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릿한 쾌감에 녹아드는 악마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40 챕터

제21화

수신음이 두어 번 울리고서야 받은 상대방은 받자마자 언짢은 듯 화를 내기 시작했다.“일을 이딴 식으로 처리해놓고 일자리를 달라는 거에요 지금?”그 익숙한 목소리에 헛웃음을 흘린 신가람이 대꾸했다.“소지율 씨, 뒤에서 사람 조종해서 이런 일이나 꾸미고, 재밌어요 이러면?”신가람의 말에 상대방은 당황한 듯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날 제 사무실에 다녀간 사람들 중에 소지율 씨랑 하지영 씨가 있어서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는데 오늘 홍보팀에서 추적해낸 IP가 하지영 씨 핸드폰으로 나오더라고요.”신가람은 소지율이 자신을 싫어하는 건 알았지만 박정후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의 회사인 천하 그룹에 손을 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전화 한 통이 뭘 증명할 수 있다고 이래요? 그리고 내가 정후 씨한테 한마디만 하면 정후 씨가 나를 믿을까요 아니면 가람 씨를 믿을까요?”소지율을 그렇게 아끼는 박정후라면 이 일을 더 따지고 들려 하진 않을 것 같았다.누구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더러운 일에 휘말리는 건 보고 싶지 않을 테니까.소지율의 맞는 말에 신가람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통화는 바로 끊겼다.하지영도 핸드폰을 낚아채고 자리를 벗어났지만 소지율은 그렇다 쳐도 하지영은 회사 일원으로서 기밀을 누출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그날 오후에 바로 경찰에게 넘겨지게 됐다.그런데 하지영은 끌려가면서도 발버둥 치며 말했다.“내가 한 짓이 아니에요, 나도 다 누가 시켜서 한 거라고요...”그 진술은 당연히 박정후의 귀에 들어갔고 박정후는 신가람의 예상대로 소지율이 엮이는 걸 막기 위해 조민형에게 당부했다.“가서 내 말 전해. 경찰 조사받을 때 입 함부로 놀리면 영원히 S 시에 발 못 붙이게 만들 거라고.”그 말을 들은 신가람은 답답한 가슴과 밀려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박정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곧바로 조민형이 그 방을 나서자 박정후는 신가람을 보며 물었다.“아직 아파?”“네, 조금요.”“그럼
더 보기

제22화

하지만 신가람의 몸도 빠르게 달아올랐고 그녀도 박정후를 원하게 됐다.그때 박정후의 핸드폰이 울려왔다.박정후는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끊겼다가도 다시 울리는 핸드폰에 신경질적으로 확인했는데 발신자가 소지율인 걸 보고 그는 귀찮은 듯 전화를 받았다.“정후 씨, 며칠 전에 의사가 와서 약 처방해주고 갔는데 이거 너무 써서 먹기 싫어.”소지율의 목소리가 신가람의 귀에도 들려오자 그녀는 몸을 떼어내려 했지만 이미 박정후의 것이 깊숙이 들어와 있어 다리가 후들거려서 힘을 주는 게 쉽지가 않았다.그래서 신가람은 베개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은 채 시트를 꽉 깨물며 자신의 신음소리가 소지율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몸에 좋은 약은 다 써, 얼른 먹어.”박정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마친 뒤 못 참겠는지 몸을 움직였다.그에 신가람의 입에서도 야릇한 소리가 튀어나왔고 그 소리를 들은 소지율은 다급히 물었다.“정후 씨 지금 뭐 해?”“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소지율을 대충 달랜 박정후는 거칠게 전화를 끊어내고 소지율의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박정후에게 허리가 잡혀버린 신가람은 몸에 힘이 다 빠져 흐물흐물해질 때가 돼서야 만족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욕구를 다 풀어내고 난 박정후의 눈가는 여전히 빨갰다.신가람이 처음 그와 잠자리를 가졌을 때는 박정후를 가학적인 성향을 가진 미친놈이라고만 생각하며 보수적이었던 그녀로서는 이런 강압적인 관계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는데 3년 동안 그와 함께 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지다 못해 그 속에서 알아서 흥분까지 하고 있었다.“어때?”일을 마치고 난 박정후는 다시 원래의 그로 돌아온 것처럼 차갑게 물었다.그에 신가람은 다리를 움직여 보다가 말했다.“다리에 감각이 사라진 것 같아요.”“안 아프면 됐어. 이거 그래도 꽤 유용한 약이니까 앞으로는 하기 전에 알아서 발라.”박정후의 말에 놀란 신가람이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자 박정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
더 보기

제23화

박정후는 흥분한 소지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말했잖아, 네가 잘못 들은 거라고.”전에 있던 온화함 밖으로 서리가 낀 듯 차가운 눈동자를 보며 박정후가 저를 싫어하게 될까 두려워진 소지율은 신가람 때문에 박정후와의 약혼을 망칠 수는 없어 다시 그의 팔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내가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좀 예민해졌나 봐. 미안해, 정후 씨. 근데 나는 항상 정후 씨랑 결혼하고 싶었어. 그건 정후 씨도 알잖아.”소지율의 고백에 박정후는 그녀를 천천히 떼어냈다.“이건 무슨 뜻이야?”“다들 내가 정후 씨 여자친구인 줄로 알아. 정후 씨가 나한테 잘해주는 거, 그거 나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었어?”“지율아, 나한테 넌 가족 같은 존재야. 몸도 안 좋은데 약혼은 서두르지 말자.”박정후의 말에 상처받은 소지율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래, 나 수술한 적 있어. 교수들도 뭐 이런저런 위험 있다고 다들 조심하라고 하는데 몇 년 동안 나 아무 문제도 없었어. 그 사람들이 전부 헛소리하는 거라고!”박정후는 온화한 말투로 소지율을 진정시키며 말했다.“지율아, 고집부리지 마.”그에 소지율은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신가람을 욕했다.소지율은 남자가 없으면 죽기라고 하는지 감히 박정후를 꼬시는 신가람을 위해 특별히 남자 하나를 소개해주기로 했다. ...한편 오피스텔로 돌아온 신가람은 바로 라면을 끓여서 먹으려고 하는데 그때 또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역시나 국제전화였지만 별생각을 하지 않은 신가람은 저도 모르게 전화를 받아버렸다.수화기 너머에서 호흡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가람이 전화를 받을 줄 몰랐어서 당황한 상대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누구세요? 말씀 안 하시면 전화 끊겠습니다.”“가람아...”그 목소리에 신가람은 깜짝 놀라 젓가락을 땅에 떨어뜨렸고 라면 그릇은 엎어지면서 신가람의 발등으로 떨어져 발등이 빨갛게 부어올랐지만 그녀는 아픈 것도 못 느끼는지 제자리에 주저앉아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주강인, 정말 주강인이었다.그때 저를 버
더 보기

제24화

“넌 왜 온 거야?”박정후는 신가람의 손이 스치기만 해도 크기를 부풀리는 자신의 것을 바라보며 구동하에게 물었다.“실험기구가 좀 필요한데, 투자해줘. 다음 주에 써야 하니까 최대한 빨리.”“이딴 식으로 투자받는 거 나한테나 통하지, 다른 사람이었어 봐. 너 진작 두들겨 맞고 쫓겨났을 거야.”구동하는 팔짱을 풀고는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돈도 안 받고 개인 연구원 노릇도 해주는데, 이 정도도 못 바라냐? 그럼 어제 줬던 약 내놔.”“투자할 테니까 약 더 만들어와.”가장 빠른 방법으로 투자금을 확보한 구동하도 흔쾌히 답했다.“당연하지, 근데 효과는 어땠어? 후기 좀 풀어봐. 나도 어딜 개선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니까.”그런 개인적인 얘기를 할 리가 없는 박정후는 그냥 좋다고만 얘기했고 구동하도 굳이 묻지 않고 떠오르는 광고멘트를 날려주었다.“너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가 좋은 거네.”그때 새 정장 바지를 찾아낸 신가람이 방으로 들어오자 박정후는 집요하게 따라오는 구동하의 시선을 느끼고는 당장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나가.”오래된 친구라 그런가 돌려 말하는 것도 없이 용건만 간단히 전하는 의사 표현이었다.“정 없는 사람들은 많이 봤는데 그중에서도 네가 원탑이야. 그래도 몇십 년 친구한테 그게 뭐냐.”구동하는 신가람을 향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나한테도 이러는 데 직원한텐 오죽하겠어요. 혹시라도 얘가 괴롭히면 절대 참지 마요.”“직원들한텐 잘해주세요, 괴롭힌 적 없으십니다.”“외할아버님이 한의학계의 전설 같은 존재시던데 가람 씨도 옆에서 보고 들은 게 많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새로 하는 프로젝트에 혹시라도 관심 있으면...”당당하게 사장 앞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구동하에 마침 옷을 갈아입고 나온 박정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아직도 안 갔어?”박정후가 신가람에 대한 마음이 단순히 파트너에 대한 것은 아님을 보아 낸 구동하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정적이 맴도는 사무실에서 고개를 돌려본 신가람의 눈에 풀어
더 보기

제25화

저녁 8시, 조민형은 한 레스토랑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신가람은 가방을 손에 들며 옆에서 자고 있던 정장 차림의 남자를 깨웠다.“대표님, 다 왔어요.”눈을 뜬 박정후는 차에서 내린 신가람이 제 문을 열어주려고 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눈을 내리깐 채로 사뿐사뿐 걸어오는 신가람은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박정후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둘이 함께 예약된 룸 안으로 들어오자 안에 있던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소지율의 예쁜 얼굴도 순간 일그러져버렸다.하지만 그녀는 이내 가식적인 웃음을 띠며 말했다.“정후 씨도 같이 왔네? 신 비서님, 여기 앉아요.”소지율은 바로 옆에 앉은 남자에게 눈짓을 했다.남자는 깔끔한 정장 차림에 호피 무늬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있는 집 아들 같았다.“박 대표님, 가람 씨, 안녕하세요, 전 이주원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성함은 이유강이십니다.”남자는 자신의 소개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말없이 사람 하나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박정후에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적이 있나 서둘러 기억을 되짚어봤다.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신가람은 가만히 앉아 구경이나 해보려 했지만 곧바로 화제가 자신에게로 흘러왔다.“가람 씨, 혹시 잊었어요? 이안 그룹이랑 천하 그룹도 몇 번이나 일 같이했었는데. 이주원 씨는 가람 씨 기억하던데, 가람 씨가 너무 바빠서 까먹었나 봐요.”신가람은 소지율이 무슨 수작인지 몰라 그냥 예의상 이주원을 향해 웃어 보였다.하지만 신가람과 늘 가까워지고 싶어 했던 이주원은 그 웃음 하나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전에는 신가람이 너무 도도해 보여 말도 잘 못 붙어봤지만 소지율이 여자친구를 소개해준다고 판까지 깔아줬으니 오늘은 좀 잘해볼 생각이었다.“어르신은 잘 계시죠?”박정후는 그냥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대충 안부만 물었다.“할아버지는 건강하세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박정후의 말에 공손히 대답하던 이주원은 바로 신가람을 보며
더 보기

제26화

“그럼 난 어때요? 솔직히 난 가람 씨가 마음에 드는데 기회 한번 주시겠어요?”신가람은 굳이 일을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실례지만 저 남자친구 있어요. 일 때문에 해외에 있어서 자주 못 만날 뿐이에요.”“에이, 거짓말.”이주원이 차를 세우고 그녀를 돌아봤다.“아까까지만 해도 다른 일은 당분간 고려 안 한다면서 내가 대시하니까 바로 말 바꾸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신가람은 행여나 그가 더 들이댈까 봐 최대한 그의 기분을 진정시켰다.“대표님은 농담도 참. 저 진짜 남자친구 있어요.”다만 이주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결혼한 것만 아니면 충분히 가람 씨한테 대시할 기회가 있는 거죠. 너무 성급하게 거절하지 말고, 천천히 지내다 보면 날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이 남자는 워낙 저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많았던지라 본인이 엄청 매력적인 사람인 줄 안다.일개 비서 따위 사로잡지 못할까.한편 신가람은 두 팔에 소름이 쫙 끼쳤다.‘이 근자감 대체 뭐야? 역겨워 진짜. 당장 도망가야지!’그녀는 결국 대충 핑계를 둘러대고 근처 지하철 입구에서 내린 후 스스로 오피스텔까지 돌아갔다.박스에서 마지막 남은 라면 두 통을 꺼내 이제 막 포장을 뜯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허기질 대로 허기진 그녀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현관에 걸어가 문을 열었는데 훤칠한 체구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한 남자가 떡하니 서 있었다.그 남자는 차분한 표정으로 신가람을 스쳐지나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대표님... 지금 바로 하시려고요? 저 아직 라면 끓이는 중인데, 이따가 다 먹고 하면 안 될까요?”어젯밤에 배고픈 것도 무릅쓰고 이 남자한테 밤새 시달리느라 속이 다 울렁거렸고 나중엔 뭘 먹기만 해도 바로 토했다.박정후가 그녀에게 답했다.“나 라면 안 먹어.”신가람은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대답했다.“대표님, 이거 제 라면인데요.”“내가 그동안 밥 한 끼 제대로 못 사줬어?”‘그러니까, 왜 굳이 라면을 안 먹는다
더 보기

제27화

신가람은 입술을 꼭 깨물고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깨끗이 씻은 후 그의 셔츠를 벗겨주려고 했다.이때 박정후가 갑자기 따라오더니 그녀를 덥석 안아서 세면대 위에 올렸다.일촉즉발의 순간, 이제 곧 이성을 잃을 것만 같을 때 식탁 위에 놓아둔 휴대폰이 진동했다.박정후는 흥미가 끊겨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안은 채 휴대폰을 가지러 나갔다.발신자 번호를 본 순간 그가 피식 웃었다.“이렇게 짧은 시간에 연락처까지 주고받았어? 어장 관리하는 거야?”신가람이 황급히 해명했다.“전에 협력 건으로 잠깐 연락했다가 삭제하는 걸 깜빡했어요.”박정후는 그런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은 채 전화를 받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곧이어 이주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람 씨, 집에 잘 도착했어요? 말이라도 해주시지, 얼마나 걱정했는데...”신가람은 어느덧 식탁 앞에서 박정후에게 짓눌려버렸다.“왜 말이 없어요? 아까 차 안에서 고백한 것 때문에 난감해서 그래요? 가람 씨 해외에 있는 남자친구 따위 신경 안 써요. 설사 내 앞에 있다고 해도 공평하게 경쟁할 거라고요.”이 말을 들은 박정후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남자친구? 그것도 해외에? 우리 가람 씨가 이런 속셈이 있는 줄은 왜 난 전혀 몰랐지?”거의 마무리되어갈 때 신가람은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그런 거. 제가 거짓말한 거예요...”그녀의 속상한 표정을 보더니 박정후는 눈썹을 치키고 그제야 손을 놓아줬다.“쟤 멀리해.”신가람은 그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닦았다.“알았어요. 대표님 셔츠가 더러워졌으니 내일 깨끗이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그리고 방금 보상으로 상여금 전부 삭감하면 안 돼요. 연간 보너스는 사석에서 보내주시면 되고요.”박정후는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봤다.한편 이 남자도 이번엔 빙빙 돌리지 않고 개인 계좌로 그녀에게 연간 보너스와 상여금까지 전부 이체했다.다만 그 돈들은 그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박정후가 떠난 후 신가람은 설거지를 마치고 방 청소까지
더 보기

제28화

자리에 돌아온 신가람은 곧바로 작업에 몰입했다.휴대폰에 앱을 설치했지만 마지막 단계에 좀처럼 작동이 안 됐다. 문외한인 그녀는 이런 작업에 서툴러 이제 막 기술팀 조수현을 찾아가려던 참인데 마침 박정후가 내선으로 전화를 걸어왔다.“어제 셔츠는 다 빨았어?”그녀는 마지못해 수중의 일을 내려놓았다.“네, 금방 갖다 드릴게요.”그녀는 쇼핑백을 들고 박정후의 사무실로 향했다.쇼핑백을 열어본 박정후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드라이클리닝 맡겼어 손빨래 했어?”“미리 검색해봤는데 이 브랜드 셔츠는 손빨래도 가능하다고 해서 다 씻고 일부러 다림질까지 마쳤어요.”이에 박정후가 담담하게 말했다.“옷 다 망가졌어.”신가람은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가까이 다가가 꼼꼼히 살펴본 후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아닌데요. 제가 볼 때 전과 똑같은데요?”“너 설마 이런 고급스러운 원단이 야채 씻듯 벅벅 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니지? 옷 다 망가졌어. 더는 못 입어.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그는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신가람은 입술을 깨물고 차오르는 울화를 꾹 참으며 갑질을 당해야만 했다.“그럼 제가... 새 걸로 한 벌 사드릴게요.”전에 검색해보았는데 이 셔츠는 공식 온라인 스토어에서 판매가가 무려 200만에 달하니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할인 활동이 있을지도 모른다.“대표님, 혹시 시간 가능하시면 퇴근 후에 저랑 함께 매장 가서 사 입으실래요?”이에 박정후가 그녀를 힐긋 살펴보며 훤히 꿰찬듯한 미소를 지었다.“내 프리미엄 VIP 카드를 쓰려고?”그에게 속내를 들켜버린 신가람은 머쓱한 듯 해명에 나섰다.“오해하셨어요. 매장은 바로 입어볼 수 있어서 사이즈가 안 맞으면 바꿀 수 있잖아요. 저는 대표님의 귀한 시간을 고려해서 그런 거예요. 안 그래도 대표님은 엄청 바쁜 분이시잖아요.”“꼼꼼하게 생각했네? 퇴근하고 차고에서 기다려.”그는 어렴풋이 움직이는 신가람의 빨간 입술을 훑어보더니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턱을 집어 올렸다.“신가람 씨,
더 보기

제29화

신가람은 손가락을 멈칫할 뿐 감히 돈줄인 이 남자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엄마가 계속 아빠 걱정해서 페이스 체인지 앱으로 전화 통화하게 해드리려고요.”박정후는 그녀의 휴대폰을 가져와 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으로 화면을 이리저리 터치하더니 곧이어 그녀의 얼굴을 스캔하고 다시 돌려주었다.“너희 아버님 사진 찾아서 교체해.”그는 말을 마친 후 뒤로 비스듬히 기댔다. 몸이 반쯤 가려져 노을에 그림자도 안 비쳤지만 얼굴 윤곽이 유난히 더 어둡고 음침했다.깔끔하고 훤칠한 쓰리피스 슈트 차림에 튼실한 허벅지까지 더하니 괜히 차 안에 공간이 비좁아 보였다.신가람은 시선을 거두고 그의 지시대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부러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를 골라서 마침내 엄마를 성공적으로 속여냈다.“대표님, 이런 것도 할 줄 아세요?”옆에 있던 조민형이 대신 대답했다.“우리 대표님 예전에 국내외에서 많은 기술 프로그램 대회에 참가했어요. 이런 설정쯤은 대표님께 식은 죽 먹기죠.”‘그 방면으로 조금 거친 것 말고 또 이런 숨은 재주도 있었네?’신가람은 이렇게 생각하며 고마움을 표했다.이에 박정후가 되물었다.“고작 말로만?”‘이럴 줄 알았으면 기술팀에 부탁해 설치하는 건데.’‘괜히 또 신세 지게 됐잖아.’백화점에 도착한 후 조민형은 주차하러 갔고 신가람과 박정후는 매장으로 들어갔다.종업원은 박정후를 보자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손님, 여기 이번 시즌 신상 몇 벌 들어왔는데 제가 가져다드릴까요?”이때 박정후가 신가람을 가리켰다.“쟤더러 갖고 오라고 해요.”말을 마친 그는 곧이어 피팅룸으로 다시 들어갔다.고급 의류 매장 피팅룸은 보통 투룸 형식으로 되어있다.종업원이 신상을 몇 벌 가져오자 신가람이 나지막이 가격을 물었다.“저기 혹시 이 옷들 다 얼마예요?”“태그에 적혀있잖아요. 태그 보세요!”사람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종업원의 몰골, 그녀는 대놓고 신가람을 무시했다. 다만 그도 그럴 것이 신가람은 평상시에 이런 고급 의류 매장에 거의 안 다
더 보기

제30화

방금 그녀에게 바짝 달라붙으며 몸이 일으킨 반응에 박정후는 순간 기분이 확 잡쳤다.요즘 신가람은 항상 그의 마지노선을 건드리고 있다.선물한 가방과 옷, 액세서리까지 아무런 미련 없이 중고거래 앱에 걸어서 팔아치우다니.게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전 남친과 한창 열정적으로 대시하는 남자까지.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분노가 차오르면서 뜨거운 불씨가 모든 감각을 불태울 것만 같았다.억제제나 약 같은 걸 전부 못 챙겨온 탓에 그는 마지못해 소파에 앉아 진정될 때까지 참아야만 했다.그는 일단 구동하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약 챙겨서 금호 빌딩 B동 7층으로 와, 빨리!”구동하는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설마 밖에서 발작한 거야?”“잔말 말고 당장 튀어와.”박정후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 초조하고 괴로운 증상을 보이는데 지금은 전보다 훨씬 나아진 상태이다. 단지 신가람만 마주치면 몸이 확 굳어버린다.신가람은 피팅룸에서 나와 머리를 푹 숙인 채 구석 자리에 가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이때 귓가에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가람 씨도 여기 있었네요? 옷 사러 왔어요?”고개를 들자 이주원이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또한 소지율도 문 앞에 서 있었다.“여기 남자 옷 매장인데 누구 사주는 거예요?”소지율은 뻔히 알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 방금 매장 종업원이 재빨리 전화해 대표님이 어떤 여자분과 애틋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일러바쳤으니까.그때 소지율은 그 여자가 신가람이란 걸 바로 알아챘다.곧이어 이주원에게 알리고 둘이서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다.신가람은 두 사람이 지금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방금 피팅룸에서 박정후가 ‘막무가내’로 나올 때 마주쳤더라면 뒷수습할 수 없을 테니까.“대표님 피팅룸에 계세요. 저는 단지 비서로서 물건 들어주러 온 것뿐이에요.”신가람이 해명했다.“그래요? 그럼 이젠 내가 왔으니 가람 씨는 이만 돌아가 보세요. 정후 씨한테는 내가 대신 전
더 보기
이전
1234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