줄까요?][너무 번거로운 거 아니에요?][아니에요. 어차피 같이 하는 건데요 뭘. 도시락 하나 더 싸는 데는 얼마 안 걸려요.][그래요. 그럼 내일은 나도 식당에서 밥 안
“성폭행?”진태하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았다.그녀는 얼굴조차 붉히지 않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밤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이 없었어요. 의식도 없는 여자와 관계를 가지는 건 성폭행이라고요. 기본적인 법률 상식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니죠?”얼굴이 굳어진 그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갑자기 한마디 내뱉었다.“그럼 고소해.”그가 이렇게 뻔뻔할 줄은 몰랐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줄은 몰랐다.‘이 인간은 내가 일을 크게 벌리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거야.그녀는 원래 그날 밤의 일에 대해 그냥 넘어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뻔뻔한 그의 태도를 보고 나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진태하 씨, 점잖은 척하지 말아요. 나랑 조금이라도 엮이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당신도 날 탐내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날 밤, 뒷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신이 나한테 키스할 때는 나 의식이 있는 상태였어요.”그는 아무런 감정 기복이 없이 그녀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오서린은 무기력함에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만든 음식도 좋아하고 내 몸도 좋아하잖아요. 나같이 완벽한 여자 친구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눈 크게 뜨고도 찾기 힘들 거란 말이에요. 나이도 꽤 있는데 진짜 나랑 만나볼 생각 없어요?”“오서린. 넌 여자가 돼서 부끄러운 줄도 몰라?”“남자만 여자를 쫓아다닐 수 있다는 법도 없잖아요. 여자가 남자를 쫓아다니면 꼭 수치스러운 일이에요?”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짧은 검은 머리에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과 차분하고 냉철한 모습, 금테 안경을 쓴 남자는 우아한 분위가 넘쳐 흘렸다. 이런 남자는 딱 봐도 통제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그러나 지금 오서린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얼른 진태하를 자신의 남자 친구로 만들어서 그들한테 보여줘야 했다. 이 오서린이 강지후가 아니더라도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단호한 그녀의 눈빛을 쳐다보며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때,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입구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노부인은 손자를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손자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로 다가와 빙그레 웃었다.“태하야, 소개해 줄게. 오늘은 서린이가 없었더라면 이 할미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몰라.”노부인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자초지종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이 할미의 목숨은 서린이가 구해준 거야. 그러니까 이 할미를 대신해 서린이한테 보답해.”진태하는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진태하 선생님, 우리 진짜 인연이네요.”“두 사람 아는 사이야?”노부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고 오서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할머니, 전 오서린이고요. 저희 엄마가 서하은예요. 저 기억 안 나세요?”“아... 네가 오씨 가문의 딸인 거니?”깜짝 놀란 노부인은 오서린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 보니까 네 엄마랑 많이 닮았구나. 그 당시 널 봤을 때는 고작 12살짜리 소녀였는데.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다 되었네.”노부인은 손짓하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여자들은 자라면서 모습이 많이 바뀐다고 하던데 이리 예쁜 아가씨로 자랐구나.”“할머니를 만나게 될 줄은 저도 몰랐어요.”여전히 아무 말이 없는 진태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분명 이 일도 그녀가 계획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어르신.”대머리인 중년 남자가 이쪽을 향해 잰걸음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중년 남자가 다가오자 진태하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할머니, 아저씨랑 먼저 돌아가세요. 이따가 본가에 가겠습니다.”의사인 손자가 많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서린을 쳐다보며 당부했다.
방금 주은채가 전화로 한 말을 그들은 모두 다 들었다. 호기심이 많았던 하이건은 자연스럽게 곁눈질했다. 동생인 하도윤이 종종 강지후와 어울렸기 때문에 오서린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다.“오서린? 예전에 태하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녔던 그 여자애 아니야?”주은혁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진태하를 쳐다보았다. 하이건 역시 진태하를 빤히 쳐다보며 생각이 잠겼다.“그래. 그런 것 같아.”“계집애가 어릴 때부터 예쁘더니. 예쁘게 잘 자랐네. 몸매도 좋고...”진태하가 손에 있던 카드를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주은혁과 하이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남자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집에 일이 있어서 그만 갈게. 너희들끼리 놀아.”말을 마친 그가 이내 자리를 떴다....얼마 되지 않아 주은채는 오빠에게서 도와주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오서린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금요일, 주은채는 그녀를 미용실로 데려가 피부 관리도 해주고 드레스도 준비해 주었다. 오후 6시, 주은혁 쪽에서 아직 소식이 없자 주은채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데리러 오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주은혁은 지금 경남시에 있다면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그 말에 주은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내가 말했잖아. 금요일 밤에 서린이와 함께...”“나 지금 바빠.”주은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순식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젠장.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 인간을 믿는 게 아니었어.”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오서린이 입을 열었다.“나 혼자 가도 돼...”“다른 사람한테 부탁해 볼게.”주은채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사람은 바로 그녀의 남자 친구 서정우였다. 서정우의 신분과 지위는 내세울 만 게 없지만 그는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키도 컸다. 하룻밤 정도 남들의 눈을 속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정우는 주은채가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같이 가자고 하는 말에 이내 준비를 마치고 그녀를 찾아왔다. 그야말로 정교한 얼굴,
박연아는 파티에 온 손님들을 챙기느라고 자리를 떴다.그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몇몇 부잣집 아가씨들이 강지후에게로 다가갔고 임다정도 그녀들의 아첨 대상이 되어 버렸다.오서린은 조용한 곳을 찾아 혼자 있다가 케이크를 자르고 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오서린, 아직도 나한테 화난 거야?”임다정의 말이 나오자 대화하던 소리가 모두 끊겼고 모두가 다시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서린은 발걸음을 멈추었고 임다정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앞으로 만나면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지?”“아직도 날 탓하는 거야?”임다정이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았다.“난 이미 네가 원하는 대로 지후 씨와 헤어졌어. 우리 정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오서린, 경고하는데. 더 이상 다정이를 괴롭히지 마. 내가 너한테 손을 대지 못할 것 같지?”강지후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다가와서는 임다정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런 거 아니야. 서린이는 날 괴롭히지 않았어. 그러니까 서린이한테 뭐라 하지 마. 계속 이러면 나 지후 씨 얼굴 안 볼 거야.”“오서린은 배은망덕한 인간이야. 더 이상 감싸고 돌지 마.”강지후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오서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잘해줘도 고마운 줄 모르더라.”“서린이가 지금 나한테 화난 건 지후 씨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곁에서 좀 멀리 떨어져.”임다정은 눈시울을 붉히며 해명했다.“오서린, 난 너한테서 지후 씨를 빼앗아 간 적이 없어. 지후 씨가 먼저 나한테 다가온 거야.”“오서린, 너 도대체 언제까지 날 괴롭힐 거야?”강지후는 분노와 증오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를 죽이고 싶은 매서운 눈빛을 보였다. 주위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강지후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그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오서린, 어찌 됐든 강씨 가문에서 널 오랫동안 키운 건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적당히 해. 다들 널 싫어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그래. 오늘은 연아의 생일이야. 여기서 소란
“제가 알아서 할게요.”“정말 네가 알아서 했다면 내가 지금 이런 전화를 하고 있겠니?”송미경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지만 그 이면엔 걱정과 조바심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태하야, 넌 우리 집안 하나뿐인 아들이야. 네가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으면 그럼 진씨 가문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니?”그때였다.“저 여자 친구 있어요.”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 말에 정작 진태하 본인도 놀랐다.생각보다 감정은 빠르게 입으로 이어졌고 그 말이 실수였단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니? 여자 친구가 있다고? 어느 집 딸이야? 왜 난 처음 듣는데?!”송미경은 놀란 나머지 새된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이내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근데 왜 오늘 그 연회장에 따라온 거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노력 중이에요.”“진짜야?”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금방 감을 잡았다.아들은 거짓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올해 설에 데리고 갈게요.”“좋아. 그럼 당분간은 맞선 안 잡을게. 근데 태하야, 엄마 속이면 진짜 가만 안 둬. 알았지?”“네.”통화를 끝낸 진태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짧은 숨을 토해냈다.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고 아랫배에 남은 뜨거운 잔열은 쉽게 식지 않았다.한참 뒤 그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거실을 지나 옆방으로 향했다.오서린의 핸드백과 휴대폰을 조심스레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고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잠든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잔잔하게 들리는 숨소리, 흰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흐르는 머리카락.진태하는 조용히 이불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다음 날 아침.오서린은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잠든 사이에 흘러간 밤을 되짚었다.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옷도 말끔히 입고 있었다.‘별일 없었던 건가?’그
사실 진태하 역시 오서린에게 아무 생각이 없던 게 아니었다.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맥주 두 병을 사 오는 걸 그렇게 쉽게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오서린이 잠들었더라면 진태하도 그녀를 그냥 내버려뒀을 것이다.하지만 오서린은 깨어있었고 도발적인 눈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무심코 아래로 향했다. 얇은 슬립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있었고 얇은 천 사이로 드러나는 곡선은 꽤 적나라했다.샤워를 마친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바디워시 향기는 껍질을 막 벗긴 과일처럼 유혹적이었다.진태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내려 손을 뻗었다.“너, 술 취했어.”“나 안 취했어요!”오서린은 오히려 그의 목을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그리고 들뜬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정적으로 말했다.“그쪽이 인정 안 해도 상관없어요. 나 알아요. 일부러 나 데리러 온 거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여사님들도 그랬어요. 그쪽, 원래 그런 자리에 안 나온다면서요. 근데 오늘은 나 때문에 왔죠? 결국 날 데리러 온 거였잖아요.”끝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조잘거림.술기운에 발그레 물든 입술이 흔들리며 단어마다 꿀처럼 흘러내렸다.진태하의 목 안쪽이 바짝 말라왔고 혀끝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스쳤다.그가 자부하던 자제력은 언제나 그녀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오서린. 너 계속 이러면 나 진짜 장담 못 해.”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속삭였다.“나 오늘 부모님 생겼어요.”그 순간, 진태하의 굳어가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오서린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오늘 나, 딸로 받아줬어요.”“그래서 너무 기뻤어요. 그런데 그 집엔 강지후가 있어서 같이 살 수는 없어요...”“친구도 있긴 한데 은채도 이제 남자 친구 생겨서 그 집에도 못 얹혀살아요.”“나, 혼자인 거 너무 싫어요. 외로운 건 더 무섭고. 근데 지금이 그쪽이 있어서
빨간불에 차량은 천천히 멈춰 섰다.무심코 고개를 돌린 진태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또렷한 시선을 느꼈다.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오서린은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잘생겼으니까요.”스물둘, 한창 생기가 얼굴 가득한 나이였다.선홍빛 입술에 하얀 치아,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는 그 미소는 햇살처럼 눈 부셨다.진태하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목울대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낮고 짙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앞으론 그런 옷 입지 마.”오서린은 눈을 깜빡이며 당황했다.고개를 숙이자마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깊은 가슴골이었다.순간, 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당황한 나머지 옷깃을 위로 끌어올렸지만 이 옷은 애초에 그런 디자인이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슬그머니 손을 내린 오서린은 시선을 피하듯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러던 중, 차가 포장마차 앞을 지나가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 배고파요.”결국 두 사람은 꼬치와 맥주를 사 들고 진태하의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오서린은 배정숙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다.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드레스를 벗고 샤워를 한 뒤 민소매 상의에 짧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그녀가 집에서 가장 편하게 입는 차림이었다.며칠 전, 진태하의 집에서 처음 밤을 보내고 난 후 오서린은 결심했다.‘이 집에 자주 올 일이 생길 거야. 그럴 거면 아예 옷 몇 벌쯤은 갖다 두자.’매번 그의 옷을 빌리는 것도 번거롭고 어색했다.그녀의 이런 행동을 진태하는 말리지 않았고 입으로는 선을 지켜야 한다고 운운하면서도 그의 눈빛과 행동은 달랐다.오늘 밤도 그랬다.오서린이 “TV 좀 볼게요.” 하고 말했을 때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머리를 말리고 번 헤어로 단정히 묶은 오서린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얼굴을 한 번 훑어본 뒤, 만족한 듯 방문을 열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저.. 어머님과 같이 가게 됐어요.]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송미경의 차에 올라탔다.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송미경은 곱게 차려입은 그녀를 한 번 흘긋 보더니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배 여사는 정말 복도 많지. 이렇게 예쁜 딸을 뒀으니 말이야.”그녀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예전에 네가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갔으면 지금쯤 나도 아들이랑 딸 하나씩 두고 있었을 텐데... 서린아, 아예 아줌마 딸 할래?”송미경의 장난스러운 말에 오서린은 머쓱하게 웃었다.그 순간, 앞자리의 기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모님, 저기 도련님 차 같은데요.”송미경이 고개를 돌리자 마당 한 켠에 아직 떠나지 않은 진태하의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순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아직 안 갔잖아? 급한 일 있다고 했던 거 다 거짓말이었네. 그냥 출발해요!”송미경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고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자신이 보낸 메시지는 그대로 읽음 표시도 없이 남아 있었다.‘봤을까? 봤겠지...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지?’오서린은 틈날 때마다 고개를 돌려 차창 너머를 살폈다.차가 큰 도로로 접어들어도 진태하의 차량은 따라오지 않았다.‘혹시 메시지를 또 보내야 하나...’그 생각이 스치려는 찰나 송미경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뭐라고요! 쓰러져요? 의사 선생님은 오셨어요? 네, 지금 바로 돌아갈게요!”송미경은 전화를 끊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기사에게 물었다.“근데 이 길 아니잖아요, 잘못 든 거 아니에요?”기사는 당황한 듯 말했다.“그게... 사모님께서 오서린 양 먼저 데려다주신다고 하셔서요.”순간, 송미경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스쳤고 그걸 눈치챈 오서린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여기서 저 그냥 내려주셔도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갈게요.”“안 돼. 밤길에 어떻게 혼자 보내.”“요즘은 앱으로 금방
“맞아, 이제 막 왔으니까 금방 가지는 않을 거야. 얼른 딸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해야겠다. 지금 출발하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여인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서로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그 대화 너머 살짝 떨어진 자리에서 오서린은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표정은 담담했지만 귀 끝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 순간. 오서린의 핸드백 안에서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켜보자 단 한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갈 거야?]보낸 사람은 진태하였다.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오서린은 그와 눈이 마주쳤고 아무 말도 없었지만 심장이 쿵 하고 요동쳤다.그의 눈빛은 담담했고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듯 차분했다.오서린은 손에 쥔 휴대폰을 꾹 쥐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짧고 단호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갈래요.]곧이어 다시 메시지 한 줄이 도착했다.[밖에서 기다릴게.]그 말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고개를 들어보니 진태하는 이미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오서린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어머니를 찾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얘가 겨우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가겠대?”그때 송미경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얼굴엔 실망이 가득했다.“이번엔 뭔가 달라질 줄 알았지. 정신 좀 차리고 여자 친구 하나 진지하게 만나려나 했더니 내가 또 괜히 기대만 했네. 그렇게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옆에 서 있던 배정숙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태하가 요즘 얼마나 바빠요. 병원 일에 회사 일까지 맡고 있다던데. 워낙 책임감이 강한 애니까 이해해 줘요.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오라고 하면 되죠.”“지금 벌써 스물여덟이에요. 나이가 적으면 말도 안 하지...”송미경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이대로 두면 서른 넘기고 마흔 넘길까 봐 두려워요. 나는 대체 언제쯤 며느리 한 번 보나 몰라. 손자 하나 안고
남자의 차가운 시선이 임다정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하게 물었다.“누구시죠?”찬물이 정수리에 쏟아진 듯 임다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졌다.그녀는 얼어붙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눌렀다.“나 기억 안 나요?”진태하의 조각 같은 얼굴은 무표정했다.잠시 그녀를 살피던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무심하게 되물었다.“환자였나?”그 말에 임다정의 얼굴에서 완전히 빛이 사라졌다.수치심과 참을 수 없는 절망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죄송합니다. 지금은 제 근무 시간이 아니라서요. 다른 일정이 있습니다.”진태하는 딱 잘라 말한 뒤,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 옆을 지나쳐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임다정은 마치 텅 빈 껍데기처럼 서 있었다.그는 그녀를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다.몇 년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던 이름과 사진첩에 몰래 저장했던 그 미소, 그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우리 아들 왔네!”연회장 안, 송미경의 목소리가 환한 미소와 자부심을 머금은 채 울려 퍼졌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귀부인들은 앞다퉈 딸들을 앞으로 내세우며 번뜩이는 눈빛으로 자리를 탐색했다.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서린의 혼처 얘기에는 외면하던 얼굴들은 이제는 딸을 진태하 옆에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정숙의 속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미소 속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오서린은 진태하의 등장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섰다.하지만 그 순간, 송미경의 한마디가 그녀를 움찔하게 만들었다.“난 또 의사들은 다 여자 만날 시간 없는 줄 알았는데, 서린이 남자 친구도 의사라며? 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잘만 하던데? 그런데 너는 스물여덟이 되도록 왜 이러니 진짜.”한순간에 연회장 안의 시선이 모두 오서린을 향했다.진태하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하얗던 얼굴은 금세 붉게 물들고 가슴은 쿵쿵
“서린이 이 옷을 입으니까 정말 예쁘네요. 내가 뭐랬어요? 분홍색은 서린이한테 찰떡이라니까요!”한 여자가 연신 칭찬을 늘어놓자 배정숙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우리 딸이 워낙 예쁘잖아요. 뭘 입혀도 다 잘 어울리죠.”“딸?”옆에 있던 송미경이 살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그러자 곧장 주위 사람들이 웃으며 상황을 설명해 줬다.“아, 이번에 정식으로 양녀로 들였대요. 오늘 발표도 했고요.”송미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그런데 전에 서린이를 며느리 삼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그녀는 남의 뒷말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최근 강지후와 오서린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배정숙은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다시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건 내키지 않았다.사실 그녀도 요즘 들어 괜히 아들과 오서린의 관계를 이리저리 떠벌려 결국 오서린이에게 상처만 준 건 아닐까 싶어서 후회하고 있었다.“우리 아들이 그럴 복이 없었나 봐요.”배정숙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서린이가 그 아이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났거든요.”“그래요?”송미경은 흥미로운 듯 오서린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래서 남자 친구가 의사라며?”그 말에 오서린의 속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이미 한 번 뱉어버린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송미경의 다음 질문이 두려워졌다.“어느 병원에서 근무해?”그 순간, 오서린은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설마 병원 이름 얘기하면 어느 의사인지 까지 물어보는 거 아니야?’다행히도 그때 배정숙이 기지를 발휘했다.“송 여사님, 그런데 아드님은 대체 언제 오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잖아요.”송미경이 가볍게 핸드백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조금 늦는다더니 혹시 깜빡했나? 내가 전화 좀 해볼게요.”그 시각, 연회장 바깥.임다정은 조용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차 안은 담배
라수아는 주변에 모여 있던 여자들을 쓱 훑어보았다.하성시에서 이름 좀 있다고 하는 인사들은 죄다 이 자리에 모여 있었고 그녀들 사이에서는 종종 남편이나 자식 이야기가 대화의 주요 소재였다.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누구네 아들이 오서린과 사귄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이 모임은 겉으로는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사실은 날마다 경쟁이 치열한 무대나 다름없었다.자식 혼사는 당연히 신중하게 따져야 했고 며느리는 백번 천번 골라야 하며 딸은 반드시 상위 집안으로 시집보내야 한다는 불문율도 존재했다.그때, 누군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물었다.“서린아, 오늘은 남자 친구 안 데리고 왔어?”배정숙의 체면을 생각한 오서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일이 바빠서요. 오늘은 못 왔어요.”“이렇게 늦은 시간까지도 일한다고?”몇몇 사모님들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을 막고 수군거렸다.그 모습을 본 배정숙은 속이 다 타는 기분이었다.‘이럴 땐 그냥 대충 둘러대지, 어쩜 저렇게 솔직하냐고...’“그래? 남자 친구는 무슨 일 하는데?”그 질문에 오서린은 가장 먼저 진태하를 떠올렸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의사예요.”“의사라, 어쩐지.”사모님들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그들 자식 중 의사인 남자는 없었고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의사는 성실한 직일 수는 있어도 ‘상류층 자제’들에게 흔한 직업은 아니었으니까.‘역시 배 여사가 사윗감 보는 눈이 없구먼.’그들 눈빛 속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어느 병원에 있어?”누군가 집요하게 물었고 배정숙의 얼굴엔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하지만 그때였다.“어머, 저기 송 여사 아니야?”누군가의 말에 모든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연회장이 일순 술렁이기 시작했다.송미경.하성시의 최상위 재벌 가문 중 하나인 송씨 가문의 안주인이자 진태하의 어머니였다.귀부인들은 경쟁하듯 딸을 데리고 그녀에게 다가갔고 라수아도 딸을 이끌고 빠르게 가서 환한 미소로 인사를
오서린은 배정숙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고 있자니 가슴 한켠이 저릿하게 뭉클해졌다. 그동안 마음 한편에 조용히 묻어두었던 외로움이 감사와 애틋함으로 바뀌며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그녀는 이 자리에서 배정숙 부부가 난처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눈물로 가득한 눈을 꾹 감은 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외쳤다.“아빠, 엄마...”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정숙은 오서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팔엔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고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강인헌 역시 눈가가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이며 오서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래, 우리 착한 딸...”행사가 마무리되고 무대에서 내려온 뒤, 배정숙은 오서린을 데리고 재벌가 사모님들 모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딸’을 데리고 등장한 그녀를 향해 모두가 진심 어린 칭찬과 부러움 섞인 인사를 건넸고 배정숙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근데 말이에요, 라 여사님. 양도준 군은 오늘 왜 안 왔어요? 이런 좋은 자리에 한 번쯤 얼굴 비출 법도 한데?”순간, 그 자리에 있던 부인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고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라수아를 향했다.오서린은 어머니가 왜 갑자기 양도준의 이름을 꺼낸 건지 알 수 없었고 라수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 애가 이런 모임 별로 안 좋아해서요.”배정숙은 가늘게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웃었다.“내가 듣기론 그 아이가 우리 서린이를 꽤 좋아한다던데요? 오늘 나도 한 번 보려고 했는데 아쉽네요.”그 말에 라수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우리 아들이 그런 말 한 적 없어요.”단호하고 건조한 말투에는 명백한 불쾌감이 느껴졌다.배정숙도 그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하고는 속으론 불쾌함이 밀려들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그럼, 여러분 댁에 괜찮은 청년 있으면 우리 서린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