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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작가: 백사장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2-17 14:23:10
남자의 말에 임가연의 머리는 또 한 번 터질 듯 울려왔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아주 험악하게 느껴졌었는데 예상외로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가만히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이 와중에 심장이 두근거린 임가연은 연이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통화를 할 때처럼 무서워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풍기는 건 매한가지였다.

금방 씻고 나온 듯 물기를 머금은 머리칼과 그 아래로 보이는 살짝 찌푸려진 미간은 그의 차가움을 극대화 시키고 있었다.

아무에게나 곁을 내주진 않을 것 같은 그 분위기에 임가연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네.”

“따라와.”

남자의 말에 임가연은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 빠르게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고급타운이라 한 층에 두 가구밖에 살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으로 다가가 지문인식을 마치고 문을 열어주는 연이진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임가연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들어가.”

100평은 돼 보이는 큰 집은 그레이와 화이트로 모던하게 장식되어있었는데 별거 아닌데도 아주 고급져 보였다.

찾아보니 여기는 상류층들만 사는 곳이라던데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니 정말 일반인들은 평생을 벌어도 살 수 없는 집인 것 같았다.

연이진은 현관에 뻘쭘하게 서 있는 임가연을 보더니 그 옆 서랍장에서 실내화를 꺼내주었다.

연이진이 준 실내화로 갈아신고 드디어 안으로 들어온 임가연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연이진을 마주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남자의 시선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 임가연은 마치 자신이 값이 매겨지길 기다리는 물건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이진이 말을 하지 않으니 몸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아 임가연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바지 벗어.”

그때 갑자기 들려온 낯간지러운 말에 임가연이 눈을 크게 뜨자 연이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물건 보자고 했잖아, 보지도 않았는데 네가 처음이란 걸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수치심에 임가연은 입술을 꾹 문 채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지금 뭐 하는 건지, 이게 맞는 건지 하는 의문들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리는 울리고 있었고 심장박동은 빨라졌으며 얼굴은 불에 데이기라도 한 듯 뜨거웠다.

아예 자세를 고쳐잡고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려 하는 연이진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임가연은 애꿎은 손만 접었다 폈다 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컵을 돌리던 연이진이 평온하게 말했다.

“난자 꺼내면 구토나 어리럼증, 호흡곤란, 난소팽창 그리고 복통 같은 게 있을 수 있어. 그런 건 알아서 해결해. 에이즈 같은 전염병에 걸릴 수도 있는데 뭐, 북성대학교 학생이니까 이런 건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잘 알겠지?”

“빨리 벗어, 나 바쁘니까.”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하는 연이진의 목소리는 기복 없는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어 좀처럼 그의 생각을 엿볼 수가 없었다.

손을 벨트에 올린 채 한참을 망설이던 임가연은 결국 고민 끝에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죄송해요, 못 하겠어요. 바로 나갈게요.”

말을 마친 임가연은 도망치듯 거실을 벗어나 현관으로 향해 문을 열려고 시도해봤지만 문은 미동도 없이 굳게 닫혀있었다.

그제야 문이 잠겼음을 알아챈 임가연은 심장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어느새 그녀의 뒤로 다가온 연이진은 임가연을 문 쪽으로 밀어붙이고 압도적인 피지컬로 그녀를 압박하더니 임가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야 후회하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어쩌나, 이미 늦었는데.”

“네가 팔고 싶을 땐 귀찮게 전화하다가 이젠 팔기 싫으니까 나가겠다, 거래는 그렇게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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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어나올 수 없는 너라는 늪   제40화

    어느덧 밤이 어두워졌다.임가연은 진하온과 식사를 마친 후에 천지국제센터로 왔다.그는 대문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옆문으로 들어가 기다란 지하 복도를 지난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관람석으로 올라왔다.“여기서 내려다보면 건물 내부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어.”진하온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임가연은 눈을 떼지 못했다.4년 만에 드디어 이 건물을 내부를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책에 사진이 있어도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보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이곳은 북성의 모든 건축학자들의 꿈이다.임가연은 넋을 놓고 구경했다. 대들보와 기둥 하나하나를 열심히 보면서 나중에 그녀도 이런 건물을 설계할 거라고 다짐했다.어느덧 한 시간이 지났다. 로비에 몇몇이 들어왔는데 위층에 있는 진하온을 보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말투를 들어보니 아주 친한 사이 같았다.“진 대표, 거기서 뭐 해? 내려와서 같이 놀자.”진하온은 밑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오늘은 일이 있으니까 너희들끼리 놀아.”“여자 친구랑 데이트하는 게 뭐 큰일이라고. 거기 가만히 서 있으면 얼마나 재미없어. 내려와서 우리한테도 좀 소개해줘. 우리가 나쁜 사람도 아닌데 뭐가 무서워서 그래?”그때 누군가가 분위기를 띄웠다.“그러게 말이야. 알고 지내면서 앞으로 도움도 주고 좋잖아.”그들의 말에 진하온은 잠깐 생각하다가 임가연에게 물었다.“가연아, 내려갈래? 다들 북성에서 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앞으로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건축하는 사람이라면 인맥은 필수였다. 게다가 저 무리는 딱 봐도 꽤 괜찮은 사람들 같았다.임가연은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녀에게 고객을 소개해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조심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용기 내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진하온이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내가 쏠 테니까 룸 하나 잡아. 금방 내려갈게.”그들은 크게 웃으면서 종업원에게 룸을 잡아달라고 했다.그

  • 헤어나올 수 없는 너라는 늪   제39화

    그의 얼굴만 봐도 송태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삼촌,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어요? 소리라도 좀 내지.”연이진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를 보면서 말했다.“봐야 하는 거, 보지 말아야 하는 거 다 봤어.”송태준은 등골이 오싹했다.“난 그냥 걔랑 장난한 거예요. 뭐 어쩌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요.”연이진은 시선을 거두고 휴대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아들이 강간 미수, 납치, 폭행, 집단 범죄 혐의를 받고 있어요. 오늘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당신 대신 내가 경찰서에 보낼 겁니다.”송태준은 머리가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삼촌...”상대가 뭐라 했는지 연이진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두 눈에 차가운 기운이 더 짙어졌다.“꺼져. 네 아버지가 널 찾고 있어.”아버지라는 소리에 송태준은 안색이 다 창백해졌다.평소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든 아버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연이진이 한마디만 해도 적어도 3개월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야 했다.지난번에 연이진을 건드렸을 때 갈비뼈와 두 다리가 부러져 창고에 3개월 동안 누워있었는데 진통제조차 주지 않았다.송태준의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삼촌, 여자 때문에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혹시 걔랑 진짜 뭐라도 있는 거예요?”연이진이 날카롭게 째려보았다.“한마디만 더 물었다간 처벌이 배가 되는 수가 있어.”송태준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연이진이 탄 랜드로바가 사라질 때까지도 송태준은 어두운 얼굴로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형님, 이제 어떡해요?”옆에 있던 부하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물었다.“어떡하긴 뭘 어떡해? 피가 나는 거 안 보여? 가서 약 발라야지.”송태준은 화를 내면서 손에 묻은 피를 털고는 초라한 모습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X발, 임가연 이 나쁜 년. 언젠가는 널 따먹고 만다, 내가.’...그 시각 차 안, 진하온은 운

  • 헤어나올 수 없는 너라는 늪   제38화

    임가연이 샤워기를 틀자 뜨거운 물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더러운 것들을 싹 다 씻어버리고 싶었다.그 후 며칠 동안 임가연은 연이진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맞은편에 살아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임가연은 매일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늦게 퇴근했다. 낮에는 회사에서 진하온과 함께 현장에 나가 설계를 배웠고 저녁에는 집에서 복습했다.진하온이 그녀가 습득력이 빠르다고 칭찬을 했으니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 지났다.임가연은 진하온과 함께 매일 병원에 나가 현장에서 일했는데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는 이 기분이 매우 좋았다.퇴근 시간이 거의 다가올 무렵 임가연은 공구를 잔뜩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현재 진하온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 퇴근할 때 자주 차를 얻어타곤 했다.진하온이 다른 일 때문에 아직 내려오지 않아 임가연이 주차장에서 잠깐 기다렸다.그때 옆에 람보르기니 한 대가 멈춰 섰다. 임가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 길을 피했다. 그런데 차 문이 열리더니 남자 몇몇이 차에서 내렸다.“임가연 아니야? 돈 많은 남자라도 만났어?”‘이 껄렁껄렁한 목소리는...’임가연이 고개를 들자마자 맨 앞에 선 송태준과 눈이 마주쳤다.오랜만에 만나는데도 여전히 건달처럼 껄렁한 모습이었다.그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임가연이 고개를 돌리고 피하려는데 송태준이 앞길을 막았다.“왜 도망쳐? 오랜만이라 이 오빠를 잊었어?”송태준이 웃으면서 말했다.“진 교수님 따라서 건축을 배우더니 꼴이 이게 뭐야? 얼굴에 먼지가 가득하잖아. 내가 닦아줄게.”그가 손을 대려 하자 임가연은 본능적으로 피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저리 치워.”“어머? 그동안 성격이 좀 사나워졌다, 너? 그러니까 더 재미있어. 오늘 기분도 좋은데 나랑 갈래?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괜찮으니까 그냥 가던 길 가.”임가연이 싸늘하게 거절하자 송태준도 표정이 굳어졌다.“뭐야?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 있던 부하가 매정하게

  • 헤어나올 수 없는 너라는 늪   제37화

    ‘뭐라고?’화들짝 놀란 임가연이 고개를 들었다. 연이진의 얼굴이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두운 불빛에 그의 눈빛도 어두웠지만 그 속에 욕망이 가득 숨어있는 게 보였다.당장이라도 무슨 짓을 할 것만 같았다.임가연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만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못 알아듣겠어? 그럼 더 알아듣기 쉽게 직설적으로 얘기할게. 내 애인이 돼줬으면 좋겠어. 쭉 해주면 더 좋고. 지금 내가 너한테 관심이 있을 때 많은 걸 요구해도 돼.”연이진이 그녀의 볼을 만지면서 차갑게 말했다.“얼마 줄까? 얼마든 네가 원하는 대로 다 줄게.”쿵...임가연은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고 손가락마저 부들부들 떨었다.‘지금까지 나한테 그랬던 게 다 그 목적 때문이었어? 잠자리해주는 애인이 되어주길 바라서?’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힘껏 고개를 돌렸다.“싫어요.”“뭐?”연이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잠자리나 하는 애인이 되기 싫다고요. 만나기도 싫고요.”임가연이 용기 내어 말했고 눈빛도 아주 확고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거절할 줄은 몰라 멍하니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날 만나지 않으면 진하온을 만나려고?”임가연은 어이가 없었다.‘여기서 갑자기 사부님 얘기가 왜 나와?’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연이진이 계속하여 말했다.“진하온이 돈이 많긴 하지만 여자한테 별로 쓰지 않아. 지금 네 월급으로 생활하는 데 쓰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을 텐데 열심히 일해서 밑 빠진 독 같은 가족을 다 챙길 수 있을 것 같아?”“연이진 씨...”임가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 집 일을 어떻게 알고 있지?’연이진이 덤덤하게 웃었다. 처음 잠자리한 그날 밤 그녀가 잠든 후 베개 옆에 놓인 그녀의 휴대전화가 한밤중까지 진동했다. 슬쩍 보았을 뿐인데도 임가연이 지금 돈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다음 날 오전에 조사해본 결과 그녀의 가족들이

  • 헤어나올 수 없는 너라는 늪   제36화

    그녀는 고개를 들고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연이진을 쳐다보았다.진하온이 옆에 있는데도 이렇게 당당하게 건드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가연아, 왜 그래?”진하온이 물었다.“아니에요. 방금 손에 경련이 일어나서요.”임가연은 숟가락을 줍고는 경고의 눈빛으로 연이진을 쳐다보았다. 연이진은 고개를 숙인 채 느긋하게 된장찌개를 먹고 있었는데 표정이 어찌나 무뚝뚝하고 차분한지 평소의 금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식탁 밑에서 까불거리는 발이 그의 발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가식 덩어리야, 진짜.’임가연은 숟가락을 꽉 잡고 조용히 종아리를 뒤로 피했다. 그런데 연이진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무릎을 지나 허벅지 사이를 터치하려 했다. 그녀가 물러설수록 그는 더욱 제멋대로 움직였다.결국 임가연은 참다못해 고개를 들어 연이진의 도발 섞인 두 눈을 빤히 째려보았다.‘날 난감하게 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어.’“가연아, 자. 고기 많이 먹어. 너 너무 말랐어.”진하온은 아무것도 모르고 임가연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그녀는 불편함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사부님.”“그래. 많이 먹어.”식탁 밑의 발이 그녀의 허벅지를 터치했다. 임가연은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허벅지로 발을 꽉 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힘이 너무 세서 손쉽게 빠져나왔고 임가연이 아무리 저항해봤자 괜히 힘만 빼는 격이었다.임가연은 입술을 꽉 깨물고 진하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어떻게 된 게 점점 못된 짓만 골라 해?’그러다가 진하온이 집어준 반찬을 먹을 때마다 연이진이 툭 건드린다는 걸 알아챘다.임가연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다 막혔다.결국 귀까지 다 빨개졌고 진하온이 집어준 반찬마저 함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식사가 거의 끝나갔다. 대충 식사를 마친 임가연은 그들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황급히 일어나 설거지하러 들어갔다.진하온이 설거지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또 거절당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주방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수

  • 헤어나올 수 없는 너라는 늪   제35화

    연이진은 갑자기 나타난 임가연을 보고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이 무덤덤하게 문에 기대어 있었다.“이사했어?”그가 덤덤하게 묻자 임가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억지 미소를 쥐어짰다.“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우리 이웃이 됐어요.”그녀가 일부러 접근했다고 오해할까 봐 괜히 설명까지 덧붙였다.“여긴 우리 회사가 제공한 직원 숙소예요. 오후에 신청했었는데 이 집으로 분배받아서요. 정말 공교롭죠?”연이진이 싸늘하게 말했다.“직원 복지가 아주 좋은 회사네.”임가연은 더는 할 얘기가 없었다. 웬일인지 연이진이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려는데 연이진이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잠깐.”“왜요?”임가연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너한테 돌려줄 게 있어.”연이진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그런데 손에 하얀 꽃무늬 팬티를 들고 있었다.임가연은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윙 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이걸 아직도 남겨두고 있었어?’아침에 옷을 급하게 갈아입을 때 다른 잠옷은 다 챙겼지만 팬티를 화장실에 놓고 나왔다. 그런데 연이진이 팬티를 챙겨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돌려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임가연은 민망한 나머지 재빨리 팬티를 받고 옷 주머니에 넣었다.“다른 일... 더 있나요?”“없어.”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거두더니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손가락 끝을 비비적거렸다.임가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쓰레기를 들고 도망쳤다.쓰레기 수거통이 복도에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연이진네 집 문이 열려있었고 그녀의 집 앞에도 누군가가 서 있었는데 연이진과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사부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임가연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진하온은 커다란 봉지를 흔들면서 웃으며 말했다.“금방 이사해서 필요한 게 많을 거 아니야. 생활용품이랑 냉장고에 넣을 음식 재료 좀 사 왔어.”그녀는 감동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부님, 숙소

  • 헤어나올 수 없는 너라는 늪   제34화

    ‘세상에... 이런 일이. 연이진 씨랑 같은 동인 건 물론이고 게다가 맞은편 집이라고? 고급 아파트라 한 층에 두 집뿐인데 그렇다면 이 층에 나랑 연이진 씨밖에 없단 말이야?’임가연은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사부님, 여기가 바로 회사에서 마련해준 직원 숙소란 말이에요?”그녀는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았다.“응. 지금 남은 집이 이 집밖에 없어. 근데 사람이 오랜 시간 살지 않아서 청소 좀 해야 해.”진하온이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문이 덜컥 열렸고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왔다.임가연은 집 안의 인테리어 스타일과 가구를 본 순간 또다시 넋이 나갔다.‘소파, 티테이블, 서랍장, 침대... 어떻게 된 게 이진 씨네 집 거랑 똑같을 수가 있지?’방향마저 똑같았더라면 잘못 들어온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진하온은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진 걸 보고 바로 물었다. 임가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에요. 그냥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요.”‘재벌들의 인테리어는 한 설계사가 대량으로 설계한 건가? 어쩜 가구 브랜드까지 똑같지?’“그렇게 긴장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혼자 사는 건데 그냥 편하게 지내. 일만 열심히 하면 돼.”진하온은 임가연이 겁을 먹은 줄 알고 일부러 농담을 건넸다.임가연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물었다.“제가 혼자 여기서 사나요?”진하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현재는 너 혼자야. 근데 잠시뿐이야. 다른 숙소에 자리가 나면 다시 이사 가도 돼.”단기라는 소리에 임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긴장됐던 마음도 조금은 놓였다.“네. 고마워요, 사부님.”“고맙긴.”진하온은 그녀의 짐을 방 안으로 옮겨주었다. 집구경을 마친 후 임가연이 짐을 정리하려 하자 눈치 있게 먼저 나가려 했다.“그럼 먼저 정리하고 있어. 오늘 반차 줄 테니까 편히 쉬어.”임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고맙다고 했다.아파트를 나선 진하온은 차 안에서 비서

  • 헤어나올 수 없는 너라는 늪   제33화

    “난 아무한테도 세를 줄 생각이 없어.”연이진이 매정하게 거절하자 진하온이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너무 급해서 그래. 우리가 친구로 지낸 지 몇 년인데 나 좀 도와주라. 한 달이라도 돼.”연이진이 물었다.“그 집을 맡아서 뭐 하려고?”진하온이 대답했다.“어젯밤에 회사의 한 직원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데 이사 가겠다고 하더라고. 걔네 아파트가 너무 복잡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직원 숙소가 패리스 타운에 있으니까 오라고 했거든.”“임가연?”연이진이 덤덤하게 물었다.“어떻게 한방에 알아맞혔지? 역시 너한테는 아무것도 못 숨긴다니까. 어쨌거나 내 제자인데 잘 챙겨줘야지, 안 그래? 근데 네가 세를 주기 싫다면 할 수 없고. 다른 집을 알아봐야지, 뭐.”진하온은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의사들은 대부분 결벽증이 있었고 남이 자기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는 걸 매우 싫어했기에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연이진이 잠깐 침묵하다가 불쑥 말했다.“세를 줄 수는 있는데 사람이 너무 많으면 안 되고 최대한 한 사람만 지낼 수 있게 해. 직원 숙소로 쓰는 건 절대 안 돼.”진하온이 바로 대답했다.“알았어. 그건 걱정하지 마.”임가연만 이사를 보낼 수 있다면 그건 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연이진은 전화를 끊은 후 번지수와 현관문 비밀번호를 보냈다. 진하온이 감사의 인사 겸 돈을 보냈지만 받지 않았다.액수가 적은 돈은 눈에 차지 않아 아예 받질 않았다. 진하온도 이미 적응하여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친한 친구라서 나중에 밥 한 끼나 사주면 되었다.진하온은 번지수를 인사팀에 보냈다. 그러고는 인사팀에 절대 말실수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임가연은 빠르게 신청을 마쳤고 숙소 분배도 아주 빨리 진행되었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진하온이 차 키를 들고 찾아왔다.“가연아, 가자. 마침 오후에 일이 없으니까 이사 도와줄게.”임가연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사부님, 이사는 제가 혼자서 하면 돼요. 짐도 별로 많지 않은데요, 뭐.”“아무리

  • 헤어나올 수 없는 너라는 늪   제32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이만 출근해야겠어요. 게스트룸 써도 될까요?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임가연은 연이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게스트룸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아침에 음식 재료를 배달한 것 말고 옷도 구매했다. 음식 재료와 함께 연이진의 아파트로 배달됐다.시간이 없어 옷을 씻지도 못하고 태그만 떼고 입었다. 그러고는 가장 저렴한 캔버스화를 신고 부랴부랴 출근했다.다행히 어젯밤에 진하온과 식사하면서 공구 상자를 그의 차에 뒀기에 바로 회사로 가면 되었다.그녀는 집을 나설 때까지도 연이진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연이진은 거실에 앉아 게스트룸에서 거실로 나왔다가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현관문이 쾅 하고 닫혔다. 동작 전체가 아주 물 흐르듯이 깔끔했다.그는 소파에 앉아 넋을 놓았다. 차분했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한참이 지나서야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고 주방으로 들어가 밑반찬 두 가지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돈 받고 그냥 가버려? 장사를 엄청 깔끔하게 하네? 임가연, 아주 잘났어, 그래.’...임가연은 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오늘은 병원에 가서 사이즈를 재는 게 아니라 다른 업무가 있다고 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에 할 일을 전부 끝내고 나니 오후에는 좀 여유가 생겨 진하온을 찾아가 휴가를 신청했다. 이사할 집을 빨리 찾아야 하니까.“금방 이사한 거 아니었어?”진하온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임가연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대충 얘기했다. 지금 머무르는 아파트가 너무 복잡해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만 했다.눈치 빠른 진하온은 그녀의 어려움을 눈치채고 이렇게 제안했다.“가연아, 너만 괜찮다면 우리 아파트에서 살래? 회사와도 가까워서 출퇴근이 편할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하고.”‘사부님네 아파트? 패리스 타운?’임가연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사부님, 저 아직 인턴이에요. 한 달 월급으로 패리스 타운의 집을 맡는 건 턱도 없어요.”‘그렇게 비싼 아파트를 무슨 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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