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은 30분 동안 심문을 했고 강연은 모든 범죄에 대해 부인하고 변호사를 요청했다.모든 범죄자는 자신을 변호할 변호사를 찾아 변호할 기회가 주어진다.하지만 어쨌든 경연은 강연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그가 막 구류 병동을 나서자 옆에 있던 동료가 기모진의 전화를 받았다.몇 마디 말하고 난 뒤 남자는 경연에게 말했다.“흑강당 내부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합니다.”경연은 고개를 끄덕여 의사를 표시하였고 그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다.석양이 비치는 오후 기모진은 아무도 없는 카페에 앉아 창밖을 삼삼오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희미하게 시선을 거두었다.눈앞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옆에는 먼 길을 떠나는 비행기 표 한 장이 놓여 있었다.그때 갑자기 ‘띠링' 하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카페 문을 열고 위층으로 올라오는 기척이 났다.조금 전 기모진은 IBCI 동료와 통화를 마쳤는데 흑강당 내부에 잠입한 전문 요원이 지금 이 카페로 와서 그를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기모진은 계단 입구를 바라보다가 그가 평생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한 남자, 경연을 보았다.그의 눈빛에는 일순간 질투심이 솟구쳐 올랐으나 곧 가라앉혔다.마주 오는 경연을 보고 기모진은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평정심을 찾고 말했다.“당신이 올 줄은 몰랐는데.”경연은 신사다운 젠틀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당신이 나한테 달려들어 한 방 치는 건 아닌가 생각했었어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은 죄로 말이에요.”기모진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그녀는 이미 내 여자가 아니야. 당신 아내지.”경연은 기모진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기모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당신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나요.”“치료할 방법도 전혀 없고 기껏 해 봐야 연명할 수 있는 날을 조금 더 연장할 뿐 아무 소용없어.”기모진은 남사택 본인도 해독할 방법이 없고
기모진은 처음에 경연이 말한 선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차 열쇠를 들고 아래층 카페 입구로 갔다. 그는 경연이 길가에 세워둔 차를 보고 천천히 걸어갔다.늦여름 오후의 햇살은 매우 부드러웠고 그 빛은 그대로 차 안으로 조용히 흩어져 있었다.반쯤 열린 차창을 통해 기모진의 깊은 눈동자 속에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얼굴이 비쳤다.“소만리.”그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고요한 심장이 다시 예전의 기쁨을 되찾은 듯 반응하기 시작했다.기모진은 천천히 문을 살짝 열었다. 은은한 향기가 차 안에서 흘러나왔다.“소만리는 요즘 너무 피곤해서 방금 그녀에게 기분 전환시켜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왔어요. 차 안에 그녀가 직접 조제한 향을 뿌렸으니 아마 푹 자고 일어날 거예요. 마지막으로 소만리와 잠시 함께 보내세요.”경연의 목소리가 뒤에서 기모진의 등을 타고 들려왔다.기모진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을 전했다.“고마워.”“내가 당신께 감사해야 해요. 당신이 IBCI의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나에게 맡겼으니 절대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경연은 이 말을 끝으로 돌아서서 이 순간을 기모진에게 맡겼다.운전석에 앉은 기모진은 조수석에 기대어 잠든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들어 뺨을 어루만지려 했지만 손가락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그는 소만리를 놀라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그도 요즘 그녀가 정말 피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기모진은 의자에 살짝 기대어 그림같이 평온하게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그의 섹시한 입술은 자기도 모르게 달콤한 아치를 그렸다.소만리, 정말 다행이야.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어.내 인생에 들어와 외롭고 메마른 삶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줘서 고마워.그리고 이 빛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을 거야. 내 등불이 다 타버릴 때까지.소만리, 나의 소만리. 다음 생애는 내가
다음날 소만리는 강연을 찾아갔다.강연은 구류 병동에서 경도 감옥으로 옮겨져 잠시 억류되었다가 수속을 마치면 F 국의 경찰에 인계된다.강연은 누군가 자신을 보러 왔다는 말을 듣고 기모진인 줄 알았지만 면회실로 들어서자 소만리가 앉아 있었다.지금 사람 같지도 않은 자신의 몰골을 생각해다가 소만리의 말숙하고 우아한 얼굴과 고귀한 자태를 보니 강연은 갑자기 통제력을 잃은 들짐승처럼 교도관의 손을 벗어나 소만리를 향해 돌진했다.소만리는 발을 들어 강연의 무릎을 찼고 강연은 소만리 앞에 또 무릎을 꿇었다.두 무릎에 말도 못 할 통증이 밀려왔다.강연은 이를 악물고 참다가 육두문자를 남발하려고 하자 소만리가 바로 강연의 턱을 힘껏 쥐었다.소만리는 서서 차갑고 우아한 얼굴로 기세를 제압했다. 두 눈빛에 증오의 기운이 가득 서려 있었다.“강연, 내 부모님이 널 기다리고 있어. 이제 네가 죽을 때가 왔어.”강연은 질투심에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소만리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얼굴에 흉악하고 음산한 냉소를 띄며 말했다.“하하하, 그래. 내가 하마터면 잊을 뻔했어. 네 부모님은 네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한테 단숨에 불에 타 죽었지!”강연은 일부러 소만리를 자극했다.“소만리, 너 사실 마음이 너무 괴롭고 슬프지? 경연이랑 결혼한 것도 네 진심은 아니지? 네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는 오직 기모진이잖아. 그런데 안타깝지만 당신들은 평생 함께 할 수 없어!”“그리고 네 딸, 아마 평생 벙어리가 될 거야! 평생 다른 사람들한테 비웃음을 사며 살 거야. 어떤 남자가 네 딸을 데려가겠어!”소만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심장에서 피가 솟구치듯 손등에서 핏줄이 터졌다.소만리는 정말로 충동적으로 강연을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이 인간의 탈을 쓴 짐승같이 악랄한 여자를 목 졸라 이 자리에서 죽이고 싶었지만 아이를 생각해서 참았다.교도관은 강연을 붙잡아 제압했다.강연은 마치 미쳐 발광하는 악마처럼 괴기하게 웃었다.“소만리, 네가 이겼다고 생각해?
경연의 이 한마디가 소만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그녀는 물끄러미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보고 있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소만리가 거의 정신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이자 경연이 다정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소만리, 묻고 싶은 말이 있으면 물어도 돼요. 다 말해 줄게요.”소만리는 가볍게 떨리는 손가락을 움켜쥐었다.“그 사람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요.”경연은 눈썹을 한번 가다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경연의 대답을 말없이 듣고 있던 소만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래서 강연의 곁에 있으면서 일부러 나와 아이에게 모질게 한 거예요? 첩자로서 잠입을 해야 하니까?”경연은 말을 할까 고민을 하다 말했다.“당신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요.”소만리는 눈을 들어 경연을 바라보았다. 온갖 복잡한 상념들이 얽혀들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경연은 소만리를 차에 태우고 그날 호텔 룸에서 강연을 체포할 당시의 영상을 소만리에게 건네주었다.그것은 기모진의 넥타이핀에 끼워진 초소형 카메라로 촬영한 것으로, 화면은 매우 고화질이었고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소만리는 기모진이 강연을 따라 호텔 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그와 강연은 마치 한통속이 된 것처럼 그 뚱뚱한 남자와 사업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뚱뚱한 남자가 강연과 계약서에 사인한 후로 모든 것이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화면 속에 기모진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그는 강연에게 ‘게임은 끝났다' 라고 말했다.그리고 뒤이어 기모진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정말로 내가 네 남자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그는 강연이 더 충격받을 만한 말을 하고 있었다.“나 기모진에게는 평생 한 여자밖에 없어. 그 여자는 소만리야.”마지막으로 기모진은 무너져가는 강연을 직접 체포했다.이를 본 순간 소만리의 눈에 뜨거운 물안개가 피어올라 시선이 흐릿해졌다.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경연은 기모진이 떠나기 전 부탁했던 것을 떠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소만리,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해 줄게요.”소만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경연의 말을 듣고 모든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왔다.소만리는 기 씨 집으로 돌아왔다. 위청재는 소만리가 돌아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반갑게 맞았다.“소만리, 강연이 그 여자 잡혔어!”“그 여자 완전히 미친 여자였어. 어찌나 수단이 악랄한지!”“흥, 정말로 사악하기가 말도 못 하겠어. 저 여자는 벌을 받아도 싸!”위청재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기분이 매우 좋은 것 같았다.하지만 소만리는 아까 본 영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기모진이 직접 강연에게 수갑을 채우고 그 순간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여자가 무너져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소만리는 자신이 통쾌한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서 조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늦여름 초가을 새벽, 소만리는 꽃을 사서 혼자 부모님의 묘지에 제사를 지내며 사화정과 모현을 그리워했다.세 번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에야 그녀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아빠 엄마, 아빠 엄마를 죽인 진짜 범인이 잡혔어요. 아마 곧 사형 집행 받을 거예요. 이제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가을바람이 그녀의 눈시울에 이슬을 적셔놓은 듯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엄마 아빠, 기모진 용서할 수 있겠어요?”이렇게 말하고 나서 소만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음의 울분을 토해내고야 말았다.그녀는 말도 못 할 죄책감을 느꼈다.부모님이 용서를 하든 하지 않든 그녀 마음속에 아픈 상처 덩어리는 치유될 수 없었다.소만리는 혼자 묘지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다.그녀의 부탁에도, 질문에도,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떠나기 전 소만리는 사화정과 모현의 무덤 밑에 조그맣게 새로 만든 무덤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무덤의 묘비를 대충 훑어보았는데 그 위에는 생년월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고 이름도 없었
경연은 소만리의 행동이 갑작스러워 그녀를 따라갔다.소만리가 다급하게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지 알 수 없었다.잠시 후 그녀가 전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안녕하세요. 선생님. 소만리에요. 지난번에 검사한 혈액 샘플의 혈액형이 뭐였나요?”경연은 소만리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들었다.그는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소만리에게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보아하니 소만리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그녀는 마치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은 듯했다.전화를 끊고 난 그녀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났다.그녀는 경연에게 저녁을 차려주었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경연이 소만리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애정이었지만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단지 호감일 수 있다는 것을 경연도 잘 안다.그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기모진이 담겨 있다.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저녁 식사 후 소만리는 경연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는 바로 샤워를 하러 갔다.경연은 조금 앉아 있다가 소만리에게 볼일이 있다고만 말하고 외출하였다.소만리는 경연이 정말로 일이 있는지 아니면 그녀와 무슨 일이 일어나길 꺼려해서 억지로 자리를 피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만약에 후자라면 소만리는 왠지 경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그녀는 경연과 결혼한 지 꽤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기모진의 이름을 지울 수 없었다.소만리는 창가로 가서 창밖의 적막한 달빛을 바라보았다.소만리, 이미 그가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더 이상 그 사람을 마음에 두지 마.어쩌면 평생 너와 그 남자는 헤어진 채로 사는 게 맞을 수도 있어.그녀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일찍 쉬려고 몸을 돌려 침대로 돌아갔다.막 누웠는데 예선한테서 전화가 왔다.예선의 말투가 굉장히 흥분되어 있는 것처럼 들렸는데 듣고 보니 긴장감이 살짝 묻어있었다.“소만리, 소군연 선배가 갑자기 내일 자
소군연이 예선을 딱 봤을 때 놀라는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오늘 너 참 예쁘다.”소군연은 진심으로 칭찬해 주었다.예선은 수줍어서 뺨이 발그레하게 뜨거워졌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예전엔 내가 안 예뻤다는 소리예요?”소군연은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지며 해명하려 했다.“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평상시와 비교해서 오늘은 특별히 더 예쁘다는 말이야.”예선은 얼굴을 돌리며 조용히 남몰래 기뻐했다. 이런 달콤함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예선은 조수석에 앉아 곁눈으로 운전하는 소군연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남자는 얼굴 옆선이 정말 조각같이 날렵했고 성격도 부드러운 데다 눈매는 여전히 풋풋한 소년미가 남아있었다.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자 소군연은 차를 세우고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예선은 미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가 소군연의 웃는 얼굴과 마주 보게 되었다.“내 얼굴 많이 봤잖아.”“...”“그날 밤 호텔에서...”“소군연 선배.”예선은 얼굴이 너무 화끈거려서 소군연의 말을 잘랐다.“소군연 선배, 정말 날 속인 거예요? 그날 밤 정말 선배 맞아요?”소군연은 손을 뻗어 안절부절못하는 예선의 떨리는 손을 잡고 말했다.“내가 아니면 그럼 누구겠어?”다시 한번 긍정의 대답을 듣고 예선의 마음속 달콤함의 한계치가 마구 치솟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그녀가 소군연을 바라보고 물어보려고 했을 때 소군연이 더 빨리 먼저 입을 열었다.“너에 대한 책임 때문에 네가 내 여자친구가 되길 원하는 게 아니야. 난 널 좋아해. 너도 마찬가지라고 믿어.”예선은 멍하니 소군연을 바라보며 더욱 밝게 웃었다.다만 그녀가 잘 이해되지 않는 건 소군연은 왜 예선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저렇게 확신하냐는 것이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예선은 차가 멈출 때까지 이 생각에 빠져있었다.그녀는 소군연이 건네준 선물을 들고 기품 있는 집 대문 앞에 섰다.그러지 않
정말 참 공교로운 일이었다.뜻밖에도 그녀와 똑같은 원피스를 입은 사람이 있었다.똑같은 옷을 입었다고 해서 잘못되거나 두려워할 일은 아니지만 참 어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누가 못생기고 예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이 원피스가 올가을 이 브랜드의 한정판 원피스였고 각 스타일마다 전 세계에 한 벌밖에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들은 똑같은 옷을 입었고 그들 중 한 명은 가짜 옷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했다.예선은 자신의 원피스 출처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아직 자신을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예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소군연의 손을 풀고 돌아섰다.“어디 가?”소군연이 의아한 듯 예선을 불렀다.소군연의 목소리가 들리자 주변의 어르신들이 바로 고개를 돌려 소군연을 에워쌌다.“소군연 왔구나.”소군연의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소군연, 여자친구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어? 어디 있어?”소군연은 돌아서려는 예선을 끌어당기며 소개했다.“바로 여기 있죠. 예선.”소군연의 어머니는 소군연이 예선을 손을 잡으러 가는 것을 보는 순간 얼굴의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예선이 입고 있던 원피스를 보았을 때 얼굴빛은 더더욱 무너져 내렸다.예선은 소군연 어머니의 달라진 기색을 살피면서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아주머니.”소군연의 어머니는 차갑게 대답했다.“예선, 그 원피스 참 재미있네요.”그녀는 분명히 뭔가 비아냥거리면서 소군연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소군연, 내문이 왔어. 저기 저쪽에 있어.”소군연의 엄마는 소군연 할아버지 옆에 서 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가리켰다.이 내문이라는 여자가 바로 예선과 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소군연이 방금 들어왔을 때 손님들이 왜 그런 눈빛으로 예선을 훑어보았는지 그제야 알아차렸다.소군연의 엄마는 소군연을 앞쪽으로 끌었다.그러나 그는 돌아서서 다시 예선의 손을 잡고 그녀를 할아버지에게 데려가 소개했다.“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려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