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기모진, 당신이 어떻게 알겠어. 내가 그때 당신을 따라간 건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걸.당신은 단지 내가 변심했고 당신을 가지고 논 거라고 굳게 믿었지.그녀는 청첩장의 이름을 어루만지고 마음 아프게 웃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모진, 당신이 만약 여온이 살아있다는 걸 안다면 정말 기뻐할 거야.”아픈 마음을 가라앉힌 후, 소만리는 다시 펜을 들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을 설계도면에 그렸다. 다음날 그녀는 도안을 기모진에게 보냈다.그는 오랫동안 답장을 하지 않았는데 마치 그때 그가 그녀를 무시했던 상태와 흡사했다. 거의 저녁때가 되어서야 소만리는 기모진의 답장을 받았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시 설계하라는 내용이었다.소만리는 기모진의 뜻에 따라 설계를 고쳤으나 거절당했고 그 후로도 몇 번을 고쳤다. 기모진은 늘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소만리에게 그가 바쁘다는 걸 강조하며 이런 알맹이 없는 디자인을 보내 쓸데없이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 말라고 했다. 소만리는 기모진이 일부러 그녀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여 아예 아이패드를 가지고 그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갔다. 그곳은 기모진이 자신의 명의로 새로 세운 회사였다. 기 씨 그룹 빌딩에서 그리 멀지 않아 소만리는 몇 개의 블럭을 지나 곧 도착했다.그녀는 프런트 데스크로 가서 예의 바르게 자신을 소개하였다.“저는 기 사장님의 결혼반지를 설계하는 일을 맡고 있는 디자이너입니다. 제 명함입니다. 기 사장님께는 이미 메시지를 보내 반지 디자인에 관해 말씀 드리겠다고 했으니 기 사장님께 제가 도착했다고 알려주시겠어요.”“알겠습니다. 잠시만요.”데스크 직원은 소만리의 명함을 들고 기모진의 사무실로 갔다. 잠시 후 데스크 직원이 돌아왔다.“죄송하지만, 지금 사장님이 화상회의 중이시라 급하지 않으시다면 잠시 기다려 보시겠어요?”“네 알겠습니다. 기다리지요.”소만리는 시간을 확인하고 조용히 앉아서 기다렸다.기모진은 사
눈앞에 그녀가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기모진은 입꼬리를 말려 올렸다.“내가 어찌 숙모님을 가지고 놀 수 있겠습니까?”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이었다.“회의는 이미 끝났지만 주무시는 숙모님을 보니 방해하기 미안했던 거죠.”“......”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 소만리를 보다가 기모진은 그녀가 안고 있는 담요를 보았다. “숙모님, 이 담요를 제가 덮어준 거라고 오해하진 마세요. 데스크 직원이 한 거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그는 그녀와의 관계에 분명히 선을 그으려 했고 그의 눈 속에는 소만리에 대한 미련이나 관심 따윈 조금도 없어 보였다. 소만리는 담요 밑에 감춰진 두 손을 꽉 쥐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럼 정말로 제가 오해했네요. 이왕에 이렇게 된 거 기 사장님이 약속 시간을 정해 주시죠. 저도 더 이상 사장님 일 때문에 많은 시간을 낭비하긴 싫거든요.”“기 씨 그룹에는 어떻게 다른 보석 디자이너는 없나요? 아니 이 귀하신 기 부인이 임신한 몸으로 이리 바삐 움직여야 한답니까?”“회사의 일은 곧 기묵비의 일이고 기묵비의 일은 곧 아내인 제 몫이기도 하지요. 남편을 위해서 바쁘다면야 기꺼이 하지요.”소만리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기모진은 이 말을 듣고 눈빛이 달라지며 말했다. “이렇게나 훌륭하신 부인을 두셨다니. 작은 아버지가 정말 부러운데요.”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낮은 그의 목소리가 소만리의 귓가를 감쌌다. “그래, 만약 그때 내가 소중한 걸 알았다면 지금 당신은 나를 위해 바쁘게 달렸을까? 내가 걱정은 되는 모양이지?”소만리는 마음이 너무 떨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소만리, 내일 아침 9시에 내 사무실로 와. “기모진은 겨울바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뱉고는 거침없이 걸어나갔다.소만리는 왜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그녀는 제시간에 기모진의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뜻밖에도 언초가 와 있었다. 기모진은 디자인
”기 부인, 제 키스를 기대하신 건가요?”“......”“안타깝게도 지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키스할 거야.”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 눈은 조롱하고 희롱하는 빛으로 더욱더 가득 찼다.소만리는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팠으나 애써 침착하였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키스를 기대한다고 생각해? 난 단지 당신의 연기에 맞춰주고 있었을 뿐이야. 기모진. 내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 주길 원하는 거예요? 아직도 날 못 내려놓은 거야? 참 안타깝네요. 그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지금은 또 얼마나 당신을 미워하는지 알겠어요?”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그에게 단호한 시선을 던지며 그 자리를 떠났다. 기모진은 허공에 머문 손을 오므리더니 조롱으로 가득한 얼굴과 눈 속에는 서서히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간은 유유히 흘러가고 어느덧 토요일.소만리는 단정하게 예복을 입고 기묵비의 팔짱을 끼고 모진과 언초의 약혼식장에 왔다. 그녀는 기모진의 약혼파티가 굉장히 성대하게 치러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약혼식장은 의외로 사람이 적었다. 그녀와 기묵비 외에는 의외로 초대받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저는 시끌벅적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간소하게 준비했어요.“ 언초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모진씨가 말했어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분이 기 선생님과 기부인이시라구요. 그래서 우리 약혼식에 두 분을 빼놓을 수 없었죠.”기묵비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모진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저희 두 사람, 꼭 약혼식 잘 보겠습니다.”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자 운전기사가 식장에서 나왔다. 그 사람은 기묵비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였고 갑자기 기묵비의 안색이 싹 변하며 말했다.“소만리, 나 일이 좀 있어서 잠깐 나가서 전화 좀 하고 올게.”“네.”소만리가 웃는 척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옆에 앉았다.약혼드레스, 부케, 그리고 그.소만리는 눈앞에
”잠을 잔 거면 많이 친한 셈인가?”기묵비는 의미심장하게 반문했다. 언초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잤다고 해서 두 사람이 꼭 많이 친한 건 아니죠. 어차피 밤새 정을 나누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난 그녀와 하룻밤만 보낸 게 아니라 아주 많은 밤을 보냈거든.”기묵비는 낮은 목소리로 언초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려 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그는 전화기를 흘끗 보고는 신사다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언초 양, 지금은 통화를 좀 해야겠군.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얘기하지.”“네, 언제든지요. “언초는 기묵비의 돌아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기묵비의 모습이 차츰차츰 사라졌다.약혼식장 정원.소만리는 벽을 짚은 채 헛구역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몸이 아픈 것인지 아니면 기모진이 다른 여인과 다정하고 행복한 모습을 봐서 마음이 아픈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우리 딸을 죽인 남자를 위해 뭘 그렇게 그 사람 아이를 소중히 품고 있으려는 거야, 소만리. 너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기모진이 차갑게 물으며 뒤에서 불만스럽게 따라왔다. 소만리는 그제야 기모진이 이미 그녀 바로 뒤에 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주먹에 힘을 주며 이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상관없잖아요.”“정말 나와 상관없는 일인데 어째서 내가 다른 여자와 약혼하는 장면조차도 견디지 못하는 거지?”“기 선생님 정말 재미있는 분이로군요. 이건 단지 그냥 평범한 입덧이에요. 저 바람 좀 쐬고 올게요.”소만리는 차분하게 부인했다.“왜 기 선생님은 내가 항상 당신을 신경 쓴다고 생각해요?”“정말 당신이 날 신경 쓰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다면 돌아서서 나를 한 번 봐요.”“내가 왜 증오하는 찌질한 남자를 돌아봐야 하죠?”소만리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과 당신 약혼녀가 약혼식도 이미 마친 것 같으니 저와 기묵비도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겠군요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F국에서 적지 않은 세력과 재력을 만들었고 아마도 그 이면에는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될 거래들도 많았을 거야.”언초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어떡해? 에이 설마. 그 사람 절대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아직까지도 당신은 그 사람을 믿고 있는 거야?” 그 사람이 선을 넘는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기모진이 추궁하며 반문하자 언초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정신이 멍해지고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당신의 가장 빛나고 찬란하게 웃는 얼굴을 당신에게 가장 아프게 상처 주었던 사람한테 남겨야 한다구.“기모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소만리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철저하고 처절하게 그 어떤 미련도 남겨 두지 않는 복수 말이야.”......기묵비는 F국에서 온 전화를 받고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일찌감치 예약했다. 물론 그는 소만리를 경도에 혼자 두지 않고 그날 밤 소만리를 데리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수행하는 사람에게 부탁해 소만리를 기여온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만나도록 했고 그 자신은 황급히 떠났다.소만리는 여온의 머리에 난 상처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져 아파왔다.“엄마, 나 너무 오래 기란군 오빠를 못 만났어. 그리고 그 잘생긴 오빠를 매일 여기서 기다리고 싶지 않아. 엄마 나 데리고 놀러 나갈 수 있어?”작은 꼬맹이는 크고 순진한 눈을 반짝거리며 소만리를 기대에 찬 듯 바라보았다. “여온아, 엄마가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서 너랑 기란군 오빠랑 그 잘생긴 오빠랑 놀게 해 줄게.”“정말?”“엄마가 언제 우리 여온이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소만리는 가슴 가득 사랑스럽게 여온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여온이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앞으로 조심하기. 다신 지금처럼 이렇게 넘어져서 아프면 안 돼.”“응. 나 엄마 말 잘 들을게. “여온은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와 소만리를 살포시 안고 뽀뽀해 주었다. .
소만리는 기여온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섰지만 뱃속에 아직 작은 아이가 있어서 오래 안고 있지는 못하고 뽀뽀를 하고 여온을 내려놓았다. “여온아, 엄마가 지금 케이크 만들어 줄게. 여온이가 엄마 좀 도와줄래?”“네~”여온은 수정처럼 맑고 큰 눈을 반짝이며 소만리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기모진은 먼 곳의 차 안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으나 소만리가 어린아이를 안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또한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소만리의 얼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언젠가 그에게도 그렇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던 적이 있었다. 기모진는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 마디마디 움켜쥐었고 두 눈엔 질투심으로 활활 타올랐다.“정말 내가 착각을 했었군. 혼자만의 착각을. 지금 보니 당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역시 그 사람이었군.”“윙윙윙.”핸드폰 진동이 울리자 기모진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핸드폰 저쪽에서 그의 조수인 육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장님, 저 지금 3번가 창고 근처에 도착했는데요. 기묵비도 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물건을 보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계속 지켜보고 있어. 내가 곧 갈 테니까.”기모진은 전화를 끊고 날카로운 눈매를 치켜세우고는 멀리 있는 별장을 흘끗 바라보고 난 후 곧바로 핸들을 돌렸다. 기묵비는 황급히 창고에 가서 물건들을 점검했다. “사장님, 흑강당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암시장의 장사마저 다 삼켜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주사위라고 불리는 부하가 불평하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최근엔 그들이 사람을 시켜 우리 창고 재고를 조사하게 했고 사장님이 며칠 전 소만리 아가씨와 경도에서 돌아간 틈을 타 우리 남미의 장사를 빼앗아서 우리가 백억 원이나 손해를 봤다구요.”“사장님 더 이상 그들이 함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한동안은 경도로 돌아가시지 말고 여기에 진을 쳐야 합니다. 사장님만이 그
기묵비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제야 소만리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을 알았다.소만리가 별장에 남아 기여온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그는 허락했다.돌아가는 길에 그는 언초에 대한 조사자료를 받았다. 모든 것이 문제없어 보였다. 그러나 자료를 살피는 기묵비의 매서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그는 소만리에게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줄 수 있었는데 그것은 기모진도 마찬가지로 초요의 신분을 새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다만 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기모진과 초요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모진이 어떻게 초요를 도울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기뻐할 일이다. 왜냐하면 초요가 아직 살아 있으니까.기묵비는 손목에 맨 머리끈을 들어 손가락에 감으며 심오한 빛을 띠며 웃었다. 초요,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되겠군.별장. 소만리는 방금 케이크를 다 구워 여온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만면에 미소를 띠고 바라보고 있을 때 기묵비가 돌아왔다. 기여온은 그를 보고 사랑스럽게 말했다.“아빠.”기묵비는 봄바람 같은 따사로운 웃음을 지으며 다가가 여온의 작은 머리를 어루만졌다.예전엔 소만리도 이런 모습을 보고 참으로 온화하고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묵비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기묵비는 겉으로는 언제나 고귀하고 우아한 신사이지만, 실제로 그는 겉과 속이 다르고 속으로 깊은 담을 쌓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빠, 엄마랑 같이 놀러 가고 싶어요. 맨날 여기 여온이 혼자서 지내고 싶지 않아요. 아무도 안 놀아 주구. 기란군 오빠랑 같이 놀아도 돼요, 아빠?”기여온은 기묵비의 손을 잡고 천진난만하게 수정 같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기묵비는 얼마 전에 차를 몰고 육경을 데려간 사람을 생각하다가 다시 여온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되지. 그런데 기란군 오빠는 지금 여기 없어. 그러니까 엄마만 같이 있
기묵비는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얇은 입술을 깨물었다. “드디어 왔군.”그는 무슨 속셈이 있는 듯 기사에게 지시했다.“따라가.”소만리를 태운 차는 재빨리 시동을 걸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소만리가 어떻게 저 남자의 눈매를 모를 수가 있겠는가.“기모진, 당신 언제 F국에 왔어요? 왜 나를 차에 태웠어요?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기모진은 백미러에 비친 소만리의 불만스러운 얼굴을 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를 타고 20분쯤 지난 끝에 기모진은 드디어 차를 세웠다. F국의 교외는 자체적으로 건설한 작은 별장이 많은데 기모진은 그 중의 한 별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마스크를 벗고 소만리를 대신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 “내려.”소만리는 냉정한 태도로 차에서 내렸다. 기모진을 쳐다 보았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그녀는 당황스러웠다.“기모진, 말해 봐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남자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차가운 말투로 얘기했다. “날 따라와 봐.”소만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간 후 소만리는 어떤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남자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오른쪽 종아리에 두꺼운 거즈를 감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방금 쓴 것 같은 구급약 상자가 있었다. 소만리는 육경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몇 번 만난 적은 있어서 육경이 기모진의 조수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왜 조수까지 여기 와 있지. 게다가 다친 상태로. 육경을 조심스레 살펴보고 있는 소만리를 향해 기모진은 불만스러운 듯 눈썹을 치켜세우고 말했다.“올라와.”그는 그녀의 이름은 부르지 않고 말했다. 소만리는 별말 없이 잠자코 2층으로 올라갔다. “기모진, 이제 말해 보세요. 도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그녀는 침착하게 그를 보며 따졌다. 남자는 손을 뻗어 방문을 닫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서서 한 걸음 한 걸음 소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