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사위분은 반드시 깨어날 거라고 확신합니다.”의사는 매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환자가 지금 매우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조만간 깨어날 거라고 믿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따님과 사위분이 함께 할 날도 머지않을 거예요. 곧 깨어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소군연이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날 거라는 의사의 말에 예선의 얼굴에는 순간 환한 미소가 번졌다.“정말요? 의사 선생님, 그게 정말이에요?”예선이 감격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깨어날 거라고 확신해요. 그런데 부상자와는 어떤 관계십니까?”“부상자의 약혼녀예요.”소만리가 예선을 대신해 대답했다.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이분이 사장님의 그 귀한 따님이셨군요. 그럼 약혼자 옆에 잘 계시면서 많이 격려해 주세요. 전 반드시 환자분이 조만간 깨어날 거라고 믿어요.”긍정적인 의사의 답변을 들은 예선은 거의 흐느끼듯 울었다.한번 울음이 터지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다.소군연의 모친도 기뻐서 눈시울을 붉혔다.“의사 선생님, 정말 내 아들이 깨어날 수 있을까요?”“네, 확실합니다.”의사의 대답은 여전히 확고했다.소군연의 모친은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며 영내문에게 고개를 돌렸다.“내문아, 앞으로도 군연이 잘 부탁한다. 네가 돌봐주면 군연이 훨씬 빨리 회복될 수 있을 거야.”영내문의 얼굴에는 순간 웃음이 떠올랐다.“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기대 저버리지 않을게요. 최선을 다해 군연 오빠 돌보면 오빠도 얼른 털고 일어날 거예요.”영내문은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말을 마치며 예선을 흘겨보았다.마치 소군연의 모친이 자기 편임을 자랑하는 듯했다.“보호자분은 그 마음이면 충분해요. 환자를 돌보는 데는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옆에 있던 의사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영내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고 이해할
”사리 분별도 못하는 미련한 사람들 같으니.”사영인 역시 빈정거리며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내문과 소군연의 모친의 얼굴에 시선을 떨어뜨렸다.“내가 밤새 임 교수에게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소군연의 상태가 이렇게 빨리 호전될 수 없었을 것이고 내가 이렇게까지 한 것은 다 내 딸 체면을 봐서였다구요. 그런데 당신들 여기서 이런 사악한 말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요? 마지막으로 한마디 할게요. 소군연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더 이상 내 딸 기분 상하게 하는 그런 말 꺼내지도 말아요. 그렇지 않으면 평생 눈에 눈물 마를 날이 없게 만들어 줄 테니까.”사영인은 단호하게 경고했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예선을 향해 부드러운 눈길을 떨구고는 돌아섰다.소군연의 모친과 영내문은 얼굴빛이 약간 흐려졌고 화를 내려고 했지만 예선을 노려보기만 할 뿐 더는 어쩌지 못하고 툴툴거리며 가버렸다.예선은 소군연의 모친과 영내문의 태도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아니, 너무 어리둥절한 나머지 사실 그 두 사람이 갔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했다.“예선아.”소만리는 예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너도 봐서 알겠지만 네 엄마는 널 위해서 한달음에 달려오신 거야.”소만리의 말에 예선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 소만리를 가만히 쳐다보고는 갑자기 몸을 돌려 사영인이 떠나는 방향으로 얼른 뛰어갔다.소만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예선의 뒷모습에서도 낯익은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예선이 지금 엄마를 뒤쫓아간 거지?”“그런 것 같네. 예선이 마음속에서 엄마에 대한 원망을 조금은 내려놓았나 봐.”기모진이 웃으며 말했다.“하늘 아래 모든 엄마들 마음은 똑같아. 자식들을 위해선 못 할 일이 없지. 무슨 일이든.”소만리는 입술을 오므리며 웃었고 흐뭇한 시선으로 예선이 달려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세상 모든 엄마들이 다 그렇지.”이 말을 듣고 기모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소만리를 그윽하
사영인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지만 정신을 다잡아 보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예선의 발자국 소리가 확실히 들렸다.그녀는 천천히 돌아서서 예선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오롯이 지켜보았다.예선은 사영인과 눈이 마주치자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사영인 역시 예선의 그런 얼굴을 보며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에 찬 얼굴을 했다.찬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지만 두 사람은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수많은 별들의 속삭임과 숨이 멎을 듯 그윽한 달빛 아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예선은 단단히 쥐고 있던 두 손에 힘을 빼고 입을 열었다.“고마워요.”두 사람이 떨어져 있던 세월의 무게만큼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던 감정을 조금 털어낸 예선의 첫마디였다.사영인의 눈에 깃들어 있던 기대가 흩어졌지만 그녀는 이내 눈빛을 추스렸다.“날이 차. 어서 들어가 봐.”사영인은 웃으며 말했다.예선은 사영인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몸을 돌려 병원 입구로 향했다.사영인은 예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자아냈다.한편 영내문은 소군연의 모친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예선과 소군연의 모친 사이를 이간질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어머니, 전 이 일이 좀 꺼림직해요. 갑자기 나타난 그 의사는 분명 예선과 한패일 거예요. 말끝마다 예선을 도와주는 언행만 하고 있잖아요.”소군연의 모친은 방금 사영인에게 한바탕 혼이 났지만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화를 삭일 수는 없었다.“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 아마도 군연이 상태가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을 거야. 일부러 우릴 속이려고 심각하다고 해 놓고 지금 와서 뭔가 조치를 한 것처럼 생색을 내려고 괜찮다고 말한 걸 거야. 목적은 예선을 군연이 옆에 가까이 붙여 놓기 위해서라구! 그런데 내가 그 꼴을 가만두고 보겠어? 애초에 그 여자가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 군연이가 병원에 누워있겠어?”그 말에 영내문의 가슴이 철렁 내려
영내문은 경찰이라는 말을 듣자 당황스러워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그게 무슨 뜻이죠?”“내 말은...”소만리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영내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전화를 받고는 바로 끊으며 눈살을 한껏 찌푸려 중얼거렸다.“왜 이렇게 스팸 전화가 많이 오는 거야. 정말 짜증 나!”그녀는 짜증을 내고는 소만리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바로 문을 밀고 병실로 들어갔다.앉아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예선은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깨어났고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그러나 들어오고 있는 사람이 영내문인 것을 알고 예선은 바로 경계하는 눈빛으로 일어섰다.“뭐 하러 여기 또 왔어요?”“예선아.”소만리가 뒤따라 들어와 예선을 불렀다.예선은 경계하는 눈빛을 서서히 풀고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소만리, 너도 왔네.”“응, 내가 아침을 좀 가져왔어. 직접 만들었으니까 우선은 좀 먹고 너도 좀 쉬어.”예선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소만리가 건네주는 아침을 받아들고 한쪽에 가서 먹을 준비를 하며 더 이상 영내문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소만리는 영내문을 공기처럼 여기며 영내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예선의 옆에 앉아서 그녀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영내문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왠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그녀는 마치 밀랍 인형처럼 침대에 누워 있는 소군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갑자기 허리를 구부려 그의 얼굴을 가까이했다.“오빠,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 해서든 오빠 곁에 있을 거야. 난 오빠가 꼭 회복되리라고 믿어.”영내문은 일부러 목소리를 조금 높여 소군연에게 따뜻한 말을 전했다.다분히 소만리와 예선이 자신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의도한 것이었고 특히 예선을 바라보는 득의양양한 눈빛은 가증스러움 그 자체였다.“예선...”갑자기 소군연의 입에서 이 두 글자가 흘러나왔다.영내문은 깜짝 놀랐다.소군연이 이때 입을 열 줄은 몰랐고 게다가 예선의
갑작스러운 경찰의 등장에 영내문은 어리둥절한 채 고개를 돌렸고 그녀의 심장은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소만리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무슨 일로 경찰이 들이닥쳤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그러나 예선은 영내문의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소군연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영내문은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자신이 당황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다.“내가 영내문인데요.”영내문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경찰관에게 걸어갔다.“경찰관 님이 두 분이나 어쩐 일로 날 찾으시죠?”“그날 예선 씨의 차에 손을 댄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 남자는 무직에 변변한 수입이 없는 사람이었고 조사해 본 결과 전예진이 말한 알리바이와 거의 일치했어요.”경찰의 말이 끝나자 소만리와 예선은 동시에 안색이 변했다.차에 손을 댄 남자를 찾았다고?영내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일부러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잡았으면 이제 그 남자를 조사하면 되는 거지 왜 날 찾아왔죠?”“수사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러 온 겁니다. 아주 급하게 조사할 일이 있어서요.”경찰의 말에 영내문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경찰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보고 경찰이 뭔가를 알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영내문은 선량한 척 미소를 지었다.“경찰 일이니 기꺼이 도와드려야죠.”그녀는 아직도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한 예선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예선, 당신이 아무리 발뺌을 하려고 해도 군연 오빠가 당신 차를 몰다가 사고가 났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어요.”영내문은 말을 끝마치고는 경찰을 보며 말했다.“자, 가시죠. 경찰관 님.”선두에 선 경찰관이 먼저 돌아서서 길을 안내하자 소만리가 입을 열어 뒤를 따르던 경찰관을 불렀다.“경찰관 님, 제가 좀 알고 싶은 게 있는데요.”경찰관은 정중하게 되물었다.“누구십니까?”소만리는 자신과 예선과의 관계, 그리고 소
예선은 멍한 표정으로 소군연의 곁으로 돌아왔고 소만리는 예선이 너무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죄책감 속에 묻힐까 봐 예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그러다 소만리는 이 소식을 기모진에게도 전했다.기모진은 아들을 학교에 보내자마자 소만리에게서 이런 소식을 듣고는 바로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파악했다.상황을 파악한 그는 바로 소만리에게 소식을 전했다.기모진에게서 소식을 전해 들은 소만리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추측했던 것을 떠올렸다.경찰차 안.영내문은 당황한 마음을 억누르며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척했다.그녀는 경찰이 무슨 일로 자신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자신이 질문을 많이 하면 괜한 의심을 살까 봐 두려워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날의 일이 저절로 떠올랐다...그날 그녀는 전예진으로부터 사람을 매수해서 이미 예선의 차에 손을 댔다는 소식을 들었다.사실 그때 영내문은 줄곧 전예진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고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의 기둥 뒤에 숨어서 전예진이 돈을 주고 데려온 남자가 차에 들어가서 손을 쓰는 동안 밖에서 전예진이 영상을 찍는 모습을 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예진이 찍은 동영상이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송되었고 한 번 쓱 보고는 답장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차 안의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십여 분 정도 지났을 때 그 남자는 차에서 나와 바로 그 자리를 떠났고 전예진도 곧장 떠났다.주차장이 텅 비었을 때 영내문은 몰래 예선의 차에 올랐다.불법적으로 남의 차 문을 열었기 때문에 차 문은 잠기지 않은 채 열려 있었고 차에 올라탄 영내문은 고무장갑을 끼고 인터넷에서 찾은 관련 자료에 근거해 브레이크 시스템을 조작했다.모든 일을 다 끝내고서야 영내문은 조심스럽게 범행 현장을 빠져나왔다.당시 영내문은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오로지 예선이 차를 몰다가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그 소식만 고대하고 있었다.영내문은 행여나 전예진이 끝까지 내달리지 않을 것을 우려해서
차를 멈춰 세운 뒤에도 영내문은 차 안에서 망설이며 앉아 있었다.그러나 기왕 이렇게 온 이상 어떻게 다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왔으니 그녀는 반드시 가야 한다.영내문은 심사숙고한 끝에 차에서 내려 곧장 어느 주차장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그날 그녀는 자신이 CCTV에 찍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경찰이 그녀에게 직접 물어본 것으로 보아 분명 뭔가 증거를 확보한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내문의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그녀 역시도 그 법칙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범행 현장으로 다시 돌아와 혹여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영내문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가장자리에 있는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그녀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지금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여자는 분명 소만리였다.어떻게 소만리가 여기에 있지?영내문의 마음속엔 의구심으로 가득 찼고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고 싶어도 들킬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어 주저하고 있었다.이때 소만리는 바닥에서 뭔가를 본 듯 갑자기 몸을 구부려 뭔가를 주웠다.“모진, 이게 뭐야?”소만리는 뭔가를 줍더니 갑자기 눈을 들어 앞을 향해 말했다.영내문은 그제야 기모진도 그 자리에 함께 와 있음을 알았다.그녀의 마음이 더욱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기모진도 여기 있었어? 뭣 때문에?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영내문은 감히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들킬세라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더 깊이 숨겼다.멀리서 소만리와 기모진이 나누는 대화가 어렴풋이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었다.“모진, 이게 뭔지 봐 봐. 이건 여자들만 쓰는 물건이겠지?”“예선이 거 아니야? 여긴 예선이 차니까 예선이 물건이 떨어져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아니야. 예선이는 이런 액세서리를 좋아하지 않아.”소만리가 기모진의 말을 부정했다.그 말을 들은 영내문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서 땀이 났다.영내
”믿을 만한 거지. 당연히.”기모진이 힘주어 말했다.“전예진이 데려온 그 남자는 확실히 예선의 차에 손을 대지 않았어. 그 남자는 돌아가서 친구들한테 자랑을 했대. 단지 차에 올라탄 것만으로 돈을 벌었다고. 그리고는 그날 밤 그 돈으로 술집에서 유흥을 즐기며 하룻밤 만에 다 써버렸지.”“그렇다면 그 남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게 확실해.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도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했는데 통과했다고 했어. 역시 예선의 차에 일부러 손을 댄 사람은 정말 따로 있는 거야.”소만리는 결론을 내며 바닥에서 또 뭔가를 집어 들었다.“이걸 떨어뜨리고 간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커.”“나도 그렇게 생각해.”기모진도 동의했다.그리고 그는 눈을 들어 예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한 번 쓱 관찰하듯 바라보았다.“살펴볼 것들은 다 살펴본 것 같아. 게다가 경찰도 이미 다 조사했으니 이제 우리 돌아갈까?”기모진이 하는 말을 들으니 영내문의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감시하고 살펴보는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녀에게 유리한 것이었다.하지만 영내문이 기뻐하는 것도 잠시 갑자기 소만리가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말했다.“모진, 저기 CCTV 좀 봐. 여기 찍히지 않았을까?”기모진은 소만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소만리, 아파트 관리실에 가서 CCTV 확인해 보자.”“그래.”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났다.영내문은 기둥 뒤에 숨어서 소만리와 기모진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천천히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왔다.그녀는 주위를 경계하며 한 번 둘러본 후에야 조심스럽게 예선의 주차 공간으로 갔다.텅 비어 있는 주차 공간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혹시나 부주의하게 떨어뜨린 물건이 있지 않은지 의심하며 살펴보았다.영내문은 자신에게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재빨리 주위를 유심히 살폈고 다행스럽게도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브로치가 배수구 위로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