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는 이상하다고 여겨 기여온을 따라 장난감 가게의 다른 쪽 유리창 앞으로 갔다.기여온의 반응이 더욱 격앙되어 유리창을 향해서 손가락을 강하게 가리켰다.소만리는 기여온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여온아, 엄마한테 뭐 보여 주려고 그랬어?”소만리가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물었다.기여온은 큰 눈을 깜빡이며 소만리의 손을 더욱 힘껏 잡고 문으로 걸어갔다.기란군도 그걸 보고 따라서 나갔다.소만리는 여온이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서 마음이 불안해서 심장이 바삐 뛰기 시작했다.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기여온은 소만리를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건너편 거리로 나와 눈앞의 큰 빌딩으로 들어갔다.“여온아, 엄마 여기 데려온 거야?”소만리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런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기여온은 유리 같은 큰 눈을 반짝이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그녀는 무언가 찾는 것 같았지만 결국 찾지 못한 듯했다.소만리가 여온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뜻하게 웃었다.“여온아, 우리 계속 장난감이나 고르러 가자.”기여온이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소만리를 따라 돌아섰다.그러나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예쁜 눈동자에 다시 한번 희미한 빛이 스쳤다.기여온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만리의 옷자락을 힘껏 잡아당기며 희고 보드라운 작은 손가락을 들어 막 닫히려던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소만리는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막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던 순간 깊고 긴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히고 말았다.소만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만리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모진?”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심장은 이미 비정상적인 궤도로 그녀의 마음을 방망이질 하고 있었다.소만리는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옆에 있던 두 아이를 떠올렸다.그녀는 아래층 로비로 내려가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올라가는 것을 몇
”모진, 보고 싶어. 정말 보고 싶어...”소만리는 떨리는 손을 꼭 잡으며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억눌렀다.이때 마침 예선에게서 전화가 왔고 소만리는 급히 감정을 추스르고 예선의 전화를 받았다.예선의 말투에는 딱 들어도 근심도 가득했다.“소만리, 나 어떻게 해야 해? 소군연 선배가 그러는데, 그의 엄마가 집으로 날 초대하고 싶다고 했대.”소만리는 예선으로부터 소군연의 할아버지 팔순 잔치 때 소군연의 가족이 예선을 소홀히 대했던 일을 들었다.기 씨 가족에게 소만리가 따돌림 당했던 때와 어쩜 이리도 똑같을까.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소군연이 예선의 편이라는 것이었다.그 당시 기모진은 소만리를 전혀 신경 쓰지도 개의치도 않았었다.지금 생각해도 당시 아팠던 기억이 여전히 소만리의 가슴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하지만 그에게 냉대를 받을지언정 그가 이렇게 영원히 그녀를 떠나길 원하지 않았다.“소만리, 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복잡한 심경이 녹아 있는 예선의 목소리가 잠시 과거의 아픈 기억 속에 머물던 소만리의 정신을 환기시켰다.“예선아, 너 꼭 가야 해.”소만리가 예선에게 대답했다.“소군연 선배 집안 사람들이 널 초대했다는 건 아마도 소군연 선배가 중간에서 설득시키느라고 많이 공을 들였을 거야.”“예선아, 네가 소군연 선배랑 계속 함께 하고 싶다면 이 고비는 꼭 넘겨야 돼. 네가 안 가면 소군연 선배는 분명히 서운해할 거야.”소만리의 나름의 분석과 건의를 들으며 예선도 적극 찬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소만리, 네가 있어 정말 다행이야.”예선의 기뻐하는 듯한 말을 들으니 소만리의 마음도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어쩌면 그녀는 지금 이런 즐거운 분위기에 많이 영향을 받아야만 했다.혼자서 헛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고 그를 잃은 고통속에 계속 빠져 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예선은 소만리의 건의를 들은 후 소군연의 집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좀 더 심플하게 입을 생각이었지
이 선물은 예선이 정성을 다해 고르고 골랐고 사기 전에 소군연에게도 의견을 구한 것이었다.그런데 지금 소군연의 엄마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걸 보고 예선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스러운 듯 선물 상자를 탁자에 던지며 냉소를 흘렸다.“흥, 소군연. 너 무슨 쓰레기 더미에서 여자친구를 찾은 거냐? 이런 수준의 여자가 우리 가문에 감히 시집오려고 그래?”“엄마,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소군연은 불만스럽게 물었다.영내문은 일어서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소군연 오빠, 지금 설마 어머니한테 화내는 거예요?”“무슨 뜻이야?”소군연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당혹스럽긴 예선도 마찬가지였다.영내문은 난처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고 소군연의 엄마가 던진 선물 상자를 가리켰다.“이건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액세사리예요. 이 블랙 다이아몬드 브로치는 경도의 매장에서는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거예요.”이 말을 하는 동안 영내문의 얼굴에는 도도함과 함께 남과 다르다는 우월감이 묻어났다.“며칠 전 제 언니가 해외여행을 가게 되어서 제가 특별히 언니한테 그쪽 매장에서 사 오라고 부탁했어요. 여기에는 품절된 이 블랙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언니가 겨우 그쪽에서 구해서 방금 제가 어머니께 드렸죠. 지금 예선이 사 온 이건 분명히 가짜예요.”가짜?예선은 완전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녀는 가짜를 사서 선물한 것이었다.“말도 안 돼. 이건 나와 예선이 같이 가서 산 건데 어떻게 가짜일 수가 있어?”소군연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예선을 옹호했다.“그건 간단하지 않아? 용을 훔쳐서 봉황으로 바꾼다고, 가짜를 진짜인 척 나한테 주고 진품은 되팔았겠지. 예선은 아예 처음부터 나한테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거야.”소군연의 엄마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예선은 살짝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모든 것에 가식이라고는 없는 솔직한 성격이었는데 이렇게 모욕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때 기모진
소군연은 기세등등하게 말하며 예선의 손을 잡고 진지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잘 들으세요. 난 가정 환경 같은 것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여자를 놓치는 일은 하지 않아요. 영내문과 그렇게 결혼하기를 원하는 것 같은데 그럼 당신들끼리 하세요. 날 더 이상 관계없는 사람이랑 엮으려 들지 마시구요.”“...”소군연의 엄마는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멍해졌다.그렇게 순하고 온화한 소군연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보았다.소군연은 예선을 끌고 가버렸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남은 가족들은 서로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영내문은 입술을 오므렸고 모욕감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그녀는 경도에서 유일하게 소군연과 대등한 가문의 여식이었는데 지금 저런 여자와 비교당하다니 어찌 승복할 수 있겠는가!소군연은 예선을 아파트로 돌려보냈고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사과했다.그러나 예선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밝게 웃었다.소군연은 화도 내지 않고 웃는 예선을 보고 내심 마음이 조마조마했다.“넌 왜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아? 지난번 할아버지 생신 때도 화 안 냈잖아.”“내가 선배한테 화냈으면 좋겠어요?”예선은 웃으며 말했다.“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선배가 제일 먼저 날 보호해 준 것이 나에 대한 가장 큰 지지와 인정이었어요. 나 너무 행복했어요. 그런데 왜 내가 선배한테 화를 내요?”소군연은 이 말을 듣고 갑자기 환해졌다.“정말 화 안 났어?”“물론이죠. 선배한테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요.”예선은 주방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고 했다.그런데 그녀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소군연을 바라보며 가다가 앞에 놓인 의자를 못 보고 부딪히고 말았다.소군연은 급히 달려가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조심해.”예선은 한숨을 돌렸고 똑바로 선 후 등 뒤에서 전해오는 따뜻한 온기와 가벼운 블루벨 향기를 느꼈다.갑자기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고마워요. 선배.”소군연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예
남자가 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는 순간 소만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녀는 세 걸음씩 두 걸음씩 긴 그림자를 향해 달려갔지만 하필이면 그때 예닐곱 살짜리 아이 두 명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그녀는 그 아이들을 피하려고 했는데 한 아이가 갑자기 땅바닥에 넘어져 엉엉 울기 시작했다.주변에 있던 아이 부모님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 소만리가 급하게 가는 것을 보고 그들의 아이와 부딪힌 줄 알았다.“이 여자가!! 내 아들을 치고 그냥 가면 어떻게 해요?”아이의 엄마는 사납게 소만리를 향해 소리치며 소만리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여자는 악랄하게 경고했고 소만리는 지금 이 순간 빌딩에 들어가려는 남자만 보았다.소만리는 흉악한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기세등등하게 여자의 얼굴에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여기 CCTV 있으니까 내가 당신 아들을 밀쳤다고 생각되면 우선 CCTV부터 확인해 보세요. 만약 내가 부딪혔다면 이 명함을 들고 절 찾아오세요!”“...”여자는 소만리의 기세에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치려다가 넘어진 아들이 해명하는 소리를 들었다.“엄마, 나 혼자 넘어진 거야. 이 아줌마랑 상관없어.”이 말을 듣고 여자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아들의 손을 덥석 잡아당겨 가버렸다.하지만 소만리가 다시 눈앞을 보니 방금 걸음을 멈춘 그 남자는 자취를 감춰버렸다.“모진, 당신이지?”소만리는 황망하게 허공을 향해 물으며 가슴을 조였다.그녀는 기 씨 집으로 돌아와 기모진이 마지막으로 남긴 책갈피를 집어 들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모진...”그녀는 책갈피에 입을 맞추며 침대 모서리에 혼자 웅크리고 이불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정말 보고 싶어. 왜 날 혼자 두고 갔어. 왜...”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며 자문하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아무도 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그녀는 사업, 조향, 디자인 그 외 다른 일에 온 정신을 쏟고 싶었지만 불쑥불쑥 그 남자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연!”강자풍은 강연의 멱살을 잡아당겼다.비록 열여덟 살 소년일지라도 그의 눈에 들어찬 날카로움에는 빈틈이 없었다.“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 네가 형을 죽이고 흑강당을 망하게 한 사람이라구!”강연이 있는 힘껏 강자풍을 밀치고 차갑게 말했다.“강자풍, 네가 뭘 알아? 오빠를 힘들게 하고 흑강당을 망하게 한 사람은 기모진이야!”“기모진이 무슨 상관이야? 네가 기모진을 좋아해서 그 사람을 건드린 거잖아! 소만리의 부모님, 그리고 기모진과 소만리의 결혼 모두 당신이 망쳐놨는데. 뭐? 지금 와서 기모진이 널 이렇게 만들었다고 할 낯짝이 있어?”강자풍이 노발대발하며 말했다.강연은 제 발 저려 하며 얼굴을 살짝 돌렸고 주먹을 쥐면서 말했다.“그래, 내가 건드렸어. 그래서 뭐? 그렇지만 기모진과 경연이 나를 꾀어 조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겠어! 기모진과 경연 둘 다 IBCI 사람이라는 거 알아?”강자풍이 이 말을 듣고 안색이 확 달라지며 말했다.“IBCI?”“흥!”강연은 경멸하듯 비꼬며 말했다.“강자풍, 기모진과 소만리는 모두 우리의 원수야. 너 알아 몰라? 그런데 넌 기여온이라는 벙어리나 감싸고 돌고. 자기 형은 죽게 생겼는데 말야. 그 벙어리를 죽여서 소만리에게 가족을 잃은 고통을 맛보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그 말이 끝나자 강자풍은 손바닥을 치켜들고 강연의 얼굴에 세차게 내리쳤다.“입 다물어!”“...”강연은 어안이 벙벙해 있었고 강자풍의 눈에는 험악한 빛이 역력했다.“여온이가 왜 벙어리가 됐어? 네가 원흉이야! 내가 있는 한 더 이상 아무도 여온이를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라고 했잖아. 강연,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강자풍은 이 말을 내던지고 훌쩍 그 자리를 떠났다.강연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부어오르는 얼굴을 매만지고 이를 악물었다....경연이 F 국에서 경도로 돌아와 소만리에게 흑강당 사건의 진행 상황을 사실대로 알렸다.강어는 사형 선고를 받
소만리는 마치 한순간에 급소를 찔린 듯 이름 모를 벅찬 충격이 그녀의 마음에 잔물결을 흩뿌려 놓았다.그녀의 잿빛 세상은 마치 햇살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고 그 빛은 얼어붙었던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모진, 모진...”소만리의 감정이 요동치며 도저히 통제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그녀는 머릿속이 하얘져서 사람들 속에 몰려 있는 이 남자를 바라보기만 했다.이 순간 여기저기서 놀랍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기모진 아냐?”“맞아. 분명히 기모진이야.”“어떻게 이런 이미지로 바꿨지? 렌즈도 낀 것 같아?”“말도 마. 너무 잘생겼다. 어떻게 이렇게 조각같이 빚었을까. 아무리 봐도 너무 잘생겼어.”저마다 감탄하는 말을 듣고 술잔을 쥔 소만리의 손가락에 점점 더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머리 염색했어?렌즈도 꼈고?그녀는 황홀한 듯 멍하게 이 남자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러나 한 가닥의 이성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오늘 그녀는 이 자리에 경 사모님의 신분으로 오게 된 것이었고 모인 사람들도 그녀와 경연이 부부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비록 그들은 형식상의 부부일지라도 외부인들은 알지 못한다.만약 이때 그녀가 너무 열정적으로 기모진을 향해 달려간다면 경연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를 것이다.지금까지 경연이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어떻게 그가 그런 잡담거리가 되도록 할 수가 있겠는가.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과연 진짜 기모진인지 아닌지 소만리조차도 조금 막막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경연은 소만리의 망설임과 복잡한 심경을 알아차린 듯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처음에 당신과 결혼한 목적은 오직 당신과 당신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어요. 만약 저 사람이 진짜 기모진이고 그가 돌아온 것이라면 난 당신을 그 사람에게 되돌려줄 거예요.”귓가에 들려오는 경연의 배려 깊은 말을 들은 소만리는 말문이 막힌 듯 이 따뜻하고 엷은
설마 방금 당신이 나타난 것이 나의 환각이었단 말인가?아냐. 환각이 아냐. 당신 분명히 근처에 있을 거야.소만리는 마음이 초조해서 기모진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방금 그의 존재는 분명한 실체였는데 마치 지금 그는 사라진 것처럼 갑자기 없어졌다.모진.소만리의 걸음은 갈피를 잡지 못 한 채 걸어갔고 계단 입구를 지날 때 문득 낯익은 온기의 손바닥이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잡아당겼다.모진!소만리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제대로 볼 겨를도 없이 기모진의 힘에 이끌려 안전 통로 쪽으로 갔다.남자의 훤칠하고 반듯한 몸매에 압도되었고 어둡고 희미한 빛 아래에서 호박색 눈동자는 소만리의 당황스러움과 떨리는 눈동자를 감싸 안는 것 같았다.소만리는 눈을 크게 뜨고 손을 들어 예전보다 더 하얀 얼굴을 쓰다듬었다.“모진, 정말 당신이야?”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기모진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품에 뛰어들어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모진, 당신 살이 있었어. 너무 다행이야!”“나 너무 보고 싶었어. 모진. 나 정말 너무너무 당신이 보고 싶었어...”소만리는 반년 동안 그리웠던 마음과 감정들을 터트리며 더욱 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그녀만의 환각일까 봐, 그가 눈앞에서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그를 꼭 껴안았다.다시는 자신의 세계에서 그를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되었다.비록 그의 외모가 왜 그렇게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포옹의 느낌과 체온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유일한 남자임을 알려주었다.그의 몸에 배어 있던 쿨민트 향은 사라진 것 같았고 옅은 베티버 향기가 났다.이 서늘하고 깔끔한 느낌은 부드럽고 순수하고 섬세하고 중독성 짙은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품에 안은 여인을 내려다보는 기모진의 눈에 기쁨의 빛이 스쳐갔지만 눈동자에 미묘한 느낌이 감돌았다.그는 손을 들어 소만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울지 마. 나 안 죽었어.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