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모진이 잠들어 있었던 게 아냐? 자는 척했던 거야?그럼 방금 그녀가 한 말을 다 들었다는 건가?소만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 순간 기모진이 잠시 뒤척였을 뿐, 잠든 척하는 것도 아니었고 방금 그녀가 한 속삭이던 말을 들은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소만리는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뒷일이 두렵기도 했다. 실은 당신이 진실을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하지만 당신이 알고 나면 우리의 딸 여온이가 위험해질 거예요.소만리는 천천히 기모진의 품에서 벗어나 남자를 겨우겨우 침대 위로 끌어당겨 눕혔다.그러자 소만리도 피로가 몰려들었고 기모진 옆에서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평온하고 온화하게 잠든 그의 얼굴을 보며 소만리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아랫배에 갖다 대었다. “기모진, 그때 내가 기란군을 가졌을 때 당신이 나를 믿어줬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알아요? 내 배를 만지고 기란군의 존재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바랬는지. 그런데 당신은 날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날 무시하고 욕했어요. 지금은 내 뱃속에 있는 우리의 아이를 느끼셨나요?”그녀의 젖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번엔 당신이 우리 아이가 태어나는 걸 직접 지켜볼 수 있기를요.”소만리는 부푼 기대를 안으며 기모진의 곁에서 조용히 잠이 들었다...날이 밝았다.소만리가 깨어났고 침대 위에는 그녀 혼자뿐이라는 걸 알았다.기모진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일어나 씻고 보니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육경이 아침을 들고 절뚝거리며 오는 것이 보였다. “부인 일어나셨군요. 마침 잘 됐네요. 아침부터 우선 드십시오.”“기모진은요?’“사장님은 일이 있어 잠시 나가셨습니다. 아마 곧 돌아올 거예요.”“혹시 기묵비를 찾아간 건 아니죠? 도
”네.”육경이 발꿈치를 절뚝거리며 말했다.소만리는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혼자 남겨졌다.그러나 그녀는 아침을 먹으러 가지 않고 살금살금 2층으로 따라 걸어갔다. 막 계단참에 올라섰을 때 침실에서 새어 나오는 기모진의 목소리가 들렸다.“현재로선 증거가 부족해. 한 번 더 창고에 가서 꼭 증거를 찾아내고 말 거야.”“사장님, 너무 위험합니다. 차라리 경도로 돌아가 다시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우리가 지금 경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기모진은 기묵비가 오래전부터 이미 마음을 먹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제 육경에게 총을 겨눈 그 한 발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기묵비는 분명 일찌감치 암암리에 그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기묵비는 소만리와 기모진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조차 이미 알고 있었다.“사장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이런 몸이라 도와드릴 방법이 없습니다.”“네가 여기서 치료하고 있으니 기묵비가 급하게 어떻게 하진 못할 거야. 그의 총구가 겨누고 있는 건 결국 나거든.”기모진의 눈빛은 또렷했고 마지막 결정을 내린 듯 말했다.“오늘 저녁 7시 전에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네가 소만리를 데리고 경도로 돌아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그녀가 기묵비를 찾아가게 해선 안돼.”“알겠습니다.”육경이 대답하고 막 돌아서려는데 소만리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기모진은 육경이 멈칫하는 것을 보고 뒤돌아보니 소만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방으로 돌아가 좀 쉬어.”그는 육경을 보내고 소만리를 향해 말했다.“벌써 다 먹었어?”소만리는 기모진의 물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기모진, 함부로 굴지 마세요. 기묵비를 찾아가서 귀찮게 하지 말라구요. 당신의 전처로서 해 주는 마지막 충고예요.”“허어.”기모진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소만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작은 얼굴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소만리, 당신 지금 나 걱정하는 거야
기묵비의 얼굴에 비친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며 기모진은 담담하게 말했다.“나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이미 받은 거 같은데.”이곳에 오기 전에 사랑하는 여자와 작별 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그래?”기묵비의 눈에 비웃음이 한껏 드리워졌다. “과연 소만리에 대한 사랑이 깊은가 보군. 하지만 이거 어쩐다. 안타깝지만 소만리는 이미 내 사람인 걸.”기묵비의 도발에 기모진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결코 소만리가 기묵비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더구나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의 고통스런 모습은 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왜? 화가 나는 모양이지? 그때 소만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자신을 탓해야지 누굴 탓해.”기묵비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권총을 집어 들며 말했다. 천천히 탄창을 갈아 끼우고 장전했다. “그 해 우리 부모님은 당신의 그 잘난 할아버지 때문에 돌아가셨지. 나는 고아가 되었고 말이야.”기묵비가 말을 이었다.“내가 가장 연약하고 보호가 필요할 때 네 할아버지는 날 F국에 던져놓고 말했지. 여기에서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내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나를 멸망시키고 싶었던 거지. 가장 좋은 재산들을 장자인 너에게 주려고.”작심한 듯 기묵비의 말은 길어졌다.“나 혼자 이렇게 여러 해 동안 힘들게 겨우겨우 세운 사업을 결코 망하게 하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 우리 기 씨 집안의 모든 것을 원래대로 다 돌려받을 거야. 그리고 소만리도 내 여자야.”기묵비는 말을 마치고 천천히 권총을 움켜쥐고 기모진의 심장을 겨누었다.두 사람은 5센티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어서 총알이 발사되면 기모진의 심장을 관통하는 데는 0.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기모진은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내게 남은 날이 단 하루뿐이라 해도, 기 씨 집안의 사업을 절대로 당신 같은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 그리고 절대로 소만리는 당신 곁에 돌아오지 않을 거야.”기묵비는 도
”기모진,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기묵비의 웃음에 가득 찬 승리의 기운이 번졌다. 그러나 기모진은 여전히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말했다.“한 번 해 보자고. 나와 당신, 누구의 손이 빠른지.”기모진의 말을 들은 기묵비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갔다. 기묵비는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 위험에 빠트리지 않을 것이다. 기모진과 대치하고 있는 지금은 더욱더 진지했다. 기모진은 기묵비가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을 포착하고 기묵비가 들고 있던 권총을 얼른 떨어뜨렸다. 권총이 떨어지는 틈을 타 기모진은 재빨리 기묵비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었다.갑자기 형세가 이렇게 바뀌자 기묵비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경호원을 모두 내보내.”기모진이 말했다. 기묵비가 얼음장 같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나가.”“사장님, 저...”“꺼져.”기묵비가 짜증 섞인 말투로 내쫓았다. 그 경호원들은 감히 더 대꾸하지 못하고 모두 밖으로 물러났다. 기모진이 정말 함부로 굴면 그들이 모두 함께 총을 쏠 거라고 기묵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기묵비는 기모진이 그 많은 총알을 피할 수 없으리라 믿었다.이제 창고 안에는 기모진과 기묵비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숙부님 놀라셨습니까? 기세가 내 쪽으로 기울 줄은 몰랐겠죠?”“흥.”기묵비는 냉소를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네가 감히 나를 해친다면 너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야. 이왕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나도 더 이상 물러설 생각이 없어.”기모진은 태연한 듯 말했으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고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위아래에서 매서운 한기가 온몸을 휘감아 도는 느낌이었다.“기묵비, 당신 말이 맞아. 우리 사이는 확실히 결단을 내려다 돼. 1년 동안 당신은 할아버지를 거의 식물인간으로 만들었고, 나에 대한 소만리의 증오를 이용해 기 씨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켰어. 이 빚은 내가 당신에게 꼭 다 갚아주겠어. 소만리와 내가 부부였을 때 당신은
방아쇠에 닿아 있는 기모진의 손가락이 점점 굳어졌다.눈앞에 있는 소만리의 끈질긴 눈빛이 마치 얼어붙은 강물처럼 싸늘했다. 기모진은 온몸으로 소만리가 뿜어내는 서늘함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뜻밖에도 기묵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것이었다.그는 인상을 깊이 찌푸리다가 긴 눈으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당신 정말 이 사람 사랑해?”소만리는 상심으로 휘청거리는 기모진의 눈을 바라보며 결연하게 말했다.“그래요. 난 뱃속에 있는 이 아이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또 사랑해요.”소만리의 대답을 들은 기모진은 눈 밑이 떨리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그는 갑자기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펑" 하고 발사되어 창문 가장자리를 꿰뚫었다.유리가 깨지는 순간 기모진의 마음도 산산조각이 났다. 소만리는 갑자기 총을 쏘는 기모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남자의 눈빛은 살기가 솟아올랐고 온몸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차가움으로 휩싸이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모든 불만과 분노를 누르고 참았다. 그저 소만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버렸다.멀어져 가는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소만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마치 갑자기 정적에 휩싸인 듯 고요했지만 소만리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기묵비는 이 상황을 보고 매우 만족하였다. 특히 소만리가 이처럼 자신을 보호해 주다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소만리, 당신이 나를 구해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기묵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 피어올랐다.그는 손을 뻗어 소만리를 안으려 했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피했다.“기묵비, 예전에 당신이 나를 구해줬으니 이것으로 은혜는 갚은 걸로 하죠.”기묵비는 무슨 말인지 알았다. 알고 보니 방금 소만리가 자신을 구해준 것은 예전에 소만리가 그에게 진 빚을 갚아주려는 것이었다.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방금 기모진이 살기를 띠고 덤벼들었을 땐 정말로 그에게 총을 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만약 소만리가 기모진
기묵비의 말을 들은 소만리는 몸서리가 쳐졌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려 기묵비에게 물었다.“기묵비,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 하는 거예요? 기모진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기묵비는 눈썹을 깊이 찡그리며 말했다.“난 내 사업을 망치려는 사람들이 한 발자국이라도 F국을 떠나는 꼴을 볼 수 없어.”이 말을 듣자 소만리의 가슴은 아프게 무너져 내렸다.“기묵비, 기모진은 당신 친조카예요! 정말 그 사람을 죽일 셈이에요?”“친조카라구?”기묵비는 한껏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 부모님이 기 할아버지 때문에 죽임을 당했을 때 기 할아버지는 내 아버지가 자신의 친동생이라는 걸 몰랐던 가보지.”“할아버지는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분명히 무슨 오해가 있었을 거예요!”소만리가 힘을 주어 말했지만 기묵비는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초조함에 사색이 되어버린 소만리를 보았고 입꼬리를 실룩거리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말이 맞든 아니든 기모진이 곧 맞이할 일은 변하지 않아.”“기묵비, 당장 당신 사람들을 멈추게 하세요.”“이미 늦었어.”기묵비는 눈동자를 굴리며 담담하게 비웃었다.소만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요동쳤다.“기묵비, 당신은 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못할 거야! 내가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그녀는 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문을 나섰으나 경호원 두 명이 그녀를 막았다. “비켜!”소만리가 노발대발하며 분노로 가득 찬 눈을 치켜올렸다.기묵비는 경호원들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두 경호원은 소만리에게서 물러났다. 그러나 기묵비는 소만리를 그냥 가게 두지 않았다.“소만리, 당신이 기어코 지금 기모진을 찾아간다면 기여온은 어쩔 거야? 상관 안 해?”“...”소만리는 막 내디딘 발걸음을 멈칫하며 거둬들였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갈림길에서 그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희미하게 그녀의 몸에 떨어지는 빗
소만리는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문 앞에 서서 자신을 겨누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떨리고 불안한 마음이 약간은 진정되어 갔다. 눈앞에서 기모진이 총을 들고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의 갈색 재킷에도 핏방울이 드리워져 있었다.지난밤 그녀를 바라보던 깊은 두 눈동자엔 흉악스러운 살기가 짙게 서려 있었다. 주홍빛으로 핏날이 서 있는 그의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며 소만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막 살육을 겪은 악마처럼 온몸에 살기가 돌았고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영롱하고 아름다웠다.들어온 사람이 소만리라는 걸 본 순간, 기모진의 눈 속에 있던 암혹한 기운은 흩어졌고 더 이상 그녀를 향한 분노도 없었다.“내가 죽었는지 아닌지 보러 온 거야?”그는 살짝 비꼬아 웃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소만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역시 당신은 기묵비의 좋은 아내로군. 나를 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부하를 푼 것도 모자라 이제 직접 확인까지 하러 오고 말이야. 그래,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실망했어?”소만리는 기모진이 하는 말을 듣고 자신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더 이상 해결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기모진, 죽기 싫으면 당장 여길 떠나요.”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 지금 떠나지 않으면 정말 못 갈 수도 있어요.”“허.”기모진이 비웃으며 소만리를 향해 겨누었던 총을 거두었다. 이윽고 피로 물든 손바닥으로 소만리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내가 정말 오늘 죽는다면 여기도 나쁘지 않은데. 심지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도 같이 있어 주고.”소만리는 결연하고 단호한 기모진의 눈을 바라보았다.“기모진, 당신 정말 죽고 싶어서 이래요?”그녀는 너무나 초조하고 애가 탔다.“기모진, 경도에 당신 아들이 있다는 걸 잊었어? 도대체 정말로 여기서 죽고 싶은 거냐구?”“아들? 당신 우리에게 아들이 있다는 걸 기
오토바이가 킬러들 사이를 휙휙 지나가더니 모퉁이를 돌자 어느새 모습이 사라졌다.기묵비는 기모진이 소만리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모든 부하들에게 그들을 뒤쫓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낮이 지나도 기모진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기모진.” 기묵비는 이를 갈았고 깨문 입술 사이로 이 세 글자가 미끄러져 나왔다.“네가 아직 F국에 있는 한,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지.”...소만리와 기모진은 교외의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여관에서 2평 남짓 되는 방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밤 비가 창문에 말을 걸 듯 고요히 내리는 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외출한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만리는 기모진이 뭘 하러 갔는지 모른 채 30분이나 지나갔다. 그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기모진을 찾아 나서고 싶었지만 문이 잠겨져 있었다.이때 마침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소만리는 눈을 들어 보았다. 기모진은 표정 없이 무뚝뚝하게 걸어오다가 도시락 한 봉지를 소만리 앞에 놓았다. “먹어.”그의 말투는 차가웠고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가방 하나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소만리는 그가 들어가서 뭘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다친 건가?”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니 소만리의 걱정이 점점 더 커져갔다.오래 걸리지 않아 기모진이 화장실에서 나왔지만 그는 여전히 쓸쓸한 표정 없는 얼굴이었고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소만리는 다른 방식으로 기모진을 따돌릴 생각을 하며 말했다. “도대체 날 여기 가둔 의미가 뭐죠? 기모진, 당신 아직 경도로 돌아갈 기회가 있어요. 날 계속 데리고 있으면 당신에게 짐이 될 뿐이에요.”“소만리, 지금 이렇게 말하면 내가 당신을 기묵비에게 보낼 줄 알아?”그는 봉황 같은 큰 눈을 뜨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불쾌함과 질투심이 가득해 보였다.“예전엔 내가 당신을 붙잡지 않고 내 안에서 빠져나가게 했지만 지금 난 다시는 똑같은 잘못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