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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1화

빨간 집은 밀림 깊숙한 곳에 지어져 있었는데 이 거대한 구덩이의 중심 같았다. 울창한 수풀 속에 우뚝 세워진 빨간 집은 유난히 섬뜩해 보였다.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간 소원은 안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에 소름이 쫙 돋았다. 울음소리는 짧고 급박했는데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무슨 상황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소원은 눈을 질끈 감고 빨간 집에 난 유일한 창문으로 고개를 들어 안을 들여다보는데 정체를 확인한 순간 소원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긴 백발을 늘어트린 노파가 한 여자의 목을 물고 흡족한 표정으로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아까 들었던 흐느끼는 소리는 피를 빨아 먹힌 사람이 내는 신음이었다.소원의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여자가 피를 빨아들일 때마다 얼굴에 졌던 주름이 펴지고 젊어지는 것 같았지만 단번에 젊은이가 되는 건 아니었다.아무튼 너무 이상했다.소원은 입을 감싸쥔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피를 빨아먹힌 여자가 숨이 끊어지는 걸 보며 소원도 마음을 졸였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백발의 여자 옆으로 수백 마리의 빨간 뱀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백발의 여자를 보호하려는 듯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마 소원이 백발의 여자를 덮치기도 전에 저 뱀들에 의해 잠식당하고 갉아먹히고 말 것이다.그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족장님, 이제 더 마시면 안 됩니다.”백발의 여자를 잡은 건 아까 본 빨간 옷을 입은 무녀였다. 무녀가 입을 열자마자 족장이라고 불리는 백발의 여자가 무녀를 저만치 날려버렸다.“풉.”빨간 옷을 입은 무녀가 피를 왈칵 토해내자 족장 옆을 지키던 뱀들은 마치 고기를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기어와 무녀가 토해낸 피를 핥아먹었다.촘촘하게 모인 뱀들이 ‘미식’을 즐기고 있는데 그 장면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너무 역겨웠다.빨간 옷을 입은 무녀가 가슴을 움켜쥐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족장님, 용서해 주세요. 요즘 공물을 찾기가 어려워 공급이 끊길 수도 있으니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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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2화

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바람처럼 손에 든 사람을 내팽개치더니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어둠 속에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무표정으로 서 있자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멈칫하더니 이렇게 물었다.“왜 나온 거예요?”남자는 대답 없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안에 있던 백발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밖에 누구야?”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리고는 차분하게 대답했다.“족장님,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왔습니다.”“쓸모없긴. 고작 그런 일로 호들갑이야.”백발의 여자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합니다. 족장님. 지금 바로 물러가겠습니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눈빛으로 남자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하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공물을 업고 나오더니 문을 닫았다.“서현재 도련님, 이제 가요.”젊은 남자는 고분고분 여자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주변이 다시 조용해지자 소원은 얼굴을 가렸던 나뭇잎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원은 아직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했다. 납작 없이 들켰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소원의 발목을 걷어찼고 소원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그러더니 이내 요상한 바람이 불어와 소원이 누워있는 곳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고 마침 다 덮었는데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안에서 나왔다.걷어찬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진 못했지만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부르는 걸 들어보니 서현재 같았다.‘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설마 기억이 돌아왔는데 잃은 척하는 건가...’소원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지금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서현재가 아까 그녀를 구했다는 것이다.‘독벌레가 현재의 머리를 완전히 갉아 먹은 게 아닐지도 몰라.’서현재가 공제당한 척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원의 마음은 다시 희망이 불꽃이 타올랐다.정말 그런 거라면 두 사람이 손잡고 이곳을 벗어날 가능성이 많아진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소원은 밧줄을 잡고 힘겹게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서현재가 아까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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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3화

트릭을 발견한 소원은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지만 급하게 들어오느라 문이 아직 활짝 열려 있어 두 시진쯤 지나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다시 오면 낌새를 눈치챌 게 뻔했기에 얼른 문을 닫아야 했다.잠에서 깬 뱀은 짧은 시간 내에는 다시 잠들지 않을 것 같았다. 소원은 바닥에 놓인 가루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시간이 일분일초 흘러갔다. 소원이 가루를 한 줌 쥐고 문 쪽으로 뛰어가자 뱀도 혀를 날름거리며 공격적인 자세로 뒤따라왔다.소원이 손에 든 가루를 뱀에게 뿌리자 뱀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충격이 컸는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회를 잡은 소원이 문을 닫고는 나뭇가지로 빗장을 다시 내렸다.웅황 가루에 다친 뱀은 아직 채 회복하지 못했지만 아까보다는 머리를 살짝 쳐들고 소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표독스러워 보였다.소원은 뱀에게 총기가 없다는 걸 안 뒤로 모든 게 허세 같아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 뱀을 여기에 간 주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같은 시간이 되자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뱀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고 뱀도 여자를 보고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의 팔뚝을 따라 얼굴 옆으로 기어 올라가더니 말하기라도 하듯 혀를 날름거렸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뱀을 살피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소원을 바라봤다.“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소원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움직이기만 해도 물어버릴 것처럼 달려드는데. 나 여기 사흘이나 갇혀 있으면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 몸이 뻣뻣해져서 움직이는데 갑자기 달려드니까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소원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소원의 말을 믿는 듯한 눈치였고 결계로 쳐놓은 분말이 흐트러진 것도 다 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여자가 알약을 하나 꺼내 뱀에게 먹이자 뱀이 고분고분 몸에서 내려가더니 몸을 웅크리고 휴식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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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4화

당황한 소원은 도로 달아갈 시간도 없었다. 문이 열리고 큰 키를 가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는데 체격을 보아하니 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눈여겨보니 서현재였다. 서현재는 눈동자가 어두웠지만 낮에 봤을 때처럼 멍한 표정은 아니었다.“누나...”서현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원을 불렀지만 소원은 너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기억... 잃은 거 아니었어...?”기억을 잃은 그가 어떻게 그녀를 알아보는지 의문이었다.서현재는 별다른 설명 없이 소원의 팔목을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이따 설명할게요. 일단 나랑 함께 가요.”소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서현재와 함께 나무를 타고 내려갔다.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양말만 신은 채 낙엽을 밟아서 생기는 소리를 최대한 줄였다.그때 새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렸고 서현재가 귓가에 속삭였다.“엎드려요.”소원이 바로 자리에 엎드렸다.머리 위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쫙 펴고 날아다녔는데 두 사람 위를 지나가며 우렁차게 지저귀었다.새가 지나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서현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월조인인데 저녁이면 무곡산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어요. 낯선 사람을 보면 바로 아래로 내려와 사람을 물고는 높은 곳에서 떨어트리죠.”소원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드리웠던 거대한 그림자가 떠올라 고개를 들어보니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마치 바다에서 사는 상어와도 같았다. 이렇게 큰 새라면 한두 사람 정도 물어가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궁금해진 소원이 이렇게 물었다.“낯선 사람은 어떻게 구별하는데?”소원은 처음 무곡산에 왔을 때 기괴한 분위기에 몹시 놀랐다. 그래도 관찰해 낸 게 있다면 여기 있는 동물과 새들은 이상하리만치 영민했고 주인의 명령에 잘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곳에 있는 무녀들이 사술을 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게다가 여기 있는 것들 모두가 전설과 연관되어 있었다.다만 실상은 아까 봤던 그 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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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5화

서현재가 입을 열었다.“이거 이혼초에요. 목에 걸고 냇가를 따라서 걸으면 나갈 수 있어요.”소원은 할 말을 잃었다. 서현재의 계획에 소원과 함께 도망가는 건 원래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기다려도 서현재가 말이 없자 소원이 물었다.“너는?”“난 아직 가면 안 돼요.”서현재가 말했다.“얼른 가요. 아직 시간이 조금 있어요.”“너는 왜 안 가는데?”소원이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족장이 사람 피를 빨아먹는 걸로 청춘을 유지하고 있어요. 몸도 바꿔야 한다는데 천년 이래 성공한 적이 딱 한 번밖에 없대요. 물론 그 한 사람도 소문일 뿐이지 목격한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무당 가문에서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요. 이번에 누나를 잡아 온 것도 다 몸을 바꾸기 위해서래요. 누나 몸에 음기가 양기보다 많아서 뱀신이 선택했다나 뭐라나?”서현재는 소원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의 몸에 뱀신이 있대요. 그때 병원에서 누나랑 마주쳤을 때 뱀신이 누나를 선택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누나를 유인해서 여기로 잡아들인 거죠.”소원은 몸을 바꾼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지만 백발의 족장이 빨간 옷을 입은 여자와 나눈 대화에 맞춰보면 맞는 말이었다. 믿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이제 믿을 수밖에 없었다.서현재는 알아둔 정보를 소원에게 남김없이 알려줬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차기 족장이 될 사람이에요. 이미 여든은 됐다고 하는데 흡혈술, 그리고 독벌레에서 추출한 알약으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어요. 여기에 살아있는 공물을 가득 기르면서 피를 끊임없이 빨아들이는 거죠.”소원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 세상에 이 정도로 미친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그러다 몸을 바꾸는 데 실패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소원이 물었다.“그러면...”그 끝이 너무 잔인해 잠깐 망설이던 서현재는 그래도 누군가는 그들의 악행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말을 이어갔다.“특수 제작한 알코올 화로에 넣어서 굽는다고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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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6화

“네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우선 나가서 지원군을 불러오고 그다음에 저 사람들을 처리하자.”소원이 설득했다.“시간이 없어요.”서현재가 고개를 저었다.“지금 나가더라도 산 중턱까지만 갈 수 있고 거기서 내가 미리 준비해 둔 산속 마을 사람들이 누나를 데리고 나갈 거예요. 하지만 산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데만 사흘이 걸려요. 우리가 지원군을 데리고 다시 오는 데까지 일주일은 족히 걸릴 거예요. 그동안 저 사람들은 이미 눈치채고 도망갈 준비를 마쳤을 거고.”그때가 되면 그녀들이 잡아 온 ‘산 채로 보관된 희생양’들은 오직 하나의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입막음 당하는 것.이번에는 족장의 육신 교체 의식 때문에 바깥에 배치되어 있던 무녀들까지 모두 소집된 상태였다.이렇게 한곳에 다 모이는 일이 드문 만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 잔당들을 언제 다시 완전히 소탕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그래도 이건 네가 할 일이 아니잖아! 네 몸 상태는 어때? 전에는 왜 기억을 잃었고 왜 갑자기 순순히 말을 듣게 된 건데?”소원이 한꺼번에 쏟아내듯 물었다.하지만 서현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지금은 모든 걸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소원 누나, 내 말 들어요. 떠나요. 무조건 떠나야 해요.”서현재의 목소리는 한없이 단호했다.“아니, 나갈 거면 같이 나가야지.”소원이 더 강한 의지로 맞섰다.그녀는 성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무모한 짓을 하는 걸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지지할 수는 더더욱 없고 말이다.“소원 누나, 난 안 나가요.”서현재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함께 체념이 서려 있었다.떠날 수 없었다.떠나서도 안 됐다.소원은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현재야, 제발 나랑 같이 가자. 나가서 지원군을 부르자. 이건 애초에 네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저 사람들 그렇게 많은 데다가 뱀도 다루고 심지어 독벌레까지 조종할 수 있잖아...”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이건 누가 봐도 죽으러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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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7화

서현재는 서씨 가문 전체를 증오했다. 이 가문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혐오스러웠다.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를 이용하고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도 모자라 그의 소중한 사람들까지 해치려 들었으니 말이다.만약 서현재가 서씨 가문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가문을 벗어나려 해도 결국 그의 존재로 인해 누군가는 다치게 될 것이다.마침 과거 무녀 중 한 명이 해외에서 어느 가문의 어린 후계자를 해쳤다.하지만 그녀가 국내로 도망친 탓에 해외 가문에서는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그러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의 흔적을 포착한 뒤 서현재에게 접근해 어떤 거래를 제안했다.그가 지금처럼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 해외 가문이 생물학 교수와 협력해 독벌레를 차단할 수 있는 약을 개발했기 때문이었다.그 덕분에 서현재는 더 이상 몸속에서 독벌레에게 갉아 먹히지 않을 수 있었다.만약 그 약이 아니었다면 서현재는 아마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나 소원에게는 절대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이 모든 위험은 혼자 감당하면 되니 말이다.소원을 다시 이런 위험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그야말로 천 번, 만 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였다.“소원 누나, 내 야망을... 누나는 모르겠죠?”희미한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어둠 속에서 서현재의 날렵한 얼굴선이 또렷이 드러났다.그는 씁쓸한 듯 혹은 조소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나는 서씨 가문을 손에 넣고 싶어요. 그 사람들이 날 고통스럽게 만들고 박해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어요?”소원은 서현재가 겪은 고통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를 더 다그칠 수도 없었다.서씨 가문이 그를 어떤 방식으로 박해했는지 차마 묻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현재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현재야, 복수를 하려거든 나도 함께할게. 근데 이렇게 위험한 방식은 안 돼. 네 목숨을 걸면서까지 장난처럼 굴면 절대 안 돼.”소원의 단호한 말에 서현재는 가볍게 웃었다.“소원 누나, 누나는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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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8화

반응할 새도 없이 소원의 몸은 강하게 밀려 물속으로 빠졌다.아래쪽은 배수로였다.소원은 거센 물살을 거스르지 못하고 점점 더 멀리 떠밀려갔다.서현재는 이 모든 걸 계산해 둔 것이었다.그는 배수로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소원이 수영을 잘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예전 마을에 있을 때 그가 직접 가르쳤으니 말이다.소원에게 수영뿐만 아니라, 활쏘기, 기초적인 격투술, 그리고 생존을 위한 기술들까지 가르쳤던 것도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소원은 빠른 속도로 물살에 휩쓸려갔다.희미하게 들려오는 소음 속에서 강가 위쪽에서 무녀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이어서 남자의 짧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고 그 뒤로 더 이상 남자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소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서현재가 들킨 것일 가능성이 컸다.팔을 힘껏 휘저으며 다시 돌아가려 했지만 거대한 물살을 이길 수 없었다.산속의 배수로는 폭우가 내릴 때면 마치 홍수처럼 변했다.소원뿐만이 아니라 체력이 좋은 성인 남성이나 수영선수라 해도 역류할 수 없을 정도였다.결국 완전히 지쳐버린 소원은 손에 힘이 빠지며 물 위에 몸을 맡긴 채 흐름을 따라 떠내려갔다.그렇게 한참을 떠다니다 눈을 떠보니 소원은 어느 초가집 안에 누워 있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혹시 또다시 붙잡힌 걸까?’그때 온화한 인상의 노인이 다가왔다.“깨어났네요? 물 좀 마실래요?”노인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물병을 건넸다.그의 얼굴에는 산골 사람 특유의 순박함이 묻어 있었지 무녀들처럼 음험하고 교활한 느낌은 없었다.하지만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소원은 물병을 받긴 했지만 마시지 않고 먼저 물었다.“어르신, 여기가 어디인가요?”그러자 노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여긴 남이산이라고 해요.”‘남이산?’그렇다면 협곡을 빠져나와 또 다른 산속으로 들어온 셈이었다.이제야 서현재가 구조를 요청하기 어렵다고 했던 이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이곳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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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9화

소원이 노인에게 물었다.“여기서 무곡산까지 얼마나 먼가요?”‘무곡산’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노인의 표정은 급격히 변하더니 조금 전의 온화한 기색마저 사라졌다. 그러고는 거친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그걸 왜 묻는 거죠? 무곡산 사람인가요?”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소원은 당황했다.노인의 손에는 어느새 고기를 다듬던 칼이 쥐어져 있었다. 하여 소원의 머릿속에는 혹시 자신을 무녀로 오해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아뇨. 저는 거기에 있는 친구를 찾으러 가는 길이에요. 친구가 아직 그곳에 있어서 데리고 나오려고요.”소원의 말을 듣고서야 노인은 손에 쥔 칼을 조금 느슨하게 잡으며 말했다.“여기서 나가려면 사흘 정도 걸려요. 하지만 그쪽 체력으로 무곡산까지 가려면 최소 나흘에서 닷새는 걸릴 거예요. 차라리 나가서 구조대를 부르는 게 빠를 겁니다.”이미 배도 채우고 충분히 쉬었던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목에 있던 금팔찌를 풀어 노인에게 건넸다.“이거 가지세요. 밖으로 나가시면 돈으로 바꿔서 생필품이라도 사세요.”노인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지만 소원은 억지로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런 뒤 혹시라도 마을 사람들이 사기를 당할까 걱정되어 덧붙였다.“이건 순금이에요. 무게가 62g이라 현재 시세로는 8만 원이 넘어요. 바꾸실 때 꼭 이 가격을 기준으로 받으셔야 해요.”400만 정도라는 말에 노인은 더욱 받을 수가 없어졌다.“아니, 아니에요. 난 생필품도 다 사냥한 고기로 바꿔서 쓰고 있어요. 두 손, 두 발 멀쩡하면 굶을 일은 없어요. 이렇게 귀한 걸 받을 순 없죠.”“이건 별거 아니에요. 저한테 이런 장신구 많아요. 어르신께서 절 도와주셨으니 감사의 뜻이에요.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받아두세요. 안 그러면 저도 마음이 불편해요.”그럼에도 노인은 계속해서 거절했지만 소원은 끝까지 주려 했다.나이가 적지 않은 노인은 언젠가 몸이 아파 사냥이 못 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이 금팔찌가 응급자금이 될 터였다.결국 소원은 몰래 팔찌를 고기 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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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0화

소원은 영문을 잘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어르신, 자제분이 아들이에요 아니면 딸이에요? 그런데 왜 거기 가신 거예요?”소원은 갑자기 경계심이 들었다.‘혹시 여자라면... 설마 무녀인 건 아니겠지?’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고 노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내 아이는 아들이에요. 그 백발의 늙은 마귀가 데려갔죠. 아무리 아니라고 발뺌해도 난 확신해요!”소원은 천천히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노인은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했다.이미 추위에 온몸이 새파랗게 얼어붙어 있었고 얇은 포대기를 걷어 보니 선천적으로 한쪽 손이 없는 아이였다.노인은 아이를 구조센터로 데려갔지만 센터에서는 복지시설로 보내야 한다며 책임을 미뤘다.산속에서 오랜 세월을 산 탓에 노인은 신고하는 법도 몰랐다.하지만 더 결정적인 건 어쩐지 그 아이와 인연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단 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꽉 움켜쥐고는 울지도 않았고 떼어놓을 수도 없었다.결국 노인은 마음이 약해져 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돌아갔다.시간이 지나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고 비록 한쪽 손이 없었지만 생활하는 데 별문제는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있는 덕분에 노인의 외로운 산속 생활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노인은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고 나이가 더 들면 산을 내려가 학교에 보내려 했다. 그러나 아이가 학교에 가서 따돌림을 당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아이는 오히려 산속 생활을 더 좋아했다. 글을 읽고 쓰는 것보다는 노인과 함께 사냥을 다니는 게 더 재미있다고 했다.공부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어 보였고 노인도 아이를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았다.그렇게 둘은 산에서 자급자족하며 부족함 없이 살았다. 사냥한 고기를 마을에 가져가 생필품으로 바꾸면 충분했으니 말이다.다만 노인이 아이에게 철저히 가르친 한 가지가 있었다.“산 너머로 절대 가서는 안 된다. 특히 무곡산은 절대 안 돼. 그곳엔 사람을 잡아먹는 무녀들이 있어. 아이를 보면 바로 잡아먹어 버릴 거다.”이 말이 단순한 겁주기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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