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겸은 최면 상태에 빠져 있는 소만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가 잘못 듣지 않았다. 소만리는 방금 누군가의 이름을 확실히 말하기는 했다.그러나 그 이름은 뜻밖에도 기모진이 아니었다.고승겸이 계획한 최면 과정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다.그는 소만리를 보면서 그녀의 마음을 자신이 이끄는 대로 끌어오려고 다시 한번 시도했다.“소만리, 다시 한번 더 물어볼게. 이 수정구 안에 누가 보여?”눈을 감고 있던 소만리는 고승겸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말했다.“여온이, 우리 딸 여온이가 보여.”고승겸은 같은 이름을 말하는 소만리의 대답을 듣고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딸 기여온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기여온은 지금 F국에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건강 상태는 어떤지 모든 것이 불분명한 상황이라 그녀가 이렇게 마음 졸이며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소만리의 반응에 고승겸의 최면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그는 임기응변이 빠른 사람이었다.그는 항상 자신의 최면술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데에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심리학에도 조예가 깊은 그에게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그는 눈앞에서 이미 최면 상태에 빠진 소만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최면을 건지 30분 정도 지났을 때 고승겸은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아래층으로 내려오려던 남연풍은 마침 고승겸이 소만리의 방에서 나오자 시중에게 휠체어 방향을 바꾸어 달라고 부탁하며 고승겸을 향해 소리쳤다.“고승겸, 거기 서!”고승겸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처음에는 남연풍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다가 남연풍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고승겸은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연풍을 바라보았다.“나한테 또 뭘 가르치려고 그러셔?”그가 차가운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비꼬았다.남연풍은 손가락을 들어 소만리의 방을 가리켰다.“뭐 하러 저기
”그런 거야.”고승겸은 단호하게 말했지만 눈빛만은 부드러웠다.“연풍, 당신은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어. 당신은 치료만 잘 하면 돼. 걱정하지 마. 돈이 얼마나 들든 마음에 두지 마. 내가 당신 다친 거 다 고쳐줄 거야. 내가 당신을 다시 일으켜줄 거라고.”고승겸은 결연하게 다짐하며 일어나 남연풍의 뒤로 다가가 휠체어를 천천히 밀었다.남연풍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그녀는 지금의 고승겸이 마치 무언가에 최면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복수만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승겸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연풍의 휠체어를 밀고 갔다.고승겸이 밀어준 휠체어를 타고 자신의 방으로 옮겨진 남연풍은 시종일관 마음을 놓지 못했다.아무래도 고승겸의 행동이 수상했다.그녀는 소만리가 지금 분명 고승겸에 의해 깊은 최면에 걸렸다고 확신했지만 깊은 최면에 걸린 소만리가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는 알지 못했다.남연풍이 방문을 나서려는데 시중이 그녀를 막았다.고승겸이 당분간은 아무데도 못 나가게 했다고 시중은 털어놓았다.결국 남연풍은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고승겸이 이런 지시를 내린 것에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로부터 이틀 후 남연풍도 뭔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밖이 매우 떠들썩했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남연풍은 때때로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들었다.의아해하던 남연풍이 시중에게 물었고 시중은 그제야 대답해 주었다.“겸 도련님 곧 결혼하실 거예요.”결혼?!남연풍은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미동도 하지 못했다.“딸깍.”이때 방 문이 갑자기 열렸다. 여지경이 들어와 시중을 밖으로 내보낸 후 남연풍의 곁으로 다가왔다.여지경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남연풍을 바라보며 남연풍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승겸이가 곧 소만리와 결혼하게 될 거야. 그냥 형식적인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여지경은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
”소만리...”남연풍은 천천히 걸어오는 소만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분명히 눈앞에 있는 소만리에게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소만리가 방 문을 들어서며 살짝 미소를 지었고 남연풍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당신이... 내 약혼자의 친구인가요?”“...”남연풍은 소만리의 말을 듣고 정신이 멍해졌다. 소만리가 최면에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지금의 소만리는 더 이상 남연풍이 알던 그 소만리가 아닌 것이었다.소만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다 고승겸의 지시에 따른 것이리라.남연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빤히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소만리는 남연풍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잠시 후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난 당신을 기억해요. 당신은 남연풍이죠. 당신과 나 사이에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승겸은 나에게 그것은 모두 지나간 일이며 그가 곧 나와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했어요. 우리 사이의 불미스러운 감정이 오늘 이 기쁜 결혼식을 계기로 사라졌으면 좋겠어요.”남연풍은 소만리의 말투에서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소만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고승겸은 소만리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성질과 기질을 모두 완전히 조작해 버렸다.눈앞에 있는 소만리는 전혀 원래의 소만리답지 않았다.눈앞의 그녀는 유순한 말투에 다정한 듯 사람을 대했다.누군가의 말에 아주 순종적인 온순한 소녀 같았다.소만리는 예전부터 그런 순종적인 소녀의 기질은 없었지만 지금의 표정과 얼굴은 시종일관 말갛고 온순해 보였다.남연풍은 고승겸이 소만리를 이런 성격으로 만들 줄은 몰랐지만 생각해 보니 고승겸이 이럴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성격의 소만리라야 고승겸은 그녀를 조종하기가 쉬웠을 것이다.예전의 소만리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잠시 후 남연풍은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당신 말이 맞아요. 과거에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든 그건 다 지난 일이에요.”남연풍은 잠시
여지경의 귓가에 기뻐하는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지경은 이를 듣고 소만리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았다.고승겸은 소만리의 의식에 깊은 최면을 걸었고 지금의 소만리의 머릿속에는 고승겸이 오랫동안 자신이 사랑했던 기모진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그녀의 사상, 눈빛 모두 허황된 허상에 가려져 버렸다.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기모진이다. 이 사실은 최면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일이다.그래서 고승겸이 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을 가려 버리는 것이었다.“그래,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구나. 축하해.”여지경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소만리는 이 말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눈을 들어 올렸다.순간 그녀의 눈동자 속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소만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오는 고승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승겸.”소만리는 소리쳤다. 마주 오는 남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기모진의 모습이 비췄다.그녀가 외친 이름은 고승겸이었지만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는 여전히 기모진을 향한 말이었다.고승겸은 입술을 오므리며 소만리에게 향했다.여지경은 이 모습을 보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왜 더 자지 않고. 내일은 바쁠 텐데.”고승겸은 다정한 목소리로 소만리에게 말을 걸었다.소만리에게 있어 왕자는 고승겸이었고 그녀의 눈 속에는 애정이 흘러넘쳤다.그녀의 얼굴에는 소녀 같은 수줍은 미소와 함께 발그레한 홍조가 번졌다.그야말로 풋풋한 소녀의 모습이었다.“당신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기뻐요.”소만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승겸은 그런 소만리를 보며 그녀가 얼마나 기모진을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가 지금 바라본 그녀의 사랑과 수줍음, 기쁨은 모두 기모진에게서 나온 그녀의 감정이지 자신에게서 비롯된 감정은 아니었다.이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그는 기모진이 부러워졌다.이런 감정은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아낄 때만 나오는 모습이기 때문이다.기모진을 생각하며 말할 때 소만리의 목
고승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남연풍이 휠체어를 멈추었다.남연풍이 자신의 말소리를 듣고 휠체어를 멈추자 고승겸의 얼굴에는 모처럼 밝은 미소가 번졌다.“연풍, 지금 당신 마음속엔 내가 고집불통에다 잘못도 깨닫지 못하는 나쁜 놈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당신은 내 평생 유일한 여자야.”고승겸의 말을 듣고 남연풍은 휠체어 스위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촉촉하고 영롱한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혔지만 그녀는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애써 참았다.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휠체어 스위치를 다시 누르고 현관 쪽으로 갔다.고승겸은 멀어지는 남연풍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심장이 차갑게 식는 듯했고 눈빛도 어둡게 가라앉았다.“기모진, 너도 곧 나의 이런 고통을 맛보게 될 거야.”고승겸이 혼자 중얼거리고 서 있는데 마침 그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다.그는 메시지를 힐끔 보더니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드디어 왔군, 기모진.”고승겸은 중얼거리면서 어디론가 출발했다.그가 문 입구에 다다르자 수행원들이 황급히 그를 향해 걸어왔다.“무슨 일이야?”고승겸이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기모진이 이미 문 앞에 도착해 있습니다.”수행원이 보고했다. 고승겸은 차갑게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했다.“난 이미 기모진을 기다린 지 오래됐어.”그는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밖으로 나갔다.그 수행원은 확신 없는 눈빛으로 고승겸을 바라보았다. 뭔가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기모진은 원래 바로 소만리를 찾으러 오려고 했지만 아들이 갑자기 납치되어 아들에게 가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이 모든 것은 고승겸이 시간을 끌 요량으로 일부러 파놓은 함정이라는 것을 기모진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납치된 아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기모진, 우리가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고승겸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앞쪽에서 들려왔다.기모진은 그 소리를 듣고 눈을 들어 거만한 고승겸의 모습을
아무리 무서운 호랑이 굴이라고 하더라도 기모진은 의연하게 뛰어들었을 것이다.기모진의 이런 심리를 고승겸도 진작에 꿰뚫어보고 있었다.고승겸은 기모진 앞에서 길을 안내하다가 거실에 도착하자 시중에게 지시했다.“미래의 사모님을 모시고 내려와.”시중은 고승겸의 말을 듣고 즉시 위층으로 올라가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미래의 사모님?기모진은 마음속에 의문이 들었다.전에 안나와 고승겸이 결혼은 했지만 안나는 지금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감옥에 있는 상태였다.아마 고승겸은 그동안에 벌써 안나와의 혼인 관계를 취소했을 것이다.그런데 그가 벌써 또 결혼을 했단 말인가?그럼 신부가 남연풍?기모진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파도를 일며 출렁이고 있었다.고승겸은 기모진의 눈빛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고 곁눈으로 2층을 힐끔 쳐다보았다.“기 선생, 나와 결혼할 여자가 누군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야? 곧 만날 수 있을 거야.”고승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계단 위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기모진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고 눈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소만리!”기모진은 소만리의 이름을 부르며 계단을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그러나 소만리는 경계하며 발걸음을 멈추었고 의혹에 가득 찬 눈빛으로 기모진의 얼굴을 보다가 고승겸에게 시선을 옮겼다.“승겸, 이 사람 누구야? 이 사람이 날 부른 거야?”“...”기모진은 이 말을 듣고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고승겸이 방금 한 말을 그제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고 고승겸이 말한 깊은 최면이라는 것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고승겸은 침착하게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소만리에게 다가가 말했다.“소만리, 겁내지 마. 내 친구니까 걱정할 거 없어.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온 거야.”고승겸의 설명을 들은 소만리는 그제야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그랬구나.”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기모진에게 다가가 손을
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기모진을 돌아보았다.고승겸의 시선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고승겸은 기모진이 그녀에게서 뭔가 듣기 위해 미끼를 던지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고승겸은 걱정하지 않았다.비록 전문적인 최면술사라고 하더라도 소만리에게 걸린 깊은 최면은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하물며 최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기모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그게 무슨 뜻인지...”소만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모진을 바라보았다.“내가 뭔가를 여쭤봐야 하는 건가요?”기모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아직 내 이름을 묻지 않았잖아요.”소만리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기모진이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그러나 소만리는 웃으며 물었다.“성함이 어떻게 되세요?”“기모진, 기모진입니다. 내 이름.”기모진은 얼른 소만리의 질문에 대답했고 곧이어 계속 말을 이었다.“내 아내는 날 모진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해요.”“...”소만리는 기모진의 깊고 아름다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기 선생님,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혹시 부인께서 함께 오시지는 않으셨나요?”기모진은 소만리의 밝고 활기찬 눈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녀도 왔어요.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요.”소만리는 놀라워하며 기모진 뒤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순간 기모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러나 소만리는 추궁할 뜻은 없었고 예의를 갖춰 기모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와 승겸의 결혼식에 와준 기 선생님과 부인께 감사드려요.”기모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소만리씨는 나에게 고맙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 사이에 평생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요.”이 말을 듣자 소만리는 다시 한번 물었다.“기 선생님은 왜 그런 말을 하세요?”“네? 잊었어요? 그게 아니라면 혹시 고 선생
소만리는 지금 자신의 기억 속에 기모진이라는 사람은 없지만 기모진의 언행으로 보아 그가 왠지 고승겸과 잘 아는 사이라는 느낌이 들었다.이때 마침 시중이 들어와서 여지경이 두 사람에게 사당에 다녀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고승겸은 시간을 지체하기 싫어서 소만리를 데리고 나갔고 떠나기 전에 경호원들에게 기모진을 잘 감시하라고 일러두었다.사실 고승겸이 처음에 기모진을 일부러 집으로 불러들여 소만리를 보게 한 것은 기모진의 마음을 좀 더 힘들게 하려고 의도한 것이었다.그러나 그의 목적은 달성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모진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버렸다.하지만 고승겸은 마음에 깊이 담아두지 않았고 옆에 있는 소만리를 보고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기모진은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그의 시선은 줄곧 소만리를 따라다니고 있었다.소만리가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기모진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소만리,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서로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야.기모진은 묵묵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을 굳혔고 자신을 향한 소만리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확신했다.다만 이번 기회에 고승겸이라는 작자는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기모진은 다시는 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고 소만리가 다시 위험에 빠지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던 기모진은 그제야 발걸음을 옮겼다.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고승겸의 경호원이라는 것을 알았다.기모진은 담담하게 앞으로 걸어갔고 깊고 날카로운 눈빛들이 그의 온몸을 주시하고 있었다.아래층 경호원들은 기모진의 주변을 살피며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기모진은 계속 걸어가다가 어느 방 입구를 지날 때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손으로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어, 선생님.”어떤 시중이 갑자기 복도 반대편에서 달려와 그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