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디죠?”소만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남자의 걸음걸이가 서서히 느려지며 그는 살짝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강직하고 완벽해 보이는 턱선은 빛을 받아 더욱 유려하게 빛나고 있었다.“여기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집에 가고 싶으면 어서 눈물부터 거두어.”그의 목소리는 그의 기질만큼이나 차가웠다.소만리는 손수건을 움켜쥐었다.“당신이 날 구한 건가요?”“마침 그쪽을 지나가던 길이었어.”그의 대답은 군더더기가 없이 똑떨어졌다.소만리는 그때 요트가 폭발하기 전에 확실히 다른 요트가 접근해 오는 것을 보았다.아마 이 남자는 그때 그 요트에 타고 있다가 마침 경연이 타고 있던 요트가 폭발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구했을 것이다.“고마워요.”소만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감사의 말을 전했다.그리고 동시에 그때 요트에 타고 있던 경연을 떠올렸다.“내 친구, 내 친구도 구했나요?”“친구?”남자가 의아해하며 돌아섰다.“그때 요트를 몰고 당신을 쫓아오던 그 남자 말인가?”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네. 맞아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만리를 바라보다가 몇 초가 지나서야 대답했다.“당신 몸이나 걱정해.”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잠시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이렇게 많이 다쳤으니 분명 경연도 많이 다쳤을 것이다.하지만 경연은 지금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그녀도 알 길이 없다.그녀는 손수건을 들어 살며시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그렇다. 이렇게 울고 있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풍파를 겪어왔는데 이 정도로 두려워할 그녀가 아니다.소만리는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밤이 되자 헛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정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그녀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갑자기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녀는 예전에 기모진도 요트 폭발 사고를 겪었던 일을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진정시키고 한 가닥 희망을 품어 보았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알고 싶으면 어서 따라와. 꾸물꾸물 대지 말고.”매몰차고 차가운 남자의 짜증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만리의 발걸음이 아직도 여전히 둔한 것은 그날 요트가 폭발한 위력이 대단해서 온몸에 기운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느릿느릿 발을 내디뎠고 두 시중은 그녀가 넘어질까 봐 걱정하며 조심스레 소만리의 뒤를 따랐다.소만리는 시중들의 이런 섬세한 보살핌에 감동했다. 자신이 구조된 것은 정말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별장의 규모는 정말 어마어마했다.모든 장식과 배치는 영국풍이었고 작은 장식품에서 큰 탁자 하나하나까지 모두 매우 소박해 보였지만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소만리는 점점 자신을 구해준 이 남자의 신분이 보통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좋은 마음으로 그녀를 구해줬을 뿐인데 거기다 대고 꼬치꼬치 이 사람의 집안 배경에 대해 깊이 파고들 이유도 없었다.소만리는 묵묵히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사실 다른 것에 신경 쓸 힘도 없었다.별장은 규모가 매우 커서 소만리는 입구를 나오는 데에도 몇 분이나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화원의 오솔길을 통해 소만리는 눈앞에 작은 현대풍 독채 건물이 있는 것이 보였다.문 앞에 이르자 남자는 걸음을 멈추었다.“당신 친구가 안에 있으니 직접 들어가 봐.”그는 뒤돌아보며 소만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소만리는 이 남자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비로소 앞에 있는 작은 독채로 시선을 옮겼다.경연이 이 안에 있을까?그녀는 묵묵히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방에 들어서자 회색빛 인테리어 장식에 왠지 음침한 분위기가 엄습해 왔다.집이 크지 않아 눈앞의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리고 눈앞의
하지만 이런 결과는 결국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유골함을 말없이 바라보던 소만리 뒤에서 남자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슬픔과 괴로움은 가장 헛된 일이야. 어서 눈물을 거두고 상처를 치료하는 데 전념해.”소만리는 몸을 돌려 여전히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내가 우는 거 봤어요?”그녀는 차분하게 되물으며 조용히 테이블 위에 놓인 유골함을 바라보았다.“이것은 그가 스스로 택한 길이에요.”이 말을 마치고 소만리는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소만리의 이런 침착하고 대담한 태도에 남자는 잠시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단호하게 훌쩍 그 자리를 떠나는 소만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문득 이런 강인한 눈빛을 가진 여자는 어떤 성격일지 궁금해졌다.그리고 망가지기 전의 얼굴이 어땠을지도 덩달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소만리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 옆에 홀연히 앉았다. 마음이 슬프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경연은 결국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금씩 그녀의 마음에 그의 죽음이 와닿기 시작했다.소만리는 눈을 감은 채 요트가 폭발했을 때를 떠올렸다. 머리를 관통하는 듯한 날카로운 느낌이 순간적으로 엄습했다.“앗.”소만리는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 안았다. 마치 얼굴이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앗.”그녀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에 시중들이 들어와 얼른 의사를 불렀다.“아파요...”소만리는 두 눈을 붉히며 겨우 입술 사이로 밀어내듯 말을 했다.의사가 곧 도착했고 그녀가 굉장히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즉시 그녀에게 마취 주사를 놓았고 소만리는 바로 의식을 잃었다.의사는 조심스럽게 소만리의 얼굴에서 거즈를 풀었다.시중들은 소만리의 얼굴이 망가진 모습을 보고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그러나 그때 얼굴을 찡그리며 들어오는 남자를 보자 바로 공손히 인사를 했다.“겸 도련님.”남자는 이런 인사에 아주 익숙한 듯 본 척도 하지 않고 우아한 걸
이 말을 듣고 소만리의 발걸음이 뒷걸음질 쳤다.모진?이 남자가 지금 모진과 관련된 동영상을 보고 있단 말인가?왜 이런 걸 보는 걸까?소만리는 의아해하다가 마음속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이 남자가 도대체 왜 기모진의 동영상을 보는 건지 궁금해하고 있던 그때 소만리는 이 남자가 자신의 출현을 알아차린 것을 알게 되었다.그의 가늘고 긴 검은 눈동자가 갑자기 겨울바람처럼 차갑고 깊게 그녀를 응시했다.“이리 와서 앉아.”남자가 입을 열어 가까이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소만리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기도 해서 테이블 가까이로 가서 앉았다.옆에서 시중이 소만리에게도 홍차 한 잔을 따라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소만리는 찻잔을 들었다. 영국풍 찻잔에서 따스함이 전해져 손안이 포근해졌다.사실 그녀는 운이 좋은 편인 셈이다. 적어도 목숨은 건졌지 않은가.경연은...소만리의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결국 그녀의 눈앞에서 한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그녀도 완전히 무관심할 수 없었다.“죽은 네 친구 생각해?”남자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정적을 깨며 소만리의 귓가를 울렸다.소만리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남자를 쳐다보았다.“나, 아직 당신 이름이 뭔지 몰라요. 내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소만리는 화제를 돌리며 여전히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남자는 홍차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부르면 돼. 모두들 날 겸 도련님이라 부르지.”소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겸 도련님, 고마워요.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그리고 이렇게 돌봐주시고 제 얼굴을 치료해 주셔서 고마워요.”남자는 가을빛을 닮은 소만리의 갈색 눈동자를 탐색하듯 바라보다가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당신의 얼굴은 열흘이다, 보름이다 뭐 그런 시간 단위로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장기전이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그는 태블릿 P
남자는 눈을 내리깔고 한 장씩 훑어보기 시작했다.소만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사진을 보러 갔다.사진을 보고 있던 남자는 긴 눈을 들어 소만리를 바라보다가 소만리의 눈에 비친 날카로운 눈빛을 포착했다.“왜 그렇게 흥분한 얼굴을 하고 그래?”그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소만리는 조용히 눈 속의 날카로움을 거두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나랑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요.”소만리의 핑계는 그럴듯하게 들렸고 남자도 아무런 의심 없이 사진을 보는데 다시 시선을 집중시켰다.“당신과 이름이 같은 여자가 어떻게 생긴 거 같아?”소만리는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한 여성을 바라보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말했다.“뭐, 그저 그렇게 생겼구만.”“그저 그렇게?”남자는 무표정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에는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이 얼굴이 그저 그렇게 생긴 얼굴이라고 한다면 당신 얼굴은 정말 절세미인이었겠는 걸.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얼굴을 보고 그저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어, 안 그래?”“...”소만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남자가 묻는 소리를 들었다.“그럼 이 남자 얼굴은 어떻게 생각해?”사실 소만리는 처음부터 기모진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었다.남자가 이렇게 묻자 그녀는 당당하게 사진 속 기모진을 바라보았다.“멋있고, 기품 있어요. 내가 본 남자 중에 제일 멋진 남자예요.”“당신이 본 남자 중에 제일 멋진 남자?”남자가 되물었다. 여태껏 무표정하던 그의 잘생긴 얼굴에 갑자기 약간의 기복이 나타났다.태블릿 PC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 남자는 은은한 달빛 같은 눈망울을 들고 소만리의 잔잔한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그럼 내 생김새는 어때?”소만리는 이 남자의 말을 듣고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었다.강직하게 쭉 뻗은 검은 눈썹, 야무지게 도드라진 입술, 새하얀 얼굴에 조각처럼 빚어 놓은 이목구비가 더없이 조화롭고 아름다웠다.“잘 생겼어요.
소만리는 미세하게 떨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한때의 섬세하고 매끄러움은 사라지고 울퉁불퉁하게 부어 있는 얼굴에 온통 추한 상처만 가득했다.이마에 난 가느다란 상처와 온전한 눈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특히 양쪽 볼은 그야말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소만리는 손거울을 꽉 잡고 냉정함을 찾으려고 애썼다.그러나 원래 온전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소만리도 마찬가지였다.“아직 치료 초반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치료에 잘 협조하면 얼굴이 회복될 거예요.”옆에 있던 의사는 소만리에게 희망을 주느라 바빴다.“고맙습니다.”소만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감사의 말을 했다.하지만 예전에 그녀가 웃을 때 모습을 드러내던 매혹적인 보조개는 지금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고 보조개는커넝 피부 자체가 사람의 피부라 할 수 없을 만큼 상해 있었다.소만리는 거울을 내려놓고 약지의 결혼반지를 움켜쥔 채 망연자실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모진, 내가 이렇게 변해버렸으니 당신은 날 알아보지 못하겠지?내가 당신 앞에 서 있어도 아마 당신은 그냥 지나칠 거야.그 꿈처럼 당신과 난 이제 낯선 사람이 되어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겠지.“이제 얼굴 확인한 거야?”냉랭한 목소리가 곁에서 울려 퍼졌다.소만리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맑고 깨끗한 눈동자로 남자의 좁고 긴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그래요. 봤어요.”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그녀의 심정도 담담함 그 자체였다.“그래도 고마워요. 당신이 구해주지 않았으면 지금쯤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잖아요.”남자는 짙은 눈썹을 살짝 비틀며 소만리를 흥미롭게 흘겨보았다.“당신 모습을 확인한 지금 당신 반응이 꽤 특이한 것 같은데.”소만리는 남자가 말하는 뜻을 알아듣고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를 쳐다보았다.“당신이 말
소만리는 나이프와 포크를 움켜쥐고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다.그녀는 심호흡을 한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내가 당신과 함께 경도에 가도 될까요?”남자는 이 말을 듣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소만리는 칠흑같이 깊고 까만 눈동자를 당당히 마주 보았다.“내 집이 경도에 있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이런 모습으로 집에 돌아가고 싶어?”“아니, 그냥 가서 한번 보고 싶어요.”소만리는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 그녀도 지금 이런 모습으로 기모진 앞에 서고 싶지 않았다.어쩌면 기모진이 그녀의 망가진 얼굴을 개의치 않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소만리는 감히 시험해 볼 수가 없었다.혹시라도 기모진이 눈앞에 있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그런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마음이 아프고 초조했다.지금의 그녀는 감히 시험해 볼 용기조차 낼 수 없었다.“당신 경도 사람이니까 경도에 대해 상당히 잘 알겠군, 그렇지? 기모진이란 사람에 대해 분명 들은 바가 있을 테지, 안 그래?”소만리는 부정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들어본 적은 있어요. 기모진이 경도 제일가는 가문의 후계자라는 건 들어봤는데 다른 건 잘 몰라요.”그녀는 침착하게 대답했고 마음속에 감춰두었던 의혹을 슬며시 꺼내 물었다.“기모진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뭐예요? 당신 그 사람이랑 사업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여긴 또 어디예요?”소만리가 쉬지 않고 여러 의혹을 토해내고서야 자신이 좀 급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남자의 그윽한 시선이 자신을 찬찬히 꿰뚫어보는 것을 느끼고 소만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시선을 돌렸다.“뭐, 그냥 궁금했을 뿐이에요.”“사람이란 호기심이 있게 마련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남자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그렇게 집에 가고 싶다고 하니 한번 데려다주지.”“...”한번 데려다준다고?이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도대체 자신을 어찌할 셈인지 남자의 속셈을 알 수
기모진과 재회하는 행복한 장면을 그토록 상상해 왔건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남자와 그녀를 사칭한 여자가 이제 막 하교하는 자신의 두 아이를 데리고 행복한 나들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소만리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시린 바람이 아픈 상처를 사정없이 할퀴었다.기모진과 그 여자가 각각 기란군과 기여온을 데리고 길을 건너려고 하자 소만리는 손을 번쩍 들어 차창을 내렸다.“모진.”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살며시 불렀다.그러나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담배 연기가 가득 낀 것 같은 쉰 목소리일 줄이야.그녀는 스스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목소리였다.그러나 기모진은 무슨 소리를 감지한 듯 소만리가 있는 쪽을 잠시 바라보았고 그 순간 소만리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서둘러 차창을 닫았다.차창 너머로 소만리는 얼굴에 타는 듯한 화끈거림을 느꼈다.그녀는 어렴풋이 자신을 향해 있는 시선을 느꼈지만 차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마침 녹색 신호등으로 바뀌어서 소만리는 곁눈으로 기모진의 꼿꼿한 몸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언뜻 보았다.한순간 몸 안에 가시가 박힌 듯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소만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그 남자의 말이 맞았다. 슬퍼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짓이다.긍정적으로 생각해야만 이 세상에서 그녀는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소만리는 택시를 타고 곧장 경연의 본가이자 경연의 부모님이 사는 집 현관 앞에 도착했다.택시에서 내린 후 그녀는 굳게 닫힌 대문을 보았다.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살갗을 건드리며 차가운 기운을 전해주었다.가슴이 사무치게 쓰려왔다.그녀는 유골함을 안고 문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한참이 지나서야 가정부가 나와 문을 열었다.“누구세요?”가정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소만리를 훑어보았다.온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스카프를 두르고 있어서 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