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도 못 견디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유영은? 이유영은 이전에 강이한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고 참아내야 했던가? 강이한은 그런 기억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이유영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손 놔!”“네 상태가 나아지기만 하면, 네가 뭘 말하든 다 받아들일게!”강이한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것은 이유영의 눈이 나아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지금 이유영의 감정이 더 격해지면 안 됐다. 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이 걱정되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강이한은 답답했다. 이유영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이 손 놓으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완강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유영의 단호하고 강한 의지는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가장 진실된 이유영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강이한의 머릿속에 지난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한 건 아마 이유영이 실명한 이후였던 것 같았다.실명하기 전까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강이한을 믿었다. 그때를 떠올릴수록 강이한의 마음은 점점 더 쓸쓸해졌다. 이유영이 말했듯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정말 많은 기회를 주었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이 준 기회들을 한 번도 소중하게 여겼던 적이 없었다.강이한 스스로가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유영을 조금도 탓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떼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이유영이 다칠까 봐 강이한은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이유영은 더듬거리며 숟가락을 잡으려 했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을 돕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이유영은 냉랭하게 말했다.“모두 나가줘.”“아가씨!”“나 혼자 할 수 있어요.”이유영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지만, 여전히 차가웠다. 우지와 우현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이한은 알아챘다. 이유영이 일부러 강이한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강이한의 불같은 성격을 알기에 일부러 화를 돋워 강이한을 떠나보내려는 의도였다.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싶었다.“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강이한이 설마 다 알아챈 건가?“10년이란 세월이야.”강이한은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는 어떤 관계도 서로를 모를 수 없다고 말했다.10년이었다.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됐든 강이한은 이유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점심 식사.무거운 침묵 속에서 점심시간이 흘렀다. 이유영이 가장 좋아하던 우천시의 지역 요리였지만 강이한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모든 음식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말을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이유영은 오후 내내 강이한과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강이한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철저히 강이한을 무시하고 있었다.강이한은 우천시에서 가장 유명한 간식거리들을 사왔다. 우천시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며 음식을 내밀었지만, 이유영은 한 입도 손대지 않았다.“유영아.”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강이한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얽힌 수많은 일들만으로도 이유영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연서의 사건까지 얽혀 있으니...이유영의 마음속 상처는 단시간에 치유될 수 없을 만큼 깊었다.“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눈도 빨리 낫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내 곁에서 빨리 벗어나지도 못할 거야. 잘 생각해 봐.”“...”강이한은 말하면서 싸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강이한과 잘 지내지 않으면 강이한을 떠날 수 없다는 뜻인 건가?아니면 이유영의 눈이 다 나을 때까지 계속 곁에 있겠다는 뜻인 건가?“흥!”이유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비웃는 듯한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그럴 시간이 있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유영의 곁에 머물러 있겠다고?이것은 이유영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자기 말이 진심임을 결국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고 심지어 보름이 지나도 강이한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저 말없이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이한의 존재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파리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었고 서주의 상황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강이한은 매일 외출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의사는 고집이 워낙 세서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우천시에서 보름이 지나도록 이유영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다른 의사들로부터 상태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강이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사를 데려오겠다는 각오로 노력하고 있었다....한편, 서주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이유영의 두 눈이 완전히 실명했을 수도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정국진 쪽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 원인은 알프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라고 했다.“아직도 소식이 없니?”서재 안, 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문기원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직 없습니다.”이유영의 소식은 단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박연준은 예상하지 못했다. 서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리고 사라질 줄은.게다가 벌써 보름 가까이 아무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대체 어디로 데려간 걸까?”박연준은 미간을 짙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 소식을 들은 일주일 동안, 박연준은 밤마다 뒤척이며 이유영의 걱정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이유영의 시력이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만약 알프산의 사건으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더 나빠진 것이라면...박연준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점점 조여 왔다.“찾아볼 곳은 다 뒤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박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상대방은 긴장하기 마련이다.의심할 여지가 없었다.박연준의 사람들은 이온유가 강이한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강이한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아마도 강이한은 그의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의심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박연준은 강이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소식을 흘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명심하겠습니다!”문기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박연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를 강이한의 곁에 둘 순 없다.”강이한을 찾을 수 없다면,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만 했다.그동안 서주가 강이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유영을 서주의 소용돌이에 더 깊이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유영을 그곳으로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박연준은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유영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주변은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알겠습니다.”문기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박연준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박연준은 말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문기원은 오랜 세월 박연준의 곁에서 함께하며 박연준이 이유영을 끌어들인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사람은 종종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박연준 역시 그랬다.그리고 강이한 또한 마찬가지였다....현재 서주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된 상태였다. 많은 이들이 강이한을 찾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보였다.한편, 파리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졌다.설유나는 엔데스 명우가 적합한 기증자를 찾기도 전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반산월.남자는 핏발 선 눈으로 소은지를 노
소은지의 냉정한 태도와 엔데스 명우의 거칠고 격렬한 분노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소은지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고 무관심해 보였다.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온 엔데스 명우조차도 지금 소은지가 풍기는 차가움에 섬뜩해질 정도였다.“정말 냉정한 사람이네.”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으며 목소리에는 위험이 가득했다.소은지는 차분히 답했다.“미안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선 공감이 잘 안돼.”일이 직접 자신의 삶에 닥치지 않는 한,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이건 냉정함이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은지는 설선비, 설유나와 특별한 관계도 없었다.그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해도 결코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러니 설선비와 설유나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소은지는 그저 냉정했을 뿐이다.더군다나,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설선비와 설유나가 겪은 일에 어떠한 연민이나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그 순간, 갑자기 목덜미에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명우의 손은 마치 소은지의 목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조였다.분명한 건,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죽음이 모두 소은지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다.설선비는 소은지의 고소로 궁지에 몰려 죽게 된 것이었고 설유나는 소은지의 외면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소은지, 너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어!”남자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잔혹했다.팍!뺨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공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는 순간, 소은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소은지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기운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은지에게는 조금의 동요도, 당황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숨을 삼켰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엔데스 명우의 사람들에게 통제당한 상태였다
한껏 완화된 긴장감은 소은지의 한마디로 다시 불이 붙었다.소은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조롱과도 같았고 어딘가 날카로운 독기를 풍겼다.소은지는 분노로 붉어진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핏빛으로 물든 그의 눈은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생생히 드러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담담히 말했다.“병이 그렇게 심각했다면 죽음도 끔찍했겠네.”소은지의 말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욱 후벼팠다.설유나는 죽기 직전까지 엔데스 명우에게 애원했다. 설유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온갖 수단과 계략으로 쟁취한 모든 것을 이렇게 허망하게 잃을 순 없었다.하지만 설유나가 신처럼 여기던 엔데스 명우조차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선 누구도 설유나를 구할 수 없었다.그렇게 설유나는 엔데스 명우의 눈앞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고 그 절망감은 지금까지도 엔데스 명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그는 설유나를 구할 방법이 있었지만, 결국 구하지 못한 이유는... 소은지 때문이었다.“이게 진짜...”남자는 이를 악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소은지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말했다.“설유나는 시작일 뿐이야.”소은지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앞으로도 엔데스 명우에게 닥칠 일이 더 많을 텐데, 벌써 이렇게 화를 내면 나중에는 어쩌려고?소은지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도발하듯 엔데스 명우를 바라봤다.분위기는 폭발 직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조여들었다.엔데스 현우가 설유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형제 관계가 아무리 냉랭해도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엔데스 현우도 예외는 아니었다.역시나, 엔데스 현우가 이곳에 나타났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엔데스 현우는 한걸음에 다가가 엔데스 명우의 손에서 소은지를 빼내 품에 안았다.엔데스 현우가 소은지를 감싸는 모습을 보자 엔데스 명우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너,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형은 세상이 이미 변했다는 걸 잊었나 보네.”엔데스 현우의 목소리
긴장감이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 두 사람은 차갑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고 소은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소은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소은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하시에서도 오직 이유영만이 유일한 존재였을 뿐,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 이유영이 소은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강이한이 나타난 후로 이유영의 삶은 늘 혼란스러웠다.대부분의 시간 동안, 소은지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유영을 붙잡아주며 지탱해야 했다.파리에 온 이후, 소은지의 삶은 엔데스 명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생각을 더욱 하지 않게 되었다.그런데 지금...“흥! 현우야, 앞으로 네가 얼마나 더 보호할 수 있을지 지켜볼게.”엔데스 명우는 비웃듯 말하고는 매섭게 돌아섰다.그의 등 뒤로는 차가운 기운이 스며 나왔다.현우는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방금 전에 있었던 긴장된 상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 소리에 소은지는 정신이 번쩍 들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뭐가 그렇게 웃겨요?”“당신도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게 웃겼어요.”두려움? 그렇다.조금 전, 엔데스 명우 앞에서 어떻게든 힘을 짜내 맞서 싸웠지만,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그 순간, 소은지는 진심으로 두려웠다.그리고 엔데스 명우가 떠난 뒤에도 소은지의 등에선 여전히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당신도 알잖아요. 당신 형은 완전히 미친 사람이란 걸!”소은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미친 사람이죠.”소은지가 엔데스 명우 곁에 있을 때 어떤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었는지, 여러 번 도망쳤다가 결국 어떻게 붙잡혔는지,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현우를 만난 뒤에야 소은지는 반격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는 모든 것을
현우는 소은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유영 씨에 대한 소식, 알고 있나요?”“유영이 말인가요?”“네.”“며칠 전에 백산 별장에 갔었는데, 거기서 들은 말로는 유영이의 두 눈이 이제 거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소은지의 마음은 조여드는 듯한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예전에 정씨 가문에 있을 때, 임소미가 얼마나 이유영의 시력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그렇기에 소은지마저 이 문제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력을 잃는다는 건 과연 어떤 느낌일까? 게다가 강이한에게 끌려간 상태라서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이유영에서 늘 문제가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이 말을 들은 순간, 옆에 있던 현우의 몸이 떨렸다.소은지는 현우의 변화를 감지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엔데스 현우는 떠났다. 현우는 늘 그렇듯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아무리 바빠도 엔데스 명우가 이곳에 올 때마다 현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돌아왔다는 점이었다.소은지가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위험에 처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현우는 계약 조건에 따라 소은지를 철저히 보호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소은지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소은지를 철저히 보호했다.소은지는 그에게 필요한 단서를 제공했고 현우도 소은지에게 필요한 보호를 제공했다.현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송연미가 찾아왔다.송연미와 소은지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 갔다.카페에는 둘만 남아 있었다. 송연미는 앞에 놓인 커피잔을 손에 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엔데스 운빈과 어제 이혼했어.”소은지의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잠시 멈췄다.놀란 얼굴로 송연미를 바라보았고 눈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스쳤다.송연미는 그런 소은지를 바라보며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평온함과 해방감이 어렴풋이 비쳤다.하지만 그
소은지는 한때 집안일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하며 전업주부가 되는 여자를 무시했다.맡길 수 있는 건 맡기고, 굳이 직접 할 필요 없는 일까지 애써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여자는 어떤 위치에 있어도, 그것이 작은 일이라도 지혜를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그런데 이유영은 강이한과 결혼한 뒤, 마치 학교에서 배운 모든 걸 다 잊어버린 사람처럼 전업주부라는 역할에 온전히 빠져들었다.그 모습을 본 소은지는 단호하게 말했었다.“전업주부는 위험한 직업이야.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잖아. 그렇게 되면 미래가 더욱 막막해질 거야.”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엔 좋은 사장이었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는 법이다.오래 착취하다 보면 착취는 곧 당연해지고, 그렇게 모든 것은 결국 변질되기 마련이었다.남편도 다르지 않았다.소은지는 깊이 한숨을 쉬고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너, 내가 이런 걸 어떻게 배웠는지 알아?”이유영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떻게 배웠는데?”현우 옆에서 배운 게 아니겠나?소은지는 지금 엔데스 가문의 칠 남매 중 막내며느리다. 바깥일은 꿈도 못 꾸는 처지라 늘 시간이 남아돌았을 터였다.이유영도 심심해서 한 일이었다. 어쩌면 소은지도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소은지는 가위를 쥔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마치 마음속 응어리가 고스란히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소은지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사람 옆에서 배웠어.”이유영은 할 말을 잃었다.소은지가 말한 그 사람은 엔데스 명우였다.“그 사람은 내가 온순한 새가 되기를 바랐어.”그 말에 이유영의 가슴이 턱 막혔다.그제야 이유영은 알 것 같았다.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 옆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엔데스 명우는 참 악랄했다. 차라리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하게 소은지를 짓밟았다.그는 소은지의 강인한 정신을 알아본 것이다. 청하시에서 소은지는 유명한 이혼 전문 변호사였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기에 그만큼 높
할 수 있든 없든,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인가?이유영은 소은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눈에 맺힌 슬픔을 보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소은지의 말이 맞았다. 모든 일에는 시작할 권리가 있지만 끝맺을 권리는 자신이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이유영은 강이한과의 관계를 통해 이미 깨달았다.처음에는 아름다운 시작이었다. 하지만 끝맺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슬픔을 감내해야 했는가!특히 엔데스 명우와 소은지의 관계는 더욱 복잡했다.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설선비와 설유나가 겪은 일처럼, 엔데스 명우는 거의 모든 것을 소은지에게 뒤집어씌웠다.“그럼 지금, 필요한 것은 없니?”이유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소은지는 단호하게 말했다.“필요한 것은 없어.”사실, 그날 밤 정씨 가문에 갔던 이후, 소은지는 정국진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가족과 권력.정국진에게는 가족이 권력보다 중요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능력으로 이미 파리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것이다.이유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소은지의 상황이 언제쯤 해결될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됐어, 다른 이야기하자. 이런 무거운 이야기들은 그만하고.”소은지는 화제를 돌렸다.이런 이야기는 너무 무거웠다. 어차피 마주해야 할 일이라면 괜히 입에 달고 살 필요는 없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일일 뿐이니까.“다른 이야기?”“응, 나 따라와.”소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유영의 손을 잡고 뒷마당으로 향했다.이곳의 구조는 이유영의 모이산과 매우 비슷했다. 심지어 인테리어 스타일도 유사했다.뒷마당에 들어서자 진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는데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했다.이유영은 놀란 듯 말했다.“꽃이 이렇게 많아?”“응.”꽃?이렇게 많은 꽃을 한꺼번에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희귀한 품종들까지. 이유영은 신기한
그녀가 청하시에서 일할 때라면 직업적인 감각으로 이상함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절히 대처했을 것이다.“자책하지 마. 내가 말했잖아. 이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는 애초에 나를 노리고 있었어.”소은지는 이유영의 마음을 읽은 듯 단호하게 말했다.소은지는 이유영의 손을 더 강하고 단단하게 잡았다.이유영은 붉어진 눈으로 소은지를 바라보았고 소은지는 이유영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조용히 말했다.“의사가 지금 울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은지야.”“됐어, 너는...”이렇게 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감정이 예민하다는 것은 이유영의 마음이 그 모든 경험으로도 완전히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좋은 일이었다.사람은 어떤 일을 겪더라도 결코 선량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너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이유영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이유영은 소은지가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엔데스 명우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내가 대처하지 않으면 분명히 일이 생길 거야.”“정말 그를 막을 수 있어?”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이유영은 그 질문을 던지며 불안한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한순간 침묵했다.막을 수 있을까?사실,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 곁에 있을 때 이미 엔데스 가문의 핵심을 파악했다. 그리고 엔데스 가문의 남자들이 가문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지 알고 있었다.그 권력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자신이 그 안에서 어떤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도.그 순간, 소은지는 결심했다. 엔데스 명우가 엔데스 가문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오르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고.그는 소은지의 세상을 망쳤다. 그러니 소은지도 그를 파리에서 몰아내야만 했다.그래서 그녀는 엔데스 현우와 협력할 기회를 찾았다.그를 막을 수 있을까?그 질문은 소은지가 깊이 고민한 적 없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질
그런 걱정거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소은지는 이유영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유영의 차가운 손을 조용히 잡았고 아무 말 없이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너무 힘들었어.소은지는 파리를 떠난 지 벌써 4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강이한과 박연준이 이유영 곁에 있었지만 그녀가 어둠 속에서 얼마나 절망했을지, 우천시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소은지만이 알 수 있었다.둘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고 식당의 도무미들이 식탁을 정리를 시작하면서 곧 차를 가져왔다.“네가 과일차 좋아하는 거 알고 준비했어.”“응.”이유영은 과일로 우려낸 차를 정말 좋아했다.차를 한 모금 마시자 익숙한 향이 입안을 감쌌다.소은지는 웃으며 말했다.“네가 만든 것만큼 맛있진 않지?”“그야 당연하지.”“나도 네가 만든 게 더 맛있어.”소은지는 감회에 젖은 듯 조용히 말했다.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그 순수했던 시절이었다.하지만 그 시절을 진정 그리워하는 사람은 소은지뿐일지도 모른다. 이유영에게 그 시간은 착각에 불과했다.강이한과의 관계에서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이유영은 끝까지 그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기억을 붙잡고 버텼다.그러나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지금 엔데스 가문은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어. 넌 괜찮아?”이유영은 걱정스럽게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엔데스 가문의 인장은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그 때문에 전기봉의 중요성은 일시적으로 희미해졌지만 만약 인장이 다시 나타난다면 엔데스 가문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이유영은 소은지가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소은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조용히 말했다.“영향은 있지만 내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야.”이유영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라니.“엔데스 명우 때문이야?”우천시에서도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유영은 여전히 소은지를 걱정했다.특히,
예전에 강이한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소은지를 찾아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밤늦도록 술을 마시곤 했다.“어때?”“맛있네. 모이산 요리사, 실력이 좋네.”이유영은 음식의 맛이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청하시의 맛도 살짝 느껴졌다.“요리사가 청하시 출신이야?”“어떻게 알았어?”사실, 현우가 데려온 요리사였다.현우는 소은지가 파리 음식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고 그녀가 엔데스 명우의 압박 속에서 힘들어할 때마다 직접 요리를 해 주었다. 덕분에 소은지는 최근 살이 많이 붙었다.현우가 청하시에서 요리사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소은지의 마음속에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청하시 음식은 내가 다 먹어 봤는데. 아마 원씨 집안 요리사일 거야. 맛이 너무 비슷해.”“그래, 너 안 가본 데가 어디야?”소은지는 이유영을 흘겨보며 말했다.강이한... 그 남자는 정말 짜증 나는 존재였지만 연애할 때만큼은 이유영을 극진히 아꼈다.그녀가 맛있게 식사할 수 있도록 청하시의 유명한 레스토랑은 거의 다 찾아다녔다.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유영의 키는 크게 자라지 않았다. 아무리 정성껏 먹여도 소용없었다.“그만 얘기하고 맛있게 먹자.”이유영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순수하고도 맑았다.소은지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현우는 좀 먹었으니까, 너 많이 먹어.”“아직도 입맛이 그렇게 없어?”“응.”소은지는 이유영의 세심함에 마음이 흔들렸다.청하시에 있을 때, 둘이 함께 식사하면 소은지는 늘 이유영의 식습관을 세심히 관찰했다.하지만 엔데스 명우에게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후, 소은지의 식욕은 현저히 줄어들었다.비록 함께 식사하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이유영은 그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은지야.”“왜 안 먹어?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잔뜩 준비했어. 다 담백하고 지금 너한테 딱 맞는 음식이야.
이유영은 아이를 꼭 안은 채 창밖으로 희미한 달빛을 바라보며 전에 없던 만족감이 밀려왔다.분명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지금은 달빛 아래에서도 시야가 또렷했다. 그녀의 눈을 집도한 의사가 얼마나 신중하게 치료했는지 알 수 있었다.그날 밤, 이유영은 딸의 향기 속에서 오랜만에 깊고 편안한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이유영은 가장 먼저 소은지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아침 식사도 거른 채, 그녀는 곧바로 모이산 뒤편으로 향했다.소은지는 우천시를 떠난 후 이유영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최근 파리 엔데스 가문이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소은지가 그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했다.차에서 내리자, 현우가 문을 열고 나왔다.트렌치코트를 멋스럽게 걸친 현우는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가문의 깊은 역사가 그의 태도에서 자연스레 드러났다.과거, 이유영이 그의 곁에 있을 때도 이 기품을 감추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녀가 주부에서 직장 여성으로 변신하는 동안 주변을 세심히 살피지 못했던 것일까?맞아, 분명 그랬을 것이다.현우는 가까이 다가와 이유영과 눈을 맞췄다. 그의 눈빛은 깊고도 반짝였다.“이제 볼 수 있나 보네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응.”거실 창 너머로, 소은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를 보살피던 왕 아주머니는 소은지의 뒤에 서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왕 아주머니는 엔데스 가문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가문의 여주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와 그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왕 아주머니.”“네.”“모두 담백한 음식이죠?”소은지는 차분하게 물었다.왕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걱정 마세요. 다 말씀해 신 대로 준비했습니다.”“네. 유영이는 수술을 마친 직후라 너무 자극적인 음식은 안 돼요.”“알겠습니다.”소은지는 왕 아주머니에게 말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 속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멈칫했다.“아빠?”“아니야, 가서 쉬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정국진의 눈에 스친 망설임을 이유영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파리와 서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으니까.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이 말했다.“그럼 전 방으로 돌아갈게요.”“응.”이유영이 서재를 나서자 정국진만 남은 공간에는 복잡한 기운이 감돌았다.서주에서 박연준이 돌아왔다.그리고 강이한은...정국진은 사람을 보내 그의 행방을 찾으려 했지만 강이한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는 떠날 때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감췄다. 마치 세상에서 존재조차 지워버린 듯했다.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수술 후에는 이유영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이유영을 완전히 떠나기 전, 그는 얼마나 깊은 고통을 견뎌야 했을까?...방으로 돌아오자, 유 아주머니와 월이가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이유영을 보자 바비 인형을 월이에게 건네며 공손히 말했다.“아가씨.”“네.”“잠시만요.”이유영이 잠시 머뭇거리다 유 아주머니를 향해 물었다.“그 사람, 몇 번이나 왔어요?”강이한을 물어보고 있었다.이제는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정씨 가문 사람들은 이유영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조용히 대답했다.“두 번 왔어요.”두 번.즉, 우천시에서 돌아온 후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이유영은 강이한이 아이를 보러 왔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꼈다.그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다. 만약 그가 아이가 자신의 혈육이라는 걸 알고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이 세상에 그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일단 나가보세요.”“네, 아가씨.”유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이유영은 조용히 월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임소미는 이유영을 꼭 끌어안으며 마치 텅 비었던 가슴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이유영이 돌아오기 전, 임소미는 이미 그녀의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여진우가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수술 전까지 모두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만큼, 그 소식은 임소미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었다.“엄마, 숨 막혀요.”이유영이 투덜거렸다.“얘가...”임소미는 그녀를 품 안에서 놔줬지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작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부드럽게 눈가를 쓰다듬었다.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임소미의 가슴은 다시 먹먹해졌다.지난 2년 동안, 이유영의 눈에 드리워진 어둠을 바라보며 마지막에 결국 텅 빈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임소미가 얼마나 가슴 아프고 두려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정말 볼 수 있는 거 맞지?”이렇게 맑은 눈동자를 보고도 여전히 불안했던 임소미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정말 볼 수 있어요. 엄마, 오늘 검은색 원피스 입으셨네요.”“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이유영이 옷 색깔을 정확히 맞추자 임소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국진도 그 말을 듣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됐어, 보이면 됐어.”“아빠.”“밥 먹자.”이것이 바로 가족이었다.언제든 집에 돌아오면 따뜻한 밥과 뜨끈한 국이 기다리고 있는 곳.여진우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따뜻함을.정국진과 임소미 앞에서 그도 편안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참 좋았다.재벌 가문에서 이렇게 화목한 가족 분위기를 가진 곳은 드물었다. 그들은 보기 드문 조화를 이루며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식탁에는 여진우가 좋아하는 음식과 함께 이유영을 위해 준비된 담백한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고 이유영은 기꺼이 그 음식을 받아들였다.“엄마, 저거 먹고 싶어요.”월이는 이유영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사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을 만나기 전, 비록 아무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순수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앗아갔다. 계산해 보면 그는 이유영을 2년 동안 지켜왔고 5년을 연애했으며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이유영은 그 감정이 진짜라고 믿었고 온 마음을 다해 화답했다. 하지만 사랑은 결국 거짓이었다.강이한도, 박연준도 모두 거짓이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끝없는 사랑을 선물했지만 박연준은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가장 큰 보호를 제공했다.한 명은 사랑을 주었지만 보호는 없었고 다른 한 명은 보호를 제공했지만 사랑은 없었다.둘 중 누구든, 이유영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래서 그녀는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었다.“알겠어요.”배준석이 씁쓸하게 말했다.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거예요.”“...”“하지만 그들은 저에게...”이유영은 말을 멈췄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냥 보내주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끝내 이유영을 놓아주지 않았다.“배준석 씨.”“네?”“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생사의 이별이 아니라 사랑하지만 얻을 수 없는 사랑이에요.”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유영은 어땠을까?그녀가 손에 쥔 모든 것은 원래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그것은 사랑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었다.“그는 이유영 씨에게 진심이었어요.”배준석이 이유영이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러나 이유영은 비웃음만 나왔다.진심이라고?그 말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진심이란 것이 존재할까? 누가 누구에게 끝까지 진심일 수 있을까? 마음을 다한 사람이 결국 가장 큰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과거의 자신이 너무 진심이었기에 지금 이렇게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순간, 배준석은 확신했다.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영원히 용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