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멈춰 세운 뒤에도 영내문은 차 안에서 망설이며 앉아 있었다.그러나 기왕 이렇게 온 이상 어떻게 다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왔으니 그녀는 반드시 가야 한다.영내문은 심사숙고한 끝에 차에서 내려 곧장 어느 주차장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그날 그녀는 자신이 CCTV에 찍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경찰이 그녀에게 직접 물어본 것으로 보아 분명 뭔가 증거를 확보한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내문의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그녀 역시도 그 법칙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범행 현장으로 다시 돌아와 혹여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영내문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가장자리에 있는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그녀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지금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여자는 분명 소만리였다.어떻게 소만리가 여기에 있지?영내문의 마음속엔 의구심으로 가득 찼고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고 싶어도 들킬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어 주저하고 있었다.이때 소만리는 바닥에서 뭔가를 본 듯 갑자기 몸을 구부려 뭔가를 주웠다.“모진, 이게 뭐야?”소만리는 뭔가를 줍더니 갑자기 눈을 들어 앞을 향해 말했다.영내문은 그제야 기모진도 그 자리에 함께 와 있음을 알았다.그녀의 마음이 더욱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기모진도 여기 있었어? 뭣 때문에?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영내문은 감히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들킬세라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더 깊이 숨겼다.멀리서 소만리와 기모진이 나누는 대화가 어렴풋이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었다.“모진, 이게 뭔지 봐 봐. 이건 여자들만 쓰는 물건이겠지?”“예선이 거 아니야? 여긴 예선이 차니까 예선이 물건이 떨어져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아니야. 예선이는 이런 액세서리를 좋아하지 않아.”소만리가 기모진의 말을 부정했다.그 말을 들은 영내문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서 땀이 났다.영내
”믿을 만한 거지. 당연히.”기모진이 힘주어 말했다.“전예진이 데려온 그 남자는 확실히 예선의 차에 손을 대지 않았어. 그 남자는 돌아가서 친구들한테 자랑을 했대. 단지 차에 올라탄 것만으로 돈을 벌었다고. 그리고는 그날 밤 그 돈으로 술집에서 유흥을 즐기며 하룻밤 만에 다 써버렸지.”“그렇다면 그 남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게 확실해.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도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했는데 통과했다고 했어. 역시 예선의 차에 일부러 손을 댄 사람은 정말 따로 있는 거야.”소만리는 결론을 내며 바닥에서 또 뭔가를 집어 들었다.“이걸 떨어뜨리고 간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커.”“나도 그렇게 생각해.”기모진도 동의했다.그리고 그는 눈을 들어 예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한 번 쓱 관찰하듯 바라보았다.“살펴볼 것들은 다 살펴본 것 같아. 게다가 경찰도 이미 다 조사했으니 이제 우리 돌아갈까?”기모진이 하는 말을 들으니 영내문의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감시하고 살펴보는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녀에게 유리한 것이었다.하지만 영내문이 기뻐하는 것도 잠시 갑자기 소만리가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말했다.“모진, 저기 CCTV 좀 봐. 여기 찍히지 않았을까?”기모진은 소만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소만리, 아파트 관리실에 가서 CCTV 확인해 보자.”“그래.”소만리는 기모진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났다.영내문은 기둥 뒤에 숨어서 소만리와 기모진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천천히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왔다.그녀는 주위를 경계하며 한 번 둘러본 후에야 조심스럽게 예선의 주차 공간으로 갔다.텅 비어 있는 주차 공간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혹시나 부주의하게 떨어뜨린 물건이 있지 않은지 의심하며 살펴보았다.영내문은 자신에게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재빨리 주위를 유심히 살폈고 다행스럽게도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브로치가 배수구 위로
사영인의 마음에 예선의 눈물이 아롱져 스며들었다.그녀는 곧장 예선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예선아.”사영인은 예선을 다정하게 부르며 손을 뻗어 티슈 한 장을 건넸다.예선은 눈물로 얼룩진 눈망울로 사영인이 건넨 티슈를 바라보았고 아무 말없이 티슈를 받아들고 눈물을 닦은 뒤 계속해서 만두를 먹었다.예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물을 거두어 보려고 했지만 눈물은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속절없이 흘러내렸다.사영인의 마음에서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아픔은 예선을 바라보는 눈빛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었다.“예선아, 내가...”“잠시 나가 있어 주실래요?”예선이 겨우 입을 열었다.예선이 내뱉은 말이 차가운 겨울바다처럼 사영인의 가슴을 매섭게 내리쳤다.하지만 사영인은 예선이 요구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었다.“나 밖에 나가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사영인은 허둥지둥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문을 닫을 때 사영인은 아쉬운 마음에 예선을 두 번 뒤돌아보고서야 겨우 문을 닫았다.예선은 사영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껏 눈물을 쏟았다.사영인 앞에서는 감히 눈물도 제대로 쏟을 수 없는 예선이었다.잠든 소군연을 깨울까 봐 잠시 멈칫했지만 자신의 울음소리에 깰 정도로 지금 소군연의 의식이 밝지는 않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마침 그때 소군연의 모친은 소군연을 보러 병원에 왔고 영내문도 함께 대동했다.소군연의 모친은 비록 영내문이 자신에게 준 선물들이 가짜라는 의혹을 품고 있었지만 감정 기관에서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영내문을 챙겨 주고 싶었다.병실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영내문은 사영인을 보았다.“어머니, 저기 보세요. 예선이 엄마가 와 있어요.”소군연의 모친은 영내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저 여자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냥 돈 좀 잘 버는 것밖에 더 있어? 돈이 많으면 많은 거지, 어쩌라구? 남편도 없고 딸은 엄마로서 인정
만두를 먹으며 울고 있던 예선은 인기척이 들리자 만두를 내려놓고 눈물을 닦았다.예선은 재빨리 눈물을 닦았지만 영내문의 눈에는 그 모습이 바로 포착되었다.영내문은 입술을 들썩이며 비아냥거렸다.“비겁한 수단으로 군연 오빠를 독차지하려 하다니. 흥, 당신들 정말 잘도 꾸며 대는군.”예선은 마음을 가다듬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영내문을 힐끔 쳐다보았다.그녀는 소군연의 모친이 아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영내문과는 쓸데없는 논쟁을 할 기분도 아니어서 얼른 자리를 피해 나가려고 했다.그러나 예선이 몸을 돌리려 하자 뒤에서 영내문이 경멸하는 투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그 의사는 군연 오빠가 곧 깨어날 거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럴 것 같지 않아요. 그 의사는 단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일부러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어떤 사람이 군연 오빠 곁에 계속 머물 수 있게 하려구요.”소군연의 모친은 소군연의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을 보며 영내문의 말을 들었고 마음속에서 화가 끓어오르자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예선을 보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불만을 터뜨렸다.“너, 더 이상 군연이 옆에서 보호자 행세할 필요 없어. 네 그 잘난 부자 엄마나 따라가. 우리한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아.”예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풀었다.“난 군연의 곁을 계속 지킬 거예요.”소군연의 모친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는 돌아서서 예선을 노려보았다.“너 왜 이렇게 사람을 성가시게 굴어? 군연이 네 차를 몰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아직도 넌 미안한 마음도 없이 이렇게 발뺌하고 있을 셈이야?”“내 딸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난 임 교수한테 당신 아들을 좀 봐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 거예요.”사영인은 병실에 들어오며 말했다.예선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는 것을 보자 그녀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쓰라렸다.“예선아, 네가 옆에 있어 주기를 군연이 원하고 있다는 거 나도
사영인은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는 걸 알았지만 예선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듣자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엄마.”예선이 말했다.사영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예선이 엄마라고 불렀다!사영인이 넋이 나간 모습으로 서 있자 예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정말 고마워요. 그동안 저와 군연의 일을 위해 한걸음에 달려오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예선은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말했다.사영인은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분명 그녀는 평생 차가우리만치 침착하고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지금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잠시 후 사영인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그, 그건 엄마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였다.“예선아, 엄마를 용서해 주는 거니?”머뭇거리며 사영인이 말했다.예선은 기대에 가득 찬 사영인의 눈빛을 보았지만 힘없이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말했다.“용서했다고는 말 못 해요. 하지만 지금 엄마를 보니 마음이 놓이고 푸근해지는 것 같아요.”예선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비록 원하는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사영인은 이미 마음이 충분히 흡족했다.그녀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었고 가슴이 벅차올라 그 기쁨과 감격스러운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는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듯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예선은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냈고 사영인에게 티슈를 건네주는 게 아니라 손을 들어 직접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순간 사영인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온몸이 그 자리에 굳어 버렸고 뜨거운 눈물이 방울져 그녀의 가슴을 적셨다.지금 이 순간 사영인은 표현하고픈 말이 말았지만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사영인이 느끼는 감정은 오롯이 예선에게도 전해졌다.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긴 한숨을 쉬
병실 문 뒤에서 작은 창을 통해 병실 밖을 엿보던 영내문은 언짢은 듯 눈을 희번덕거렸다.방금 자신이 도발한 행동이 오히려 예선과 사영인의 화해시키는 도화선이 될 줄은 몰랐다.정말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였다.영내문은 이를 악물었고 병상에 누워 아무런 미동도 없는 소군연을 돌아보며 짜증이 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군연 오빠, 날 탓하지 마.난 오빠를 해치려고 한 게 아니야. 탓하고 싶으면 예선을 탓해.원래 우리는 어릴 적부터 잘 지내왔잖아. 천생연분이었어. 예선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 사이에 끼어든 거라고.만약 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 지금쯤 이미 결혼해 있을 거야.그러니 정말로 죽어야 할 사람은 오빠가 아니라 예선이야.“아이구. 군연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겠구나.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누워만 있으니.”소군연의 모친이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깊이 내쉬자 영내문은 생각의 끝을 잡고 다시 정신을 다잡아 착하고 온화한 척 소군연의 모친에게 다가와 위로했다.“어머니,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고 하잖아요. 군연 오빠는 반드시 아무 일 없이 일어날 거예요.”영내문은 마음씨 좋은 사람처럼 착한 얼굴로 가장하고 위로했다.“하지만 더 이상 예선과 그 엄마라는 사람이 마음대로 행동하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군연 오빠는 어머니 아들이에요. 결정은 어머니가 하시는 거죠. 그 여자들이 아니라.”소군연의 모친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굳어졌다.“내문아, 너 문 잠그고 와. 저 사람들이 다시는 못 들어오게.”영내문은 소군연의 모친이 자신이 한 말에 넘어오자 주저하지 않고 얼른 병실 문을 잠갔다.예선과 사영인은 밖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소군연의 곁을 지키려고 병실 문 앞에 섰다.그러나 예선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 보아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그녀는 문 위에 나 있는 작은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영내문이 도도한 눈빛으로 눈을 희번덕거리며
문고리를 잡은 영내문은 완전히 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는 듯 문 틈으로 빼꼼히 문밖을 내다보고는 소만리가 보이자 오만했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아, 소만리, 당신이었군요.”영내문은 애써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온통 주차장에서 뭔가를 찾고 있던 소만리와 기모진의 모습뿐이었다.도대체 소만리는 그때 무엇을 주웠는지 영내문은 아직도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소만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나예요.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어서요.”소만리는 병실을 둘러보며 말했다.“잠깐 나올래요? 선배가 푹 쉬는 데 방해하면 안 되잖아요.”“여기서 못 할 얘기가 뭐 있다고 나가서까지 얘길 해?”소군연의 모친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소만리를 쳐다보았다.“소만리, 우릴 속여서 방에서 나오게 한 다음 저 잡스러운 사람들을 들여보내려고 그러는 거죠?”소군연의 모친이 영내문을 감싸며 도와주려는 모습을 보고 소만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눈을 들어 보였다.“소군연 선배가 당한 교통사고의 주원인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눌까 하구요. 부인은 알고 싶지 않으세요?”이 말에 소군연의 모친은 얼굴빛이 약간 변했고 영내문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스쳐 지나갔다.소만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싸늘한 시선을 거두어 그대로 복도 쪽으로 나왔다.영내문의 심장 박동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이런 자신의 심경이 소만리에게 행여나 들킬까 봐 걱정스러웠다.영내문이 잠시 망설이고 있는 동안 소군연의 모친은 이미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지금 뭐라고 했어요? 군연이 당한 교통사고의 주원인이라고 했어요? 주원인은 이 여자의 차를 몰았기 때문 아닌가요? 뭐 더 이상 할 말 있어요?”소군연의 모친 말에 소만리는 눈살을 찌푸렸다.“부인, 경찰이 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요. 경찰은 분명히 말했어요. 누군가가 예선의 차에 손을 대서 브레이크 고장으로 사고가 난 것이지 예선이
”예선아, 걱정하지 마. 소군연 선배는 반드시 좋아질 거야. 그리고 진짜 범인도 곧 체포될 거야.”소만리가 영내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영내문, 어제 경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고 하던데 경찰이 뭘 물어보던가요?”소만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영내문은 이 말을 듣고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 사람들에게 어떤 단서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며 말했다.“소만리, 경찰이 나한테 뭘 물어보든 그건 경찰 소관의 일이지 당신이 나한테 물어볼 권리는 없잖아요.”“그렇죠. 당연히 그럴 권리는 없죠. 그렇지만 내 남편은 있는 것 같은데요.”소만리가 말을 마치자 기모진이 그녀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기모진은 방금 주차를 하느라 소만리보다 조금 늦게 병실로 온 것이었다.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모진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기모진이 언제 경찰이라도 된 거예요? 소만리, 어디 감히 우리를 속이려는 거예요?”“난 당신들 속이려고 혈안이 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에요.”소만리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영내문, 당신은 경찰이 왜 당신을 찾았는지 알고 있잖아요. 그것도 아주 잘.”“소만리, 그게 무슨 뜻이죠?”소군연의 모친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가 가지 않아 원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당신 말하는 걸 듣자 듣자 하니까 우리 아들 사고가 내문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자꾸 헛소리하지 말아요!”“이 여자와 관계가 있죠. 아주 깊이.”소만리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고 기모진의 신분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말하는 걸 깜빡했었네요. 내 남편은 IBCI 고위 요원이에요. 경찰이 가져야 할 권리가 마땅히 내 남편에게도 있는 거죠.”영내문과 소군연은 모두 넋이 나간 듯 기모진을 바라보았다.기모진이 그런 신분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기모진의 신분에 대해 알고 있었던 예선에게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비록 영내문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