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렇게 간단한 미소가 아니다. 박연준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약혼을 깬다고...? 그렇다면...이유영은 정씨 가문의 딸이다. 정씨 가문에서 이유영의 신분을 밝힌 후 파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씨 가문을 찾아왔던가.그러니 만약 박연준이 파혼을 선서한다면 박연준에게 잇따르는 결과가 어떤지는 불 보듯 뻔했다.“윽, 아파!”박연준은 갑자기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 마치 아이를 대하듯, 어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이유영은 아파서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아픈 건 아네?”“당연하지!”그녀는 원망스레 박연준을 쳐다보았다.진중했던 분위기가 덕분에 조금 나아진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것도 찰나일 뿐, 박연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이유영, 네가 강이한과 날 싫어하는 건 알아. 하지만...”여기까지 얘기한 박연준은 약간 멈칫했다. 이유영은 정말 강이한을 극도로 증오하는 것만 같았다. 서주에 오자마자 강이한에게 신씨 가문이라는 선물을 줬으니 말이다.이유영은 박연준을 보면서 장난스러운 시선을 거두었다.그리고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박연준도 그런 이유영을 마주했다.“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넌 온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아무것도 모르잖아.”“강이한 옆에 있던 때처럼 말이야?”이유영이 비웃으면서 얘기했다.강이한 곁에 있던 때와 마찬가지가 아닌가.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볼 줄 모르던, 그때.“...”강이한과 이유영의 10년을 떠올린 박연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런 적은 처음이었다.예전의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무슨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든지, 결국 이유영을 서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하지만 박연준은 달랐다.차 안의 분위기는 약간 심각해졌다.정원에 도착해 차에서 내릴 때, 박연준과 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릴 때,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상한 기운을 알아차렸다.문기원은 박연준이 돌아온 것을 보고 앞으
“날 보러 오라고 해.”박연준이 힐끔 보더니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문기원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아시다시피 여진우 씨의 사람들은 여태껏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그 사람들은 명령만 들을 뿐, 감성팔이는 안 통하는 사람들이다.“...”문기원의 말에 박연준의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여진우의 사람.신씨 가문은 서주에서 교활하기로 유명한 반면, 여진우의 사람은 고집이 세기로 소문이 났다.문기원은 침묵하고 있는 박연준을 보면서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만약 여진우의 사람을 회유하려 든다면 그 일은 영원히 실패할 것이다.문기원은 어두운 표정의 박연준을 보더니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하지만 이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혹시 지금...”그 뜻을 눈치챈 박연준이 고개를 홱 들어 문기원을 쳐다보았다.어두운 불빛 아래, 위험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엄습했다. 지금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일은 이유영이 알면 안 되는 일에 가까웠다.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것은 장혜주를 막는 것이다.하지만 박연준은 그 생각을 접고 얘기했다.“됐어.”“그럼...”“우리보다 더 조급한 사람이 있을 거야.”10년 동안 이유영을 이용했으니 박연준과 이유영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게다가 여기서 장혜주를 건드려 무슨 일이라도 나면 안 된다.사람은 감정에 따라 움직이면 안 된다. 감정은 변하는 것이니 문제가 생기기 쉽다.하지만 지금은...“강이한 쪽을 얘기하시는 건가요?”“우리 주변에 있지만 쉽게 경계를 풀지 못할 거야.”박연준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맞다.그 시간 동안 박연준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강이한의 사람도 장혜주를 관찰하고 있었다. 다만 시간이 오래 지난 일을 결국 알아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네.”문기원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진중한 목소리로 박연준에게 대답했다.“장혜주가 알았으니 여진우 쪽도 알게될 겁니다.”다 여진우의 사람이니 말이다.그 말의 뜻은 분명했다.강이한은 장혜주를
강이한은 연회에서 나온 후 바로 신지수와 떨어졌다.하지만 차에 올라타자마자 이시욱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강이한은 짜증 가득해서 미간을 좁히고 넥타이를 풀었다.이유영은 정말 그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신씨 가문이라니...강이한이 두 주먹을 꽉 쥐자 관절에서 뚝 소리가 났다.“그래서 장혜주가 모든 것을 알아낸 건가?”“네. 그 해 홍산파의 애슐리를 찾아냈습니다.”이시욱이 진중하게 얘기했다.애슐리... 그녀는 강이한 곁의 중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난 후 강이한은 그녀 곁의 모든 사람을 처리하고 애슐리만 남겨두었다.그래서 그해의 일에 연관된 사람 중 살아남은 건 애슐리뿐이었다.하지만...“여진우의 사람은 정말 대단한 놈들이네.”강이한의 말투에서 짜증이 확 묻어났다.애슐리...이건 이미 몇 해나 지난 일이다. 애슐리도 이제 거의 40살이 될 것이다.전에는 장혜주가 애슐리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애슐리를 찾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박연준은 알고 있나?”강이한이 짜증을 내면서 물었다.“이유영 씨가 불쾌해하셔서 박연준은 자기 사람을 철수했습니다.”“저 구렁이 같은 게...”강이한의 짜증이 점점 쌓여갔다.작은 공간 안에서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졌다.장혜주는 정말 인정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지금 알지 말아야 할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이시욱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이한을 쳐다보았다.“그럼 이제...”“장혜주는 어디 있지?”“아직 감시 중입니다. 이유영 씨를 찾아가지 않았으니 이유영 씨는 아직 이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그래!’아무래도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다. 장혜주가 애슐리를 알아냈으니 그해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자를 불러. 내가 만나봐야겠어.”강이한이 차가운 말투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이시욱은 약간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정은 돌아왔나?”“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이시욱은 진지하게 얘기했다.이정은 이번
“이유영한테도 알 권리가 있어.”“네.”그들은 이 사건을 정말 깔끔하게 잘 처리해 놓았다. 서주에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이런 원한이 있었던 줄은 몰랐다. 게다가 서주에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여진우의 여동생이 여기에 엮이다니.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유영이 여진우 없이도 서주에서 홀로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을 만나지 말고 바로 이 정보를 이유영한테 전해.”“네, 알겠습니다.”“그리고...”거기까지 생각한 여진우가 차가운 눈을 번뜩였다.이유영이 서주에서 하는 일들을 지켜본 그는 이유영이 쉽게 휘둘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그렇기에 이유영이 이 정보를 알게 된다면 서주는 아마 뒤엎어질 것이다.“그리고 루브를 곁에 붙여줘.”“네.”루브를 이유영한테 붙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장혜주는 사건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전화를 끊은 순간, 여진우는 차가운 시선으로 밖을 내다보았다.정국진은 들어오는 순간 여진우의 눈빛을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하지만 여진우는 정국진이 서재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빠르게 표정을 감추었다.“진우야.”“네.”여진우가 대답했다.하지만 정국진의 눈에는 약간의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왜냐하면 여진우가 한 번도 그들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신씨 가문과 강이한이 같이 나타나게 된 건... 유영이 짓이니?”“네.”여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들은 정국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이유영과 강이한이 이렇게 되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하지만 강이한이 이유영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떠올리면 죽어도 용서할 수 없었다.게다가 그건 이유영이 아이를 낳을 때가 아닌가.많은 고생을 했고 많은 위기를 넘겼다.그러니 이유영이 어떻게 강이한이 자기 아이한테 그런 짓을 하는 걸 보고만 있었을까.“아이고.”정국진이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 사이의 일이
다른 한편.서주.박연준과 강이한은 이유영이 그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이시욱이 갑자기 장혜주의 별장을 찾아갔다.두 사람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감정을 숨긴 두 눈동자가 마주치자 원래도 무거웠던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어두워졌다. 분명 보기에는 여자 같았는데 남자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시욱은 그런 장헤주를 보면서 말했다.“당신이 여자라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그 말을 들은 장혜주는 약간 흠칫했다. 서주에는 장혜주가 여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아마 이유영도 모를 것이다.“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장혜주는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요.”장혜주의 말투는 매우 언짢았다.장혜주는 다름 사람이 그녀의 성별을 언급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마치 남자였다면 일을 더 잘했을 거라는 듯이 보니까 말이다.하지만 사실 서주에는 장혜주가 여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적었기에 그런 일이 적었다.“우리 도련님은 당신이 그 자료를 이유영 씨한테 전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이시욱은 장혜주의 요구대로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하.”그 말을 들은 장혜주가 작게 웃었다.그 차가운 비웃음은 아주 날카롭고 예리했다.“조건을 말해봐요.”조건을 들어보겠다는 건 그들의 뜻에 따를 거라고 예상했다는 뜻이 아닌가? 장혜주가 얘기하기도 전에 이시욱이 얘기했다. “나를 못 믿겠으면 우리 도련님과 직접 얘기해도 됩니다.”‘강이한을?”“안 만날 겁니다.”장혜주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서주에서 강이한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근래에 서주에 오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서주는 불바다가 됐을 겁니다.”장혜주가 와인을 들자 더욱 매혹적이었다.이시욱은 그런 장혜주를 보면서 눈을 흘겼다.“당신은 여진우의 사람이니 어떻게 하지 않을 겁니다.”“하지만 내가 모시는 사람과 당신이 모시는 사람이 사이가 좋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어떻게든 숨기고 싶겠지만 안 될 겁니다. 이유영 씨는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거든요.”“...”“게다가 두 사람의 반응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그 말을 들에 원래 무겁던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장혜주의 말은 사실이었다.강이한도, 박연준도. 장혜주가 이 사건에 손을 댄다는 것을 알자 바로 과한 대처를 했다.장혜주는 여진우의 사람이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았다.“결국 알게될 일입니다.”그러니 더이상 감출 필요가 없었다.게다가 이유영은 속인다고 해서 속여지는 사람도 아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의 이러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건이라니.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아무렇게나 둘러댄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장혜주 씨!”“이만 돌아가세요.”“당신...”“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네요.”“...”그 순간 이시욱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다만 장혜주는 눈을 반짝이며 위험한 기운을 내뿜었다.결국 이시욱은 몸을 일으켰다.장혜주는 그런 그를 불러서 얘기했다.“보아하니 이유영 씨를 아주 많이 생각해주시는 것 같네요.”당연한 말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유영이 이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했을 때 강이한은 다른 반응을 했을 것이다.그리고 박연준도...하지만 지금 보니 이유영이 하는 모든 행동은 두 사람을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만 같았다.이시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몸을 돌리자마자 장혜주가 이시욱을 향해서 얘기했다.“돌아가서 전해요. 나를 막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이미 제 상사는 이 일을 알고 있거든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시욱이 장혜주를 노려보았다.“이유영 씨가 서주에 왔을 때부터 강이한 씨와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겁니다.”강이한이 왜 이유영이 서주에 오지 못하도록 막았을까.그녀를 지켜주는 한편, 그녀가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될까 봐 무서웠으니까 그랬던 것이다.만약 이유영이 강이한의 곁에 있을 때 한지음이 없었다면, 이온유가 없었다면 그럼 이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행동으로만 봤을 때는 괜찮았는데... 애슐리가 서주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그래, 그들은 모두 애슐리가 서주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장혜주가 서주를 나서지 않는다면 이 사건을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그 일이 있은 후 애슐리는 분명 서주를 떠났다. 그래서 그들은 애슐리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결혼한 후 서주로 돌아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이번에 장혜주에게 걸릴 줄도 몰랐다.쿵.강이한은 화가 나서 차 문을 내리쳤다. 그의 눈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이유영... 이유영!’그는 이성을 잃었다. 강이한은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어쩌면 장혜주가 말한 것처럼 이유영이 서주에 온 후부터 모든 일은 결말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요.”“백남 별장으로 가.”백남 별장은 박연준이 사는 곳이었다....백남 별장.이유영은 눈앞의 박연준을 보면서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녀는 대충 얘기했다.“난 자고 싶어.”이유영은 정말 힘들었다.“유영아.”“응?”“왜 계속 조사하는 거야?”이유영이 눈썹을 움찔거렸다.핸드폰을 보니 아무 연락도 없이 조용했다. 그녀는 박연준을 보면서 일어났다.“가서 전화 좀 하고 올게.”“이유영!”박연준의 말투는 아까보다 더욱 진중해졌다.“...”“조사 안 하면 안 돼?”이유영은 원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박연준이 말을 들으니 더욱 짜증이 났다.그때 핸드폰이 마침 그녀의 손에서 진동했다.이유영은 박연준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전화가 울리는 순간 박연준이 흠칫 굳어버린 것을 발견했다.박연준은 바로 일어나서 이유영 곁으로 오더니 핸드폰 번호도 보지 않고 핸드폰을 빼앗아버렸다.“뭐 하는 거야!”“이 시간은 우리 둘만의 시간이야.”“돌려줘!”이유영이 화를 냈다.‘박연준 미친 거 아니야?’“집사!”박연준이 큰 소리로 집사를 부르자 집사가 나타났다.“네.”“사람을 준
박연준은 집사를 보면서 말했다.“가지. 얼른 준비해.”“박연준.”이유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원래 두통이 있었던 이유영은 머리가 더욱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일단 핸드폰을 이리 줘.”박연준의 모습을 본 이유영은 장혜주가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아까 전화가 장혜주였나...?’문기원이 떠난 후 박연준은 더욱 이상해졌다.이 사건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을 리는 없다. 장혜주는 확실히 실력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순간 이유영은 여진우가 어떤 가시밭길을 걸어서 지금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인지 알게 되었다.여진우 곁의 사람들을 보면 다 알 수 있었다.“알프산에서 돌아오면 줄게.”“너...”이유영은 화가 나서 박연준의 말을 듣고 완전히 무너져버렸다.그녀의 핸드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결국 박연준은 빠르게 이유영을 데리고 헬리콥터에 올라탔다.지면의 불빛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유영이 말했다.“이렇게 하면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아?”그들이 이렇게 나올수록 이유영은 이 사건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이 사건이 정씨 가문과 연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박연준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난 널 막고 싶지 않아.”“하.”이유영이 차갑게 웃었다.지금 이 상황을 보면서도 막지 않는다고? 어느새 주변은 새카맣게 어두워졌다. 이유영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얼마나 가 있을 건데.”“유영아.”“알프산! 얼마나 가 있을 거냐고.”서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박연준은 이유영을 데리고 알프산에 가서 여행을 한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한 달, 어때?”‘한 달?’그건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이유영은 그를 바라보면서 비웃었다.“정말 나랑 알프산에서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을 것 같아?”“가능한지는 시도해보면 알지.”“...”이제는 이유영이 점점 화가 날 정도였다.이유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박연준이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얼굴을 마
강이한은 이유영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에 닿았다.이유영이 물었다.“대체 어디 가는 거야?”“염 선생님이 드디어 진료를 허락하셨어.”지난 스무날 동안.아무리 이유영이 강이한을 거부하고 밀어내도, 강이한은 단 한 순간도 이유영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한결같이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서주의 상황이 어떨지 알 수 없었지만, 이유영은 혼란에 휩싸였겠다고 짐작했다.그럼에도 강이한은 이곳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차 안에서.이유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한다고 내가 널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감동이라도 했냐고? 전혀,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강이한은 이 험난한 순간에도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유영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이유영의 말에 옆자리의 강이한이 잠시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망설임 없이 이유영을 품에 끌어안으며 부드럽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용서는 필요 없어. 난 네가 낫기만 하면 돼.”용서?강이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은 평생 그를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랐다.그렇다.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었다.하지만 괜찮았다.강이한이 바라는 것은 오직 이유영이 건강을 되찾는 것뿐이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강이한은 마치 지난 생에서 스친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고집스러웠다.이유영은 그때도 어둠 속에서 자신을 적응시키려 애썼다. 강이한은 이런 이유영을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아무리 누군가가 도우려 해도 이유영은 완강히 거부했다. 우지와 우현이 곁을 지켰음에도 이유영은 그 누구의 손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의 곁에는 강이한 밖에 없었고 이유영은 결국 강이한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어둠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강이한에게 기대지 않기 위해 혼자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그러나 이번 생은 달랐다. 이유영 곁엔 가족도 친구도 많았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어둠 속에 익숙해지
아직도 협박할 수 있냐고?송연미가 말한 것들이 정말 소은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는 걸까? 그렇다면 이 여자가 두려워하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송연미는 소은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꼿꼿하게 걸어가고 있는 소은지의 뒷모습은 세상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태도가 느껴졌다.“여섯째 도련님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여섯째 도련님이 날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건, 넌 네가 원하는 걸 평생 이룰 수 없다는 거야.”차분하게 말을 마친 소은지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소은지의 발걸음은 가볍지도, 급하지도 않았다.그 발걸음에서는 오직 평온함만이 느껴졌다. 지금의 소은지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두려움도 없는 사람 같았다.그런 소은지를 보며, 송연미는 소은지가 무엇을 두려워할 수 있을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송연미는 오랫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밖으로 나간 소은지에게 도우미가 한 마리의 주황색 고양이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는 더욱 그랬다.소은지의 옆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이런 상황에서도 고양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을 여유가 있다니. 이 여자는 정말 두려움이란 감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소은지는 품에 안긴 작은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요?”조그맣고 여린 새끼 고양이를 바라보며 소은지가 말했다.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일곱째 도련님께서 길에서 발견하셨다고 합니다. 사모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 보내셨다고요.”길에서 발견했다니? 현우의 따뜻한 마음씨에 소은지는 미소를 지었다..보통 남자라면 이런 행동을 할 리 없는데, 현우는 달랐다. 현우의 이런 모습은 귀엽다 못해 믿음직스러웠다. 현우는 믿음직스럽고 의지할 수 있는 남자였다.소은지는 고양이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작은 고양이는 소은지의 품 안에서 몸을 비비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오씨 아줌마.”“네, 사모님
눈앞에서 떨고 있는 송연미를 바라보며 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이런 무의미한 일은 이제 그만둬.”애써 더 많은 노력을 쏟을수록 결국 더 깊은 실망만 남는 법이다. 그리고 그 실망의 원인을 현우에게 돌릴 뿐이다.소은지는 이런 광경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다.결국, 혼자만의 집착일 뿐이었다.송연미의 분노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여섯째 도련님이지?”“...”송연미의 목소리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억압이 깃들어 있었다.“하고 싶은 말이 뭔데?”소은지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너와 여섯째 도련님의 일, 아무도 모를 것 같아? 만약 그분이 알게 된다면...”송연미는 말을 멈추고 소은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경고와 위협이 담겨 있었다.소은지는 그 속셈을 간파한 듯 가볍게 웃었다.“날 협박하겠다는 거야?”“그분이 알게 된다면, 현우는 반드시 우리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야 할 거야. 그때도 현우가 널 선택할 것 같아?”“그럼 해보던가.”송연미의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소은지는 앞에 앉아 있는 송연미를 바라보며 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소은지의 태도는 단호했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소은지의 모습에 송연미의 마음은 한층 더 흔들렸다.그랬다.이 상황에서도 송연미는 여전히 소은지와 여섯째 도련님 사이의 일이 자신의 유리한 카드라고 믿고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일이 끝나기 전인데도 말이다.이 카드는 소은지에게도, 현우에게도 중요한 변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송연미는 비열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애썼다. 단지 소은지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 주길 바랐을 뿐이다.하지만... 소은지는 이 모든 상황에서도 여전히 냉정하고 무심했다. 소은지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그렇다.송연미가 소은지에게 느낀 감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여자는 마치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그리고 그 점이 송연미의 마음을 더 초조하게 했다.“해볼래?”소은지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
소은지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는 듯했다.겉으론 무심해 보였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내 생각엔, 현우가 이미 네 아버지의 지원을 거절한 것 같은데?”송연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소은지가 말을 이어갔다.소은지의 말투는 비아냥으로 가득 찼고 송연미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소은지는 정곡을 찔렀다. 정말 마녀 같은 여자였다.바로 그 순간, 송연미는 현우가 이렇게 오랜 세월 한곳에 머물러 있다가 왜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는지 깨달았다.바로 이 여자... 소은지 때문이었다.소은지 때문에 최근 들어 현우가 여러 일에 뛰어든 것이었다. 예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소은지가 등장한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현우는 송연미가 엔데스 운빈과 결혼한 이후로 파리를 떠났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그간 엔데스 가문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현우는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돌아왔고 그것도 이 여자 때문이라니?송연미는 소은지를 응시했다.송연미의 눈빛은 마치 소은지를 꿰뚫으려는 듯한 날카로움으로 가득했다.소은지는 송연미의 반응을 보며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한 말이 맞는 모양이네.”“만족스러워?”소은지의 태도에 송연미는 결국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송연미는 수년간 엔데스 가문에서 겪은 일들로 인해 이미 모든 인내심을 잃어버렸다.모든 것을 잃은 송연미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지금 소은지의 태도는 송연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현우의 곁에 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다.모든 것이 끝나야 할 타이밍이었다. 송연미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리며 긴 시간을 보냈고 이제야 겨우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하지만 현우가 돌아왔을 때, 현우의 곁에는 소은지가 있었다. 소은지는 그렇게 이곳 반산월에 머물고 있었다.소은지는 반산월이 가진 의미를 알 리 없었다. 그곳은 송연미와 현우가 함께 설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결혼하면
무언가 생각난 듯, 송연미는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송연미의 눈빛은 단순히 차가운 것을 넘어 얼음처럼 날카로웠다.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엔데스 가문이 어떤 상황인지 너도 알고 있겠지?”“...”“우리 아버지의 지지가 현우에게 굉장히 중요해.”송연미가 엔데스 운빈과 결혼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송연미를 차지했기 때문이다.결혼 후, 엔데스 운빈이 아무리 송연미를 존중했어도, 송연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수년 동안, 송연미는 엔데스 운빈의 곁을 떠날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최근에야 드디어 아버지를 설득해 아버지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 결과가 송연미를 이렇게까지 괴롭게 만들 줄은 몰랐다.“소은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을 거라고 믿어.”소은지가 침묵하자, 송연미는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껏 방법을 찾지 못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왜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걸까?그 이유는 단 하나, 소은지 때문이었다.소은지가 느낀 현우의 변화를 송연미도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둘이 느낀 대상은 완전히 달랐다. 송연미의 눈에는 엔데스 현우의 변화가 모두 소은지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그렇기에 송연미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이대로 두면 상황은 더욱 통제 불가능한 방향으로 치달을 것이었다.송연미는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소은지에게 단호하게 나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소은지는 그런 송연미를 비웃으며 조소 섞인 미소를 지었다.소은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네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면 어떡할 건데?”소은지는 자신이 하는 말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태연한 척하는 게 분명했다.소은지는 송연미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송연미가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 걸까?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그 이유는 명백했다. 송연미는 이미 상황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엔데스 현우도 결
현우는 소은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유영 씨에 대한 소식, 알고 있나요?”“유영이 말인가요?”“네.”“며칠 전에 백산 별장에 갔었는데, 거기서 들은 말로는 유영이의 두 눈이 이제 거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소은지의 마음은 조여드는 듯한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예전에 정씨 가문에 있을 때, 임소미가 얼마나 이유영의 시력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그렇기에 소은지마저 이 문제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력을 잃는다는 건 과연 어떤 느낌일까? 게다가 강이한에게 끌려간 상태라서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이유영에서 늘 문제가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이 말을 들은 순간, 옆에 있던 현우의 몸이 떨렸다.소은지는 현우의 변화를 감지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엔데스 현우는 떠났다. 현우는 늘 그렇듯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아무리 바빠도 엔데스 명우가 이곳에 올 때마다 현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돌아왔다는 점이었다.소은지가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위험에 처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현우는 계약 조건에 따라 소은지를 철저히 보호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소은지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소은지를 철저히 보호했다.소은지는 그에게 필요한 단서를 제공했고 현우도 소은지에게 필요한 보호를 제공했다.현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송연미가 찾아왔다.송연미와 소은지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 갔다.카페에는 둘만 남아 있었다. 송연미는 앞에 놓인 커피잔을 손에 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엔데스 운빈과 어제 이혼했어.”소은지의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잠시 멈췄다.놀란 얼굴로 송연미를 바라보았고 눈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스쳤다.송연미는 그런 소은지를 바라보며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평온함과 해방감이 어렴풋이 비쳤다.하지만 그
긴장감이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 두 사람은 차갑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고 소은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소은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소은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하시에서도 오직 이유영만이 유일한 존재였을 뿐,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 이유영이 소은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강이한이 나타난 후로 이유영의 삶은 늘 혼란스러웠다.대부분의 시간 동안, 소은지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유영을 붙잡아주며 지탱해야 했다.파리에 온 이후, 소은지의 삶은 엔데스 명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생각을 더욱 하지 않게 되었다.그런데 지금...“흥! 현우야, 앞으로 네가 얼마나 더 보호할 수 있을지 지켜볼게.”엔데스 명우는 비웃듯 말하고는 매섭게 돌아섰다.그의 등 뒤로는 차가운 기운이 스며 나왔다.현우는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방금 전에 있었던 긴장된 상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 소리에 소은지는 정신이 번쩍 들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뭐가 그렇게 웃겨요?”“당신도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게 웃겼어요.”두려움? 그렇다.조금 전, 엔데스 명우 앞에서 어떻게든 힘을 짜내 맞서 싸웠지만,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그 순간, 소은지는 진심으로 두려웠다.그리고 엔데스 명우가 떠난 뒤에도 소은지의 등에선 여전히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당신도 알잖아요. 당신 형은 완전히 미친 사람이란 걸!”소은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미친 사람이죠.”소은지가 엔데스 명우 곁에 있을 때 어떤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었는지, 여러 번 도망쳤다가 결국 어떻게 붙잡혔는지,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현우를 만난 뒤에야 소은지는 반격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는 모든 것을
한껏 완화된 긴장감은 소은지의 한마디로 다시 불이 붙었다.소은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조롱과도 같았고 어딘가 날카로운 독기를 풍겼다.소은지는 분노로 붉어진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핏빛으로 물든 그의 눈은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생생히 드러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담담히 말했다.“병이 그렇게 심각했다면 죽음도 끔찍했겠네.”소은지의 말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욱 후벼팠다.설유나는 죽기 직전까지 엔데스 명우에게 애원했다. 설유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온갖 수단과 계략으로 쟁취한 모든 것을 이렇게 허망하게 잃을 순 없었다.하지만 설유나가 신처럼 여기던 엔데스 명우조차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선 누구도 설유나를 구할 수 없었다.그렇게 설유나는 엔데스 명우의 눈앞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고 그 절망감은 지금까지도 엔데스 명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그는 설유나를 구할 방법이 있었지만, 결국 구하지 못한 이유는... 소은지 때문이었다.“이게 진짜...”남자는 이를 악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소은지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말했다.“설유나는 시작일 뿐이야.”소은지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앞으로도 엔데스 명우에게 닥칠 일이 더 많을 텐데, 벌써 이렇게 화를 내면 나중에는 어쩌려고?소은지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도발하듯 엔데스 명우를 바라봤다.분위기는 폭발 직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조여들었다.엔데스 현우가 설유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형제 관계가 아무리 냉랭해도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엔데스 현우도 예외는 아니었다.역시나, 엔데스 현우가 이곳에 나타났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엔데스 현우는 한걸음에 다가가 엔데스 명우의 손에서 소은지를 빼내 품에 안았다.엔데스 현우가 소은지를 감싸는 모습을 보자 엔데스 명우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너,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형은 세상이 이미 변했다는 걸 잊었나 보네.”엔데스 현우의 목소리
소은지의 냉정한 태도와 엔데스 명우의 거칠고 격렬한 분노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소은지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고 무관심해 보였다.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온 엔데스 명우조차도 지금 소은지가 풍기는 차가움에 섬뜩해질 정도였다.“정말 냉정한 사람이네.”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으며 목소리에는 위험이 가득했다.소은지는 차분히 답했다.“미안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선 공감이 잘 안돼.”일이 직접 자신의 삶에 닥치지 않는 한,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이건 냉정함이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은지는 설선비, 설유나와 특별한 관계도 없었다.그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해도 결코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러니 설선비와 설유나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소은지는 그저 냉정했을 뿐이다.더군다나,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설선비와 설유나가 겪은 일에 어떠한 연민이나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그 순간, 갑자기 목덜미에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명우의 손은 마치 소은지의 목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조였다.분명한 건,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죽음이 모두 소은지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다.설선비는 소은지의 고소로 궁지에 몰려 죽게 된 것이었고 설유나는 소은지의 외면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소은지, 너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어!”남자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잔혹했다.팍!뺨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공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는 순간, 소은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소은지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기운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은지에게는 조금의 동요도, 당황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숨을 삼켰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엔데스 명우의 사람들에게 통제당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