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는 정신없이 잠들었고 목이 간지러운 느낌이 났던지 본능적으로 손으로 목을 살짝 긁는 것 외에는 좀체 깨지 않고 잠에 빠져 있었다.기모진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 소만리를 보며 말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자신이 지금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이 된 느낌이다.뭔가 소만리에 대한 진상을 알아보고 싶어서 가만히 훔쳐보고 있는 것이었다.하룻밤을 보내면서 소만리는 꿈을 꾸었다.기란군과 기여온이 그녀의 현재 얼굴을 보고 놀라 엉엉 울었고 막내아들마저 놀러 그녀 곁에서 도망쳐 가짜 소만리에게 달려가 안겼다.양이응은 승자의 자세로 오만방자하게 웃으며 눈물짓고 있는 소만리를 내려다보았다.소만리가 악몽으로 괴로워하는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미스 천, 미스 천.”그녀가 눈을 떠 보니 기모진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있는 것이 보였다.생각지도 못하게 가까운 거리에서 기모진의 눈을 마주하니 소만리의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에 대한 설렘은 점점 더 강해졌다.소만리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기모진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일어났어.”“...”소만리는 그제야 자신이 지난밤 기모진의 서재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게다가 소만리의 몸 위에는 따뜻한 담요까지 곱게 덮여 있었다.“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언제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소만리는 급하게 일어나며 해명했다.“어젯밤에 내가 너무 많은 일을 시켰으니 피곤해서 곯아떨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기모진의 말투는 봄바람처럼 보드랍고 따뜻했다.“씻고 뭐 좀 먹어. 보니까 장모님은 벌써 일어나신 것 같아.”“여사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늦잠을 자서 정말 죄송해요.”소만리는 사과했다.“죄송해요, 사장님. 그럼 전 여사님한테 얼른 가 보겠습니다.”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황급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빠른 걸음으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기모진의 눈빛에 햇살 같은 부드러움이 흘러내
소만리와 닮아서 왠지 특별한 느낌이 드는 걸까?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문을 나섰다.소만리도 자신을 향한 모현의 특별한 관심을 느꼈고 그 눈빛에 마음의 상처가 조금은 치유되는 것 같았다.힘없이 낮게 뜬 눈으로 사화정은 모현이 떠나는 방향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소만리도 덩달아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여사님, 이제 우리도 밖으로 산책 나가 볼까요?”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뒤돌아보니 천진난만하고 커다란 눈망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누나, 나랑 동생도 같이 가도 돼요?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아빠가 놀아줄 시간이 없대요.”기란군은 기대에 찬 눈으로 소만리를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소만리도 아이들과 잘 지내고 싶어서 곧바로 승낙했다.“그래, 우리 같이 가자.”“누나 참 좋아.”기란군이 옅은 보조개를 움푹 드러내며 기여온의 손을 잡고 소만리의 뒤를 따랐다.양이응은 방에서 나오다가 대문 앞의 이 광경을 보고 입꼬리를 치켜세우더니 갑자기 뭔가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기 씨 집 근처에는 공원이 있었다.소만리는 사화정이 앉은 휠체어를 밀면서 기여온 기란군 남매와 한가로운 정을 나누며 걸어갔다.늦가을의 따스한 햇살이 온몸에 부서져 내렸다.소만리는 시선을 낮추어 사화정을 바라보다가 발랄하고 귀여운 두 남매에게 시선을 옮겼다.보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얼굴에 퍼져 모든 상처가 아무는 것 같았다.아침 시간이라 공원에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소만리는 한쪽에 자리를 잡고 사화정을 호숫가 옆 나무 아래로 데리고 왔다.기여온은 껑충껑충 뛰면서 나무 아래로 달려와 바닥에 떨어진 작은 분홍 꽃잎을 주워 들고 돌아서서 사화정 앞으로 달려와 꽃잎을 건넸다.사화정은 손바닥을 펴고 살짝 웃으며 꽃잎을 받았다.사화정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소만리는 순간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내뱉지 못
갑작스러운 고함소리에 소만리는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그녀가 올려다보니 마스크를 쓴 남자가 기여온을 강제로 안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기란군은 기여온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라 성인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고 단번에 내동댕이쳐졌다.“기란군!”소만리가 급히 달려가 호숫가에 내동댕이쳐진 기란군을 붙잡아 안았다.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기란군을 바라보았다.“기란군,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얼른 엄마한테 말해, 아니 누나, 누나한테 말해봐.”기란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여온이 끌려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소만리는 벌떡 일어나 기란군을 사화정 곁으로 데려갔다.“기란군, 아빠한테 얼른 전화해. 누나는 지금 여온이 뒤를 쫓을 테니까!”소만리는 기란군에게 핸드폰을 쥐여준 뒤 기여온이 끌려가는 방향으로 달려갔다.“누나, 조심해!”기란군이 소만리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고 이내 사화정의 곁을 지키며 기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사화정도 어느새 눈살을 찌푸리며 멀어져 가는 소만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기여온은 왜 항상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끌고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도 매번 이런 상황이 싫었지만 반항할 능력이 없었다.“아빠, 아빠.”기여온은 끊임없이 아빠를 불렀다. 그녀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그 이름, 아빠.소만리는 기여온을 계속 쫓아갔고 길목까지 다다랐을 때 그 납치범이 길가에서 차를 불러 기여온을 안고 타는 모습을 보았다.소만리도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이 곧장 차를 불러 따라갔다. 마음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이번에는 또 누가 기여온을 납치한 걸까? 왜? 돈 때문에?머릿속에 불안한 추측들로 가득 찬 소만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앞에 가는 차를 주시했다.소만리가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길목에서 지켜보던 양이응은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간특한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운전기사에게 너무 빨리 운전하지 말라고 하고 그
”여온아, 괜찮아. 걱정하지 마. 언니가 지금 집에 데려다줄게.”“어어어”기여온은 흐느끼는 소리를 냈고 소만리는 처음에는 이 소리가 기여온이 겁에 질려서 내는 소리인 줄 알았다.그런데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느낌이 들었고 왜 기여온이 그런 소리를 냈는지 알게 되었다.방금 나갔던 그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소만리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남자는 큰 몽둥이를 들고 자신을 치려고 했다.소만리는 급히 기여온을 안고 한쪽으로 몸을 피했다.“당신 누구야? 왜 아이를 괴롭혀? 뭘 하고 싶은 거야!”소만리는 기여온을 감쌌다.자신도 겁이 나고 불안한 마음이 솟구쳐 올랐지만 그런 내색을 얼굴에는 절대 내비치지 않았고 오히려 남자에게 서슬 퍼런 눈빛으로 물었다.건달 같은 남자가 담배를 한 대 물고 차가운 미소를 만면에 드리우더니 다짜고짜 몽둥이를 들고 소만리를 향해 내리쳤다.소만리는 기여온을 꼭 껴안고 몽둥이를 피했고 빠른 걸음으로 문으로 달려갔다.“여온아, 겁내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가 너 다치지 않게 해 줄게.”소만리는 겁에 질린 기여온을 달래며 품에 안았다.“흥, 어디로 뛰어가나 보자!”뒤에서 거들먹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만리가 뒤돌아보니 흉악스러운 표정을 하고 남자가 바짝 뒤쫓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기여온을 안고는 빨리 달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소만리는 기여온을 내려놓았다.“여온아, 빨리 달리는 거야. 언니가 곧 여온이 따라갈게!”기여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소만리의 전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 눈을 바라보니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여온아, 어서, 빨리 가!”기여온은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솟구쳐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맑고 깨끗한 기여온의 큰 눈이 소만리를 뚫어져라 보더니 갑자기 작은 입을 열었다.“엄마.”“...”기여온이 지금 이때 자신을 엄마라고 부를 줄이야!단 두 글자였을 뿐인데 그 말은 소만리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평
소만리의 목을 움켜쥔 건달은 뒤에서 뭔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건달이 뒤돌아보자마자 바로 왼쪽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아얏!”건달은 비명을 질렀고 소만리의 목을 조르던 손에 힘이 풀렸다.건달이 막 욕지거리를 퍼부으려고 고개를 들자마자 누군가가 옆에서 그를 발로 걷어찼고 건달은 바로 진흙탕에 넘어졌다.건달은 아파서 기어 나오지도 못한 채 진흙투성이가 되었다.“콜록콜록.”소만리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숨을 쉬기가 괴로운 듯 연거푸 기침을 했다.기모진은 쏜살같이 소만리의 곁으로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미스 천, 괜찮아? 저놈이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소만리는 힘겹게 기침을 하다가 기모진이 자신을 걱정하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여온이, 여온이가 달려갔어요. 어서 그 아이를 찾아야 해요.”그녀는 힘겹게 팔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고개를 들어보니 고승겸도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기모진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고승겸을 보았고 소만리를 감싸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소만리는 기모진이 잠시 넋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이자 얼른 상기시켜 주었다.“사장님, 어서 여온이를 찾아야 해요!”기모진은 마지못해 소만리에게서 손을 떼고 발걸음을 옮겼고 마침 고승겸을 스쳐 지나갈 때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고승겸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그러고는 기모진은 이내 빠른 걸음으로 소만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고승겸은 기모진을 돌아보다가 소만리에게 시선을 돌렸다.“당신 정말 대담해.”고승겸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기모진은 당신이 복수할 대상인데 그의 딸을 지키느라 자신의 안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일을 하다니.”소만리는 이 말을 듣고 계속 기침을 하다가 감정을 추스른 다음 입을 열었다.“아이가 무슨 죄예요. 아무리 아빠가 밉다고 해도 아이를 미워해선 안 돼요. 겸 도련님도 아이가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면 저처럼 똑같이 했을 거예요.”“그
기모진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었다.기여온은 소만리를 향해 계속 말했다.“엄마, 엄마.”기모진은 깜짝 놀랐다. 기여온이 엄마라는 말을 하다니.그러나 기모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여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길가에 주차된 차로 계속 걸어갔다.기모진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본 소만리는 그제야 고승겸에게 말했다.“겸 도련님이 어떻게 여기 나타날 수가 있어요? 설마 겸 도련님이 몰래 계속 경호원처럼 날 보호하고 있었던 거예요?”소만리는 사실 감시라는 단어를 쓰고 싶었지만 우회적으로 보호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승겸의 좁고 긴 검은 눈동자와 소만리의 눈동자가 마주치자 고승겸은 발걸음을 옮겼다.“조금이라도 빨리 얼굴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지금 나랑 같이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소만리는 자신의 얼굴에 매일 정기적으로 소독하고 약을 갈아줘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 남자가 굳이 일부러 그녀의 얼굴 상처 소독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별장으로 돌아온 후 의사는 고승겸의 지시대로 곧 들어와서 소만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오늘은 마취를 하지 않아 따끔따끔한 통증이 얼굴 전체에 퍼지는 것 같아 꽤나 아팠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청량한 느낌이 들기까지 해서 소만리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치료가 끝난 후 소만리는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상처 처리가 끝난 직후라 그런지 아직 볼이 빨갛게 부어올라 전보다 더 못생겨 보였다.“육 선생님, 완전히 딱지가 앉으려면 얼마나 더 걸릴까요?”소만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곧 아물 거예요.”의사의 대답은 소만리에게 한 줄기 희망을 심어 주었다.그 말과 함께 고승겸이 방으로 들어왔다.소만리의 얼굴을 본 고승겸은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말했다.“잘 회복되고 있군.”잘 회복되고 있다는 고승겸의 말에 소만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는 의사를 내보냈다. 방 안에 그와 소만리 단둘이 남게 되자 그가 물었다.“기모
소만리는 자신에게 이런 말을 걸어오는 여자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그 여자의 눈앞으로 다가갔다.어둑어둑한 가로등 아래 소름 끼칠 정도로 자신과 똑같이 생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였다.섬뜩하고 괴상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양이응은 대담하고 예리한 눈빛으로 소만리를 훑어보았다.“소만리, 너인 줄 알았어!”양이응은 결심이 선 것처럼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소만리는 침착하게 양이응에게 다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사모님, 소만리는 사모님 이름 아니었나요? 그런데 지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설마 어제처럼 또 선을 넘는 짓을 하는 거예요?”“흥.”양이응은 냉소를 머금고 팔짱을 낀 채 도도한 자세로 소만리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네가 소만리가 아니라면 누가 그 작은 꼬맹이 때문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목숨을 내놓겠어?”양이응은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도발하며 말했다.“소만리, 내가 알려주지. 네 딸을 안고 도망간 남자는 내가 돈을 주고 고용한 남자야. 네가 소만리인지 아닌지 테스트해 보고 싶었거든. 네가 보인 행동들이 날 너무나 흡족하게 만들었어. 역시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았어.”양이응은 마치 자신이 총명하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아주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소만리도 그 납치범이 누군가의 사주로 그런 짓을 벌였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양이응이 자신을 떠보려고 이런 술책을 벌일 줄은 몰랐다.양이응의 의기양양한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소만리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그러나 소만리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서 집 안을 바라보았다.설마 식구들이 안에 아무도 없는 건가?그래서 양이응이 이렇게 대담하게 나오는 걸까?아마도 그런 것 같다.“소만리, 너 말해봐! 경연이 도대체 어떻게 죽은 거야? 네가 죽인 거지!”양이응은 갑자기 달려들 듯 소만리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어둠 속에서도 그 여자의 얼굴에 가득한 흉악함은 가려지지 않았다.양이응은 갑자기 소만리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움켜쥐며 매서운 눈빛을 쏘아붙
”입 다물어!”양이응이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그녀는 갑자기 감정이 통제 불능 상태로 빠진 사람 같았다.“소만리, 어서 말해. 경연이 도대체 어쩌다 죽게 되었는지. 너지? 너야! 너 때문에 경연이 죽은 거야! 어서 말해!”양이응은 다시 손을 뻗어 소만리의 어깨를 움켜쥐었고 감정의 통제 능력을 잃은 미치광이처럼 야만적으로 소만리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소만리는 양이응의 손을 잡고 그녀를 제압했다.“양이응, 잘 들어. 경연의 죽음은 사고였어. 누구와도 상관없는 일이었다구. 그가 선택한 길이었어.”“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경연은 너한테 죽임을 당한 거야! 소만리, 넌 정말 못되고 천박한 여자야!”양이응은 온몸에 힘이 들어가 미친 사람처럼 윽박질렀고 급기야 손을 들어 소만리의 얼굴을 때리려고 했다.소만리도 지지 않고 손을 들어 양이응의 얼굴을 찰싹 때리며 자신의 몸을 움켜쥐고 있던 양이응의 손을 뿌리쳤다.양이응은 비틀거리며 두어 발자국 뒤로 넘어졌다.그녀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만리를 노려보았다.양이응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아픈 뺨을 만지작거리더니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터뜨렸다.“소만리, 이미 너랑 이렇게 된 이상 빙빙 돌지 않겠어! 네가 경연을 죽였으니 너도 기모진과 네가 낳은 세 아이들이 어떻게 지옥에 떨어지는지 똑똑히 봐!”소만리는 화를 가라앉히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네가 정말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모진이 서재에서 자지는 않았을 거야. 양이응, 내가 나타나고부터 모진은 뭔가 나에게 느낀 거야. 그것은 한편으론 모진이 너한테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양이응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이내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소만리, 정말 기모진이 밤마다 서재에서 잔다고 확신할 수 있어? 잘 들어. 네가 이 집에 오기 전 이미 난 네 남자와 밤을 보냈어!”이 말을 꺼내자 양이응은 소만리의 표정이 확연히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