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응은 손에 더욱더 힘을 주었고 소만리는 순간 정말로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이미 한 번 저세상 문턱까지 갔다 온 소만리가 아닌가!이렇게 또 누군가에게 유린당할 그녀가 아니었다.소만리는 다리를 들어 양이응의 배를 거세게 걷어찼다.“악!”양이응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소만리의 발길에 그대로 차여 바닥에 나뒹굴었다.“콜록콜록.”소만리는 숨을 거세게 몰아쉬며 거친 숨소리로 기침을 연발했다.두 손이 묶여 있어 움직이기 불편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문쪽으로 달려갔다.지금 양이응의 상태는 이성을 잃은 미치광이 딱 그 모습이었다.양이응은 정말 눈에 뵈는 게 없어 보였고 살인이라도 저지를 사람으로 보였다.그러나 소만리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그녀는 낡은 집을 뛰쳐나왔고 바닷바람이 싸늘하게 불어왔다.습하고 차가운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소만리의 뼛속까지 그 서늘한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소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갔다.찬바람이 앞에서 쉴 새 없이 그녀를 향해 몰아쳤다.소만리는 마스크도 쓰고 있었고 아까 양이응에게 심하게 목이 졸린 탓인지 달릴수록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이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다행히 두 남자가 소만리의 다리까지는 묶지 않아서 적어도 그녀는 지금 도망이라도 칠 수 있었다.한참을 달린 후 소만리는 양이응이 쫓아오는 기색이 없자 잠시 멈추고 쉬려고 했지만 불과 몇 초 만에 그녀는 그녀의 뒤를 바짝 뒤쫓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양이응인 줄 알고 다시 뛰기 시작했지만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뭔가 둔탁한 것이 그녀의 목덜미를 가격하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소만리는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져 진흙투성이의 땅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콰당탕.”안나는 손에 든 각목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고 그제야 뒤쫓아오는 양이응을 바라보며 건방진 눈빛으로 말했다.“오호, 이 여자가 진짜 소만리였구나. 넌 가짜였고
그린 것 같은 아름다운 소만리의 눈썹을 바라보며 양이응은 음흉한 미소를 흘렸고 이윽고 힘껏 소만리를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안나는 멀찍이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당연히 양이응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양이응이 소만리를 물속에 밀어 넣는 모습을 지켜본 안나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살인이라고 하면 너무 끔찍하지만 이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제거하는 것일 뿐이었다.양이응은 소만리를 밀어 놓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한 바닷물을 보며 뒤돌아섰고 안나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소만리가 죽자 양이응은 마음이 너무나 편해졌다.그녀는 경연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부터는 진정한 소만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왜냐하면 이 얼굴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그녀 단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었다.양이응은 비를 맞으며 기 씨 본가로 돌아왔다.기모진이 집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스스로 진정한 소만리가 된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침실로 돌아왔다.그녀는 사워를 한 후 소만리의 옷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소만리만의 특유의 웃음을 연습하며 방을 나왔다.양이응은 거실에 한가롭게 앉아 차를 마시며 쿠키를 먹기 시작했다.그때 위청재가 방금 유치원에서 기란군과 기여온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위청재는 거실에 앉아 쿠키를 먹고 있는 양이응을 보고 한눈에 소만리라고만 생각했다.그런데 위청재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기모진이 이틀 전에 한 말과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위청재는 거실에 들어가지 않고 현관에 서서 기란군과 기여온에게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 했다.두 꼬마는 위청재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집 밖으로 다시 나갔다.위청재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양이응을 보고 그제야 신발을 갈아 신고 걸어왔다.“소만리, 언제 돌아왔어? 네가 요 며칠 동안 일이 있어서 해외 출장을 갔다고 모진이 그러던데.”양이응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위청재의 말에 양이응은 문고리를 움켜쥔 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게 닫힌 방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래서 일부러 위청재가 자신을 이 방에 가두었다고?위청재가 이미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을까?그럴 리가!위청재는 분명히 아주 멍청해!그전에도 그녀를 지켜줬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그렇게 똑똑하게 그녀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있단 말인가?“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 소만리예요.”양이응은 일부러 애처로운 말투로 소만리인 척 연기를 이어갔다.그러나 문밖에서 위청재의 냉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너 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어? 네가 가짜인 줄도 모르는 그런 멍청이로 날 생각했니?”“...”양이응의 얼굴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자신의 정체가 들통났다고는 정말이지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화가 난 듯 발을 들어 문을 힘껏 걷어찼다.“문 열어요! 안 그러면 여기 방 안에 있는 물건들 죄다 부숴버릴 거야!”이 말을 들은 위청재는 완전히 자신의 생각을 확실히 굳혔다.역시 이 여자는 소만리가 아니었다!이런 사악한 여자가 이 집에 오래 머물렀다고 생각하니 위청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위청재는 매번 이 여자를 옹호했었다.그런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니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그녀는 애써 참았다.양이응이 문을 발로 차고 욕을 해도 위청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위청재가 문을 열 의사가 전혀 없자 양이응도 당황하기 시작했다.양이응은 원래 소만리를 제거하기만 하면 자신이 진정한 소만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이후에는 기 씨 안주인이 되어 경도 제일의 사모님이 될 줄 알았다.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위청재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킬 줄이야!설마 자신의 얼굴이 좀 이상해졌나? 어떻게 위청재가 한눈에 그녀가 가짜인 걸 알았지?양이응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어쨌거나 지금 그녀는 오로지 도망가
도우미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양이응은 발바닥에 불이 난 듯 현관을 뛰쳐나왔다.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쏜살같이 곧장 대문으로 달려갔다.그런데 그녀는 몇 걸음 뛰기도 전에 갑자기 발목에 뭔가 박힌 듯 아파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넘어졌다.다시 일어나 뛰려고 하는 순간 기모진의 훤칠한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양이응은 깜짝 놀라며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기모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기란군, 정말 잘했어.”멀리서 위청재가 기란군을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이응은 발 옆에 있는 장난감 부메랑을 보았다.그제야 기란군이 부메랑을 던져 그녀의 발목에 떨어뜨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일어서려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지만 기모진은 갑자기 머리를 숙이고 손을 뻗어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양이응은 숨이 턱 막혔고 기모진의 매서운 눈초리에서 깊은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기모진은 소만리와 거의 똑같은 얼굴로 성형한 그 괴물 같은 얼굴을 마주하자 왠지 모르게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밀려왔다.이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은 소만리에 대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사실 그는 당황하고 두려움에 벌벌 떨며 불안해하는 소만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양이응, 너 정말 대단하군. 감히 여길 다시 들어오다니!”기모진은 얼음송곳처럼 날카롭게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그가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는 차마 이 낯짝을 마주 볼 수 없었다.양이응은 놀라 두 눈을 크게 떴지만 비가 들이치는 바람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게다가 지금 기모진이 멱살을 잡고 있어서 그녀는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말해! 왜 여기 다시 돌아온 거야? 어딜 감히 네가?”기모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추궁했다.양이응이 숨이 막힌 듯 가쁜 숨을 몰아쉬자 기모진은 차갑게 손을 뿌리치며 그녀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양이응은 비에 젖은 땅바
”뭐라고?”위청재는 크게 놀라 양이응에게 달려들어 옷깃을 움켜쥐었다.“뭐라고? 다시 말해봐! 너 소만리를 어쨌다고!”위청재는 다급하게 양이응을 추궁했다.양이응은 고개를 들어 기모진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들키면 어때?졌으면 어때?소만리가 그녀의 손에 의해 바닷물로 끌려들어 가는 순간 그녀는 이미 이긴 것이었다!“기모진, 당신 지금 마음이 몹시 혼란스럽고 괴로워 죽겠지?”양이응이 약을 올리며 말했다.“두어 시간 지났으니까 아마 지금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는 죽었을 거야. 내가 소만리를 바닷물에 밀어 넣었을 때도 이미 의식이 없었거든.”“너 정말 소만리를 바닷물에 밀어 넣었구나!”위청재는 소리치며 말했다.“어떻게 이런 악랄한 여자가 있을 수 있어!”위청재는 화가 나서 손을 들어 양이응의 얼굴에 세차게 뺨을 내리쳤다.양이응은 고통스럽게 소리쳤고 고개를 돌려 표독한 시선으로 위청재를 노려보았다.“헛, 날 때려? 네가 날 때려죽여도 소만리는 살아 돌아오지 못해!”그녀는 위청재에게 모진 말을 하면서 혹한이 가득 서려 있는 기모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소만리, 그 천한 년! 경연한테 가서 속죄나 하라지!”“그 입 다물어!”아까부터 화가 치밀어 오르던 기모진이 드디어 폭발했다.양이응의 말을 듣은 기모진은 그녀에게 소리쳤고 동시에 그녀의 가슴을 짓밟고 목을 졸랐다.매처럼 날카롭고 가시 돋친 그의 눈빛이 두려움에 떠는 양이응의 눈빛을 압도하고 있었다.“소만리가 어디 있는지 어서 말해!”양이응은 입술을 깨물었고 점점 얼굴이 붉어지더니 호흡이 가빠졌다.온몸에서 살기를 뿜어내는 기모진의 모습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지금 당장 경연이 있는 곳으로 보내줄 테니까!”양이응은 자신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모진의 이 말과 어둠을 삼킬 듯한 그의 눈빛을 보니 점점 그녀도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기모진은 소만리가 사실은 이미 뭍에 올라왔을 거라는 환상 아닌 믿음을 갖고 싶었다.그러나 어쨌든 이미 두어 시간이나 지나버렸다.만약 정말로 그녀가 이 바닷물에 빠졌다면 아마 그녀는 이미...아니다.기모진은 황급히 자신의 이런 헛된 생각을 멈추었다.그렇지만 이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는 정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비를 머금은 겨울바람 속에 그는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마음속으로 소만리의 이름을 소리 없이 되뇌이며 넋을 잃은 듯 서 있었다.위청재는 집에서 기모진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가장 바라는 것은 기모진이 소만리를 데리고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이었지만 무심하게도 날은 이미 저물어져 가고 있었고 기다리던 기모진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하염없는 위청재의 기다림은 다음날에도 이어졌다.그녀는 소식이 없는 기모진을 찾아가 소만리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낯선 전화를 한 통 받았다.혹시라도 소만리에 대한 소식일까 봐 얼른 전화를 받았지만 기자들이었다.위청재는 기자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마음이 없어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지는 기자의 말에 전화를 끊으려던 손길을 멈추었다.“기모진과 소만리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어젯밤 소만리가 몇몇 낯선 남자와 함께 클럽을 드나드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요.”“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 며느리와 아들은 아무 문제가 없으니 헛소리 지껄이지 마!”위청재는 불만 섞인 경고를 던지고는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몇 초도 되지 않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이번에는 다른 매체에서 온 전화였다.위청재는 끈질긴 기자들의 태도에 참을 수가 없어서 결국은 아예 전화를 꺼버렸다.그런데 방금 기자들이 말한 내용을 돌이켜보니 위청재는 점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잠시 후 그녀는 도우미들이 공손히 ‘도련님'이라고 인사하는 것을 들었다.위청재는 눈을 들어 기모진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그
양이응은 잠시 멍한 눈으로 휘몰아치는 검은 눈썹과 빼어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누구세요? 내 방문 앞에 서서 뭐 하세요?”양이응이 입을 열었다.이 말을 들은 고승겸의 매서운 눈빛이 반짝였고 이어 기품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당당하신 기 씨 작은 사모님이 호텔에서 밤을 지새우다니, 당신과 기모진의 사이가 좀 불안불안한가 봐.”양이응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시큰둥한 미소를 지었다.“맞아요. 저와 남편은 좀 불안한 관계죠. 그래서 곧 이혼할 지경에까지 왔구요. 왜냐하면 저도 결코 편안한 여자는 아니거든요. 외부에서 생각하는 뭐 그런 현모양처도 아니고 그냥 지조없는 여자예요.”고승겸은 양이응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기 씨 집안 작은 사모님 말은 정말 뜻밖인데. 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는 여자는 처음 봤어.”“그래요? 지금 봤잖아요?”양이응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고 계속 소만리의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소만리라는 여자가 원래는 이렇게 뻔뻔했답니다. 난 오는 남자 막지 않아요. 누구라도 날 만족시켜주면 돼요. 지금까지 기모진은 날 전혀 만족시켜주지 못했거든요.”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저질스러운 말들을 늘여놓던 양이응은 눈빛을 반짝이며 고승겸을 바라보았다.“잘생기셨네. 일부러 날 보러 온 거예요? 기자예요? 너무 잘생겼다. 지금 당신이랑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난 상관없어요. 나랑 지금 재미난 일 만들어 볼래요?”양이응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고승겸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하지만 그의 몸에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온몸에 퍼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눈을 들어 얼음처럼 차가운 고승겸의 눈빛을 알아채고는 갑자기 얼른 손을 떼었다.고승겸은 싸늘한 눈빛으로 양이응을 스치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양이응도 서둘러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고승겸은 어지러이 널려 있는 옷가지와 배달 음식 쓰레기들을 보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그러나 그
”하나 물어볼게. 이름이 뭐야?”“양이응이라고 해요.”양이응은 소만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진심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그러자 이 대답을 들은 고승겸은 만족스러운 듯 이어 물었다.“왜 소만리와 똑같이 생겼지?”“성형을 했으니까요.”“왜 소만리와 똑같은 얼굴로 성형했지?”“내가 좋아하던 남자가 만들어 줬어요. 왜 날 소만리의 얼굴로 성형했는지는 잘 몰라요.”“그 남자가 누군데?”“경연이에요.”경연.고승겸은 요트 폭발로 죽은 남자를 금방 떠올렸다.그의 눈빛은 다시 양이응의 얼굴로 떨어졌다. 이미 초점 없는 그녀의 눈빛은 단단히 그의 최면에 빠져들었다.고승겸은 한때 소만리에게도 최면을 걸었지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소만리는 의지가 강해서 걸려들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소만리와 달라서 쉽게 최면에 빠져들었다.고승겸은 몇 초 동안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다시 물어볼게. 넌 왜 소만리의 이름으로 그 많은 남자들과 클럽에서 놀려고 하는 거야? 기모진이 네가 가짜라는 걸 알고 있어?”양이응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승겸의 뜻에 따라 순순히 대답했다.“소만리는 이미 서쪽 폐부두가 근처 바다에 떠다니고 있을 거예요. 그녀가 죽으면 내가 진짜 소만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모진이 내가 가짜라는 걸 알아 버렸어요. 기모진이 날 잡으려고 했고 난 도망쳤어요. 잡히기 전에 소만리의 명성을 다 더럽혀 버릴 거예요.”이 말을 들은 고승겸의 눈빛이 달라졌다.“네가 소만리를 죽였어?”“그래요. 아마 죽었을 거예요.”양이응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치 감정 없는 로봇처럼 고승겸의 질문 하나하나에 순순히 답했다.“언제 소만리를 바닷물에 밀어 넣었어?”“어제 해 질 녘.”“네가 두 남자를 시켜 소만리를 납치하라고 한 거 맞아?”“내가 아니라 그건 다른 여자가 한 짓이에요. 그 여자가 날 찾아와서 소만리를 처리하는 일에 힘을 합치자고 해서 승낙했어요.”“그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