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생각난 듯, 송연미는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송연미의 눈빛은 단순히 차가운 것을 넘어 얼음처럼 날카로웠다.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엔데스 가문이 어떤 상황인지 너도 알고 있겠지?”“...”“우리 아버지의 지지가 현우에게 굉장히 중요해.”송연미가 엔데스 운빈과 결혼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송연미를 차지했기 때문이다.결혼 후, 엔데스 운빈이 아무리 송연미를 존중했어도, 송연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수년 동안, 송연미는 엔데스 운빈의 곁을 떠날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최근에야 드디어 아버지를 설득해 아버지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 결과가 송연미를 이렇게까지 괴롭게 만들 줄은 몰랐다.“소은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을 거라고 믿어.”소은지가 침묵하자, 송연미는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껏 방법을 찾지 못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왜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걸까?그 이유는 단 하나, 소은지 때문이었다.소은지가 느낀 현우의 변화를 송연미도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둘이 느낀 대상은 완전히 달랐다. 송연미의 눈에는 엔데스 현우의 변화가 모두 소은지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그렇기에 송연미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이대로 두면 상황은 더욱 통제 불가능한 방향으로 치달을 것이었다.송연미는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소은지에게 단호하게 나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소은지는 그런 송연미를 비웃으며 조소 섞인 미소를 지었다.소은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네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면 어떡할 건데?”소은지는 자신이 하는 말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태연한 척하는 게 분명했다.소은지는 송연미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송연미가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 걸까?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그 이유는 명백했다. 송연미는 이미 상황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엔데스 현우도 결
소은지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는 듯했다.겉으론 무심해 보였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내 생각엔, 현우가 이미 네 아버지의 지원을 거절한 것 같은데?”송연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소은지가 말을 이어갔다.소은지의 말투는 비아냥으로 가득 찼고 송연미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소은지는 정곡을 찔렀다. 정말 마녀 같은 여자였다.바로 그 순간, 송연미는 현우가 이렇게 오랜 세월 한곳에 머물러 있다가 왜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는지 깨달았다.바로 이 여자... 소은지 때문이었다.소은지 때문에 최근 들어 현우가 여러 일에 뛰어든 것이었다. 예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소은지가 등장한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현우는 송연미가 엔데스 운빈과 결혼한 이후로 파리를 떠났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그간 엔데스 가문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현우는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돌아왔고 그것도 이 여자 때문이라니?송연미는 소은지를 응시했다.송연미의 눈빛은 마치 소은지를 꿰뚫으려는 듯한 날카로움으로 가득했다.소은지는 송연미의 반응을 보며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한 말이 맞는 모양이네.”“만족스러워?”소은지의 태도에 송연미는 결국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송연미는 수년간 엔데스 가문에서 겪은 일들로 인해 이미 모든 인내심을 잃어버렸다.모든 것을 잃은 송연미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지금 소은지의 태도는 송연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현우의 곁에 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다.모든 것이 끝나야 할 타이밍이었다. 송연미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리며 긴 시간을 보냈고 이제야 겨우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하지만 현우가 돌아왔을 때, 현우의 곁에는 소은지가 있었다. 소은지는 그렇게 이곳 반산월에 머물고 있었다.소은지는 반산월이 가진 의미를 알 리 없었다. 그곳은 송연미와 현우가 함께 설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결혼하면
눈앞에서 떨고 있는 송연미를 바라보며 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이런 무의미한 일은 이제 그만둬.”애써 더 많은 노력을 쏟을수록 결국 더 깊은 실망만 남는 법이다. 그리고 그 실망의 원인을 현우에게 돌릴 뿐이다.소은지는 이런 광경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다.결국, 혼자만의 집착일 뿐이었다.송연미의 분노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여섯째 도련님이지?”“...”송연미의 목소리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억압이 깃들어 있었다.“하고 싶은 말이 뭔데?”소은지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너와 여섯째 도련님의 일, 아무도 모를 것 같아? 만약 그분이 알게 된다면...”송연미는 말을 멈추고 소은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경고와 위협이 담겨 있었다.소은지는 그 속셈을 간파한 듯 가볍게 웃었다.“날 협박하겠다는 거야?”“그분이 알게 된다면, 현우는 반드시 우리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야 할 거야. 그때도 현우가 널 선택할 것 같아?”“그럼 해보던가.”송연미의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소은지는 앞에 앉아 있는 송연미를 바라보며 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소은지의 태도는 단호했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소은지의 모습에 송연미의 마음은 한층 더 흔들렸다.그랬다.이 상황에서도 송연미는 여전히 소은지와 여섯째 도련님 사이의 일이 자신의 유리한 카드라고 믿고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일이 끝나기 전인데도 말이다.이 카드는 소은지에게도, 현우에게도 중요한 변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송연미는 비열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애썼다. 단지 소은지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 주길 바랐을 뿐이다.하지만... 소은지는 이 모든 상황에서도 여전히 냉정하고 무심했다. 소은지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그렇다.송연미가 소은지에게 느낀 감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여자는 마치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그리고 그 점이 송연미의 마음을 더 초조하게 했다.“해볼래?”소은지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
아직도 협박할 수 있냐고?송연미가 말한 것들이 정말 소은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는 걸까? 그렇다면 이 여자가 두려워하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송연미는 소은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꼿꼿하게 걸어가고 있는 소은지의 뒷모습은 세상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태도가 느껴졌다.“여섯째 도련님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여섯째 도련님이 날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건, 넌 네가 원하는 걸 평생 이룰 수 없다는 거야.”차분하게 말을 마친 소은지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소은지의 발걸음은 가볍지도, 급하지도 않았다.그 발걸음에서는 오직 평온함만이 느껴졌다. 지금의 소은지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두려움도 없는 사람 같았다.그런 소은지를 보며, 송연미는 소은지가 무엇을 두려워할 수 있을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송연미는 오랫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밖으로 나간 소은지에게 도우미가 한 마리의 주황색 고양이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는 더욱 그랬다.소은지의 옆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이런 상황에서도 고양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을 여유가 있다니. 이 여자는 정말 두려움이란 감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소은지는 품에 안긴 작은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요?”조그맣고 여린 새끼 고양이를 바라보며 소은지가 말했다.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일곱째 도련님께서 길에서 발견하셨다고 합니다. 사모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 보내셨다고요.”길에서 발견했다니? 현우의 따뜻한 마음씨에 소은지는 미소를 지었다..보통 남자라면 이런 행동을 할 리 없는데, 현우는 달랐다. 현우의 이런 모습은 귀엽다 못해 믿음직스러웠다. 현우는 믿음직스럽고 의지할 수 있는 남자였다.소은지는 고양이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작은 고양이는 소은지의 품 안에서 몸을 비비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오씨 아줌마.”“네, 사모님
강이한은 이유영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에 닿았다.이유영이 물었다.“대체 어디 가는 거야?”“염 선생님이 드디어 진료를 허락하셨어.”지난 스무날 동안.아무리 이유영이 강이한을 거부하고 밀어내도, 강이한은 단 한 순간도 이유영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한결같이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서주의 상황이 어떨지 알 수 없었지만, 이유영은 혼란에 휩싸였겠다고 짐작했다.그럼에도 강이한은 이곳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차 안에서.이유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한다고 내가 널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감동이라도 했냐고? 전혀,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강이한은 이 험난한 순간에도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유영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이유영의 말에 옆자리의 강이한이 잠시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망설임 없이 이유영을 품에 끌어안으며 부드럽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용서는 필요 없어. 난 네가 낫기만 하면 돼.”용서?강이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은 평생 그를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랐다.그렇다.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었다.하지만 괜찮았다.강이한이 바라는 것은 오직 이유영이 건강을 되찾는 것뿐이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강이한은 마치 지난 생에서 스친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고집스러웠다.이유영은 그때도 어둠 속에서 자신을 적응시키려 애썼다. 강이한은 이런 이유영을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아무리 누군가가 도우려 해도 이유영은 완강히 거부했다. 우지와 우현이 곁을 지켰음에도 이유영은 그 누구의 손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의 곁에는 강이한 밖에 없었고 이유영은 결국 강이한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어둠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강이한에게 기대지 않기 위해 혼자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그러나 이번 생은 달랐다. 이유영 곁엔 가족도 친구도 많았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어둠 속에 익숙해지
그리고 이곳 우천시의 기후는 정말 좋았다.지금은 여름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의 몸 상태 때문에 이처럼 기후가 좋은 곳에서도 견디기가 쉽지 않은 듯했다.진료를 받는 도중.강이한은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이유영은 어두운 진료실 안에서 진하게 퍼지는 한약 냄새를 맡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냄새는 유난히 강렬했다.“연기에 화상 입은 건가요?”염 선생님은 이유영의 눈을 살피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이유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때 완전히 실명한 건 아니었죠?”“맞아요.”“왜 그땐 수술을 받지 않았죠?”당시 상황에서는 수술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의사들은 보수적인 치료로는 조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다며 경고했었다.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시력이 급격히 악화될 거라고 했다.모두 그렇게 말했다.“적합한 시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정씨 가문 아가씨 아닌가요?”“네.”이유영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염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정씨 가문이라면 수술을 받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보아하니 염 선생님은 단순한 의사가 아니었다. 적어도 상류층에 대한 사정은 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유명한 의사라면 당연히 상류층 사이에서 이름을 알렸을 것이다.“수술이 절실한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이유영의 어조는 담담했다. 이유영은 자신의 실명에 대해 아무런 원망도, 후회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평정 속에는 깊은 체념이 스며 있었다.거칠고 단단한 손끝이 이유영의 맥을 짚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이내 염 선생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아가씨는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복이 많다니?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염 선생님은 이어서 말했다.“그 아이가 아가씨 같은 딸을 둔 것도 그 아이의 복이죠.”“...”“그리고 그런 남편을 둔 것도 아가씨의 복이에요.”남편?강이한? 염 선생의 말에 이유영의 온몸이 순간
“사실 난 수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염 선생님은 너처럼 상태가 심각한 환자를 수백 명도 더 치료해 봤어. 경험이 아주 풍부하시니, 날 믿어.”믿으라고? 이유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이유영의 싸늘한 반응에 강이한의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저렸다. 하지만 이유영을 탓할 자격은 그에게 없었다.두 사람의 관계를 이 지경까지 만든 건 바로 자신이었다.강이한은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가장 기대고 싶고 믿고 싶었던 순간에, 강이한은 번번이 이유영의 곁에 없었다. 이유영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모든 것은 그의 자업자득이었다. 이 쓰라린 결과는 오로지 그가 짊어져야 할 무게였다....정원에는 한약 냄새가 짙게 깔려 공기마저 쌉쌀하게 느껴졌다. 지난 몇 년간 임소미와 함께 지내며 이유영은 이 한약 냄새에 익숙해졌다.그러나 이번 약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쓰고 거북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한 그릇의 약이 이유영의 앞에 놓였다.“먼저 약부터 마셔.”강이한의 목소리에는 모든 미안함과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한때 이유영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만큼 모두 보상하고 싶었다.“이 약은 얼마나 더 먹어야 해?”임소미와 함께 있을 때부터 이유영은 끊임없이 약을 먹어왔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약 복용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막함에 이유영을 더 지치게 했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약을 마실 때마다 임소미의 걱정 어린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결국 이유영은 어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모든 약을 마셨다.어머니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아무리 쓴 약이라도 어머니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지와 우현이 직접 약을 챙겨왔고 이유영이 약을 마시는 것까지 확인해야만 했다.그렇지 않으면 임소미가 직접 회사를 찾아와 확인하며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그때는 몰랐다. 왜 고모인 임소미가 그렇게까지 이유영을 걱정하고 신경 쓰는지.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진정한 가
이유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서주에서 벌어진 상황이 이십여 일 만에 얼마나 엉망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강이한은 두 달 동안 이곳에 남겠다고 했다. 두 달이라니,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를 긴 시간이다. 아직 이유영이 입을 떼기도 전에, 강이한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건 네 몸 상태가 괜찮을 때의 얘기야. 상황이 좋지 않으면 반년이 걸릴 수도 있어.”“...”그 말을 들은 이유영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두 달도 버거운 시간인데 반년이라니?“유영아,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어. 내가 네 곁에 끝까지 있을게.”강이한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의 진심이 흔들림 없이 전해졌다.하지만 이유영의 마음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이온유, 퇴원한 지 얼마 안 됐지?”이유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유영의 어투에는 여전히 강이한에 대한 냉소가 배어 있었다.얼마 전 큰 병을 앓고 겨우 회복한 이온유를 두고 정말 여기서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맞아.”강이한이 솔직히 대답했다.“여기에 있을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이유영의 질문에는 여전히 의심이 묻어 있었다. 과연 이럴 여유가 있을까? 두 달이든 반년이든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얼마나 걸리든, 이번엔 반드시 네 곁에 있을 거야.”“말은 잘도 하네.”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서주 쪽 상황이 이런데, 강이한이 정말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있을까? 하지만 이유영 또한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자신의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주의 일들로 계속 바쁘다는 것을.“일단 약부터 마시자.”강이한은 대화를 더 이어가지 않기로 했다.과거 이유영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이번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갚겠다는 각오가 강이한의 마음을 채웠다.그리고 이유영만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 대가로 무언가를 잃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지금 강이한의 마음에는 오직 하나, 이유영의 건강을 되찾고 싶다는 간절함뿐이었다.“너무 써.”약의 쓴맛이 마치 입안을 사로잡는 듯했다. 황련보다 더 쓴 느낌이었다.너무 쓰다 못해 괴로
“배준석을 데려와.”배준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안과 전문의였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 인물이자 강이한과는 말할 것도 없이 깊은 친분이 있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수술할 때, 강이한이 용성시에 있었는지도 확인해.”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진영숙의 마음은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알겠습니다.”남기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진영숙은 소파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강이한이 사라지기 전, 이유영과 함께 우천시에 가서 진료를 보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곳의 염 선생이 이유영의 눈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리고 그 누구도 지금 진영숙의 마음속 상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특히 지금 이유영의 눈이 치료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의심을 더욱 깊게 했다.어머니로서 그런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이유영이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든 진영숙은 강이한이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이라면 이유영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오늘, 이유영이 청하시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진영숙의 마음은 피가 더욱 아파졌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그 아이는 정말로 강이한을 똑 닮았다....한편 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방문객들을 침착하게 맞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예기치 않게 여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긴장감이 맴돌았다.특히 여진우에게서 풍기는 것은 단순한 차가움 이상의 것이었다.소은지는 말없이 찌푸린 눈으로 여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조용히 소은지를 응시했다.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무슨 일이에요?”“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소은지 씨도 알고 있죠?”“알아요.”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세상 모든 이가 아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두 사람의 10년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걸까? 사랑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은 대체 어디 갔을까?’이유영은 풍산 그룹에서 나오기 전, 진영숙에게 아이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진영숙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시윤이 방으로 들어섰다.“사모님.”“왜... 도대체 왜...”진영숙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정은 이미 한계를 넘어 통제 불능 상태였다.시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에 대해 그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진영숙 곁에 있었던 이들은 예전에 진영숙과 이유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결국 인과응보라고 여겼다.“이유영에게 다 말했어. 하지만...”진영숙은 여기까지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강이한이 끝내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진영숙은 모두 이유영에게 털어놓았다.하지만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이유영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강이한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사람 같았다.“사모님, 작은 사모님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어쨌든...”시윤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가 결국 말을 멈추고 진영숙을 바라보았다.과거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진영숙도 이유영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미 모든 대가를 치렀다.하지만 여전히 과거를 놓아주지 않는 이유영이 마냥 이해되지 않았다.‘아무리 미워도 지금 강이한이 사라진 마당에 그 분노를 조금은 억누를 수도 있지 않을까?’과거에 무슨 원한이 있었든 이렇게까지 무심할 일이란 말인가? 강이한은 서주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졌다.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도 여전히 냉정한 이유영의 태도에 진영숙은 마음이 아팠다.“대체 어떻게 해야 그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왜 박연준의 사람들조차
“강이한은 2년 동안 자신을 가둔 채 보냈어.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지금의 이유영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담담한 걸까?심장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걸까?“네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겨내기 시작했어.”그때를 떠올리자 진영숙은 한층 더 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강이한은 아직도 그 안에 있었고 이건 그가 내린 선택이었다.“강이한은 지금 혼자 그 벌을 받는 거야. 네가 겪었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겪고 있어. 알기나 해?”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저 자기만 강이한 곁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강이한이 결국 이유영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끝을 맞았다. 그녀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이제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아무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보고만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이유영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진영숙은 생각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영숙이 이런 사실을 이유영에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너무 차갑게만 강이한을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강이한의 실종에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강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다.진영숙의 삶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녀는 이유영만 편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친듯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걸 다 말했음에도 이유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건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어요.”“...”순간 머릿속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말을 뱉는 사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하지만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한지음의 존재는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했고 연서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정말이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경고할게요. 제 딸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마요. 그 아이는 강이한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이유영!”진영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녀의 눈빛 속엔 끓어오르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이유영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숙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냉정하다는 말을 들은 이유영의 입가엔 오히려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냉정하다고?’“지금 강이한이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두 철수한 것에 대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사실상 생사불명이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유영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니 진영숙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차갑고 무정했다.아무리 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온기가 스몄을 텐데 이유영은 아니었다.강이한이 생사불명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냉정하다고요?”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영숙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분노만 가득했다.“그럼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생사불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조차 이유영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
한 시간 뒤, 이유영은 풍산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진영숙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빛엔 깊고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뜻밖에도 박연준은 진영숙을 파리에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그녀 스스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강이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손에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영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네가 강이한의 딸을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차디찼고 이어지는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왜요? 뱃속에서 죽이지 못해서 화가 났어요?”그 말에 진영숙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은 슬픔이었다.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듯 쓸쓸함이 스며들었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남은 건 흩어진 슬픔뿐이었다.이유영의 싸늘한 태도 앞에서 진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우리 애 어디 있는지만 말해줘.”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강이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이유영뿐이라 믿고 있었다.박연준이 사람들을 풀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진영숙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됐다.박연준은 그녀와 함께 서주로 가자고 했지만 진영숙은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른다고 했잖아요.”“정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진영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뭐라고요?”‘무엇을 의심하란 말이지?’“내가 들은 바로는 강이한이 너를 우천시로 데려갔던 건 염 선생을 찾기 위해서였대. 그땐 너도 몰랐겠지.”“...”“그런데 네 수술 시기에 맞춰 각막이 정확히 준비돼 있었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이 상황을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그 말에 이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
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묻지 말라고?’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은지에 관한 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진우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늘 그렇듯 그들은 단순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지는 이제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그 말에 이유영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이미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그 말 한마디에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오늘 송씨 가문 소식은 들었어?”“들었어.”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 소식을 접한 뒤, 파리 전체가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모든 게 흐릿하고 불길했다.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여진우의 품에 안긴 순간, 이유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짓눌렸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느낀 이유영은 무언가 정말로 큰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긴 침묵이 흐른 후, 이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찾았어?”지금 그 도장과 문서는 엔데스 가문 사람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존재였다.그 하나가 모든 걸 좌우할 수도 있었다.도장 이야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낮게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곧 나올 거야.”그 말은 다짐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로 같았다. 그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잠시 뒤, 여진우는 자리를 떴고 정국진도 오늘 집에 없었다.백산 별장에는 임소미와 이유영, 그리고 조기 교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이만 남아 있었다.월이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방 안을 돌아다녔고 그 모습은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예전엔 조기 교육 센터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운 듯 아침마다 스
남기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오늘은 몇 명이나 더 찾아올 것 같아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탐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남기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지금으로서는 일곱째 도련님 쪽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말뜻은 분명했다. 소은지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는 경고였다.소은지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가능하다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 늪으로 끌어들인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엔데스 명우. 그 이름이 떠오르자 소은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렸다.송연미가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소은지는 조용히 물었다.“남기 아저씨, 지금 제가 떠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송씨 가문의 결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뚜렷해졌다.남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일곱째 도련님은 송연정 아가씨와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요?”‘그렇다면 송연미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소은지가 생각에 잠기자 남기가 말을 이었다.“일곱째 도련님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십니다. 송씨 가문과 선을 그은 걸 보면 뭔가 그 속셈을 알아보신 듯합니다.”“...”“그리고 지금 사모님을 떠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사모님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물론입니다.”남기의 말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우천시에 있었을 때,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며느리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다.예전엔 현우를 지지하는 송씨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 송연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자 송씨 가문 회장님의 인품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 사실을 인식하자 오히려 마
사실 모든 기회는 그녀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엔데스 운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그 순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 가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왜 송연정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은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걸까?’처음엔 그 이유가 운빈과의 관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느닷없이 엔데스 신우와의 혼사를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송연미는 문득 깨달았다.그 모든 결정의 이면엔 현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결국 현우의 태도가 아버지의 선택을 바꿔 놓은 것이다.“현우를 만나야겠어.”송연미는 온몸을 떨며 소은지를 바라봤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현우를 직접 만나서 물어야 했다.차가운 엔데스 가문의 셋째 사모님으로 불리던 그녀는 지금 반산월에서 감정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몇 년 전, 현우가 파리를 떠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떤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 오랜 기다림 끝에 현우가 돌아왔고 그녀는 현우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단호히 끊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우였다.“네 전화도 받지 않는데, 널 만나고 싶어 할까?”소은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 한마디가 송연미는 더 깊이 무너졌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 순간 완전히 부서지는 듯했다.그녀의 눈빛엔 절망이 가득했다.“그래도 현우를 꼭 만나야 해.”송연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엔데스 신우와의 결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결정 앞에서 그녀는 늘 무기력할 뿐이었다.그동안 엔데스 운빈 곁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는지 모른다.그리고 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하지만 지금 현우는 그녀를 차갑게
소은지는 조용히 송연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그녀의 눈빛엔 이미 무거운 결심이 내려앉아 있었다.송연정 역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 속에는 오래 참아온 비통함이 스며 있었고 그 아래엔 날 선 증오가 번득였다.“왜 엔데스 신우랑 결혼시키려는지 알아?”“왜?”‘엔데스 운빈과의 관계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또다시 다른 사람과의 혼사를 이야기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한때 송연정을 ‘넷째 사모님’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지금은 어떤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왜냐하면 네가 아직 여기에 있기 때문이야.”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 아버지는 송연정과 현우의 혼사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돌아오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거야.”“...”“넌 우리 아버지가 그냥 호의로 누굴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은지, 대체 얼마나 더 망쳐야 속이 시원하겠어?”“...”“지금 엔데스 가문 상황이 현우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르는 거야?”송연정은 마치 이 모든 일이 소은지 탓이라도 되는 듯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실제로 소은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송연정과 현우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란히 서곤 했다.소은지는 배경도 권력도 없는 외국 여자일 뿐이었다.파리 사람들은 모두 송씨 가문과 현우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고 가문 안팎의 관심은 오롯이 현우에게 쏠려 있었다.그렇다면 그녀가 이혼을 택한 건 단지 운빈과의 관계가 아니라 엔데스 가문 자체와 더 깊은 얽힘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현우와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니까.소은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잊었어? 내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유, 바로 너 때문이야.”그 말에 송연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입술이 달싹였으나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나만 없으면 가문이 너를 선택했을 것 같아? 결국 가문이 택한 건 송연정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