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801 - Chapter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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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1화

재석이 눈덩이를 낑낑대며 굴릴 때, 정은은 실험실에서 데이터 기록에 몰두하고 있었다.민지와 서준은 이미 집으로 돌아가고, 그녀 혼자 남았다.평소 민지가 재잘거리는 것에 익숙했기에, 아침에 실험실에 들어섰을 때 정은은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하지만 실험대 앞에 서서 일을 시작하자 그 허전함도 금세 사라졌다.정은은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도겸이 그녀를 별장에 가두었던 그 몇 년,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으니까.혼자 책을 읽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밥을 하고, 혼자 먹고, 혼자 기다리는 것에.학문이라는 건 함께할 수도 있지만, 결국 혼자서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그건 정은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점심이 되자, 정은은 오랫동안 숙이고 있던 목을 주무르며 탕비실로 향했다.아침에 준비해둔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밥을 먹으며 휴대폰을 꺼내 SNS를 확인했다.그때, 진욱이 한 시간 전에 올린 글이 눈에 띄었다.[눈덩이 굴리다가 토할 지경이야.]함께 올라온 사진에는 크기가 일정하고 정렬된 세 줄의 눈덩이가 있었다.‘세 줄이라니?! 꽤 충격이야.’정은은 먼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겼다.[전 교수님 정말 대단해요!]그러자 곧바로 답글이 달렸다.[대단한 건 내가 아니야, 하하하.]몇 분 후, 뭔가 더 말하고 싶었던 듯 다시 문자가 왔다.[그건 정말 대단한 게 아니라, 아주 미친 거지.][그게 무슨 뜻이에요?]그러나 진욱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정은은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실험대 앞에 섰다.겨울은 해가 빨리 져서, 정은은 점심시간에 오래 쉬지 않았다.한번 눕기 시작하면 다시 일어나기 힘든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일을 빨리 끝내야 일찍 집에 갈 수 있으니까.다행히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정은은 오후 네 시쯤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골목에 들어서자, 아래층에서 눈사람을 만드는 두 아이가 보였다.꽤 정성 들인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코는 코, 눈은 눈.빨간 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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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2화

“자, 우리 큰 눈덩이 하나 굴리자.”말하면서 재석은 이미 소매를 걷어붙이며 당장이라도 시작할 기세였다.“선배님, 그냥 눈덩이 말고, 우리 눈사람 만들어요! 네?”재석은 순간 멍해졌다.“뭐든 다 할 줄 안다면서요? 눈사람 만드는 게 더 재밌잖아요. 아, 이왕이면 좀 더 크게 만들어야겠다...”정은은 남자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두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조금 전 아이들이 만들던 걸 떠올리며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한참 동안 재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정은은 고개를 들었다.“선배?”“눈사람을... 만든다고?”“맞아요!”정은의 눈이 반짝였다.“그래.”그는 살짝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예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지만, 그래도 못 할 것도 없었다.그러나 그 결과.정은은 눈앞에 놓인, 어딘가 이상한 두 덩어리의 눈덩이를 바라보았다. 간신히 위아래로 쌓긴 했지만, 둥글지도 네모지지도 않은 데다, 위가 더 크고 아래가 더 작았다.얼굴은커녕 전체적인 형태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이게 대체 뭐지?’억지로라도 무언가라고 해야 한다면 그냥 ‘두 눈덩어리’라고 하는 게 맞을 듯했다.정은은 조심스레 재석을 쳐다보았다.딱히 할 말은 없었다.재석은 민망한 듯 코를 긁적이며 헛기침했다.“그게... 아무래도 오늘따라 컨디션이 좀 안 좋은가 봐.”“괜찮아요...”정은은 재석이 더 민망해할까 봐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오히려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시간도 늦었고 밖도 많이 춥네. 이제 들어갈까요?”“그래.”한번 허세를 부리다 평생 창피를 당한 셈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올라 각자 집으로 들어갔다.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정은은 2초 정도 침묵했다.그리고 그다음 순간.“푸하하하하하하!”재석에게 미안하지만, 정은은 정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한편, 재석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앉아 급히 휴대폰을 꺼내 톡을 열었다.그리고 진욱에게 문자를 보냈다.[왜 눈사람 만드는 방법을 안 가르쳐줬어?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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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3화

[할머니께서 정성스럽게 준비하셨으니, 네가 거절하면 실망하실 거야.]정은은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현빈이 이렇게 말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오전 11시 30분, 현빈이 차를 몰고 도착했다.정은은 미리 나와 그를 맞았다.“왜 밖에 나왔어? 나 혼자 들어갈 수 있는데.”“못 들어오잖아요.”정은이 같이 출입 인증 구역을 통과하고 나서야, 현빈은 ‘못 들어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출입 통제가 처음 왔을 때보다 더 엄격해진 것 같은데?”커팅식 날에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현빈은 그때의 실험실과 비교해 보았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시 설정했어요.”“위에서 보안 강화를 요구한 거야?”“그런 것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오빠는 바쁘지 않아요? 이렇게 시간 내서 밥까지 챙겨올 시간이 있다니?”“바빠도 와야지. 할머니께서 특별히 맡기신 ‘임무’니까.”“임무요?”두 사람이 생활 구역에 도착할 무렵, 현빈은 보온 가방을 열어 도시락통을 하나씩 꺼냈다.심지어 아직도 따뜻했다.그는 차곡차곡 반찬을 식탁 위에 놓으며, 깨끗한 젓가락과 숟가락도 준비했다.“네가 다 먹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거.”정은은 식탁을 바라보며 속으로 묵묵히 세어 보았다.반찬만 여섯 가지, 게다가 국까지 있었다. 전부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와, 냄새 정말 좋다...”“할머니께서 요즘 요리책을 보며 연습하셨거든. 몇 년 만에 다시 요리를 하시려니 너무 서투를까 봐 걱정된다나. 연습하실 때 만드신 요리들은 나랑 할아버지가 대신 먹었고.”현빈은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도 그러시더라. 우리가 네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매일 할머니께서 만드신 요리를 맛보겠어.”정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럴 것까진... 그런데 이건 좀 너무 많은데요.”그녀는 난감한 듯 식탁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랐다.“오빠, 점심 먹었어요?”현빈은 살짝 멈칫했다.“아직. 너무 늦을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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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4화

재석은 전혀 사양하지 않고 바로 승낙했다.현빈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미안해요, 갑자기 생각났네요. 여기에 남은 그릇과 젓가락이 없는데.”“찬장에 일회용 젓가락 있어요.”정은이 일어나며 말했다.“내가 가져올게요.”그렇게 말하고선 곧장 자리를 떴다.재석은 자연스럽게 현빈 맞은편에 앉아, 식탁을 한번 훑어보며 웃었다.“진수성찬이네요. 딱 봐도 아주 맛있는 거 같아요.”현빈도 가볍게 웃었다.“조 교수님, 실험실은 안 바빠요? 이렇게 남의 실험실에 와서 밥 얻어먹을 시간이 다 있다니?”“연말이라 일정이 좀 느슨해서 그리 바쁘지 않아요. 나도 원해서 밥 얻어먹는 게 아니니 뭐 어쩌겠어요? 심 대표님이 워낙 열정적이어서 직접 초대까지 했으니 내가 거절하면 너무 실례잖아요.”현빈은 말문이 막혔다.“그보다 심 대표님은 요즘 연말 연회 준비로 많이 바쁠 텐데? 그런데도 이렇게 여유가 있는 거예요?”“정은이 밥 챙겨주는 거라면 바빠도 시간은 내야죠.”재석은 피식 웃었다. 현빈이 자연스럽게 내뱉은 ‘정은이’라는 호칭에 조금 웃긴 듯했다.현빈은 미간을 좁히며 돌려 말하지 않았다.“조 교수님, 혹시 정은이를 좋아하는 거예요?”비록 질문이었지만, 확신에 찬 어투였다.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재석은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어떤 입장으로 묻는 거죠? 그냥 남자로서? 아니면 정은이의 오빠로서?”현빈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설마, 우리의 관계를 조 교수님한테 말한 거예요?”“덕분에 더 확신이 서네요. 전에 정은이를 데리러 왔을 때, 일부러 나 헷갈리게 하려던 거였죠?”현빈은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인정하지도 않았다.“확인도 안 하고 착각했으니 누굴 탓하겠어요?”재석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심 대표님, 솔직히 궁금하네요. 정은이와의 관계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 감정을 말하기 힘든 사이? 그래서 애매하게 행동하며 남들로 하여금 오해를 하게 한 거예요?”현빈은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구부렸다.“그래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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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5화

재석이 말했다. “내 사랑은 정정당당해서 숨길 이유가 전혀 없으니 왜 인정하지 못하겠어요?”현빈은 재석의 순수하고 직설적인 눈빛을 바라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처음으로 패배감을 느꼈던 것이다.“정은이는 알고 있어요?”재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고백을 시도하긴 했지만, 그냥 떠보는 정도였어요. 정은이는 감정을 잠시 뒤로 하고 학업을 우선하겠다고 했거든요.”현빈은 피식 웃었다.“그럼, 차인 거네요?”“아니요.”재석은 현빈의 비웃음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정식으로 고백한 게 아니니까요.”현빈의 웃음이 짙어졌다.재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뭐가 그렇게 웃긴 거죠?”“조 교수님이요.”“그래요?”재석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지금은 기회가 없을지 몰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하지만 심 대표님은... 지금도, 앞으로도 기회가 없을 거예요.”그렇다면 누가 더 우스운 것일까?현빈은 표정이 굳어졌다.“그릇이랑 젓가락 가져왔어요!”정은이 돌아왔다.두 사람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이 순간만큼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뭔가 완벽하게 통했다.봉수진이 만든 음식은 넉넉했고, 재석까지 먹어도 충분했다.식사 중 정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선배님, 부담 갖지 마요. 이건 우리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거예요. 이 소고기 조림도 먹어 봐요, 아, 탕수육도 맛있어요! 이 완자도요! 안에 표고버섯이랑 고기가 들어가 있어요!”재석은 정은이 추천하는 대로 하나하나 맛보았다. 정말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소스 맛이 진하면서도 느끼하지 않네. 굉장히 맛있어. 그리고 이 완자는 표고버섯 향이 살아 있고, 전체적으로 살짝 신맛이 도는 것 같은데?”정은은 놀라워했다.“선배님, 미각이 엄청 뛰어나잖아요! 우리 할머니께서 완자를 빚을 때 식초를 조금 넣으시거든요. 그러면 맛이 더 풍부해진대요.”재석이 웃으며 말했다.“다 맛있어. 내가 오늘은 제대로 찾아왔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으니까.”현빈은 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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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6화

“본보기?”“네.”재석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듣자하니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사연이 아니라 사고예요.”“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비밀은 아니에요. 사실... 예전에 재검사를 생략했다가 숫자 하나를 잘못 입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데이터를 담당한 사람이 민지였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 뭐예요.”재석은 정은의 반짝이는 눈빛에 자연스레 빠져들며 궁금해했다.“그래서? 후에 어떻게 됐어?”“서준이 바로 데이터를 찾아서 밤새 수정했어요. 이틀 밤을 꼬박 새우고 완벽하게 고친 후에야 다시 업로드했죠.”민지는 평소 다이어트를 해도 조금 빠졌다가 금방 요요가 오곤 했는데, 그 이틀 동안 스트레스 때문에 3kg이나 빠지고 머리카락도 한 움큼 빠졌다.“그런데 서준이가, 그렇게 엄격한 사람이 민지한테 사흘이나 휴가를 줬다니까요. 매일 아침 운동하라고 잔소리하던 서준이가요. 아, 선배님,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지난번에 네가 부탁한 자료들 다 찾았어.”정은의 눈이 반짝였다.“벌써요? 이렇게 빨리 찾은 거예요?”“해외에 있는 친구들한테 부탁했어. 국내에선 구하기 어려운 자료들도 외국에선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거든.”“정말 고마워요. 또 신세를 졌네요.”“괜찮아. 어차피 갚을 필요도 없는데 뭘.”“그래도 그냥 받을 순 없죠.”재석은 웃으며 말했다.“아까 밥 사줬잖아? 그것도 할머니가 직접 해주신 집밥. 따지고 보면 내가 더 이득 본 거야.”“참, 이제 실험실에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재석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다들 휴가를 냈거든.”‘아, 어쩐지...’그렇게 재석은 오후 내내 실험실에 남았다.정은이 실험을 하는 동안, 그는 노트북을 꺼내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조용한 실험실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일에 집중했지만, 같은 공간 속에서 함께하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5시가 다 되어갔다.“이제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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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7화

봉수진은 서둘러 문을 열었지만, 정은뿐만 아니라 곁에 잘생기고 기품 있는 젊은 남자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았다.두 어르신은 순간 멈칫하다가 곧바로 눈을 마주쳤다.봉수진은 재석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미소를 띠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아, 이분은 누구니? 소개 안 해줄 거야?”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재석이 먼저 말했다.“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조재석이라고, 정은이 친구입니다.”두 노인과 시선을 마주하며 재석은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이춘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조 씨라고? 혹시... 조기봉 조 회장의 아들인가?”“네.”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서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원래 제 아버지도 찾아뵙고 싶어 하셨는데, 제가 먼저 와버렸네요.”“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조씨 가문은 아들이 셋이라던데, 자네는 몇 째지?”“셋째입니다. 위로 형이 두 명 있습니다.”“혹시 연구직에 종사한다는 그 아들인가?”“네.” 재석은 눈가에 미소를 머금었다.봉수진은 감탄했다.“어머, 그럼 우리 정은이랑 같은 분야네?”이춘재는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 어떻게 만났겠어?”봉수진은 재석이 유명한 물리학자라는 걸 듣고 더욱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어르신들의 편애가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재석아, 늦은 시간까지 우리 정은이를 바래다줘서 정말 고맙군. 그냥 가지 말고 밥 먹고 가렴.”재석은 그냥 이렇게 찾아왔으니 인사라도 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 따라 들어온 것뿐이었다.가볍게 인사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저녁 식사까지 권유받았다.“괜찮을까요? 가족끼리 식사하시는데 제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니겠죠?”“아유, 방해는 무슨!” 봉수진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이렇게 추운 날씨에, 게다가 어두운 밤길을 혼자 다니게 하는게 너무 걱정이었는데, 자네가 데려다줘서 정말 마음이 놓이네. 그리고 말이야, 우리 정은이가 친구를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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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8화

이춘재도 따라 들어와서 물었다.“도와줄 거 있어?”봉수진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도와주긴 뭘 도와줘요? 당신이 언제 주방일을 해봤다고?”“허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같이 있어줄 순 있잖아?”“당산, 내가 보기에 재석은 정말 괜찮은 젊은이에요. 외모도 반반하고 예의도 바르지. 집안도 번듯하고, 무엇보다 가풍이 좋잖아요. 조씨 가문은 명문 가문이지 않나요? 괜한 소문 하나 안 나온 집안이라고요.”이춘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갑자기 그 얘긴 왜 해? 그런데 뭐, 재석은 꽤 괜찮긴 하지.”봉수진은 거실 쪽을 힐끗 보았다. 눈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젊은이가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우리 정은이랑...”“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미 친구라고 했잖아. 대체 뭘 상상하는 거야?”“내가 뭘 상상했다고 그래요? 친구든 뭐든, 우리 정은이의 곁에 있으려면 우리가 제대로 봐야 하지 않겠어요?”“아직도 정은이가 어린애인 줄 아나 본데, 젊은 사람들이 친구 사귀는 건 그들의 자유야. 우리가 굳이 끼어들 필요 없어.”“나도 알아요. 간섭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냥... 객관적으로 재석이라는 아이를 평가해보자는 거죠.”“그래, 우리끼리 조용히 얘기하는 건 괜찮지만, 괜히 정은이 앞에서 티 내지 마. 원래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당신이 자꾸 그러면 애들만 민망해지잖아.”봉수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처럼 보여요?”이춘재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지.”“그나저나, 당신 눈치챘어요? 현빈이 기분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요?”“그래?” 이춘재는 눈썹을 찡그렸다.“무슨 일 있나?”“들어오자마자 말도 없이 일부터 하잖아요. 기분이 안 좋은 게 분명해요.”“그건 뭐, 회사에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겠지. 그게 뭐가 어때서? 남자는 원래 이 나이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작은 문제 하나쯤 있는 건 당연한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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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9화

정은은 줄곧 바쁘게 지내다가 섣달 그믐날이 사흘 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실험실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왜냐하면 소진헌과 이미숙이 L시에서 왔기 때문이다.부부는 오래전부터 올해 J시에서 이춘재, 봉수진과 함께 설을 보내기로 정해놓았다.소진헌이 부모님과 두 형에게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는 이미숙을 따라 J시에 오게 되었다.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주 전에 도착했어야 했지만, 출발 직전에 이미숙이 갑자기 영감을 받아 일주일간 자신을 방에 가두어 글을 썼고, 이어서 G시에서 열린 사인회에 참석하느라 일정이 계속 미뤄졌다.다음 날 아침, 정은은 차를 몰고 고속열차역으로 향했다.설이라 역 안은 인파로 북적거렸고,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야 소진헌과 이미숙이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아빠, 엄마!”정은은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다.이미숙은 눈에 띄는 빨간 코트를 입고 있었고, 키도 크고 세련된 분위기가 풍겨서 군중 속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 옆에 선 소진헌은 그녀보다 키가 좀 더 컸고, 여행 가방을 밀며 한 손에는 크고 작은 짐가방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반면 이미숙은 작은 핸드백 하나만 들고 있어서, 마치 우아하게 휴가를 떠나는 귀부인 같았다.언뜻 보면 마치 어느 집안의 아가씨와 수행하는 집사처럼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현실은 이랬다.“나도 좀 들게요!” 이미숙은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그러나 예상대로 소진헌은 몸을 재빨리 틀며 피했다.“됐어! 이 정도 짐쯤이야 나 혼자 들 수 있어. 당신 그냥 편하게 가.”말하면서 그는 일부러 짐이 가벼운 척 들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안 돼, 나도 들 거예요.”“안 돼, 그렇게 하게 할 수는 없어.”“싫어요...”“나도 싫어...”정은이 가까이 다가갈 때, 두 사람은 서로 짐을 들겠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그럼 제가 좀 들어드릴까요?”그러자 두 사람 모두 만족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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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0화

소진헌은 얼버무리며 대충 넘어갔다.분명히 자세히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정은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이씨 가문 본가에서.이춘재와 봉수진은 딸과 사위가 온다는 소식에 일주일 전부터 대청소를 하며 집 안팎을 말끔히 정리했다.이미숙의 방도 새로 꾸미고, 1인용 침대를 2인용으로 바꿨다. 소진헌이 식물을 다루기 좋아한다는 걸 알고, 온실 옆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크고 작은 화분과 다양한 흙까지 준비해 두었다.그뿐만 아니라, 설날 장식도 빠짐없이 걸어 집 안 곳곳에 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이른 아침, 이춘재와 봉수진은 일부러 새로 맞춘 한복을 차려입고 활기찬 모습으로 딸과 사위를 맞을 준비를 했다.“몇 시죠?” 봉수진이 물었다.이춘재는 손목시계를 보며 답했다. “금방 11시 넘었어.”“그럼 곧 도착하겠네요. 10시에 떠나는 열차 타면 시간이 딱 맞을 거예요. 슬리퍼는 준비됐지?”가정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차는 식지 않았어?” 이춘재는 걱정스레 물었다.“아뇨, 아직 따뜻합니다.”“따뜻한 걸로는 부족하지! 차는 펄펄 끓는 맛으로 마셔야 돼! 그거 버리고 내가 이따가 새로 하나 우려야지.”“네.”“그리고.” 봉수진은 문득 떠올린 듯 말했다. “과일은 미리 썰지 말고, 도착한 다음 깎아. 그래야 싱싱한 맛 볼 수 있어.”“알겠습니다.”“거실은 깨끗하게 정리됐지?”“화장실은 오늘 아침에 다시 한번 청소했어?”“주방은 준비 다 됐고?”이렇게 두 노인은 준비 사항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바쁘게 돌아쳤다.그리고 마침내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드디어 왔네!”현관 앞에 선 두 사람은 문을 열었다.딸과 사위가 나란히 들어섰고, 그 뒤로 손녀가 따라 들어왔다.두 노인은 이 순간을 수십 년이나 기다려 왔다.그리고 이제야 그 꿈이 이뤄졌다....점심은 봉수진이 정성껏 차린 음식들로 가득했다.전부 소진헌, 이미숙, 그리고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되었다.“미숙아, 이것 좀 먹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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