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익은 목소리는 소만리가 거부감을 느꼈던 목소리였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복도의 밝은 불빛에 육정의 추악하고 옹졸한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육정은 술을 마셨다. 그는 원래 옆모습만 보고 좀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소만리의 앞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발이 걸려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소만리는 담담하게 방 앞에 서서 육정의 창백해진 얼굴과 뒷걸음질 치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저기요, 왜 그러세요?" 소만리가 미심쩍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부축해 드릴까요?"육정은 소만리를 보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소…소만리! 오지 마! 오지 마?흥.소만리는 더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왜 이렇게 무서워하세요? 제가 무슨 귀신도 아니고... 왜 그러세요…""귀신! 너 귀신이야! 소만리 너 귀신이야! 오지 마! 절대 나 찾아오지 마, 나는 기껏해야 거짓말 좀 했을 뿐이야, 나는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내가 너를 죽인 것도 아니잖아, 소만영 찾아가! 나 찾아오지 말고!”육정은 소만리에게 소리를 지르고 허둥지둥 도망쳤다. 소만리는 육정이 허겁지겁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며 우스워 콧방귀를 뀌었다. 소만리는 평생 양심에 찔린 짓을 하지 않았지만 괴롭힘을 당해 몸과 마음이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해치고 괴롭혔던 사람들을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유흥업소에서 술 마시며 춤추고 놀고 있었다.방금 전 육정의 겁에 질린 반응에 소만리는 미소를 지으며 머릿속에는 복수를 계획했다. 소만리는 마침내 앞에 있는 방 문을 열었다. 방 안의 불빛은 로비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복도처럼 밝지도 않았다. 소만리가 들어서자 기모진이 소파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흰 셔츠 옷깃이 살짝 풀어져 그의 섹시한 쇄골이 보일 듯 말 듯했다. 기모진은 잠든 것 같았다. 샹들리에의 부드러운 불빛이 기모진의 멋있는 얼굴을 밝혔지만 그는 여전히 지쳐 보였다.소만리는 기모진이 지친 표정
소만리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기모진이 손을 놓을 주지 않았다. "기 대표님, 손 놓아주세요.""다시는 이 손 놓지 않을 거야."뭐? 기모진의 갑작스러운 말에 소만리는 의아해했다.소만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기모진을 바라봤다. 그때 갑자기 기모진이 그녀를 자신의 품속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하이힐을 신고 있던 소만리는 기모진이 갑자기 잡아당기자 중심을 잃고 그의 품으로 넘어졌다. 이 순간, 그녀는 익숙한 체취가 느껴졌다.기모진은 소만리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남녀 간의 가장 친밀한 접촉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소만리가 감정을 추스리고 일어서려고 하자 기모진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기 대표님 뭐하시는 거예요? "소유리는 불편해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기모진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허리에 얹혀 있던 기모진의 손이 갑자기 그녀의 등으로 옮겨졌다. 기모진이 힘을 주자 소만리는 그대로 그에게 향했다.약간 취기 오른 멋있는 기모진의 얼굴이 소만리의 눈앞에 다가와 그의 호흡이 소만리와 어우러졌다. 코끝에서 코끝까지의 거리에 소만리는 깜짝 놀랐다.소만리는 기모진과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기모진은 정말로 취한 듯했다. 술에 취해 몽롱한 눈으로 넋을 잃은 듯 소만리를 바라봤다.기모진은 따뜻한 손을 뻗어 소만리의 뺨을 만졌다. 그의 눈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는 듯했다. 소만리는 기모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런 가까운 거리와 자세를 유지하고 싶지도 않았다.소만리는 손을 뿌리치고 불쾌한 듯 기모진을 밀쳤다.“취하셨네요!”소만리가 가방을 챙겨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몇 걸음 채 안 갔을 때 기모진이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토록 바랐던 따뜻함이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꼭 감싸 안자 벗어날 수가 없었다.“만리야.”기모진은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렸다. 목이 잠긴 그의 목소리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소만리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 이 순간을 의심
소만영은 기모진 앞에서 가냘프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잊은 채 미치광이처럼 소만리에게 돌진했다.소만영이 와인병을 소만리의 얼굴에 내리치려던 순간, 기모진이 손을 뻗어 소만영의 행동을 제지했다.기모진은 소만리를 그의 뒤로 보호했다. 방금 전까지 술에 취한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멀쩡해져 소만영을 노려봤다. "뭐하는 거야?"소만영은 기무진이 소만리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소만영은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눈물을 짜내며 약하게 보여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진아, 정말 때리려고 한 건 아니었어, 이 여자가 계속 네 옆에 붙어 있는 게 보기 싫었을 뿐이야."소만영을 술병을 내려놓으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모진아, 저 여자 네 관심 끌려고 소만리랑 똑같이 성형한 거 모르겠어? 모진아, 이런 여자한테 현혹되지 마.”기모진은 성형이라는 말에 흠잡을 곳 없는 소만리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이를 본 소만리가 웃으며 말했다. "당당한 모가 집안 아가씨, 미래의 기가 며느님이 이렇게 무책임하게 말할 수 있어요? 제 얼굴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얼굴인데, 무슨 근거로 제가 성형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성형을 해도 죽은 사람 얼굴과 똑같이 성형하지 않아요!" ‘죽은 사람’이라는 말이 기모진의 심장을 찌른다.기모진은 불과 몇 분 만에 술이 깨는 것 같았다. 이 순간 엄습한 아픔은 그를 가장 사랑했던 소만리가 3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소만리가 기모진의 곁을 스쳐 지나 소만영에게 다가갔다."소만영씨, 여기서 화 낼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왜 당신 약혼자가 술 취해서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약혼녀인 당신이 아닌 나를 찾았는지 생각해봐요. "너....""기 대표님, 약혼녀가 질투나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더 이상 저 찾아오지 마세요.” 소만리는 말을 끝내고 곧바로 가버렸다. 소만영은 이를 갈며 소만리의 뒷모습을 째려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기모진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그의 팔짱을 꼈다.
기란군은 소만영의 웃는 모습에 가늘고 큰 눈을 급히 피했다.“아빠한테 사인받으러 왔어요.”소만영은 기란군이 들고 있던 교과서를 보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해줄까?”기란군은 교과서를 움켜쥐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기모진을 바라보았다."엄마한테 해달라고 하고 어서 자.” 기모진이 말을 마치고 방문을 닫았다. 닫힌 방문을 바라보던 기란군의 맑고 고운 두 눈에는 어둠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기란군은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기모진에게 거절당해 문밖에 남겨진 소만영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소만영은 불만을 가득 품고 기란군 방으로 향했다. 그때 마침 기란군이 문을 닫으려 하자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 방문을 발로 찼다. 기란군은 소만영을 바라보며 엄마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끝내 부르지 않았다. "란군아, 왜 그래? 난 네 엄마야, 어쩜 엄마를 볼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니?" 소만영이 활짝 웃으며 기란군에게 다가가자 가란군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위선자의 가면을 벗은 악마가 흉측한 얼굴을 드러낸 것 같았다. "너는 왜 하필 그때 나타난 거야? 네가 내 일을 망칠 줄 진작에 알았어! 애초에 쓸모없을 줄 알았으면 널 안 낳았을 텐데, 보면 볼수록 정말 밉다.”소만영은 거침없이 욕을 퍼부었다.기란군은 그녀를 피해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소만영은 화장실 문 앞에까지 쫓아와 계속 욕을 했다. 소만영은 기란군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매우 혐오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소만리를 싫어했던 것처럼!예전에 소만영은 기란군 덕분에 얻은 것도 많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란군의 눈매가 기모진과 똑같다고 했지만, 소만영은 기란군을 보면 볼수록 소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기란군은 소만리와 기모진의 친자식이기 때문에, 아들의 모습이 친어머니와 닮은 것은 당연하다!소만영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뒤에서 기란군을 괴롭혔다. 때문에 올해 5살이 된 기란군은 또래아이처럼 활발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기란군은 구석
"만리 누나 맞아요?"기란군은 소만리를 자세히 바라보며 마침내 물었다.소만리는 잠시 넋을 잃고 환하게 웃었다.“꼬마야 안녕, 난 염염이 엄마야, 내 이름이 궁금하면 알려줄게. 내 이름은 천미랍이라고 해"소만리는 미소를 지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는 기란군이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의 작고 뽀얀 얼굴은 기모진의 좋은 유전자를 완벽하게 이어받아 특히 예뻤다.그러나 기란군의 맑고 까만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깊은 근심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착각일 것이다. 이렇게 작은 어린아이에게 걱정거리가 있을 리 없다. 3년 전 소만영은 소만리를 음모하기 하기 위해 기란군 얼굴에 칼자국을 냈었다. 그때 기란군은 피를 흘리고 울부짖으며 심하게 아파했다. 소만리는 흉터 없이 매끈한 기란군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칼자국 흉터가 없었다. "엄마! 엄마! 제가 엄마한테 말했던 란군 오빠예요, 우리 이제 친구예요!”염염이의 달콤한 목소리는 마치 솜털처럼 부드럽게 소만리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염염이가 말한 란군이 오빠였구나"소만리는 염염이의 말에 감탄해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염염이와 가란군이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은 원치 않았다.기란군이 싫어서가 아니라 어색한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염염아, 우리 이제 집에 가야 해, 란군이 오빠한테 인사해.”“네.” 염염이는 통통한 작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란군 오빠, 우리 내일 만나자, 안녕~"소만리도 기란군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꼬마야, 안녕.”그녀는 인사를 끝내고 한손으로는 염염이를 안고 한손으로는 우산을 쓰고 갔다.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않았을 때 소만리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빗줄기가 갑자기 세지며 늦여름의 바람이 약간 서늘했다. 소만리가 뒤돌아보니 기란군이 입구에서 서있었다. 기란군은 허약하고 작은 몸으로 책가방을 메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소만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소만리와 기란
"란군 오빠, 1+1은 왜 2야?”"왜 사과 두 개에 바나나 하나를 더하면 3이 될까?""란군 오빠, 버섯 좋아해?"염염이는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기란군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기란군은 고작 다섯 살이지만 성숙해 보였다. 기란군은 염염이의 질문 하나하나에 모두 대답해 줬다. 염염이가 이해하지 못하면 귀찮아하지 않고 다시 설명해 줬다. 그전까지 소만리는 사실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염염이와 기란군이 가깝게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광경을 보고 그녀는 기란군이 마치 철든 오빠같이 여동생을 사랑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장면은 너무 따뜻하고 그녀의 마음을 녹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이내 웃음기가 사라졌다.소만리의 첫째 아이가 죽지 않았다면 염염이를 사랑해 주는 언니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따뜻한 장면도 있었을 것이다."란군 오빠, 숨바꼭질 할까?" 염염이는 기란군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기란군은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염염이의 손을 잡았다. "응, 놀아줄게."기란군이 앳된 목소리로 말했지만 소만리가 듣기에는 남달랐다. 그리고 소만리는 기란군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기란군은 웃지 않았다.기란군은 집에 와서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보통 아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소만리가 완성된 케이크와 신선한 과일주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아이들을 데리러 가려 할 때 휴대폰이 울렸다.소만리는 발신자표시를 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미랍씨 저한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무슨 일로 먼저 전화를 하셨죠?” 기모진은 낮은 목소리로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기대표님, 저한테 전화하기 전에, 혹시 아들 담임선생님께서 전화 몇 통이나 하셨는지 못 보셨어요? 일도 중요하지만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가장이 해야 할 일이예요."소만리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의 기모진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모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아들 거기 있어요?" 주소 보내주세요, 제가 지금 데리러 갈게요."어차피 기
소만리는 기란군이 갑자기 자신의 품에 안겨 엄마라고 부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소만리는 기란군이 매우 불안하며 안정감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란군은 소만리의 품에 꼭 기대어 두 손을 꼭 잡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해야 무섭지 않은 것 같았다. 소만리는 불안해하는 기란군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마음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오랜 만에 느끼는 뼈아픈 아픔이 그녀의 가슴을 또 한 번 파고들었다.소만리는 기란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란군아 무서워하지 마."소만리가 기란군을 다독이자 상태가 점점 좋아지며 덜 긴장하고, 불안해하지 않았다. “엄마, 란군 오빠 왜 그래요?염염이는 살며시 다가와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괜찮아. 걱정하지 마, 엄마가 간식 만들었으니까 가서 같이 먹자." 소만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염염이가 기뻐하며 기란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란군 오빠, 엄마가 만든 간식 먹으러 가자, 우리 엄마가 만든 케이크 엄청 맛있어!”정적이 흐르고, 기란군은 비로소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듯했다.기란군은 가늘고 긴 큰 눈으로 소만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기란군은 눈을 깜빡이며 잘생긴 얼굴이 붉어지며 마치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죄송합니다." 기란군이 갑자기 사과했다.소만리는 기란군의 사과가 매우 성숙하게 들렸다.소만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기란군의 볼을 쓰다듬었다. “란군아, 네가 왜 사과를 해,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소만리의 부드럽고 상냥하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기란군의 눈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온화하고 다정한 엄마를 가진 염염이가 부러웠다.기란군의 컨디션이 회복되자 소만리도 왠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그녀가 만든 케이크를 먹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녀는 왠지 모르게 기뻤다. 특히 기란군이 염염이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다정하게 닦아주는 모습을 보니 행복했다. 그러나 소만리는 죽은 아이가 생각나
소만리는 이렇게 어린 기란군이 과거의 자신을 신뢰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이제부터 미랍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기란군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소만리를 바라봤다.소만리는 방금 기란군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른 것이 생각나 어리둥절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소만리의 대답에 기란군의 얼굴에 드디어 함박웃음이 번졌다.소만리는 3년 전이나 후나 지금까지 기란군이 웃는 것을 처음 봤다. 기란군의 웃는 모습은 매우 빛나고 사랑스러웠다. 입술 옆에는 염염이와 똑같은 보조개가 보일 듯 말 듯했다. 그 순진한 웃는 얼굴을 보고 소만리의 마음도 왠지 훈훈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모진이 도착했다.기모진이 집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소만리가 그를 문밖에서 막았다."기대표님, 다음부터는 귀한 아들을 잘 보살펴 주세요. 어쨌든 당신과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랑 낳은 아들이잖아요." 소만리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녀는 기란군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란군아, 아빠 오셨으니까 집에 가자, 다음에 또 놀러 와.”"네." 기란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기모진의 곁으로 다가갔다.하지만 기란군도 기모진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두 부자는 마치 낯선 사람처럼 거리감 있어 보였다. “미랍씨, 고마워요.” 기모진은 감사 인사를 하고 무언가 더 말하려고 할 때 전화벨 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소만영에게 온 전화였다. 기모진은 잠시 머뭇거린 끝에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소만영이 통곡하며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진아! 방금 란군이 데리러 유치원에 갔는데, 선생님이 천미랍이 우리 란군이 데려갔데!” 천미랍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거야? 왜 란군이를 납치하려고 하는 거야? 모진아, 우리 이제 어떻게 해? 천미랍이 분명 란군이 해칠 거야, 무서워! 모진아..."소만영의 목소리가 너무 과장돼서 소만리는 안들을 수가 없었다. 소만리는 기모진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입을 열려고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