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우리 회사 직원이에요. 저랑 함께 선물 고르러 가준 거예요. 여자들이 선물을 고를 때 더 꼼꼼할 것 같아서 데리고 갔을 뿐이죠.”박시언은 그윽한 눈길로 김하린을 바라봤다.만약 그의 속내를 진작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김하린도 지금 이 눈빛에 홀딱 넘어갈 게 뻔하다.진애경은 애틋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었다.그녀는 박시언이 여대생을 만나는 중이라고 똑똑히 전해 들었었다! 게다가 박시언이 김하린을 싫어하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다!“시언이는 젊고 유능한 인재일 뿐만 아니라 우리 하린이도 엄청 아껴주네. 하린이 너한테 맡긴 건 나도 아주 마음이 놓여. 큰형도 하늘에서 분명 시름 놓고 계실 거야. 그리고 이건 가족 연회니까 너무 격식 차릴 필요 없어.”김석진이 들뜬 얼굴로 박시언을 안으로 들였다.김하린은 박시언의 팔짱을 끼고 나지막이 말했다.“연기 꽤 잘하네.”“너도 마찬가지야.”박시언은 또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돌아왔다.자리에 앉은 진애경은 줄곧 마음이 안 내켰다. 그녀는 박시언과 김하린을 힐긋거리며 두 사람한테서 흠을 잡지 못해 안달이었다.“숙모,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왜 자꾸 이쪽만 쳐다보는 거죠?”김하린이 갑자기 말을 꺼내자 진애경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너랑 시언이가 사이가 참 좋아 보여서 그래. 소문과는 전혀 다르네.”“소문은 믿을 바가 못 돼요. 숙모도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믿는 거예요?”김하린은 박시언에게 고기를 한 점 집어줬다.박시언은 담백한 음식 위주로 먹는데 이번에는 내색 없이 고기를 먹었다. 이어서 가시 바른 생선을 김하린의 앞접시에 내려놓았다.진애경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그러게...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오늘 보니까 철저히 알게 됐어. 시언이는 우리 하린이를 정말 지극히 챙기는구나.”옆에 있던 김석진이 두 사람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다가 의아한 듯 물었다.“하린아, 너 언제부터 생선찜을 먹게 된 거야?”진애경은 남편의 말을 듣더니 정신을 번쩍 차리고 드디
전생에 박시언의 말 한마디면 그녀를 곤경에서 구해줄 수 있었는데 정작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옆에서 매정하게 지켜보기만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김하린은 제 손등에 올린 박시언의 손을 툭 쳐냈다.이에 박시언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다행히 이 제스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연회가 끝난 후 박시언과 김하린은 나란히 손을 잡고 김씨 일가를 떠났다. 문밖을 나선 후 김하린은 손을 빼냈다.박시언은 텅 빈 손이 살짝 적응이 안 됐다.잠시 후 김하린이 먼저 물었다.“여긴 왜 왔어?”“혼자 오면 서운함을 당할 걸 뻔히 알면서 왜 기어코 혼자 오려고 한 거야?”김하린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너한테 물었었잖아.”박시언은 입술을 앙다물었다.“오늘 은영의 생일이라 그리로 가봐야 해.”“소은영 생일이라고?”김하린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근데 여길 왜 와?”박시언은 그 누구보다 소은영을 중히 여긴다.김하린의 말투에 이 남자는 저도 몰래 미간이 구겨졌다.“이 가족 연회는 우리 집안과 너희 집안이 관련된 자리이니 당연히 와야지.”“겉과 속이 달라도 너무 달라.”김하린이 나지막이 구시렁댔다.박시언은 그녀의 말이 잘 안 들렸다.“뭐라고?”김하린이 침묵했다. 전생에도 박시언은 가족 연회가 열리는 걸 알았지만 그녀와 함께 와준 적이 없다. 항상 그녀 홀로 까다로운 진애경이나 다른 방계 친척 어르신들을 상대하게 내버려 두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안 가겠다는 핑곗거리조차 귀찮아서 지어내지도 않았다.“소은영 생일 같은 중요한 날에 네가 가서 함께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고.”소은영 얘기에 박시언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은영이는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랐고 애가 참 사려 깊고 착해. 너희 집안 가족 연회라는 걸 알자마자 나한테 전화 와서 일단 여기부터 다녀오라고 했어. 나도 연회 끝나거든 금방 가서 함께 생일을 보내겠다고 약속했고.”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박시언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알아챘다.김하린은
지난번에 김하린이 화려하고 요염한 롱 드레스를 입었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과 김하린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박시언은 항상 소은영을 어린아이처럼 챙겨줄 뿐 여자로 대한 적이 거의 없다.오늘 밤에 반드시 이 기회를 잘 이용하여 박시언에게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끼익.”문이 열리고 소은영도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박시언이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대뜸 이 남자의 품에 안겼다.“은영아?”“안 오실 줄 알았어요.”소은영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잔뜩 서운한 척하며 말했다.박시언은 그녀를 가볍게 밀어냈다.“오늘 네 생일이잖아. 온다고 약속했으면 꼭 와야지.”소은영은 그의 말을 들은 순간 두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하지만 박시언은 그녀의 옷차림과 방 안의 장식을 보더니 저도 몰래 미간이 구겨졌다.“시언 씨, 제가...”“은영아, 이런 옷은 너랑 안 어울려.”소은영이 말하기도 전에 박시언이 대뜸 그녀의 말을 잘랐다.소은영은 잠시 넋 놓고 있었다.박시언은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서 불을 환하게 켰다.“오늘 고른 생일 선물 마음에 들어?”“네...”그녀는 박시언이 방금 한 말을 미처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그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이 비서한테 말해서 이 방 예약하라고 했어. 네 친구들 불러서 다 같이 놀라고 한 거야. 게다가 여기 학교랑 가까워서 내일 학교 가기도 편해.”소은영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박시언이 이어서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나는 저녁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이만 갈게. 너도 일찍 자.”“시언 씨!”박시언이 나가려 하자 소은영은 재빨리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울먹였다.“혹시... 제가 뭐 잘못했나요? 왜 갑자기 가려는 건데요?”박시언은 자신을 안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을 가볍게 내려놓았지만 차마 심하게 몰아붙이지는 못했다. 그는 목소리를 내리깔았다.“나는 네가 주변 환경에 영향받지 말고 공부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어.”소은영은 가슴이 움찔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박시언은 어느새 떠나고 없었다.이 비서는 호텔 밖에 차를 대
김씨 일가의 가족 연회가 끝난 지 며칠 만에 김하린은 A대의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그녀가 A대의 대학원생으로 입학했다는 사실은 업계 내에서 초특급 뉴스로 거듭났다.A대가 금융계 최고의 대학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김하린은 금융을 접해본 적이 없는 명문가 딸이다. 이 두 가지를 함께 엮는 자체가 이미 아주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다.“띠리링...”김하린은 오후에 김석진의 전화를 받았다.김석진은 전화기 너머로 매우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하린아, 너 정말 A대에 합격했어? 그 소문 가짜지?”“당연히 진짜죠.”김하린도 딱히 숨길 생각이 없었다. 이 바닥에는 영원한 비밀이 존재하지 않으니까.김석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대체 얼마를 써서 A대에 들어간 거야? 아니면 박시언이 도와줬니?”“그냥 운 좋게 수능 봐서 합격한 거예요. 시언이가 도와준 거 아니에요.”“그럼 돈 쓴 거네?”김석진이 끝까지 우겨댔다.“어떻게 네 아빠가 물려준 유산으로 그런 짓을 벌여?! 그 돈은 네 미래를 위한 비상금이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 살아!”김석진의 말을 들은 김하린은 저도 몰래 미간이 구겨졌다.“큰아버지, 혹시 제 은행 계좌를 조회하셨어요?”“그건, 다 널 위해서야! 4천억이라니! 어떻게 그 돈으로 A대에 들어가려고 사람을 매수하냐고? 소문이라도 퍼지면 우리 집안 사람들 무슨 체면으로 머리를 들고 다녀? 넌 창피하지도 않아? 이대로 뻔뻔스럽게 살아갈 셈이야?”김석진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지금 바로 A대 가서 그 돈 돌려받고 이 학교 그만둬.”김석진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마치 김하린이 이 돈으로 학교 측 사람들을 매수하여 A대에 입학했다고 단정 지을 기세였다.이건 진애경이 꼬드겨서 그녀에게 전화하라고 시킨 게 틀림없다. 김하린은 바로 알아챘다.한편 그 부지에 관한 일은 아직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없고 또한 진애경이 꼼수를 부리도록 내버려 둘 리도 없다.김하린이 말했다.“큰아버지, 그 돈은 돌려받을 수
진애경이 괜히 그녀가 뒷돈을 주고 A대에 입학한 거라고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또한 4천억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날린 것만 아니었어도 김석진은 절대 김하린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전화를 끊은 후 김하린은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진애경이 벌써 아빠가 물려주신 유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네? 이제 막 소문이 떠돌자 황급히 큰아버지를 부추겨서 내 은행카드를 조회한 거야?’아무래도 진애경은 일찌감치 음모를 꾸민 듯싶다.김하린이 은행 전용 번호로 전화를 걸자 상대가 곧장 받았다.“안녕하세요 김하린 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자산을 다른 카드로 옮기려고요.”“네, 추후 전담 요원이 하린 씨를 위해 서비스해드릴 겁니다.”김하린이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만약 우리 가족이 제 은행 자산에 관해 묻는다면 미리 저한테 말씀해 주시겠어요?”“네, 알겠습니다, 김하린 씨.”김하린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4천억으로 그 부지를 산 바람에 은행카드에 자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빠가 물려주신 유산을 줄곧 이 카드에 넣어두었고 오직 김석진만 이 일을 알고 있다.그가 이토록 중요한 일까지 진애경에게 말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진애경은 역시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다.개강하는 날, 김하린은 아침 일찍 일어났고 유미란도 준비 물건을 미리 챙겨놓았다.유미란은 그녀가 홀로 이 물건들을 챙기는 걸 보더니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대표님도 참 너무 하시네요. 오늘 사모님 개강일인 걸 뻔히 알면서 돌아와서 좀 도와주시면 어디 덧나나요?”“괜찮아요, 아줌마. 시언이 없으면 저는 오히려 더 홀가분해요.”김하린의 말을 들은 유미란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전의 사모님은 매일 이다시피 대표님이 돌아오길 바라셨으니 말이다!“띠리링...”이때 휴대폰이 울렸다. 김하린은 고개 숙여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는데 서도겸한테 걸려온 전화였다.요 며칠 서도겸은 실종된 것처럼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오늘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 온 걸까?전화기 너머로 서도겸의 낮은 웃음소리가
단번에 집 한 채를 샀으니 안 비쌀 리가 있을까? 그곳은 일반 학군이 아니라 귀족학교 근처의 집이다!여기까지 생각한 배주원은 운전하며 백미러로 서도겸을 매섭게 노려봤다.“방금 뭐라고?”김하린은 그의 말이 잘 안 들렸다.이에 서도겸이 답했다.“여기 괜찮다고. 너무 비싼 건 아니래.”그 시각 차가 커브 길을 돌면서 급정거를 했다. 김하린은 제대로 앉지 못하고 곧장 넓고 단단한 품에 쓰러졌다.머리 꼭대기에서 차갑고 진중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배주원, 운전 똑바로 해.”“알았어!”‘사랑 앞에서 우정은 정말 볼품없구나!’그들의 차가 A대 맞은편의 한 고급주택 앞에 도착했다. 서도겸은 전자카드 한 장을 김하린의 손에 쥐여주었다.“개인정보는 내가 대신 입력해줬어. 앞으로 출입할 때 이 카드를 긁으면 돼. 이 주택은 프라이빗 보장이 잘 돼 있고 입주자 대부분이 유명인사들이라 새로운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을 거야.”김하린은 이 주택을 쭉 둘러봤다.A대에 다니기로 했을 때 그녀도 여기서 집을 구하려 했었다.하지만 이 주택은 단지 비싼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지내려면 반드시 자격을 평가받아야 한다.서도겸은 그녀에게 이 집을 구해주느라 엄청 신경을 썼을 것이다.“들어가 봐. 방 구조가 마음에 드는지 한번 둘러봐.”서도겸은 한결 부드러운 눈길로 변했다.김하린은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그녀의 집은 가운데 있는 13층으로 역시 전망이 가장 좋은 자리였다. 문을 열자 방안에서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우면서 심플해서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김하린이 아무 말도 없자 배주원이 얼른 말했다.“이봐, 하린이는 이런 거 절대 안 좋아한다니까! 어떤 여자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해? 다들 소녀 감성을 좋아하겠지.”“아니, 나 너무 마음에 들어.”김하린이 서도겸을 쳐다봤다.“고마워.”“안 갑갑해?”“전혀. 난 심플하고 조용한 게 좋아.”이곳에는 모든 일상생활용품이 갖춰져 있고 향초와 커피머신 같은 물건까지 마련되어
김하린은 오후에 출석체크하러 학교에 갔다. 심플한 캐주얼 차림이지만 캠퍼스 안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너무 예쁜데? 신입생이야?”“전에 본 적 있어? 우리 학교 학생이 맞긴 맞아?”“전에 입시 때 본 것 같기도 하고, 신입생이겠지?”주위 사람들이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김하린을 힐긋거렸다.이때 나름 잘생긴 선배가 달려오며 선뜻 물었다.“안녕? 우리 학교 신입생이야?”김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요.”“기숙사 어디야? 내가 바래다줄까?”“아니요, 괜찮아요. 저 기숙사 안 살아요.”“그럼 함께 출석체크하러 가자. 난 3학년이야. 1학년은 제1강의동에서 출석체크할 거야.”“아니, 난 제2강의동에서 해.”“뭐?”자칭 선배라는 남자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김하린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난 제2강의동에서 출석체크한다고.”“하지만 거긴...”‘대학원생들이 출석체크하는 곳이잖아?!’‘선배’는 김하린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그녀는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어린 소녀인데 A대의 대학원생으로 입학하려면 적어도 3년에서 5년 좌우 수능을 준비해야 한다. 김하린은 아무리 훑어봐도 다 늙은 여자 대학원생들과 비교할 바가 안 됐다.“제2강의동 바로 저기 있네. 고마워 학생.”김하린은 ‘선배’에게 웃으며 인사한 후 돌아서서 제2강의동으로 들어갔다.요 며칠 소은영은 줄곧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다. 박시언은 며칠째 그녀에게 연락 한 통 없고 만나려는 의향이 아예 없었다. 유가람과 안소이마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유가람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건넸다.“은영아, 네 그 남친 말이야, 왜 줄곧 아무 연락도 없지?”“그러게 말이야. 두 사람 설마 그 여자 때문에 헤어진 건 아니지?”안소이도 질문을 보탰다.소은영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요즘 출장 갔어. 괜한 생각 하지 마.”“헐! 이 사람 지난번에 너희가 말했던 은영의 남친 좋아한다던 그 여자 아니야?”이때 또 다른 룸메가 갑자기 그녀들 앞에 휴대폰을 내밀었다.다름이 아니라 학교
이렇게 예쁜 애가 어딜 가나 잘될 텐데 왜 하필 A대에 와서 금융학과를 전공하는 걸까?안소이가 소은영에게 말했다.“내가 볼 때 얘 지금 네 남친 뺏으려고 일부러 너랑 견주러 왔어.”소은영은 사색이 된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아예 못 들었다.김하린이 왔다는 건 그녀가 했던 모든 거짓말이 한순간에 들통난다는 걸 의미한다!“은영아? 너 왜 그래 은영아?”유가람이 소은영 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소은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응? 아니야 아무것도. 갑자기 몸이 좀 안 좋네. 오후 수업은 못 갈 것 같아.”그녀는 홀로 침대에 누워 머릿속에 온통 김하린이 어떻게 A대에 들어왔는지 고민하고 있었다.설마 김하린이 정말 박시언의 도움 없이 홀로 돈을 써서 A대에 입학한 걸까?여기까지 생각한 소은영은 저도 몰래 이불을 꽉 잡았다.그녀는 엄청난 시간을 공들여서 열심히 공부해서야 겨우 A대에 붙었다.하지만 부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조건이 우월하다 보니 돈만 쓰면 남들이 수년간 품었던 꿈을 바로 이룬다.‘대체 왜? 뭣 때문에?!’소은영은 달갑지 않았다!룸메이트들이 다 나간 후 그녀는 박시언에게 전화를 걸었다.전과 달리 연결음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통화가 연결됐다.예전 같으면 박시언은 아무리 바빠도 곧장 그녀의 전화를 받았었다.“대표님, 하린 언니 대학원생으로 합격했어요?”소은영은 방금 울었는지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박시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응.”“어떻게 이렇게 쉽게 합격한 거죠? 올해 시험문제 봤는데 엄청 어려웠다고요.”소은영은 살짝 불만 섞인 말투로 말했다.박시언은 그녀가 얼마나 A대의 대학원생이 되고 싶어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매년 대학원 진학 보증 추천 명액은 몇 명뿐이지만 박시언의 말 한마디면 소은영은 매우 순조롭게 A대의 대학원생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박시언은 늘 그녀에게 더 노력하라고만 할 뿐 단 한 번도 도와주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그리고 지금 김하린이 너무 쉽게 A대에 입학했다.전화기 너머로
“김하린, 말을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박시언은 소은영을 보호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김하린은 귀찮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할머니한테 이 사진을 보여주기 싫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박시언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뭐 어쩔 건데?”“강한 그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놔.”박시언한테서 사과받기란 불가능했다. 그저 입으로 하는 사과보다 실질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다.박시언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럴 수 없어.”“그럴 수 없다고? 그래. 그러면 할머니한테 이 사진 보여주면 되지. 네가 은영 씨를 만나기 위해 속인 걸 알면 무슨 반응일까?”김하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난 상관없어. 오히려 은영 씨가 등록금과 생활비가 끊긴 마당에 할머니가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모르겠네?”소은영은 이 말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맞아, 협박하는 거.”김하린은 별로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었다. 어차피 증거도 가지고 있으니 충분히 협박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대표님...”소은영은 박시언을 불쌍하게 쳐다보면서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박시언은 소은영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하고 싶은데?’“강한 그룹이 본 손해를 두 배로 갚아줘. 그리고 이제부터 강한 그룹을 건드려서는 안돼.”“알았어.”김하린은 그가 소은영을 위해 흔쾌히 대답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소은영이 이미 충분히 불쌍한데 더 불쌍해지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지금 바로 진행해. 오늘 내로 결과를 봐야겠어.”“김하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난 늘 이런 사람이었어.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김하린의 차가운 모습에 박시언은 한참 동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결국 회사에 전화할 수밖에 없었다.소은영은 그의 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다 저의 잘못이에요. 저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언니한테 약점이 잡히지도 않았을 텐데... 저 때문에 잃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김하
“이놈이 정말 얍삽하더라고. 처음에는 경쟁사에서 한 짓인 줄 알았잖아. 요 며칠 얼마나 많은 회사에서 투자를 철수했는지 몰라. 내가 끈질기게 한 사람을 잡고 물어봤더니 그제야 박시언이 한 짓이라고 하더라고. 강한 그룹에 투자하는 사람은 걔 박시언을 무시하는 거라고 하면서!”강한나가 흥분할수록 김하린의 얼굴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박시언이 어떤 성격인 줄 알았지만, 소은영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강한나가 강 씨이긴 해도 서호철의 손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강한 그룹을 건드렸다는 것은 서호철을 건드린 거나 다름없었다. 박시언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강한나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잠깐만요. 제가 해결해 볼게요.”김하린은 전화를 끊었다.아까까지만 해도 박시언과 소은영을 어떻게 해볼 생각이 없었지만 인제 와서 보니 자신이 너무 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시언은 강한나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김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 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얼마 가지도 않아 박시언이 소은영을 위해 커피를 사다 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소은영이 박시언을 끌어안는 틈을 타 김하린은 핸드폰으로 이 모습을 찍어놓았다.몰카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에 박시언은 김하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역시나 김하린은 핸드폰을 흔들거리면서 도발하고 있었다.박시언은 김하린의 핸드폰을 뺏어오고 싶었지만 김하린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놓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쇼핑몰에 사람도 많아서 대놓고 뺏을 수도 없었다.소은영은 박시언의 팔뚝을 잡으면서 김하린을 향해 애원했다.“언니, 저는 이미 집에서도 쫓겨났는데 저희 대표님 좀 내버려 두면 안 돼요?”“그래? 그러면 넌 지금 뭐 하고 있는 건데?”소은영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저...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김하린이 질문했다.“돈이 없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는 거 아니고? 아니면 불쌍한 모습을 시언이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내가 A대 가기 싫은 거 가지고 협박하지 마. 난 이혼하면 그만이야. 어디 서로 물어뜯어 보자고!”김하린은 박시언이 고자질하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심지어 박시언은 김씨 가문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챙기려면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 했다.박시언은 결국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데?”“거래해. 내가 할머니한테 좋은 말하는 대신 너도 같이 연기를 해야 해.”“연기를 해?”박시언이 의심의 눈초리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겨우 그거야?”“다른 사람이 봤을 때 넌 완벽한 남편이 되어야 해. 내 의견을 따르고, 내 체면까지 살려줘야 할 것이야. 그리고 적당히 내 편도 들어주고, 내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해. 얼마나 쉬워. 너한텐 손해 볼 일도 아니잖아.”김하린은 굳이 돌려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김씨 가문 쪽에서는 박시언의 연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며칠 전 최미진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박시언은 김하린이 더욱 싫어졌고, 좋은 남편인 척하기에는 불가능했다.박시언이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래.”김하린은 태블릿 PC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치마를 정리하면서 말했다.“할머니더러 저녁 식사하러 오시라고 해. 내가 직접 요리할 거야.”박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려고?”“할머니 앞에서 서로 사랑하는 부부인척해야 할머니가 너를 풀어줄 거 아니야.”박시언이 피식 웃었다.“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박시언은 그녀의 속을 훤히 뚫어보는 듯했다.김하린은 별로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오후, 이도하가 최미진을 픽업해 왔고, 김하린은 한창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시언은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고, 애써 서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인 척했다.이 장면에 최미진이 흐뭇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식사하는 동안에도 박시언은 친절하게 김하린의 앞에 음식을 짚어주었고, 때로 서로 농담도 주고받았다.최미진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했다.“할머니, 저 내일 쇼핑하고 싶은데
최미진은 박시언을 늘 엄하게 대했고, 박시언은 회초리를 피할 수조차 없었다.최미진이 젖 먹던 힘으로 때린 나머지 박시언의 몸이 시퍼렇게 멍들기 시작했다.김하린은 그저 우두커니 지켜볼 뿐이다. 박시언은 이를 꽉 깨문 채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결국 회초리가 부러지고, 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래도 사과 안 할 거야?”박시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김하린은 박시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맞고도 사과하지 않는 걸 보니 절대 사과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김하린이 말했다.“할머니, 화 푸세요. 저는 사실 시언이를 탓한 적 없어요. 얼른 의사 선생님이나 불러와야겠어요.’김하린의 이해 넓은 모습에 최미진은 그제야 화가 가라앉는 듯했다.박시언의 할머니로서 그가 어떤 성격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박시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아까는 그저 김하린의 화를 풀어주려고 연기한 것이다.최미진이 김하린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하린아, 이제부터 할머니가 시언이를 잘 보고 있을게. 그리고 약속할게. 그년은 이제부터 우리 박씨 집안에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해. 이 집안의 안주인은 너야.”김하린은 그저 웃을 뿐이다.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박시언은 차가운 눈빛으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날이 어두워지고, 최미진은 결국 이도하더러 의사 선생님을 불러오라고는 이곳을 떠났다.김하린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그제야 바닥에서 일어난 박시언은 싫증난 표정으로 말했다.“김하린, 연기 다했어?”김하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시언이 또 이어서 말했다.“이혼을 핑계로 할머니더러 은영이를 쫓아내게 해? 정말 대단해. 내가 너 우습게 봤어.”“마음대로 생각해.”김하린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때 마침 의사 선생님이 도착했고, 김하린이 말했다.“이따 약 바르실 때 너무 살살하실 필요 없어요. 박 대표님은 가죽이 두꺼워서 아파하지도 않아요.”의사 선생님은 고개 숙여 박시언의 눈치만 볼
차에 올라타자마자 이도하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니까 이따 좀 부드럽게 말씀하세요.”김하린이 살며시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할머니께서는 언제 집에 오셨어요?”“오후요.”김하린이 예상했던 대답이었다.최미진이 지금까지 난리 치는 바람에 이도하가 이제야 픽업하러 온 것이다.성격이 불도저 같은 최미진은 절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이쯤이면 소은영은 이미 최미진한테 쫓겨났을 것이다.집에 도착했을 때 집 문은 열려있었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최미진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유미란이 서 있었다.마지막에야 박시언이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방안에는 소은영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짐은 다 쌌어요?”“네. 사모님.”유미란이 트렁크 하나를 끌고 나오면서 말했다.“이거 다 은영 씨 짐입니다.”최미진이 물었다.“도하 씨, 이 중에 시언이가 산 물건들이 어떤 거예요?’이도하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대표님께서 계속 은영 씨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기 때문에...”최미진이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이것들 전부 시언이가 사준 거란 말이에요?”이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최미진이 유미란에게 말했다.“전부 버려요! 그리고 교장 선생님한테 오늘부터 소씨 가문과 연을 끊겠다고 말씀드리세요.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 저희 도움도 필요 없을 것 같은데.”“할머니!”박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은영이는 그저 평범한 아이예요. 집안 형편도 안 좋은데 언제 돈을 벌어서 A대 등록금을 낼 수 있다고 그러세요!”“금융 전공이잖아. 그럴 능력도 못 된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괜히 후원해 준 거나 다름없어!”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리고 네가 후원해 줘서 지금까지 우리 박씨 가문에서 뭐 섭섭하게 해준 거 있어? 독립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라면 더는 그런 사람한테 후원해 줄 필요도 없어.”최미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하린아,
해성의 환경미화원이 출동한 덕분에 김하린이 구매한 오염 구역이 슬슬 정리되기 시작했다. 몇 달만 지나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김하린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도 했다.허가증이 내려온 덕분에 많은 기업들이 이곳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자금이 충분했다.저녁, 배주원은 김하린이 한상 차린 테이블 위에 자료 하나를 올려놓더니 감탄하면서 말했다.“고작 보름 동안 몇십억 원의 투자를 받다니. 하린아, 정말 대단한 거 아니야?”서도겸이 말했다.“자금이 충분하니까 완공 전에 다른 사업에 투자해도 되겠어.”김하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응. 그래서 이미 일부 자금으로 소소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어.”“소소한 투자?”서도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몇백억 원이 나간 걸 봐서는 소소한 투자가 아닌 것 같은데?”김하린은 몇백억 원을 빼내 간 걸 서도겸이 알고있는 줄 몰랐다.처음부터 서도겸을 속일 생각이 없었다. 요 며칠 박시언과 티격태격하느라 많은 일들을 서도겸에게 맡겼기 때문에 서도겸을 속일 수도 없었다.“얼마? 몇백억 원?”강한나는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무슨 투자를 하는 데 몇백억 원씩이나 들어?”‘이건 소소한 투자가 아닌데...’김하린이 말했다.“김씨 가문 명의로 된 프로젝트를 매수했어요.”“뭐라고? 너희 집 명의로 된 프로젝트를 매수했다고?”배주원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그럴 리가! 넌 김씨 가문의 큰딸인데 너희 집 명의로 된 프로젝트도 돈으로 사야 해?”김하린은 최근에 매수한 프로젝트 자료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전부 다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부동산 프로젝트와 투자 진행 상황이었다.배주원이 말했다.“어떤 건 수익이 나지도 않고, 어떤 건 심지어 손해를 보고 있는데 이것들 사서 뭐하려고?”“저가로 매수해서 괜찮아. 나중에 값이 오를 거야.”“지금 상황을 봐서 언제 값이 오르겠어!”김하린은 배주원이 나중에 값이 오를 거라는 말을 믿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전생에 박시언이 이
김하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떠났고, 소은영은 박시언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대표님, 언니가 홧김에 한 말일 거예요. 마음에 두지 말고 화 푸세요.”박시언이 손을 빼버리자 소은영은 멈칫하고 말았다.이때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회사에 처리할 거 있으니까 공부하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리고.”“대표님...”박시언을 잡으려고 했지만 가차 없이 떠나버렸다.밖에서 마당을 쓸고 있던 유미란은 소은영을 향해 콧방귀를 꼈다.‘부부싸움 하는 것 가지고,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알았나 봐?’유미란의 표정에 소은영은 화가 치밀어올랐다.김하린은 학교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갔고, 점심이 되자 강한나가 방문했다.강한나가 흥분하면서 말했다.“정말 박시언한테 이혼하자고 말했어? 대답했어?”김하린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대답 안 했어요.”“그러면 대답한 거나 다름없는 거지. 내 개인 변호사한테 이혼서류를 준비하라고 할게. 재산을 전부 뺏어서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리자고!”흥분한 강한나는 지금 바로 김하린을 끌고 변호사 사무실로 가고 싶었다.김하린이 고개를 흔들었다.“아마도 이혼 못 할 거예요.”“왜?”강한나가 멈칫하더니 말했다.“이혼할 마음이 있었으면 제가 먼저 말 꺼낼 필요도 없이 진작에 저랑 이혼했겠죠.”“그렇긴 한 데... 그런데 왜...”강한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처음부터 서로 이용하려고 맺어진 혼인이었어요. 박씨 가문과 김씨 가문은 아직 서로 이용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이혼하면 안 되는 거고요. 시언이 할머니께서도 저를 손주며느리로 엄청나게 예뻐해 주셔서 은영 씨 하나 때문에 저랑 이혼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김하린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집을 나서면서 일부러 유미란 앞에서 이혼을 언급한 것이다.유미란은 예전부터 최미진을 모셔 온 사람이라 이 소식을 꼭 알릴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 소은영은 바로 더 빌리지에서 쫓겨날 것이었다.강한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모님! 이제야 오셨네요!”유미란이 이 정도로 반기는 걸 보니 아주 서러운 모양인 것 같았다.“아주머니, 시언이 집에 있어요?”“네! 집에 계세요!”유미란이 머뭇거리면서 말했다.“그런데 소은영 씨도 있어요...”유미란은 소은영 생각에 이를 꽉 깨물었다.김하린은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말에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저 최미진이 왔다 갔는데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에 놀랄 뿐이다.‘할머니를 등질 정도로 은영 씨를 좋아하나 봐.’도어락에 지문을 갖다 댔을 때 불일치라는 알림이 떴다.그러자 유미란이 말했다.“어젯밤 도련님께서 돌아오자마자 비밀번호를 전부 바꾸라고 하셨습니다.”유미란이 대신 새로 바꾼 비밀번호를 눌러서야 김하린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박시언은 거실에서 소은영에게 열심히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열애 중인 커플처럼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켁! 켁!”유미란이 마른 기침하면서 박시언에게 말했다.“도련님, 사모님 오셨습니다.”유미란은 일부러 ‘사모님’을 강조해서 말했다.박시언은 그제야 고개 들어 김하린을 낯선 사람처럼 차갑게 쳐다보았다.“누가 우리 집 들어오라고 했어?”박시언의 말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대표님, 왜 화를 내요. 언니가 물건 챙기러 왔을 수도 있잖아요.”소은영이 김하린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언니, 까먹고 챙기지 않은 물건이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직접 오실 필요도 없이 제가 택배로 보내드렸을 텐데.”김하린은 소은영을 냉랭하게 쳐다보고는 박시언에게 말했다.“오늘 회사 안 갔어?”박시언이 피식 웃었다.“네가 뭔데 날 감시해?”“내가 감시하는 게 아니라 도하 씨가 너 연락 안 된다고 전화 왔었거든. 출근하라고 말하러 온 것뿐이야.”김하린의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박시언이 무심하게 말했다.“나 바빠. 시간 없어.”김하린은 한창 박시언의 수업을 받고있는 소은영을 보면서 말했다.“이래서 시간이 없는 거야?”소은영이 미안해하면서 말했다.“언니, 제
서도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김하린이 말했다.“과일 고르는 솜씨가 우리 집 아주머니보다도 나아.”서도겸이 피식 웃었다.차마 하나하나 먹어보면서 고르느라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윙-안방에서 미세한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오자 강한나가 말했다.“누구 핸드폰이 울리는데?”이들은 서로 쳐다만 볼 뿐이다.배주원이 말했다.“내 핸드폰은 진동모드가 아니야.”서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한나는 핸드폰을 꺼내면서 말했다.“내건 여기 있어.”김하린은 그제야 어제 이도하의 전화를 끊고 귀찮은 마음에 진동모드로 바꿔놓은 사실이 떠올랐다.그래서 부랴부랴 안방으로 달려갔다.윙-발신자는 다름아닌 이도하였다.김하린이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이도하는 김하린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모님, 이제야 전화를 받으시네요.”“무슨 일 있으세요?”“대표님께서 어제 온 저녁 찾으셨어요. 서도겸 씨와 함께 클럽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전화를 끊어버리더라고요. 오늘은 출근도 안 하셨고요. 혹시 대표님 연락되시면 출근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저를 찾았다고요?”김하린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왜 갑자기 나를 찾는 거지? 내가 죽든 살든 관심이 없잖아.’핸드폰을 확인하자 정말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와있었다. 하지만 새벽 3시쯤 되었을 때, 박시언은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사모님, 그래도 대표님께서 많이 신경 쓰고 계세요. 대표님께 연락이라도 해보세요. 혹시나...”“알았어요. 고마워요. 도하 씨.”김하린은 박시언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직접 전화하기로 했다. 전화 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전화기 너머에서 냉랭한 기계음이 들려왔다.“지금 거신 전화는 통화 중입니다.”김하린은 인내심을 가지고 박시언에게 문자를 보냈다.[어제 술을 마시느라 못 봤어. 날 찾았어?]문자를 보내자마자 갑자기 뜨는 차단 알림에 김하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박시언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