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번호였다.오서린은 별생각 없이 메시지를 눌렀다가 그 순간 손끝이 멈췄다.침대에 누워 있는 강지후의 사진이었다.상반신이 드러난 채, 눈을 감고 깊이 잠든 모습은 사진만 봐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갈 수 있었다.[너, 아직 지후 씨랑 자본 적 없지?]순간, 오서린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누가 보낸 메시지인지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고 그녀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역시, 네가 전화할 줄 알았어.”익숙한 목소리.비웃음이 섞인 도발적인 첫마디였다.“임다정. 내가 널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랑은 절대 안 만나겠다고 하지 않았어?”“지후 씨가 자꾸 나한테 집착해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당당하게 내뱉는 그 목소리에 오서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두 사람 일에는 흥미 없어.”임다정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오서린, 너도 꽤 연기 잘하더라. 나는 네가 지후 씨네 집에서 나간 거 보고 진짜로 끝낸 줄 알았거든? 근데 알고 보니, 일종의 밀당이더라고. 너, 네가 나가면 지후 씨가 후회할 줄 알았지?”임다정은 말을 이어갔다.“안타깝지만 지후 씨는 널 신경도 안 써. 지후 씨 엄마가 널 아무리 좋아해도 그건 오히려 독이 될걸? 어머님이 널 좋아할수록 지후 씨는 널 더 미워하게 돼.”그리고 결정타처럼 내뱉은 한마디.“참, 지후 씨 나한테 청혼했어.”그 말에 오서린의 가슴이 저릿해졌다.이미 마음에서 내려놨다고 생각했는데‘청혼’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흔들리고 말았다.그녀는 강지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와 함께했던 시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미래 같은 걸 말한 적 없었고 심지어 ‘약혼’이라는 말만 꺼내도 부담스럽다며 피했었다.‘그런 강지후가 임다정에겐 그렇게 쉽게 청혼했다고?’“오서린, 지후 씨는 너한테 빚진 거 없어. 그 사람도 자기 인생 살 권리가 있어. 이제 그만 놓아줘야지. 사람이라면...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을까?”그 순간, 임다정이 말했다.
밤이 깊었다.몇몇 재벌가 자제들이 고급 라운지의 프라이빗 룸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누군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야, 요즘 오서린하고 어떻게 되고 있어? 진전 좀 있냐?”요즘 들어 양도준은 얼굴을 거의 비추지 않았고 다들 그가 오서린에게 열심히 구애 중이라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그들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여서 누가 어떤 성격인지 어떤 속내를 지녔는지 뻔히 아는 관계였다.그래서 은근슬쩍 양도준이 과연 오서린과 사귈 수 있을지 내기를 거는 이들도 있었고 그 열정이 얼마나 갈지 두고 보자는 분위기였다.하지만 양도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누군가가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얘 요즘 소개팅하느라 바쁘잖아?”그 말에 주위가 술렁였다.강지후와 하도윤까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저번엔 오서린 말고는 다 필요 없다더니?”“맞아, 나도 기억나. 이번엔 진심인 줄 알았는데!”누군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도준이 탓은 못 하지. 오서린은 남자 친구까지 생겼다며? 도준이도 다른 여자 만날 수 있는 거잖아.”“그렇지. 우리 도준이 어디 가서 꿀릴 외모도 스펙도 아닌데 오서린이 보는 눈이 없는 거지. 지난번에도 제대로 선 넘던데?”이런저런 말들이 쏟아졌고 누군가는 양도준의 어깨에 팔을 걸고 장난스레 말했다.“소개팅에서 괜찮은 여자 있었냐? 언제 한번 데리고 나와봐. 우리가 같이 봐줄게.”양도준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의 팔을 밀쳐냈다.“꺼져.”순간, 룸 안이 조용해졌다.침묵이 흘렀고 양도준이 머리를 헝클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너희가 뭘 알아? 소개팅은 내가 좋아서 한 게 아니야. 우리 엄마가 하라고 해서 억지로 나간 거라고. 안 가면 내 카드 막겠다며 협박까지 했어.”누군가 조심스레 물었다.“그럼 아직도 오서린 좋아하는 거야?”양도준은 쓰게 웃으며 털어놓았다.“그래. 아직도 좋아해. 근데 걘 남자 친구가 있잖아. 나 따윈 쳐다도 안 본다고.”말투는
강지후가 조용히 양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서린은 내 여동생이나 마찬가지야. 걔가 싫어하고 원치 않는 일은 강요해서는 안 돼. 걔의 생각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해. 그걸 못 하겠으면 그냥 멀리 떨어져 있어.”그 말에 양도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명심할게.”오서린은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다.강지후를 생각해서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정 때문이든 오서린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기만 한다면 양도준은 끝까지 잘해 줄 자신이 있었다.강지후는 다시 조용히 와인잔을 들었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도윤의 시선이 강지후를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잔잔한 눈빛 속에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고 그의 속마음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그때였다.그때 하도윤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급히 전화를 받았다.“형.”“한 명이 모자라. 당장 튀어와.”전화기 너머 짜증 섞인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오자 하도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 바로 갈게.”공손한 하도윤의 태도에 주변 사람들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하나같이 무덤덤한 표정이었다.하도윤의 친형은 건드려선 안 되는 악귀 같은 존재였고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하도윤은 전화를 끊자마자 허겁지겁 위층으로 향했다.고급 프라이빗 룸.그곳엔 이미 세 남자가 모여 있었다.주은혁은 입에 담배를 문 채, 문을 열고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하도윤을 흘끗 봤다. 그러고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허차오를 향해 비꼬듯 말했다.“네 동생, 말 진짜 잘 듣네?”하이건은 손가락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앉아.”하도윤은 재빨리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인물을 보고 순간 얼어붙었다.“태하 형... 또 뵙네요...”그 맞은편엔 다름 아닌 진태하가 앉아 있었다.“그래.”진태하는 그를 차갑게 훑어보며 짧게 대답했다.이내 탁자 위엔 카드를 섞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고 세 사람은 카드를 치면서도 일 얘기를 나눴다.
“야, 뭘 그렇게 뜸 들여! 빨리 말해!”하이건이 동생의 정강이를 슬쩍 발로 차며 재촉하자 하도윤은 놀란 듯 급히 입을 열었다.“오서린이에요. 어릴 때 우리 집에도 몇 번 왔었어요!”“오서린?”주은혁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고 하이건도 무언가 떠오른 듯한 눈빛이었다.“걔, 은채랑 엄청 친하잖아.”“얼마 전에 은채가 전화해서 오서린 남자 친구인 척 좀 해달라고 하더라.”주은혁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이 여자 맞지?”하도윤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근데 형은 왜 오서린 사진을 갖고 있어요?”주은혁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진태하를 힐끔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그러니까, 누가 갑자기 싸늘하게 돌아섰다 했더니 질투였구먼?”하이건도 놀란 듯하면서 은근히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에 형 옆에 있던 그 여자, 오서린이었어?”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테이블 건너편 진태하를 향했다.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진태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패 한 장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걔한테 이상한 생각 품지 마.”낮고 단단한 목소리엔 명확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하도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역시... 오서린이 말한 남자 친구, 진짜 태하형이었어...’“오호라.”주은혁과 하이건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슬쩍 웃음을 터뜨렸다.“사진 지워.”진태하가 짧게 명령했다.“알았어, 알았어. 네 여잔데 내가 무슨 짓 하겠냐?”주은혁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사진을 삭제했고 심지어 휴지통까지 비운 뒤 핸드폰을 진태하에게 내보였다.“됐지?”그리고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근데 진짜 의외네. 내 기억이 맞다면 오서린이 은채랑 동갑이었을 텐데, 그럼 형보다 여섯 살 어린 거 아냐? 게다가 족보상으론...”“삼촌이지.”하이건이 툭 끼어들었다.“맞다, 삼촌!”주은혁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맨날 근엄한 얼굴로 금욕주의자처럼 살더니, 오하늘이 떠난 뒤론 여자는 쳐다도 안 보는 줄 알았
“형, 전에 오서린 남자 친구가 그냥 대학교 조교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도윤이 형 말은 다르더라고. 그 남자 건드리지 말래. 함부로 볼 사람이 아니라면서.”“그럼,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얘기 안 했어?”“아니. 그냥, 나더러 오서린한테 관심 끄래.”“관심 끄라고?”강지후의 입꼬리에 냉소가 스쳤다. 그는 말없이 휴대폰을 꺼내 하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은 꺼져 있었다.“뭐야. 알려주기 싫다는 거네.”하지만 강지후는 그날 밤에 본 남자가 바로 오서린의 남자 친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오서린과 함께 올라온 모습을 분명히 목격했고 게다가 바로 맞은편 집에 살고 있어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설마 그 남자,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가?’그는 곧장 어딘가 전화 걸었다.“그 남자에 대해 다시 조사해 봐.”한편, 배정숙은 오서린이 운영하는 매장을 찾았다.오서린은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고 배정숙은 옆 테이블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손님이 나간 후, 오서린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자 배정숙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옆에 앉히며 말했다.“여기 옷들 참 예쁘구나.”오서린이 다정하게 웃었다.“마음에 드는 거 있으세요? 제가 선물로 드릴게요.”“역시 넌 속이 깊은 아이지.”배정숙은 오서린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문득 속을 태우는 아들이 떠올랐다.‘이럴 줄 알았으면 둘째라도 낳는 건데.’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었고 무엇보다,이제 그녀와 오서린은 더 이상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그녀의 눈가가 붉어진 걸 본 오서린은 조심스럽게 티슈를 건넸다.“저 지금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서린아...”배정숙은 오서린의 손을 꼭 잡았다.“우리 딸 해줄래?”오서린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진심이야. 아저씨랑 나, 너를 딸로 삼고 싶어.”배정숙의 눈빛은 간절했다.오서린은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하려 했지만 문득 임다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집은
저녁 식사 시간.이날따라 오서린은 평소보다 밥을 천천히 말없이 먹고 있었다. 늘 틀어놓던 TV도 오늘은 꺼진 채였다.진태하는 식사를 마친 뒤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무슨 일 있어?”오서린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내일 밤엔 여기 못 올 것 같아요. 밥도 못 해줄 것 같고요.”“괜찮아. 병원 식당에서 먹으면 되니까.”“네...”짧게 대답한 뒤, 오서린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인 채 그 뒤로는 아무 말도 없었다.진태하도 더 이상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밤이 깊었다.오서린을 그녀의 집 앞까지 데려다준 뒤, 진태하는 그대로 차 안에 앉아 있었다.오서린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지켜본 뒤에도 십 분 넘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혹시나 연락이 올까 싶어 휴대폰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오서린에게서는 전화도,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그가 막 시동을 걸려던 순간,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화면을 확인한 진태하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네, 엄마.”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무뚝뚝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는 다정했다.“저녁은 먹었니?”“네, 먹었어요.”“내일 밤엔 당직 있니?”“왜요.”“시간 되면 엄마랑 같이 좀 가줄 데가 있는데...”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태하는 단호하게 잘랐다.“시간 없어요.”“당직 없다며!”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지만 이내 애원하듯 이어졌다.“태하야, 엄마랑 아빠가 네가 의사 되는 걸 반대한 적 없어. 근데 의사 한다고 네 인생까지 버리면 안 되잖아. 지금 당장 결혼하라는 말 아니야. 적어도 여자 친구는 좀 사귀어 봐야지.”“엄마, 나 지금 일하고 있어요.”“이 전화 끊으면 엄마 진짜 내일 병원으로 찾아간다!”진태하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결국 끊지도 못하고 전화기를 귀에 붙인 채 말없이 있었다.“태하야, 솔직히 말해봐. 혹시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거니?”그는 잠시 말을
“오늘 우리 모녀룩 입기로 했잖아요?”오서린이 거울 앞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러자 옆에 서 있던 배정숙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다음에 입자. 오늘은 이 드레스가 훨씬 더 잘 어울려. 너무 예쁘다, 정말.”그녀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오서린을 바라보았다.이제 오서린은 그녀의 ‘딸’이었다.그녀는 이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딸로 만들고 싶었고 무엇이든 좋은 것, 아끼는 것 전부 다 주고 싶었다.그 생각만으로도 배정숙의 가슴 한편이 따뜻하게 벅차올라 웃음이 절로 피어나는 기분이었다.오서린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복잡했지만 배정숙의 그 따스한 미소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모임은 호텔이 아닌 강씨 가문의 저택에서 열렸다.배정숙의 말처럼 초대된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이었다.오서린은 그들 중 절반 이상이 낯익은 얼굴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이런 상류층 모임은 이 집 저 집 돌아가며 열리는 일상이었고 그녀도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스며든 듯했다.배정숙은 오서린의 손을 꼭 잡고 손님을 맞았다.오늘 자리에 온 이들 대부분은 사모님들이었고 그 중엔 명문가 아가씨들도 눈에 띄었다.하지만 정작 도련님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오서린은 얌전히 배정숙 옆에 서서 인사를 도우며 이야기를 들었다.그제야 오늘 모임의 명목이 배정숙 부부의 결혼기념일임을 알게 되었다.그때, 느닷없이 한 여자가 물었다.“아드님이랑 그 여배우는 어떻게 됐어요?”배정숙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그녀는 눈가에 호기심이 가득한 상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오늘 같은 날엔 그 얘기 하지 말죠. 괜히 기분만 상하니까.”“진짜 그 여배우랑 사귀는 거예요?”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놀라며 물었다.그러고는 힐끔 오서린을 바라보더니 소곤거리듯 말했다.“그 여배우, 아무리 봐도 서린이만 못하던데. 아드님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배정숙이 오래전부터 오서린을 며느릿감으로 점찍어 두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지후는 이번에도 임다정을 부모한테 인사시키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다른 재벌가 자제들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정숙은 속이 끓어올라 당장이라도 화를 내고 싶었지만 하객들도 많고 체면도 있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못 본 척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냥 넘어가진 않았다.“지후는 왜 이쪽엔 오지도 않아? 인사는커녕 얼굴도 안 보이네.”“저 여자, 연예계에 있다는 그 애 맞지? 둘이 꽤 다정해 보이던데?”“서린아, 네가 가서 지후 좀 불러와 봐.”오서린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망설임에 사람들 사이로 은근한 수군거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배정숙이 조용히 몸을 돌려 오서린에게 속삭였다.“서린아, 우리랑 있으니 재미없지? 너도 애들이 있는 쪽으로 가서 놀아.”“네...”배정숙의 배려 섞인 말에 오서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레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박연아를 포함한 몇몇 여자아이들은 오서린이 이 자리에 참석한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그녀가 배정숙 곁에서 다른 사모님들과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도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녀가 다가오자 자연스레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서린아, 오늘 정말 예쁘다!”“그러니까.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도 정말 잘 어울리네. 이것도 아줌마가 골라주신 거지?”배정숙이 오서린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이미 사교계에 퍼질 대로 퍼져 있었고 그 덕분에 오서린을 은근히 질투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오서린은 그들의 가식적인 웃음과 말투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 모임을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런 위선은 이미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그럼에도 오늘은 그녀가 존경하는 배정숙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기에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오서린은 예전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응, 이모가 골라주셨어.”“역시 널 정말 예뻐하시는구나. 이 드레스 가격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우리 엄마는 이런 거
“제가 알아서 할게요.”“정말 네가 알아서 했다면 내가 지금 이런 전화를 하고 있겠니?”송미경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지만 그 이면엔 걱정과 조바심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태하야, 넌 우리 집안 하나뿐인 아들이야. 네가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으면 그럼 진씨 가문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니?”그때였다.“저 여자 친구 있어요.”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 말에 정작 진태하 본인도 놀랐다.생각보다 감정은 빠르게 입으로 이어졌고 그 말이 실수였단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니? 여자 친구가 있다고? 어느 집 딸이야? 왜 난 처음 듣는데?!”송미경은 놀란 나머지 새된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이내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근데 왜 오늘 그 연회장에 따라온 거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노력 중이에요.”“진짜야?”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금방 감을 잡았다.아들은 거짓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올해 설에 데리고 갈게요.”“좋아. 그럼 당분간은 맞선 안 잡을게. 근데 태하야, 엄마 속이면 진짜 가만 안 둬. 알았지?”“네.”통화를 끝낸 진태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짧은 숨을 토해냈다.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고 아랫배에 남은 뜨거운 잔열은 쉽게 식지 않았다.한참 뒤 그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거실을 지나 옆방으로 향했다.오서린의 핸드백과 휴대폰을 조심스레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고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잠든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잔잔하게 들리는 숨소리, 흰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흐르는 머리카락.진태하는 조용히 이불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다음 날 아침.오서린은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잠든 사이에 흘러간 밤을 되짚었다.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옷도 말끔히 입고 있었다.‘별일 없었던 건가?’그
사실 진태하 역시 오서린에게 아무 생각이 없던 게 아니었다.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맥주 두 병을 사 오는 걸 그렇게 쉽게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오서린이 잠들었더라면 진태하도 그녀를 그냥 내버려뒀을 것이다.하지만 오서린은 깨어있었고 도발적인 눈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무심코 아래로 향했다. 얇은 슬립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있었고 얇은 천 사이로 드러나는 곡선은 꽤 적나라했다.샤워를 마친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바디워시 향기는 껍질을 막 벗긴 과일처럼 유혹적이었다.진태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내려 손을 뻗었다.“너, 술 취했어.”“나 안 취했어요!”오서린은 오히려 그의 목을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그리고 들뜬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정적으로 말했다.“그쪽이 인정 안 해도 상관없어요. 나 알아요. 일부러 나 데리러 온 거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여사님들도 그랬어요. 그쪽, 원래 그런 자리에 안 나온다면서요. 근데 오늘은 나 때문에 왔죠? 결국 날 데리러 온 거였잖아요.”끝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조잘거림.술기운에 발그레 물든 입술이 흔들리며 단어마다 꿀처럼 흘러내렸다.진태하의 목 안쪽이 바짝 말라왔고 혀끝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스쳤다.그가 자부하던 자제력은 언제나 그녀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오서린. 너 계속 이러면 나 진짜 장담 못 해.”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속삭였다.“나 오늘 부모님 생겼어요.”그 순간, 진태하의 굳어가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오서린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오늘 나, 딸로 받아줬어요.”“그래서 너무 기뻤어요. 그런데 그 집엔 강지후가 있어서 같이 살 수는 없어요...”“친구도 있긴 한데 은채도 이제 남자 친구 생겨서 그 집에도 못 얹혀살아요.”“나, 혼자인 거 너무 싫어요. 외로운 건 더 무섭고. 근데 지금이 그쪽이 있어서
빨간불에 차량은 천천히 멈춰 섰다.무심코 고개를 돌린 진태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또렷한 시선을 느꼈다.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오서린은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잘생겼으니까요.”스물둘, 한창 생기가 얼굴 가득한 나이였다.선홍빛 입술에 하얀 치아,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는 그 미소는 햇살처럼 눈 부셨다.진태하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목울대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낮고 짙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앞으론 그런 옷 입지 마.”오서린은 눈을 깜빡이며 당황했다.고개를 숙이자마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깊은 가슴골이었다.순간, 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당황한 나머지 옷깃을 위로 끌어올렸지만 이 옷은 애초에 그런 디자인이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슬그머니 손을 내린 오서린은 시선을 피하듯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러던 중, 차가 포장마차 앞을 지나가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 배고파요.”결국 두 사람은 꼬치와 맥주를 사 들고 진태하의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오서린은 배정숙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다.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드레스를 벗고 샤워를 한 뒤 민소매 상의에 짧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그녀가 집에서 가장 편하게 입는 차림이었다.며칠 전, 진태하의 집에서 처음 밤을 보내고 난 후 오서린은 결심했다.‘이 집에 자주 올 일이 생길 거야. 그럴 거면 아예 옷 몇 벌쯤은 갖다 두자.’매번 그의 옷을 빌리는 것도 번거롭고 어색했다.그녀의 이런 행동을 진태하는 말리지 않았고 입으로는 선을 지켜야 한다고 운운하면서도 그의 눈빛과 행동은 달랐다.오늘 밤도 그랬다.오서린이 “TV 좀 볼게요.” 하고 말했을 때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머리를 말리고 번 헤어로 단정히 묶은 오서린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얼굴을 한 번 훑어본 뒤, 만족한 듯 방문을 열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저.. 어머님과 같이 가게 됐어요.]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송미경의 차에 올라탔다.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송미경은 곱게 차려입은 그녀를 한 번 흘긋 보더니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배 여사는 정말 복도 많지. 이렇게 예쁜 딸을 뒀으니 말이야.”그녀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예전에 네가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갔으면 지금쯤 나도 아들이랑 딸 하나씩 두고 있었을 텐데... 서린아, 아예 아줌마 딸 할래?”송미경의 장난스러운 말에 오서린은 머쓱하게 웃었다.그 순간, 앞자리의 기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모님, 저기 도련님 차 같은데요.”송미경이 고개를 돌리자 마당 한 켠에 아직 떠나지 않은 진태하의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순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아직 안 갔잖아? 급한 일 있다고 했던 거 다 거짓말이었네. 그냥 출발해요!”송미경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고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자신이 보낸 메시지는 그대로 읽음 표시도 없이 남아 있었다.‘봤을까? 봤겠지...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지?’오서린은 틈날 때마다 고개를 돌려 차창 너머를 살폈다.차가 큰 도로로 접어들어도 진태하의 차량은 따라오지 않았다.‘혹시 메시지를 또 보내야 하나...’그 생각이 스치려는 찰나 송미경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뭐라고요! 쓰러져요? 의사 선생님은 오셨어요? 네, 지금 바로 돌아갈게요!”송미경은 전화를 끊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기사에게 물었다.“근데 이 길 아니잖아요, 잘못 든 거 아니에요?”기사는 당황한 듯 말했다.“그게... 사모님께서 오서린 양 먼저 데려다주신다고 하셔서요.”순간, 송미경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스쳤고 그걸 눈치챈 오서린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여기서 저 그냥 내려주셔도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갈게요.”“안 돼. 밤길에 어떻게 혼자 보내.”“요즘은 앱으로 금방
“맞아, 이제 막 왔으니까 금방 가지는 않을 거야. 얼른 딸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해야겠다. 지금 출발하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여인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서로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그 대화 너머 살짝 떨어진 자리에서 오서린은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표정은 담담했지만 귀 끝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 순간. 오서린의 핸드백 안에서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켜보자 단 한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갈 거야?]보낸 사람은 진태하였다.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오서린은 그와 눈이 마주쳤고 아무 말도 없었지만 심장이 쿵 하고 요동쳤다.그의 눈빛은 담담했고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듯 차분했다.오서린은 손에 쥔 휴대폰을 꾹 쥐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짧고 단호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갈래요.]곧이어 다시 메시지 한 줄이 도착했다.[밖에서 기다릴게.]그 말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고개를 들어보니 진태하는 이미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오서린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어머니를 찾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얘가 겨우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가겠대?”그때 송미경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얼굴엔 실망이 가득했다.“이번엔 뭔가 달라질 줄 알았지. 정신 좀 차리고 여자 친구 하나 진지하게 만나려나 했더니 내가 또 괜히 기대만 했네. 그렇게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옆에 서 있던 배정숙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태하가 요즘 얼마나 바빠요. 병원 일에 회사 일까지 맡고 있다던데. 워낙 책임감이 강한 애니까 이해해 줘요.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오라고 하면 되죠.”“지금 벌써 스물여덟이에요. 나이가 적으면 말도 안 하지...”송미경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이대로 두면 서른 넘기고 마흔 넘길까 봐 두려워요. 나는 대체 언제쯤 며느리 한 번 보나 몰라. 손자 하나 안고
남자의 차가운 시선이 임다정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하게 물었다.“누구시죠?”찬물이 정수리에 쏟아진 듯 임다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졌다.그녀는 얼어붙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눌렀다.“나 기억 안 나요?”진태하의 조각 같은 얼굴은 무표정했다.잠시 그녀를 살피던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무심하게 되물었다.“환자였나?”그 말에 임다정의 얼굴에서 완전히 빛이 사라졌다.수치심과 참을 수 없는 절망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죄송합니다. 지금은 제 근무 시간이 아니라서요. 다른 일정이 있습니다.”진태하는 딱 잘라 말한 뒤,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 옆을 지나쳐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임다정은 마치 텅 빈 껍데기처럼 서 있었다.그는 그녀를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다.몇 년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던 이름과 사진첩에 몰래 저장했던 그 미소, 그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우리 아들 왔네!”연회장 안, 송미경의 목소리가 환한 미소와 자부심을 머금은 채 울려 퍼졌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귀부인들은 앞다퉈 딸들을 앞으로 내세우며 번뜩이는 눈빛으로 자리를 탐색했다.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서린의 혼처 얘기에는 외면하던 얼굴들은 이제는 딸을 진태하 옆에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정숙의 속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미소 속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오서린은 진태하의 등장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섰다.하지만 그 순간, 송미경의 한마디가 그녀를 움찔하게 만들었다.“난 또 의사들은 다 여자 만날 시간 없는 줄 알았는데, 서린이 남자 친구도 의사라며? 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잘만 하던데? 그런데 너는 스물여덟이 되도록 왜 이러니 진짜.”한순간에 연회장 안의 시선이 모두 오서린을 향했다.진태하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하얗던 얼굴은 금세 붉게 물들고 가슴은 쿵쿵
“서린이 이 옷을 입으니까 정말 예쁘네요. 내가 뭐랬어요? 분홍색은 서린이한테 찰떡이라니까요!”한 여자가 연신 칭찬을 늘어놓자 배정숙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우리 딸이 워낙 예쁘잖아요. 뭘 입혀도 다 잘 어울리죠.”“딸?”옆에 있던 송미경이 살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그러자 곧장 주위 사람들이 웃으며 상황을 설명해 줬다.“아, 이번에 정식으로 양녀로 들였대요. 오늘 발표도 했고요.”송미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그런데 전에 서린이를 며느리 삼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그녀는 남의 뒷말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최근 강지후와 오서린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배정숙은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다시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건 내키지 않았다.사실 그녀도 요즘 들어 괜히 아들과 오서린의 관계를 이리저리 떠벌려 결국 오서린이에게 상처만 준 건 아닐까 싶어서 후회하고 있었다.“우리 아들이 그럴 복이 없었나 봐요.”배정숙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서린이가 그 아이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났거든요.”“그래요?”송미경은 흥미로운 듯 오서린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래서 남자 친구가 의사라며?”그 말에 오서린의 속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이미 한 번 뱉어버린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송미경의 다음 질문이 두려워졌다.“어느 병원에서 근무해?”그 순간, 오서린은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설마 병원 이름 얘기하면 어느 의사인지 까지 물어보는 거 아니야?’다행히도 그때 배정숙이 기지를 발휘했다.“송 여사님, 그런데 아드님은 대체 언제 오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잖아요.”송미경이 가볍게 핸드백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조금 늦는다더니 혹시 깜빡했나? 내가 전화 좀 해볼게요.”그 시각, 연회장 바깥.임다정은 조용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차 안은 담배
라수아는 주변에 모여 있던 여자들을 쓱 훑어보았다.하성시에서 이름 좀 있다고 하는 인사들은 죄다 이 자리에 모여 있었고 그녀들 사이에서는 종종 남편이나 자식 이야기가 대화의 주요 소재였다.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누구네 아들이 오서린과 사귄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이 모임은 겉으로는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사실은 날마다 경쟁이 치열한 무대나 다름없었다.자식 혼사는 당연히 신중하게 따져야 했고 며느리는 백번 천번 골라야 하며 딸은 반드시 상위 집안으로 시집보내야 한다는 불문율도 존재했다.그때, 누군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물었다.“서린아, 오늘은 남자 친구 안 데리고 왔어?”배정숙의 체면을 생각한 오서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일이 바빠서요. 오늘은 못 왔어요.”“이렇게 늦은 시간까지도 일한다고?”몇몇 사모님들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을 막고 수군거렸다.그 모습을 본 배정숙은 속이 다 타는 기분이었다.‘이럴 땐 그냥 대충 둘러대지, 어쩜 저렇게 솔직하냐고...’“그래? 남자 친구는 무슨 일 하는데?”그 질문에 오서린은 가장 먼저 진태하를 떠올렸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의사예요.”“의사라, 어쩐지.”사모님들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그들 자식 중 의사인 남자는 없었고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의사는 성실한 직일 수는 있어도 ‘상류층 자제’들에게 흔한 직업은 아니었으니까.‘역시 배 여사가 사윗감 보는 눈이 없구먼.’그들 눈빛 속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어느 병원에 있어?”누군가 집요하게 물었고 배정숙의 얼굴엔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하지만 그때였다.“어머, 저기 송 여사 아니야?”누군가의 말에 모든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연회장이 일순 술렁이기 시작했다.송미경.하성시의 최상위 재벌 가문 중 하나인 송씨 가문의 안주인이자 진태하의 어머니였다.귀부인들은 경쟁하듯 딸을 데리고 그녀에게 다가갔고 라수아도 딸을 이끌고 빠르게 가서 환한 미소로 인사를
오서린은 배정숙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고 있자니 가슴 한켠이 저릿하게 뭉클해졌다. 그동안 마음 한편에 조용히 묻어두었던 외로움이 감사와 애틋함으로 바뀌며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그녀는 이 자리에서 배정숙 부부가 난처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눈물로 가득한 눈을 꾹 감은 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외쳤다.“아빠, 엄마...”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정숙은 오서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팔엔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고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강인헌 역시 눈가가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이며 오서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래, 우리 착한 딸...”행사가 마무리되고 무대에서 내려온 뒤, 배정숙은 오서린을 데리고 재벌가 사모님들 모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딸’을 데리고 등장한 그녀를 향해 모두가 진심 어린 칭찬과 부러움 섞인 인사를 건넸고 배정숙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근데 말이에요, 라 여사님. 양도준 군은 오늘 왜 안 왔어요? 이런 좋은 자리에 한 번쯤 얼굴 비출 법도 한데?”순간, 그 자리에 있던 부인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고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라수아를 향했다.오서린은 어머니가 왜 갑자기 양도준의 이름을 꺼낸 건지 알 수 없었고 라수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 애가 이런 모임 별로 안 좋아해서요.”배정숙은 가늘게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웃었다.“내가 듣기론 그 아이가 우리 서린이를 꽤 좋아한다던데요? 오늘 나도 한 번 보려고 했는데 아쉽네요.”그 말에 라수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우리 아들이 그런 말 한 적 없어요.”단호하고 건조한 말투에는 명백한 불쾌감이 느껴졌다.배정숙도 그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하고는 속으론 불쾌함이 밀려들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그럼, 여러분 댁에 괜찮은 청년 있으면 우리 서린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