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 잔향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30 챕터

제1화

시카이캐슬. 밤, 10시.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등 스위치를 누르자, 객실의 크리스탈 조명이 내 그림자를 바닥에 비추며 창문에 드리워졌다. 이 집은 나의 신혼집이고, 내 약혼자 허민우는 한 회사의 팀장으로 잘생기고, 날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규칙상 결혼 전날 밤은 같이 보내지 못하기에 민우는 신혼집에 머물고, 나는 친한 친구 하시정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내일 사용할 물건들을 확인하다가 면사포를 안 챙긴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몰래 신혼집으로 돌아갔다. 민우에게 미리 전화하지 않은 이유는 그에게 깜짝 서프라이즈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일부터 민우와 함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될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가던 중, 갑자기 침실에서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침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여자의 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불길처럼 화가 치솟았고, 마치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발걸음을 옮겼다.나는 침실 문 앞에 서서 그 안에서 들려오는 거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점점 더 또렷하게 들리며 내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대어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베이지색 하이힐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여자의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런 장면을 보자 저절로 안 좋은 예감이 떠올랐다.나는 마음속 분노와 혼란을 억누르며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내 마음은 칼에 베인 듯 아프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대학 시절, 4년 동안 함께 친구로 지내왔던 진예주가, 내일 나랑 결혼할 약혼자인 민우와 한 침대에 있었다. 예주는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고, 신음 소리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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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고윤슬이 강요하지 않았다면 나도 절대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민우는 거침없이 이 말을 내뱉은 후, 예주를 강하게 눌러 눕혔다. “자기야, 네 약혼녀가 진짜로 왔어.” 예주는 두 손으로 민우의 가슴을 밀어내며 침대에서 일어났고, 침대 문 쪽을 가리켰다. “그럴 리가 없어. 방금 전에 돌려보냈는데, 어떻게...”민우는 말을 하면서 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윤슬아, 네가 왜 여기 있어?” 민우는 나를 보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급하게 예주를 떼어내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의 욕망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당황한 나머지 벌거벗은 몸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예주는 이불을 몸에 감고, 여유 있게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에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나는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앞의 사실에 화가 나고, 미운 마음이 들어 뭐든지 하고 싶었지만 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몸에 타월만 두른 채로 급히 나를 쫓아왔고, 그의 눈빛은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윤슬아, 내 말 좀 들어봐...” “설명할 게 뭐가 있어? 방금 본 그대로잖아. 뭘 더 말하려는 건데?” 심장이 터질 듯 아팠지만 민우가 설명하려 하자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그러나 예주가 민우의 셔츠를 입고, 헝클어진 웨이브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채 나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은 더 없이 유혹적이었다. 예주는 내 앞에 서서 도발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유안이는 민우의 아이야.” 진유안, 세 살인 예주의 아이. 그 아이가 허민우의 아이라니... 내가 가지고 있었던 희망이 예주의 말 한마디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나는 잠시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민우가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예상은 빗나갔다.민우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눈빛은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안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었다. 내 마음은 칼에 베인 것처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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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고윤슬,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손찌검을 할 수가 있어? 언제부터 이렇게 과격해진 거야?” 민우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화가 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꾸짖었다. 나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나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내가 예주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허민우 약혼녀잖아.’ 내일이면 결혼할 사이인데, 민우는 나와의 신혼집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고, 그 여자는 바로 대학 시절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다. “진예주, 당장 꺼져! 여기는 내 신혼집이야, 당장 나가라고!” 나는 미친 듯이 예주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쫓아내려 했다. “그만해, 고윤슬! 너 너무 지나치잖아!” 민우는 다가와 나를 거칠게 밀어냈고, 예주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그녀를 보호하려 들었다. 엉덩이에 느껴진 아픔은 가슴속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쓴웃음을 지으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나는 내가 그에게 있어서 내연녀보다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민우, 이 개X식아!” 나는 절규하듯 그에게 외쳤다. 그 말은 내 온몸의 힘을 다해 내뱉은 듯했다. 나는 아파트를 뛰쳐나와 계속해서 달렸다. 온몸을 격렬하게 움직여야 방금 본 광경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방금의 장면이 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결혼 전날, 약혼자가 친구와 뒤엉킨 모습을 본 것도 모자라, 그 친구가 내 약혼자의 아이까지 낳았다니.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일이 나한테 일어날 줄은 몰랐다.지난 7년 동안 나는 민우와의 사랑을 믿어왔다. 내일이 지나면 민우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밤 내가 본 것은 내 모든 환상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내게 사랑한다고, 평생 함께하겠다고 말하던 민우가 아니었다. 스탠드 바.연기와 술 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했고, 음악 소리는 귀가 터질 듯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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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갑자기 내 시선이 멀리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 멈췄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바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를 알아봤다. 그는 민우의 상사인 변도준이었다. 민우가 회사 연회에 나를 데리고 갔을 때, 도준이 연설을 했던 기억이 있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왜 이런 곳에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상류층의 성공한 사람들도 술집에서 여가를 즐기는 건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하민우가 먼저 날 배신했으니 나도 가만히 있을수만은 없지.나는 술잔을 들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도준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의 가까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발이 삐끗하며 비틀거려 그만 도준의 품으로 쓰러졌다. 도준은 젊어 보였다. 기껏해야 서른 살쯤 되어 보였다. 흰 셔츠의 목깃이 살짝 풀어져 있었고, 소매는 팔 중간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다. 구릿빛 피부, 높고 오뚝한 콧대, 섹시한 입술, 깊은 눈매... 하지만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도준은 잘생겼지만 차가운 남자였다. 도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얼굴에 혐오감을 드러내며 곧바로 나를 밀어냈다. “오늘 밤, 나랑 함께 있어줘요.” 나는 술에 취한 눈빛으로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뭐라고?” 도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이렇게 직접적일 줄은 상상도 못한 눈치였다. “오늘 밤, 나랑 함께 하자고요. 내 말 못 알아들었어요?” 나는 도준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술기운에 용기가 솟았던 것이다. 평소라면 이런 말을 절대로 하지 못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차마 부끄러워할 것도 없었다. 그만큼 오늘 겪었던 일이 날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요즘 여자들은 다 이렇게 개방적인 건가? 정말 나한테 안기고 싶은 거야?” 도준은 나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 그에게 나는 그저 바에서 남자를 유혹하는 저질적인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왜?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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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혼란스럽고 아찔했던 밤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온몸이 쑤시고 뼈마디가 다 느슨해진 것처럼 아팠다. 나는 마음속으로 도준을 몇 번이고 저주했다. 어젯밤 도대체 얼마나 미친 듯이 굴었던 건지, 완전히 야수가 따로 없었다. 몸을 일으켜 앉아 가슴을 내려다보니 온통 키스마크 투성이였다. 게다가 팔에 꼬집은 듯한 자국이 남아 있는 걸 보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굳이 이렇게까지 난폭할 필요가 있었나? “어젯밤 어땠어? 만족해?” 나는 옆에서 들려온 남자의 섹시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도준은 차가운 얼굴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급히 이불로 몸을 감쌌다. 비록 어젯밤에 내가 먼저 함께하자고 했다고는 해도, 아직은 낯선 남자가 내 몸을 그렇게 보는 것이 불편했다. “어젯밤에는 그렇게 대담하더니 이제 와서 순진한 척 하는 거야?” 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건방진 말투와 오만한 태도에 내 마음은 더 불편해졌다. 마치 내가 정말로 하찮은 여자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그의 눈앞에서 당당하게 입었다.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거기도 크고 테크닉도 아주 만족스러웠어요.” 나는 가벼운 시선으로 도준의 바지 쪽을 훑어보며 말했다. 도준의 얼굴이 단숨에 어두워졌고, 나를 향한 시선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요즘 여자들은 다 당신처럼 뻔뻔한 건가? 그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다니!” 도준은 말을 내뱉은 후 시선이 침대 쪽에 멈추었다. 잠시 복잡한 눈빛을 보인 그의 시선을 따라 보자, 침대 위에 선명한 붉은 피자국이 눈에 띄었다. 나는 마음이 살짝 저릿했다. 민우와 7년 동안 연애하며 첫 경험은 결혼 첫날밤에 하기로 다짐했었다. 그러나 나는 결혼 전날에 민우의 배신을 목격했고, 나 또한 이렇게 한순간에 첫 경험을 낯선 남자에게 주고 말았다. “처음이었어?” 도준은 다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복잡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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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시정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나를 바라봤고, 두 손가락을 계속 톡톡 두드렸다. 나는 단번에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맞아, 남자랑 있었어. 하지만 그 남자는 허민우가 아니야.” 다시 한번 ‘허민우’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자 그저 역겨웠다. 내가 어쩌다가 그런 남자를 선택했을까, 정말 눈이 멀었던 게 분명했다. “뭐라고? 다른 남자랑 있었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시정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내가 한 말에 완전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는 시정의 놀란 얼굴을 보며 어젯밤 신혼집에서 민우와 예주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뭐? 그런 짓을 했다니, 완전 인간도 아니네!” 내 설명을 들은 시정도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민우를 비난했다. “그런데 오늘 결혼식은 어쩌려고? 오늘이 네 결혼식 날이잖아.” 무언가 떠오른 듯 시정은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결혼식 취소했어.” 나는 담담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 말을 할 때,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또렷이 느껴졌다. 이 결혼식은 내가 수년간 기다려온 꿈이었고, 결혼 준비의 모든 세부 사항까지 하나하나 모두 내가 직접 챙겼다. 모든 마음을 쏟아부었지만, 이제는 전부 사라져 버렸다. “시정아, 나 너무 힘들어. 좀 쉬고 싶어.” 허민우를 생각하면 여전히 역겹지만, 그래도 7년을 사랑했던 사람이니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지금은 그저 푹 잠들어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었다. 깨어나면 이 모든 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시정도 내 마음을 아는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한참을 자고 깨어났을 때, 거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민우의 목소리 같았다. 분명 시정이 민우와 다투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방 문을 열고 거실을 내다보았다. 민우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시정은 분노에 찬 얼굴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윤슬아.” 내가 나오자 민우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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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문제는 내가 허민우의 진짜 여자친구라는 점이었다. 오늘은 우리 둘의 결혼식 날인데, 이런 말을 하다니.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가 이렇게나 뻔뻔한 줄은 몰랐다. “윤슬아, 고마워...” 민우는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고맙다고? 하하... 민우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보니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한때 나를 아껴주며 평생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던 남자가 이제는 내가 결혼식을 취소했다는 말을 듣고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다니. 정말로 웃기고 비참했다. “꺼져! 다시는 너 같은 놈 보고 싶지도 않아!” 나는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혹시나 참지 못하고 민우에게 달려들어 왜 배신했는지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안 들려? 어서 꺼지라고!” 시정이 화가 나서 빗자루를 들어 민우의 등을 힘껏 두드렸다. 민우가 떠나고 나니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나는 멍한 눈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민우가 나쁜 남자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7년 동안 사랑했던 사람이다. 7년의 사랑이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윤슬아, 울고 싶으면 울어. 울면 좀 마음이 편해질 거야.” 시정은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꼭 안아주며 마음 아픈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울어, 그런 파렴치한 놈 때문에 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시정아, 앞으로 내 앞에서 그놈 얘기 꺼내지도 마.”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울지 않으려 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윤슬아,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 차라리 실컷 울어버려. 울고 나면 그놈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야.” 시정은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내 친구로서, 지금 내 모습을 보는 것이 그녀에게도 괴로웠을 것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부어오르고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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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시정아,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그동안 민우가 나의 전부였고, 내 모든 생활이 민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없어지자 나는 모든 동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슬아, 그놈은 그냥 쓰레기였을 뿐이야. 지금이라도 그놈의 본모습을 알게 되어 다행인 거지. 만약 결혼 후에 알게 됐다면 상황이 더 복잡했을 거야.” 시정은 내 옆에 앉아 나를 위로하듯 안아주었다. 시정의 눈빛에서 나를 향한 깊은 걱정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마음이 여전히 너무 아파...” 나는 시정을 꼭 끌어안았다. 며칠 동안 눈물은 이미 다 흘려버렸지만, 가슴속 깊은 고통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윤슬아, 너 분명 그놈을 잊게 될 거야. 그리고 그놈보다 천 배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그놈도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시정은 내 눈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순간에 내 곁에 남아 위로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시정이가 곁에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지 않았다면, 난 여태껏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일어나, 얼른 옷 갈아입고 화장하자. 오늘은 실컷 쇼핑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버리자. 오늘 이후로 허민우라는 이름조차 네 삶에서 완전히 지워버려!” 시정은 나를 침대에서 끌어내고 억지로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게 했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운 백화점으로 향해 여성복 매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전에 이 백화점은 민우가 다니는 회사 소속이라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와 관련된 곳이라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지만, 시정이 강하게 나를 붙잡았다. 시정이가 나를 어둠 속에서 꺼내주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알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자리를 뜨지 않았다. 여성복 매장을 돌아다니자 시정은 금세 많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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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시정의 경멸어린 표정을 보자 예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주는 곧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하시정, 그따위로 말하지 마! 나와 민우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고윤슬만 없었어도 우리 둘은 벌써 만났을 거야!” 시정은 눈을 홉뜨며 역겨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남의 남자 빼앗는 년들은 늘 진심이니 어쩌니 떠들더라. 친구 약혼자 유혹해놓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다니, 넌 그냥 내연녀 체질이었던 거지!” 예주는 화난 표정으로 시정을 노려보았다. “지금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하시정, 말조심해!” “내가 누굴 말하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지 않겠어? 그렇게 역겨운 행동을 해놓고 뻔뻔하게 순진한 척하는 거야? 정말 구역질 나네.” 시정도 지지 않고 예주를 똑바로 노려봤다. 그들의 언쟁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고, 나는 얼른 시정의 팔을 끌어당겼다. “굳이 저런 년놈들 때문에 화낼 필요 없어. 우리 가자.” “민우야, 저 두 사람이 날 이렇게 괴롭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우리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예주는 민우의 팔을 붙잡으며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윤슬아.” 민우는 예주가 상처 입는 것을 못 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불렀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가슴이 저릿했다.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친구, 방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사과하는 게 맞지 않아?” 민우는 멀리서 나를 보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냉정한 태도에 내 마음은 산산이 찢어졌다. 한때 나를 아껴주고 보호해주던 남자가 지금은 다른 여자 편을 들며 날 질책하고 있다니. 우리의 7년간의 사랑은 결국 이렇게나 가벼운 관계였던 걸까. “시정이 틀린 말이라도 했어? 네가 날 배신하고 7년 동안 속여왔으면서 이제 와서 내 친구더러 내연녀에게 사과하라니,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허민우, 네가 뭔데?” 나는 주변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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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나는 절대로 눈앞의 역겨운 남자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어차피 민우의 마음을 가질 수 없으니까 큰소리 치고 있는 거잖아? 고윤슬, 너 같은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 예주는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우리 윤슬이를 좋아하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허민우 같은 눈먼 쓰레기나 너 같은 꽃뱀같은 여자를 좋아하지!” 시정은 참지 못하고 예주의 건방진 말에 되받아쳤다. “그래? 그럼 고윤슬을 좋아하는 남자 데려와 봐. 어디 그런 남자가 있나 한 번 보자고. 도대체 어떤 남자길래 고윤슬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지.” 예주는 내가 얼마나 민우를 사랑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나와 예주는 모든 걸 공유하는 친구였고, 그중에서도 민우 얘기를 자주 나눴다.그때 난 예주를 가장 친한 친구라 생각했기에, 그녀가 민우에 대해 물으면 항상 망설임 없이 모든 걸 털어놓았다. 좋은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난 예주가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모조리 알려주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게 되었다. 예주는 내 일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민우를 유혹하려고 물었던 것이다. “왜? 얼른 불러오지 그래? 설마 고윤슬을 좋아해주는 남자가 없는 거 아니야?” 예주는 또다시 비웃으며 나를 보며 도발적인 표정을 지었다. 내 약혼자를 빼앗고 대놓고 나를 깔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꼴사나웠다. 나는 예주의 집요한 태도에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뒤돌아서서 가버리려고 했지만, 예주는 내 팔을 잡아 끌며 못 가게 막았다. “진예주, 적당히 좀 해! 너 대체 뭘 더 원하는 거야?” 내가 화를 내며 예주를 노려보며 말하자 그녀는 오히려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가려는 듯했다. 바로 그때, 멀리서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입가에 냉소를 띠우며 예주를 보며 말했다. “내 남자가 누군지 보고 싶다고 했지? 좋아, 보여줄게.” 이 말을 남기고 나는 도준이 있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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