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오직 그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되어야만 한다...그렇게 7일이 흘러가는 동안 전연우는 늘 어정쩡하게 그녀의 옆에 누워 있었다. 그녀를 만질 때에도 항상 그녀가 다칠세라 조심조심 신중을 기했다. 전연우는 단 한 번도 어느 날 장소월이 자신을 떠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과거에는 힘도 권력도 없어 그녀에게 최고 좋은 선물을 줄 수 없었다.하지만 이제 그는 모든 것을 가졌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즉시 눈앞까지 가져다줄 수 있다.불 꺼진 어두운 방 안에서 전연우는 눈을 감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처음부터 마음을 독하게 먹었어야 했어. 너희 둘이 만나지 않았다면... 소월이는 영원히 이 오빠의 것이었을 텐데...”새벽 열두 시, 서철용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본 순간 피곤함이 사라지고 경계심이 피어올랐다.그는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잠든 듯 누워 있는 배은란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에 처음 가졌던 경계심이 풀렸다.깊이 잠들어 있던 배은란은 얼굴에서 전해져오는 간지러움에 흐릿하게 눈을 떴다. 그 순간 깊고 가는 서철용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어 서철용이 그녀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음엔 휴게실에 가도 돼.”배은란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생긴 상처에 흠칫 놀랐지만 이내 그의 시선을 피하고는 당황한 듯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시간이 꽤 지났어. 이제 수술할 때가 되지 않았어? 나랑 약속한 거 잊지 마.”서철용이 말했다. “나 지금은 시간 없어.”배은란은 벌컥 화를 내며 손에 들려 있던 베개를 그에게 집어 던졌다. “약속은 지켜야지... 너랑 자주면... 우리 그이 살려준다고 했잖아!”.서철용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나처럼 변태 양아치 같은 놈의 말을 믿어?”배은란은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말은 마치 그녀의 얼굴에 세게 내
“미... 미안해. 오늘은 민용 씨 일로 찾아오는 게 아니었어. 오늘 힘들면 다음에 다시 찾아올게.”배은란은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그를 기다렸었다. 더이상 있다간 바보가 될 것 같았다.배은란이 소파에 놓인 가방을 들고 돌아서서 나가려는 순간... 서철용은 돌연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번쩍 안아 올렸다.배은란이 몸부림치며 말했다. “내려놔.”서철용은 귀를 닫고 곧장 휴게실로 들어가 그녀를 침대에 던져놓고는 그녀의 몸을 짓누른 뒤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너도 하고 싶은 거지? 왜 항상 내가 나가라고 하면 안 나가는 거야?”서철용은 한 손으로 그녀의 속옷을 찢고, 다른 한 손으로 금속 바지 지퍼를 내려 커다란 물건을 드러내고는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안 돼... 하지 마.”서철용은 짜증스러움에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거칠게 물건을 밀어 넣었다.30분 사이에 관계는 빠르게 금세 끝이 났다. 서철용은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서 흐느끼고 있는 배은란의 몸에서 내려와 종이를 꺼내 흔적을 닦았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 내일 내가 데려다줄게”배은란은 아직 복부의 팽창 감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가 몸에 걸쳤던 옷을 끌어 올리며 일어나 앉았다.“필요 없어. 나 오늘 운전했어.”배은란은 다리에 힘이 풀려 간신히 서 있었다.“서민용이 우리 사이에 대해 모를 것 같아?”배은란은 온몸이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자리에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너... 네가 말한 거야?”서철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나도 짐작만 한 것뿐이야.” 서철용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냥 삼켜버렸다.“기어이 그런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말리진 않을게.”배은란은 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리 사이가 불쾌하게 끈적끈적했고 하이힐을 신은 발 옆에는 찢어진 속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그것을 주워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서철용은 조금 전 콘돔을 착용하지 않고 모두 다 넣어버렸다. 그녀
그녀는 이미 결혼한 몸이다!배은란은 절대 지조 없는 여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배은란은 서민용에게서 걸려온 3통의 부재중 전화를 보니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서민용에게 너무 미안해 다시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자를 보냈다.[나 오늘은 바빠서 스튜디오에서 야근해야 해. 내일 들어갈게.]서민용은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알았어.]그가 더는 묻지 않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연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복잡한 마음에 침대 옆에 있는 서철용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게 옳은 일이 맞는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정말 방법이 없었다.서민용과 함께 해외로 나갔던 3년 동안, 그녀는 각지 모든 병원에 가보았지만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결국 오장육부가 서서히 고장 나 죽고 말 것이다.현재 서민용은 약물에만 의존하여 겨우 생명의 끈을 유지하고 있다.배은란은 서철용을 제외하고는 부탁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전연우는 장소월이 입원한 층 전체를 독점했다.이틀 후 의식을 회복한 장소월은 병원 침대에 앉아 종양 전문의들에게 말했다. “수술은 하지 않겠습니다.”“장소월 씨, 걱정 마세요. 저희가 직접 소월 씨의 수술을 집도할 거예요. 소월 씨가 치료에 협조하기만 한다면 높은 확률로 수술에 성공할 수 있어요... 아니면 몸은 정말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질 거예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직 젊은 나이잖아요...”장소월의 백옥 같은 얼굴엔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고, 눈동자는 공허하게 텅 비어 있었다. “살고 싶지 않아요.” “수술 안 하겠어요. 아무도 저한테 강요할 수 없어요.”“장소월 씨... 그건...”“됐어요! 다들 나가요!” 전연우가 문을 걷어찼다.사람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그들이 나간 후, 전연우는 더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고 장소월에게 가까이 다가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대
“그들을 위해 복수하고 싶다면 몸 회복하고 직접 날 죽여. 그렇지 않으면... 다음은 인씨 가문이 될 거야.” 잔인한 말을 내뱉은 뒤, 전연우는 얼음처럼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으로 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 가능한 한 빨리 수술을 준비해 주세요. 거부한다면 수술대에 묶어요.”전연우는 말을 마친 뒤 병동을 떠났다.그녀의 말은 모두 강영수를 위해 복수를 하겠다는 말뿐이었다. 전연우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다간 무슨 일을 저지를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문밖에서 전연우가 경호원에게 지시했다.“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똑바로 감시해.”“네, 대표님.”사무실 안.서철용은 장소월을 치료하고 그녀가 무사히 평화롭게 살게 해주는 것만이 그녀에게 속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창문 앞에서 전연우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서철용은 환풍구를 열어 연기를 내보냈다.“네 마음이 안 좋다는 거 알아. 하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으니 해결할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어.”“지금은... 정말 너답지 않아.”전연우가 물었다. “제일 빨리 할 수 있는 수술 시간은 언제야?”서철용은 손에 든 서류를 닫으며 말했다. “내일이야. 오늘 밤부터 금식해야 해.”전연우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고 몸을 돌려 그와 마주 섰다. “내일 수술의 성공 가능성은 얼마나 돼?”“...”서철용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네 글자 내뱉었다.“십 퍼센트.”겨우 10%?서철용은 입술을 앙다물고 일어나 그에게 걸어갔다. “이미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고 종양이 뇌신경을 누르고 있어. 만약 수술 중 조금이라도 사고가 나면...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어. 그리고...”죽을 수도 있다!“모든 알 수 없는 변수를 차단할 수는 없어... 그래서 나도 단언은 못 해.”“최선을 다해 소월 씨를 살리겠다고 약속할게.”전연우가 깊게 어둠이 내려앉은 눈으로 말했다.“왜 암에 걸린 거야? 이미 자궁 적출 수술도 받았잖아?”서철용이 대답했다. “원인을 설명하기 어려운 병
병실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장소월이 집어던진 물건들이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져 있었다. 또한 바닥 군데군데에 피가 고여 있어 간호사가 청소하고 있었다.장소월은 다행히 의식을 찾았다. 하지만 환자복 전체가 피로 얼룩졌고, 몸 상태는 더욱 악화된 것 같았다. 그가 자리를 비운 그 짧은 시간 안에 이 지경이 되었다니.전연우는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 전해졌다.장소월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발버둥 쳤다.“난 수술 안 할 거야. 이거 놔...”그녀의 팔은 간호사에 의해 단단히 압박되어 있었다.그녀는 문밖에서 들어오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넌 나가. 보기 싫어.”전연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섞인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수술해.”장소월은 그를 쳐다보며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살아서 수술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저주할 거야.”장소월은 전연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고통을 보았다.그녀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걸까?그건 장소월에게 있어 조롱거리일 뿐이었다.그녀는 전연우는 절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전연우가 말했다.“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마. 넌 괜찮을 거야.”“그 말... 날 위로하려는 거야, 아니면 널 위로하려는 거야? 나보다 내 몸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전연우, 내가 언젠가 죽으면... 꼭 널 저주할 거야...”“널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모두 떠나고...”넌 평생 고독하게 살다가 쓸쓸하게 죽어가게 만들 거야...장소월은 말을 채 끝내기 전, 진정제 약효 때문에 잠이 들었다.모두가 그 말을 들었지만 단 한 사람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수간호사님 준비됐어요.” 함께 온 간호사가 머리를 자르는 도구를 들고 옆의 수간호사에게 건네주었다.수간호사는 난감한 얼굴로 전연우의 옆으로 걸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보호자분, 수술 전에 아가씨의 머리를 깎고 두개골을 열어 피를
서울 감옥.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음산하고 어두운 감옥 안, 허름하기 그지없는 누더기를 걸친 송시아가 손발이 꽁꽁 묶인 상태로 깨어났다.강지훈은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근 검은색 제복을 입고 눈까풀 위 흉측한 흉터를 번뜩이고 있었다.“오랫동안 그 사람과 함께 다녔는데도 아직 처녀라니. 생각지도 못했네.”“너희들, 데려가서 씻겨. 죽게 만들면 안 돼.”“네. 알겠습니다.”“나쁜 자식.” 송시아는 돌연 분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남자에게 반 발자국도 다가서기 전에 곤봉이 그녀의 다리를 후려쳤다. 송시아는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럽게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강지훈은 모자를 눌러쓴 채 힘없이 널브러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지금까지 내 영역에서 감히 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어. 네가 처음이야.”“나는 네 주인님의 여자고, 너는 그 사람의 개에 불과해. 전연우가 알면 널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강지훈은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봤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몸을 팔러 나온 창녀들이었고, 심지어 그는 인씨 가문 고고한 사모님과도 함께 뒹굴었었다. 송시아는 그가 처음으로 손대본 처녀였다. 하여 침대 위에서 그 여인들에게 했던 거친 방식에 비하면, 송시아에게는 최대한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런 말을 지껄이면 내가 직접 그 입을 꿰매 버리겠어.”“...”“처음 가진 잠자리라고 하니, 이제부터 넌 내 사람이다. 반경 수십 킬로미터 내엔 사람 한 명 없는 황량한 들판뿐이니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고분고분 내 말을 잘 듣기만 하면 나가서 놀게 해줄게.”그가 떠난 후 송시아는 다른 교도관들에게 끌려 검은 타일로 둘러싸인 큰 욕조가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방금 전 그곳보다 크게 다르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었다.그곳에 가는 동안 송시아는 오랫동안 성욕에 굶주린 남자들에게 수차례 모욕을 당했다. 욕조 안, 송시아는 몸의 더럽혀진 곳을 씻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어느 때에도 강지훈과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고는 전
“난 그 사람처럼 너그럽지 않아...”조금 전 몸싸움 때문에 송시아의 치마가 길게 찢어졌다. 그렇게 그녀의 몸은 또다시 남자의 시야에 고스란히 들어왔다...그는 간결한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테이블 위에 엎드리게 했다.그가 거칠고도 폭력적으로 그녀의 몸속을 관통했다......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끊임없이 쏟아진 비가 서울시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냈다.청연사.기성은은 언젠가 전연우가 이런 곳에 오게 될 거라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그는 독실한 신자처럼 이 황금 불상 아래 무릎을 꿇고 있었다...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장소월을 위한 것이었다!기성은이 보기에 그는 세상의 경제 명맥을 장악하는 큰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지,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이토록 비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장소월도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그 당시 강영수는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기성은은 그가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기적적으로 다시 깨어났다.그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장소월는 그를 위해 매일 같이 이곳에 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대표님은 알고 있었지만 결코 막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기 때문이었다.그는 종래로 그와 같은 것들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전연우는 이것 말고는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기성은이 더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대표님, 이런 건 소용없습니다.”“한 번 해보지 뭐. 만에 하나라도 소용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아?”장소월의 수술은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졌다. 서철용은 그녀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어 수술대에서 내려오면 완치되더라도 영구적인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그녀는 지금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수술실에 누워있다...전연우는 수술 동의서에 사인한 순간부터, 길을 잃은 것 같았다...전연우는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장소월이 죽은 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항상 이성적이고 현명했던 전연
기성은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 길을 선택한 이상 이젠 돌이킬 기회가 없다.당시 장소월을 제거하고자 독한 일을 행했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뼈에 사무치게 후회하고 있다...하늘이 어두워지자 화려하고 정갈한 전당 안에서 타오르던 촛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문 밖의 우중충한 날씨를 보니 곧 폭풍이 몰아칠 것만 같았다.전연우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었다.기성은이 마지막 전화를 받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병원 측에서 아가씨의 수술이 거의 끝나간다고 전해왔습니다. 저희 이제 돌아가 봐야 합니다.”전연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깊은 눈동자 아래에는 이전의 불안감보단 차분함이 내려앉아 있었다.“지금 몇 시야?”“저녁 8시입니다. 저희가 병원에 도착하면 아가씨의 수술이 거의 끝나있을 겁니다.”절 담장 뒤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은 주지 스님이었고, 다른 한 명은 7, 8살 남짓한 어린 동자 스님이었다.“사부님... 저분 우리 절에 기부하신 분 아닌가요?”“그렇게 돈이 많은데 왜 아직도 고민이 있는 걸까요?”“이 세상 모든 사람 누구에게나 삼천 가지 번뇌가 있는 법이란다.”“알겠습니다, 스승님.”하산길은 울퉁불퉁 웅덩이가 가득 파여 있어 걷기 쉽지 않았다.차는 거세게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빠르게 고속도로를 달렸다.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전연우의 몸에선 절에서 피운 향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그가 병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기진맥진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안을 살펴보고 있던 서철용이 그를 막아 세웠다. “수술은 잘 됐어. 이제 깨어날 수 있느냐에 달렸어.”“잘 됐으면... 됐어.”“이거 무슨 냄새야?” 서철용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청연사에 가서 향이라도 피운 거야?”전연우가 그런 일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과거 그에 대한 서철용의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리는 순간이었다....서철용은 그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삼켜버리고는 화제를 돌렸다. “수술 끝났으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
“때가 되면 돌려보내 줄게.”군복을 입은 경호원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강 소장님, 이상한 놈 두 명이 잡혀 왔습니다. 지금 감옥에 가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순식간에 차가워진 강지훈의 얼굴을 본 소현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가 먹여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이 쓰디쓴 약을 며칠 동안 연속으로 먹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강지훈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약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했어?”“부관님 쪽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가두고 내버려 둬. 알아서 죽겠지.”“알겠습니다, 소장님.”소현아는 혓바닥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제 안 먹을래요. 강지훈 씨, 나 자고 싶어요. 너무 졸려요.”강지훈의 약 그릇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도우미가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졸리면 푹 쉬어.”소현아는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금세 잠들었다.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나가자, 방에 있던 도우미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함께 방을 나서고 문을 닫았다.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검사한 거 맞지? 임신한 거 아니야?”도우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현아 아가씨는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 안 계신 동안, 주인님의 지시대로 아기씨를 돌보았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건강 검진도 받게 했고요. 임신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무엇 때문인지 도우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강지훈은 도우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 역시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소현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평소에도 통통하게 살이 쪘던 덕분에 배가 점점 불러와도 주인님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계속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잠자리 과정에서 주인님의 흘러넘치는 힘이 분명히 배 속의 아이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그러다 혹시 피라도 나면...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
은경애는 새벽에 한 번 일어나 아이를 돌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편의를 위해 바로 옆방 침실에서 잤던 그녀는 옷을 걸친 채로 일어나 별이 방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활짝 열려있는 문을 본 그녀는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또 어디에 가신 거예요!”은경애는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지독한 휘발유 냄새와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졸음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 났어요, 빨리 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은경애는 별장의 모든 조명을 켰다. 옆방 침실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서철용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즉시 눈을 뜨고 옷을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별장을 가득 메운 불쾌한 냄새가 서철용의 코에도 흘러들어왔다. 코를 막고 계단을 내려가니 1층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사고를 친 아이는 서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은경애는 급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모두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경호원들이라 물이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바닥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를 떴다.지난번에는 부엌에 불을 지르더니, 이번에는 물바다를 만들었네. 좋아, 아주 좋아!“도련님, 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이고!” 은경애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이렇게 멘붕이 오곤 했다. 이 일은 정말이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장씨 가문에 들어와 갖은 일을 경험했지만, 돈 욕심 때문에 참고 견뎠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를 데리고 몇 달 동안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은경애와는 달리 서철용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불쾌한 냄새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그때 서철용의 눈에 구석 쪽 이상하게 고여있는 물이 들어왔다. 그는 걸어가 발로 툭툭 밟아 보았다. 그 순간 아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
은경애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대표님이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서철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 자식을 꽤 믿나 보네요...”“그럼요, 대표님께서 돌아오면 보너스를 주신다고 했어요. 조금만 더 모으면 큰 손주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 수 있어요.”참으로 보기 드문 진심이고 충심이었다. 주위에 온통 괴물들뿐인 전연우의 곁에 이토록 헌신적인 사람이 있었다니.“말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전연우가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나도 아주머니를 믿을 수 있어요.” 서철용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설득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은경애에게 문자를 보여주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는 한배를 탄 사람들이에요. 아주머니를 해치는 건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은경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저는 글자를 몰라요.”그 한마디에 서철용은 할 말을 잃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누가 알겠는가, 이 남자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남원 별장에는 보일러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서철용은 너무 더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은경애가 물었다. “여기에서 주무시려고요? 외부인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수 없어요.”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의심이 많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치면 안 돼요. 내 말까지 믿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로 일이 터졌을 때 아무도 당신들을 도와줄 수 없어요.”은경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표님께서 똑똑히 말했었다.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지 않는 한, 누구든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믿어서는 안 된다.은경애는 별장에서 별이를 돌보는 일만 하고 있었고, 식사는 다른 몇 명의 도우미들이 준비해 정해진 시간에 가져다주고 있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후
은경애는 시선을 흘끗 돌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일어서는 별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우리 작은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행기 장난감 가지고 놀고 계시지 않았어요? 언제 내려오셨어요?”“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대표님과 아가씨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요.”서철용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시선을 맞추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눈빛이었지만, 서철용은 한눈에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겨우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다.별이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철용을 향해 옹알거렸다.아이를 오랫동안 돌본 은경애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철용 앞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서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는가 봐요. 평소에 집에 외부인이라곤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선생님을 보고 신기한가 보네요.”“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삼촌이세요. 삼촌이라고 해보세요...”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벌써 말을 할 줄 알아요?”은경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정말 신기해요. 너무 똑똑해서 가르쳐주는 건 뭐든 한 번이면 다 따라 한다니까요.”서철용은 숨김없이 말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별이는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며 옹알이를 했다. 은경애가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한테나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저 말고는 누구도 가까이 못 가게 해요.”서철용이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방으로 들어간 서철용은 별이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장소월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별이는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서철용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지금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어.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도 함께 돌아올 거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의 남자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직 팔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면봉으로 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었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온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 “서 선생님, 환자분 상태는 여전히 똑같습니다. 목숨은 건졌고 의식도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서철용이 손을 휘젓자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 “형, 지금까지 이렇게 제대로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내 말 듣고 있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전연우를 보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나 이제 더는 어떠한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아.” “난... 서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물론 아버지의 사생아도 아니야. 우연히 서씨 가문과 연이 닿았고, 서철용이라는 신분을 사칭해 들어가게 된 거야.” “진짜 서철용은 오래전에 죽었어.” “내 진짜 성은 연 씨야. 20년 전, 난 원수에게 살해당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러다 진짜 서철용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서씨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옥패를 넘겨주었어. 그때는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네.” “그리고 배은란은... 나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 은란이가 낳은 아이 아버지는 형이야.” 침대에 누운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서철용은 그가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은란이 좋아하는 거 맞아. 하지만 비열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은란이 마음 얻고 싶지 않아.”“서민용, 치료 잘 받고 형 아내와 아이한테 돌아가...” “형을 저승 문턱에서 데려와 살려놓은 내 수고를 헛되이 하진 말아야지.” 서철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종래로 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장해진이 죽어 복수가 끝났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
“아, 참, 그리고 그 아이도...” “전연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송 대표님.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밤 반드시 일을 성공시킬 겁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상대방은 팔을 걷어붙이고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전에 얘기했던 회사 주식은...” 송시아는 날카롭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 회사 주식은 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해가 지면 좋은 소식이 들리실 겁니다.” 남원 별장이 사라지고 아이도 죽으면... 그때쯤이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겠지. 장소월... 그때까지도 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언제까지 숨어있는지 두고 보겠어. 장소월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자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치는 건 외면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꼭꼭 숨어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찾아낼 방법은 수백 가지가 넘으니까. 러시아 국경 밖. 잠을 자던 장소월은 갑자기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꿈속에서 별이가 계속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짖고 있었다... 장소월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걱정의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한 사람은 전연우 외에도 별이가 더 있었다. 그 아이... 장소월은 왜인지 모르게 줄곧 그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었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의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환자 차트를 보고 있던 서철용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소월 씨,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별이가 잘못되는 꿈을 꿨어요. 혹시 남원 별장에 가봐 줄 수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요.” 서철용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내며 말했다.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