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린은 고개를 돌려 진태하를 바라보았다.정혁수가 말을 이었다.“태하 형은 아니거든요. 저 형은 주안대 나왔거든요. 전에 한국대로 학술교류 갔을 때 지안 씨 지도교수님이랑 같이 있었대요.”그 말에 오서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서린은 다시 매장으로 돌아왔다.정혁수는 진태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의 진료실로 돌아갔다.“형, 아까 지안 씨 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선 넘은 것 같지 않아요?”진태하는 그 말을 깔끔히 무시한 채 수술 환자의 검사 결과지를 바라보았다.정혁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그런데 더윈 오피스텔이면 재건축 아니에요? 그런 데는 관리도 제대로 안 된다고 들었는데. 전에 우리 부모님도 더윈 중고 매물 보러 갔었거든요. 거기 사람들도 그렇고 분위기가 너무 어수선해서 그냥 아파트로 가셨어요.”“서린 씨는 집주인분이 한국대라서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 뭔가 수상하단 말이죠. 괜히 불안하다고 해야 하나.”“그리고 여자 혼자 살잖아요.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접근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그 집 한 번 가볼까요?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면 아무리 집주인이라도 함부로 못 하겠죠.”정혁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진태하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진태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시간 없어.”“형 조카잖아요!”“보고 싶으면 알아서 가든가.”정혁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저도 가고는 싶죠... 그런데 저랑 서린 씨가 그럴 사이도 아니고, 괜히 여자 혼자 사는 집에 가겠다고 하면 조금 이상해 보이잖아요.”“형, 피가 안 섞였을 뿐이지, 이웃사촌이잖아요. 갑자기 서린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부모님께는 뭐라고 할 건데요?”진태하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다가 다시 환자 차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회진 갈 시간이야.”회진을 마친 후, 정혁수는 다시 외래 진료를 떠났다. 진태하는 그제야 평화를 되찾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의자에 다시 앉은 그는 문득 정
오서린은 미리 준비해온 립스틱을 가방에서 꺼내 손에 쥐고 거실로 나왔다.거실 통유리창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립스틱은 찾았어?”오서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바닥을 펼쳐 립스틱을 보여주었다.“그럼 이제 볼 일 없지?”오서린은 슬쩍 진태하의 식탁을 바라보았다. 마침 식사 중이었던 것 같았다.“밥 좀 얻어먹어도 될까요?”“...”“어차피 이거 혼자 다 못 먹잖아요. 남기면 또 아깝고, 아직 저녁도 안 먹었는데 집에 가서 차리긴 귀찮잖아요.”식탁 위엔 네 가지 반찬이 넉넉하게 차려져 있었다. 진태하는 음식을 한 번 남기면 다시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대신 내일 점심은 제가 사 올게요. 그럼 태하 씨는 점심값 안 써도 되고, 저도 편하고. 서로한테 좋은 거 아니에요?”이렇게 하면 내일도 찾아올 명분이 생기는 것이었으니 오서린은 말하면서도 본인이 꽤 똑똑하게 느껴졌다.하지만 진태하가 오서린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싸늘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말했다.“그깟 점심값 안 아껴도 되는데.”오서린은 이미 그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사는 세상은 전혀 달랐다. 이미 고액의 연봉도 받고 집안까지 짱짱한 진태하가 점심값을 아끼려 할 리가 없었다.오서린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아무리 그래도 돈 많다고 이런 식으로 낭비하는 건 좀 아니죠. 초등학생 때 안 배웠어요? 농부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데.”“안 되면, 다 먹고 남은 거 포장이라도 해갈게요.”‘이렇게까지 하는데 또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예전에도 냉장고에 남은 반찬은 가져가도 된다고 했으니까.’게다가 오서린은 전에 진태하에게 사줬던 약값도 받지 못했다. 그것도 눈감아줬으니 이 정도는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남자는 깊고 검은 눈동자로 조용히 오서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오서린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볼 것 같았다.진태하의 눈을 마주한 오서린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대놓고 좋아하겠다며 선언해놓
오서린은 자신의 요리에 꽤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진태하에게 밥을 차려줬던 그때, 그도 평소보다 더 많이 먹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날보다 입맛이 없어 보였다.진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새우 껍질을 까는 데 집중했다.오서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밥은 제가 차려줄게요. 인건비 같은 건 굳이 안 받을 테니까 장 볼 돈만 주세요. 그럼 우리 다 점심이랑 저녁은 걱정할 필요 없을 거고, 굳이 아주머니 부르거나 구내식당에서 안 사 먹어도 되잖아요.”“그리고 제가 직접 만드는 게 더 깨끗하고 건강에 좋지 않겠어요? 매일 메뉴도 다르게 만들 수 있고, 태하 씨 건강에 더 좋은 음식이 뭔지도 공부해볼게요. 먹고 싶은 게 생기면 말만 해요, 제가 다 만들어 줄 테니까. 모르는 건 인터넷 찾아서라도 레시피 꼭 외워 올게요. 진짜...”진태하가 오서린의 말을 끊었다.“예전에도 그런 식으로 강지후 비위 맞춰줬어?”“...”남자의 차가운 표정을 마주한 오서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진태하가 자신과 강지후의 사이를 알고 있다는 게 불편하게만 느껴졌다.식사를 마친 진태하는 휴대폰을 들고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식탁 앞에는 오서린 홀로 남게 되었다.오서린은 이미 저녁을 먹고 온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밥집에 들러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왔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탓에 굳이 집에서 요리를 하고 싶지 않았고 혼자 먹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천천히 밥을 다 비우고 나니 배가 너무 불렀다. 서재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고, 진태하는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오서린도 이렇게 가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릇과 수저들은 모두 주방으로 들고 가 싱크대에 놓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물을 틀었다.시간 맞춰 집으로 온 김혜숙은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설거지 중인 오서린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물었다.“왜 여기서 설거지를 하고 계세요?”오서린은 그 목소리
회사 일까지 마친 진태하는 서재에서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그러다가 주방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오서린과 김혜숙이 나란히 서서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이미 쓰레기까지 다 정리해둔 김혜숙은 거실로 나온 진태하를 발견하고 웃으며 말했다.“그럼... 서린아... 나도 두 사람 더 방해 안 하고 먼저 가볼게.”김혜숙의 ‘두 사람’이라는 표현에 오서린은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집 안에는 단둘만 남게 되었다. 진태하가 무심히 오서린을 바라보자 그녀가 급히 해명했다.“우리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안 믿으시더라고요.”진태하는 간단히 대답한 후, 다시 몸을 돌렸다.“태하 씨!”그 말에 진태하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려 오서린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오서린은 성큼성큼 진태하의 앞으로 걸어와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그... 아까 제가 아주머니 요리에 대해서 막 얘기했잖아요. 그건 신경 안 써도 돼요. 저도 이제 아주머니 사정 안 좋은 거 다 들었거든요. 제가 괜한 얘길 한 것 같아요. 저도 굳이 아주머니 밥그릇 뺏을 생각 없어요.”말을 하면 할수록 괜히 더 민망해지는 것 같았다.진태하는 오서린의 제안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그런데도 굳이 한 번 더 얘기하는 자신이 괜히 들떠서 김칫국 마시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더 무안해졌다.오서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끝을 바라보았다.“그럼...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까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소파에서 가방을 챙겨 빠른 걸음으로 현관까지 걸어갔다.오서린의 빠른 걸음 뒤로 남자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내가 데려다줄게.”그 말에 오서린이 걸음을 멈추고는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지금... 저를 데려다주겠다고요?”진태하는 방으로 들어가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오서린은 얼떨떨한 얼굴로 진태하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늦은 밤바람이 창문 틈으
하지만 진태하가 멀리 가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마침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운 진태하는 휴대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왔다.오서린의 전화번호였다.왜인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어 급히 전화를 받아보았다.그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는 다급하고도 불안한 오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태하 씨, 아까 샤워하다가 갑자기 정전됐어요. 뭐가 잘못된 것 같은데, 와서 좀 봐주면 안 돼요?”오서린이 급히 말을 이었다.“원래는 집주인분 부르려고 했는데, 시간도 너무 늦어서 실례일까 봐... 저 무서워요.”진태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옷 챙겨 입어. 금방 갈게.”“네, 고마워요.”전화를 끊자마자 진태하는 바로 앞 교차로에서 방향을 틀어 유턴했다....오서린은 옷을 갈아입고 복도에 나와 진태하를 기다리고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진태하가 보였다. 오서린은 반가운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가 그를 맞이했다.“왔어요?”진태하는 오늘 길에 공구 가게에 들러 수리에 필요할지도 모를 공구 상자와 전선을 챙겨와 능숙하게 고장 난 전선을 교체해 주었다.다시 온수기를 켜 본 오서린은 그제야 모든 게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태하 씨 진짜 대단하네요. 왜 모르는 게 없어요? 오늘 정말 큰 도움 받았어요.”밝은 백열등 아래, 오서린의 눈동자에는 즐거운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조금의 숨김이나 꾸밈도 없는 그 밝은 미소가 진태하를 향해 있었다.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린 진태하는 더 이상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진태하를 현관까지 배웅해주기 위해 문을 연 그 순간, 손에 배달 음식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던 유재준과 마주쳤다.“서... 서린 씨, 바비큐 좀 갖고 왔어요...”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를 보자마자 잠시 멈칫했다.진태하는 인상을 구기며 오서린을 바라보았다.오서린이 유재준을 소
그날 밤, 휴대폰을 들고 한참이나 고민하던 오서린은 결국 남은 600만 원을 추가로 송금했다.그러자 유재준에게서 답장이 돌아왔다.[???][저도 괜히 빚지고 싶지 않아요. 그냥 받아주세요.]유재준은 메시지를 입력했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시 답장을 보냈다.[서린 씨, 혹시 제가 방금 찾아간 것 때문에 남자친구분이 오해하시는 건 아니겠죠?][아니에요, 그냥 이 동네 집값 시세를 잘 아니까 그런 거예요. 적어도 이 동네 월세는 120만 원이 기본인데, 이 집만 50만 원이니까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한 거죠.][재개발 때문에 집이 갑자기 여러 채가 생겨버려서 조금 싸게 줘도 상관없어요.][이건 조금이 아니라 아예 반값이잖아요. 그게 너무 불공평한 거죠. 그리고,]한참이나 망설이던 오서린은 다시 메시지를 마저 전송했다.[저도... 남자친구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유재준은 더 이상 아무 답장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오서린의 계좌이체 어플에서 송금 성공이라는 알림이 울렸다.유재준이 돈을 받은 후에야 오서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동시에 마음이 아팠다.진태하가 그 400만 원을 안 받아준 게 신의 한 수였다. 만약 그 400만 원이 아니었으면 한꺼번에 천만 원이 나가버리는 셈이었으니 생활비가 부족해 쪼들리며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진태하를 떠올리자 김혜숙이 해줬던 말들도 생각났다.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전선도 갈아주고,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던 말도 자꾸 떠올랐다.그는 흉부외과 교수였다.오서린은 인터넷에 진태하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곧이어 그와 관련관 게시글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더 놀라웠던 건 그에게 팬카페까지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팬카페 회원 수까지 2만 명으로 절대 적지 않았다.팬들은 다른 팬덤들과 비슷하게 진태하를 띄워주기에 바빴다. 어떤 팬은 연예인보다 잘생긴 데다가 능력까지 갖춘 완벽한 남자라는 게시글을 올렸다. 그럴 만도 했던 게 진태하
“강지후, 너 미쳤어?”“형, 저랑 서린 씨 여기 있어요!”오서린은 김지안과 함께 식판을 들고 걸어오는 진태하를 발견하자마자 급히 전화를 끊고 그 번호를 차단했다.진태하는 여전히 정혁수의 옆에 앉았고 김지안은 오서린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오서린은 김지안의 등장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김지안은 오서린을 발견하자마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지만 눈에서는 조금의 웃음기도 보아낼 수 없었다.“또 왔네요, 서린 씨?”오서린은 김지안의 말투에서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챘다. 이 여자 역시 진태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지금 진태하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었다. 그러니 둘의 경쟁은 공평한 것이었다.오서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혁수가 먼저 나섰다.“서린 씨한테도 오늘부터 식권 카드가 생겼거든요, 앞으로 점심은 우리랑 같이 먹을 거예요.”“우리 구내식당이 그렇게 맛있는 편도 아닌데, 서린 씨처럼 귀티 나는 분이 이런 밥을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죠?”김지안은 고개를 살짝 들어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더니 그윽한 미소로 말했다.“선배는 어떻게 생각해요?”진태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오서린을 슬쩍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에 오서린은 괜히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미 생각해둔 말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병원 구내식당 밥이 싸잖아요. 밖에서 먹으려면 도시락 하나 사도 만원 거의 되는데, 여긴 메뉴도 다양하고, 고기로 많고, 국물도 무한 리필이니까요.”말을 마친 오서린은 국물이 담긴 그릇을 들어 크게 한 입 들이켰다.정혁수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병원 밥이 진짜 싸긴 하죠, 깨끗하고. 게다가 다 집밥 느낌이라 저는 오히려 좋아요.”김지안은 그 말에 비웃듯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오서린의 귀를 흘끗 바라보았다.“그 귀걸이... 딱 보니까 명품이네요. 그거 적어도 몇백은 할 텐데, 돈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요.”“이건 제 친구가 선
김지안은 오서린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건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앞에 앉은 진태하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자신이 아닌 오서린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진태하를 보는 김지안의 마음속은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진태하는 김지안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정혁수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서린 씨, 세상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래도 좋은 남자는 있어요.”“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하지만 그 좋은 남자도 평생 저한테만 잘해줄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남자보다 제 집이 더 믿음이 가네요.”정혁수는 남자가 집을 사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려면 기본적으로 둥지라는 게 필요했으니까.현실적인 오서린의 생각은 좋았지만 집을 사기 위해 대출까지 낀 여자를 만난다면 분명 둘의 앞날에 영향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쩐지 마음이 복잡해진 정혁수는 밥을 다 먹고 난 후, 전처럼 오서린을 배웅해주지 않았다.오서린도 그런 정혁수의 변화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병원을 나서려던 그녀는 뭔가를 떠올린 듯 가방을 뒤적여 분홍색 텀블러를 꺼내더니 진태하에게 건넸다.“안에 꿀물 있어요. 인터넷 서치하다가 봤는데 꿀이 위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가져가서 마셔요.”정혁수와 김지안은 오서린의 행동에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정혁수는 그저 삼촌을 잘 챙기는 조카라고만 생각했다. 어차피 오서린은 진태하를 꼬박꼬박 삼촌이라고 불렀고, 친척끼리 서로 챙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하지만 김지안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굳었다. 진태하의 건강까지 챙기며 각별히 신경 쓰는 오서린의 행동에 김지안은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그래도 김지안은 진태하가 오서린이 준 텀블러를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에 그녀가 사 왔던 밀크티도 자신에게
“제가 알아서 할게요.”“정말 네가 알아서 했다면 내가 지금 이런 전화를 하고 있겠니?”송미경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지만 그 이면엔 걱정과 조바심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태하야, 넌 우리 집안 하나뿐인 아들이야. 네가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으면 그럼 진씨 가문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니?”그때였다.“저 여자 친구 있어요.”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 말에 정작 진태하 본인도 놀랐다.생각보다 감정은 빠르게 입으로 이어졌고 그 말이 실수였단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니? 여자 친구가 있다고? 어느 집 딸이야? 왜 난 처음 듣는데?!”송미경은 놀란 나머지 새된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이내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근데 왜 오늘 그 연회장에 따라온 거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노력 중이에요.”“진짜야?”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금방 감을 잡았다.아들은 거짓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올해 설에 데리고 갈게요.”“좋아. 그럼 당분간은 맞선 안 잡을게. 근데 태하야, 엄마 속이면 진짜 가만 안 둬. 알았지?”“네.”통화를 끝낸 진태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짧은 숨을 토해냈다.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고 아랫배에 남은 뜨거운 잔열은 쉽게 식지 않았다.한참 뒤 그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거실을 지나 옆방으로 향했다.오서린의 핸드백과 휴대폰을 조심스레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고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잠든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잔잔하게 들리는 숨소리, 흰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흐르는 머리카락.진태하는 조용히 이불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다음 날 아침.오서린은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잠든 사이에 흘러간 밤을 되짚었다.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옷도 말끔히 입고 있었다.‘별일 없었던 건가?’그
사실 진태하 역시 오서린에게 아무 생각이 없던 게 아니었다.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맥주 두 병을 사 오는 걸 그렇게 쉽게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오서린이 잠들었더라면 진태하도 그녀를 그냥 내버려뒀을 것이다.하지만 오서린은 깨어있었고 도발적인 눈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무심코 아래로 향했다. 얇은 슬립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있었고 얇은 천 사이로 드러나는 곡선은 꽤 적나라했다.샤워를 마친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바디워시 향기는 껍질을 막 벗긴 과일처럼 유혹적이었다.진태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내려 손을 뻗었다.“너, 술 취했어.”“나 안 취했어요!”오서린은 오히려 그의 목을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그리고 들뜬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정적으로 말했다.“그쪽이 인정 안 해도 상관없어요. 나 알아요. 일부러 나 데리러 온 거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여사님들도 그랬어요. 그쪽, 원래 그런 자리에 안 나온다면서요. 근데 오늘은 나 때문에 왔죠? 결국 날 데리러 온 거였잖아요.”끝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조잘거림.술기운에 발그레 물든 입술이 흔들리며 단어마다 꿀처럼 흘러내렸다.진태하의 목 안쪽이 바짝 말라왔고 혀끝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스쳤다.그가 자부하던 자제력은 언제나 그녀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오서린. 너 계속 이러면 나 진짜 장담 못 해.”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속삭였다.“나 오늘 부모님 생겼어요.”그 순간, 진태하의 굳어가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오서린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오늘 나, 딸로 받아줬어요.”“그래서 너무 기뻤어요. 그런데 그 집엔 강지후가 있어서 같이 살 수는 없어요...”“친구도 있긴 한데 은채도 이제 남자 친구 생겨서 그 집에도 못 얹혀살아요.”“나, 혼자인 거 너무 싫어요. 외로운 건 더 무섭고. 근데 지금이 그쪽이 있어서
빨간불에 차량은 천천히 멈춰 섰다.무심코 고개를 돌린 진태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또렷한 시선을 느꼈다.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오서린은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잘생겼으니까요.”스물둘, 한창 생기가 얼굴 가득한 나이였다.선홍빛 입술에 하얀 치아,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는 그 미소는 햇살처럼 눈 부셨다.진태하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목울대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낮고 짙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앞으론 그런 옷 입지 마.”오서린은 눈을 깜빡이며 당황했다.고개를 숙이자마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깊은 가슴골이었다.순간, 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당황한 나머지 옷깃을 위로 끌어올렸지만 이 옷은 애초에 그런 디자인이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슬그머니 손을 내린 오서린은 시선을 피하듯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러던 중, 차가 포장마차 앞을 지나가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 배고파요.”결국 두 사람은 꼬치와 맥주를 사 들고 진태하의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오서린은 배정숙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다.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드레스를 벗고 샤워를 한 뒤 민소매 상의에 짧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그녀가 집에서 가장 편하게 입는 차림이었다.며칠 전, 진태하의 집에서 처음 밤을 보내고 난 후 오서린은 결심했다.‘이 집에 자주 올 일이 생길 거야. 그럴 거면 아예 옷 몇 벌쯤은 갖다 두자.’매번 그의 옷을 빌리는 것도 번거롭고 어색했다.그녀의 이런 행동을 진태하는 말리지 않았고 입으로는 선을 지켜야 한다고 운운하면서도 그의 눈빛과 행동은 달랐다.오늘 밤도 그랬다.오서린이 “TV 좀 볼게요.” 하고 말했을 때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머리를 말리고 번 헤어로 단정히 묶은 오서린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얼굴을 한 번 훑어본 뒤, 만족한 듯 방문을 열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저.. 어머님과 같이 가게 됐어요.]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송미경의 차에 올라탔다.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송미경은 곱게 차려입은 그녀를 한 번 흘긋 보더니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배 여사는 정말 복도 많지. 이렇게 예쁜 딸을 뒀으니 말이야.”그녀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예전에 네가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갔으면 지금쯤 나도 아들이랑 딸 하나씩 두고 있었을 텐데... 서린아, 아예 아줌마 딸 할래?”송미경의 장난스러운 말에 오서린은 머쓱하게 웃었다.그 순간, 앞자리의 기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모님, 저기 도련님 차 같은데요.”송미경이 고개를 돌리자 마당 한 켠에 아직 떠나지 않은 진태하의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순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아직 안 갔잖아? 급한 일 있다고 했던 거 다 거짓말이었네. 그냥 출발해요!”송미경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고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자신이 보낸 메시지는 그대로 읽음 표시도 없이 남아 있었다.‘봤을까? 봤겠지...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지?’오서린은 틈날 때마다 고개를 돌려 차창 너머를 살폈다.차가 큰 도로로 접어들어도 진태하의 차량은 따라오지 않았다.‘혹시 메시지를 또 보내야 하나...’그 생각이 스치려는 찰나 송미경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뭐라고요! 쓰러져요? 의사 선생님은 오셨어요? 네, 지금 바로 돌아갈게요!”송미경은 전화를 끊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기사에게 물었다.“근데 이 길 아니잖아요, 잘못 든 거 아니에요?”기사는 당황한 듯 말했다.“그게... 사모님께서 오서린 양 먼저 데려다주신다고 하셔서요.”순간, 송미경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스쳤고 그걸 눈치챈 오서린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여기서 저 그냥 내려주셔도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갈게요.”“안 돼. 밤길에 어떻게 혼자 보내.”“요즘은 앱으로 금방
“맞아, 이제 막 왔으니까 금방 가지는 않을 거야. 얼른 딸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해야겠다. 지금 출발하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여인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서로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그 대화 너머 살짝 떨어진 자리에서 오서린은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표정은 담담했지만 귀 끝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 순간. 오서린의 핸드백 안에서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켜보자 단 한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갈 거야?]보낸 사람은 진태하였다.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오서린은 그와 눈이 마주쳤고 아무 말도 없었지만 심장이 쿵 하고 요동쳤다.그의 눈빛은 담담했고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듯 차분했다.오서린은 손에 쥔 휴대폰을 꾹 쥐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짧고 단호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갈래요.]곧이어 다시 메시지 한 줄이 도착했다.[밖에서 기다릴게.]그 말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고개를 들어보니 진태하는 이미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오서린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어머니를 찾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얘가 겨우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가겠대?”그때 송미경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얼굴엔 실망이 가득했다.“이번엔 뭔가 달라질 줄 알았지. 정신 좀 차리고 여자 친구 하나 진지하게 만나려나 했더니 내가 또 괜히 기대만 했네. 그렇게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옆에 서 있던 배정숙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태하가 요즘 얼마나 바빠요. 병원 일에 회사 일까지 맡고 있다던데. 워낙 책임감이 강한 애니까 이해해 줘요.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오라고 하면 되죠.”“지금 벌써 스물여덟이에요. 나이가 적으면 말도 안 하지...”송미경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이대로 두면 서른 넘기고 마흔 넘길까 봐 두려워요. 나는 대체 언제쯤 며느리 한 번 보나 몰라. 손자 하나 안고
남자의 차가운 시선이 임다정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하게 물었다.“누구시죠?”찬물이 정수리에 쏟아진 듯 임다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졌다.그녀는 얼어붙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눌렀다.“나 기억 안 나요?”진태하의 조각 같은 얼굴은 무표정했다.잠시 그녀를 살피던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무심하게 되물었다.“환자였나?”그 말에 임다정의 얼굴에서 완전히 빛이 사라졌다.수치심과 참을 수 없는 절망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죄송합니다. 지금은 제 근무 시간이 아니라서요. 다른 일정이 있습니다.”진태하는 딱 잘라 말한 뒤,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 옆을 지나쳐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임다정은 마치 텅 빈 껍데기처럼 서 있었다.그는 그녀를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다.몇 년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던 이름과 사진첩에 몰래 저장했던 그 미소, 그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우리 아들 왔네!”연회장 안, 송미경의 목소리가 환한 미소와 자부심을 머금은 채 울려 퍼졌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귀부인들은 앞다퉈 딸들을 앞으로 내세우며 번뜩이는 눈빛으로 자리를 탐색했다.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서린의 혼처 얘기에는 외면하던 얼굴들은 이제는 딸을 진태하 옆에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정숙의 속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미소 속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오서린은 진태하의 등장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섰다.하지만 그 순간, 송미경의 한마디가 그녀를 움찔하게 만들었다.“난 또 의사들은 다 여자 만날 시간 없는 줄 알았는데, 서린이 남자 친구도 의사라며? 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잘만 하던데? 그런데 너는 스물여덟이 되도록 왜 이러니 진짜.”한순간에 연회장 안의 시선이 모두 오서린을 향했다.진태하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하얗던 얼굴은 금세 붉게 물들고 가슴은 쿵쿵
“서린이 이 옷을 입으니까 정말 예쁘네요. 내가 뭐랬어요? 분홍색은 서린이한테 찰떡이라니까요!”한 여자가 연신 칭찬을 늘어놓자 배정숙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우리 딸이 워낙 예쁘잖아요. 뭘 입혀도 다 잘 어울리죠.”“딸?”옆에 있던 송미경이 살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그러자 곧장 주위 사람들이 웃으며 상황을 설명해 줬다.“아, 이번에 정식으로 양녀로 들였대요. 오늘 발표도 했고요.”송미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그런데 전에 서린이를 며느리 삼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그녀는 남의 뒷말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최근 강지후와 오서린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배정숙은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다시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건 내키지 않았다.사실 그녀도 요즘 들어 괜히 아들과 오서린의 관계를 이리저리 떠벌려 결국 오서린이에게 상처만 준 건 아닐까 싶어서 후회하고 있었다.“우리 아들이 그럴 복이 없었나 봐요.”배정숙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서린이가 그 아이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났거든요.”“그래요?”송미경은 흥미로운 듯 오서린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래서 남자 친구가 의사라며?”그 말에 오서린의 속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이미 한 번 뱉어버린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송미경의 다음 질문이 두려워졌다.“어느 병원에서 근무해?”그 순간, 오서린은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설마 병원 이름 얘기하면 어느 의사인지 까지 물어보는 거 아니야?’다행히도 그때 배정숙이 기지를 발휘했다.“송 여사님, 그런데 아드님은 대체 언제 오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잖아요.”송미경이 가볍게 핸드백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조금 늦는다더니 혹시 깜빡했나? 내가 전화 좀 해볼게요.”그 시각, 연회장 바깥.임다정은 조용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차 안은 담배
라수아는 주변에 모여 있던 여자들을 쓱 훑어보았다.하성시에서 이름 좀 있다고 하는 인사들은 죄다 이 자리에 모여 있었고 그녀들 사이에서는 종종 남편이나 자식 이야기가 대화의 주요 소재였다.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누구네 아들이 오서린과 사귄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이 모임은 겉으로는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사실은 날마다 경쟁이 치열한 무대나 다름없었다.자식 혼사는 당연히 신중하게 따져야 했고 며느리는 백번 천번 골라야 하며 딸은 반드시 상위 집안으로 시집보내야 한다는 불문율도 존재했다.그때, 누군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물었다.“서린아, 오늘은 남자 친구 안 데리고 왔어?”배정숙의 체면을 생각한 오서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일이 바빠서요. 오늘은 못 왔어요.”“이렇게 늦은 시간까지도 일한다고?”몇몇 사모님들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을 막고 수군거렸다.그 모습을 본 배정숙은 속이 다 타는 기분이었다.‘이럴 땐 그냥 대충 둘러대지, 어쩜 저렇게 솔직하냐고...’“그래? 남자 친구는 무슨 일 하는데?”그 질문에 오서린은 가장 먼저 진태하를 떠올렸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의사예요.”“의사라, 어쩐지.”사모님들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그들 자식 중 의사인 남자는 없었고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의사는 성실한 직일 수는 있어도 ‘상류층 자제’들에게 흔한 직업은 아니었으니까.‘역시 배 여사가 사윗감 보는 눈이 없구먼.’그들 눈빛 속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어느 병원에 있어?”누군가 집요하게 물었고 배정숙의 얼굴엔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하지만 그때였다.“어머, 저기 송 여사 아니야?”누군가의 말에 모든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연회장이 일순 술렁이기 시작했다.송미경.하성시의 최상위 재벌 가문 중 하나인 송씨 가문의 안주인이자 진태하의 어머니였다.귀부인들은 경쟁하듯 딸을 데리고 그녀에게 다가갔고 라수아도 딸을 이끌고 빠르게 가서 환한 미소로 인사를
오서린은 배정숙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고 있자니 가슴 한켠이 저릿하게 뭉클해졌다. 그동안 마음 한편에 조용히 묻어두었던 외로움이 감사와 애틋함으로 바뀌며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그녀는 이 자리에서 배정숙 부부가 난처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눈물로 가득한 눈을 꾹 감은 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외쳤다.“아빠, 엄마...”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정숙은 오서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팔엔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고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강인헌 역시 눈가가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이며 오서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래, 우리 착한 딸...”행사가 마무리되고 무대에서 내려온 뒤, 배정숙은 오서린을 데리고 재벌가 사모님들 모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딸’을 데리고 등장한 그녀를 향해 모두가 진심 어린 칭찬과 부러움 섞인 인사를 건넸고 배정숙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근데 말이에요, 라 여사님. 양도준 군은 오늘 왜 안 왔어요? 이런 좋은 자리에 한 번쯤 얼굴 비출 법도 한데?”순간, 그 자리에 있던 부인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고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라수아를 향했다.오서린은 어머니가 왜 갑자기 양도준의 이름을 꺼낸 건지 알 수 없었고 라수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 애가 이런 모임 별로 안 좋아해서요.”배정숙은 가늘게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웃었다.“내가 듣기론 그 아이가 우리 서린이를 꽤 좋아한다던데요? 오늘 나도 한 번 보려고 했는데 아쉽네요.”그 말에 라수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우리 아들이 그런 말 한 적 없어요.”단호하고 건조한 말투에는 명백한 불쾌감이 느껴졌다.배정숙도 그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하고는 속으론 불쾌함이 밀려들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그럼, 여러분 댁에 괜찮은 청년 있으면 우리 서린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