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후, 너 미쳤어?”“형, 저랑 서린 씨 여기 있어요!”오서린은 김지안과 함께 식판을 들고 걸어오는 진태하를 발견하자마자 급히 전화를 끊고 그 번호를 차단했다.진태하는 여전히 정혁수의 옆에 앉았고 김지안은 오서린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오서린은 김지안의 등장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김지안은 오서린을 발견하자마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지만 눈에서는 조금의 웃음기도 보아낼 수 없었다.“또 왔네요, 서린 씨?”오서린은 김지안의 말투에서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챘다. 이 여자 역시 진태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지금 진태하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었다. 그러니 둘의 경쟁은 공평한 것이었다.오서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혁수가 먼저 나섰다.“서린 씨한테도 오늘부터 식권 카드가 생겼거든요, 앞으로 점심은 우리랑 같이 먹을 거예요.”“우리 구내식당이 그렇게 맛있는 편도 아닌데, 서린 씨처럼 귀티 나는 분이 이런 밥을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죠?”김지안은 고개를 살짝 들어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더니 그윽한 미소로 말했다.“선배는 어떻게 생각해요?”진태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오서린을 슬쩍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에 오서린은 괜히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미 생각해둔 말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병원 구내식당 밥이 싸잖아요. 밖에서 먹으려면 도시락 하나 사도 만원 거의 되는데, 여긴 메뉴도 다양하고, 고기로 많고, 국물도 무한 리필이니까요.”말을 마친 오서린은 국물이 담긴 그릇을 들어 크게 한 입 들이켰다.정혁수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병원 밥이 진짜 싸긴 하죠, 깨끗하고. 게다가 다 집밥 느낌이라 저는 오히려 좋아요.”김지안은 그 말에 비웃듯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오서린의 귀를 흘끗 바라보았다.“그 귀걸이... 딱 보니까 명품이네요. 그거 적어도 몇백은 할 텐데, 돈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요.”“이건 제 친구가 선
김지안은 오서린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건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앞에 앉은 진태하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자신이 아닌 오서린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진태하를 보는 김지안의 마음속은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진태하는 김지안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정혁수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서린 씨, 세상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래도 좋은 남자는 있어요.”“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하지만 그 좋은 남자도 평생 저한테만 잘해줄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남자보다 제 집이 더 믿음이 가네요.”정혁수는 남자가 집을 사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려면 기본적으로 둥지라는 게 필요했으니까.현실적인 오서린의 생각은 좋았지만 집을 사기 위해 대출까지 낀 여자를 만난다면 분명 둘의 앞날에 영향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쩐지 마음이 복잡해진 정혁수는 밥을 다 먹고 난 후, 전처럼 오서린을 배웅해주지 않았다.오서린도 그런 정혁수의 변화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병원을 나서려던 그녀는 뭔가를 떠올린 듯 가방을 뒤적여 분홍색 텀블러를 꺼내더니 진태하에게 건넸다.“안에 꿀물 있어요. 인터넷 서치하다가 봤는데 꿀이 위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가져가서 마셔요.”정혁수와 김지안은 오서린의 행동에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정혁수는 그저 삼촌을 잘 챙기는 조카라고만 생각했다. 어차피 오서린은 진태하를 꼬박꼬박 삼촌이라고 불렀고, 친척끼리 서로 챙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하지만 김지안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굳었다. 진태하의 건강까지 챙기며 각별히 신경 쓰는 오서린의 행동에 김지안은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그래도 김지안은 진태하가 오서린이 준 텀블러를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에 그녀가 사 왔던 밀크티도 자신에게
“아, 아니야...”“너 뭐 숨기는 거 있지? 뭐야?”오서린은 거짓말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주은채는 그녀의 표정만 봐도 오서린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너 설마, 진짜 남자친구 생긴 거야?”그런 게 아니라면 매일같이 밖으로 달려나갈 이유가 없었다.오서린이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도 해명해보려 했지만 주은채가 말을 끊었다.“나한테 솔직히 말해. 거짓말이라도 하면 진짜 절교야!”“...”주은채가 정말 이런 일로 절교를 할 리는 없었지만 오서린도 계속 숨기는 건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앞으로도 계속 밖으로 달려나가야 할 텐데 말이다.“사실 남자친구는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래. 어떻게든 꼬셔보려고 그러는 거야.”“...”주은채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네가 누굴 꼬신다고?”오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그냥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중이긴 한데. 정말 잘 되면 그때 얘기해줄게.”오서린이 이윽고 덧붙였다.“안 되면 너무 창피하잖아.”주은채는 들을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서린의 얼굴과 몸매로 직접 남자를 꼬시러 다녀야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오서린이 강지후와 사귀었을 때도 둘은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았고, 먼저 접근한 쪽도 강지후였다.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오서린은 누군가를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남자 아이돌이나 잘생겼다고 유명한 배우에게도 빠진 적이 없었다. 그랬던 오서린이 직접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 쫓아다닌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그 남자가 대체 얼마나 잘났길래.”잘난 게 아니고서야 오서린 같은 친구가 이렇게까지 쩔쩔맬 리 없었다.오서린은 저절로 진태하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보니 외모는 충분히 출중했다. 게다가 학벌도 높았고 능력도 있었다. 이윽고 게시판을 가득 채웠던 환자들의 감사 인사와 칭찬 글들까지 떠올려 본 오서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엄청난 남자지.”오서린의 입에서 ‘엄청난’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
오서린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 밥을 두 공기 퍼와 식탁 앞에 앉았다.진태하의 구겨진 미간을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디. 그는 말없이 가만히 오서린을 응시했다. 그 눈빛은 마치 왜 허락도 없이 들어왔냐며 따지는 것 같았다.오서린은 그런 진태하의 싸늘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직 입을 대지 않은 젓가락으로 미트볼 하나를 집어 그의 밥그릇에 올려주더니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이거 연근이랑 돼지고기로 만든 미트볼이거든요. 입맛에 맞는지 한 번 먹어봐요.”그렇게 마주한 오서린의 눈빛에는 아부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진태하는 문득 낮에 자신에게 꿀물을 건네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렸다. 뭔지 모를 기대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마치 꼬리를 흔들며 애교 부리는 강아지처럼 보였다.진태하는 분명 오서린이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호텔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던 이후로, 오서린은 자꾸 진태하의 삶에 발을 들이려 하고 있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집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여자애가 왜 자꾸 남의 집에 드나들어.”이것 역시 분명한 거절 의사를 담아 내뱉은 말이었다.눈치 빠른 오서린이 그 말뜻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못 알아들은 척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말했다.“저도 밥 좀 얻어먹으면 안 돼요? 어차피 다 못 먹으면 버릴 거잖아요. 그냥 경제적으로 저 좀 도와준다고 생각해요.”진태하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서린은 미리 준비해둔 듯 휴대폰을 꺼내 어젯밤에 받았던 계좌이체 내역을 보여주었다.똑똑했던 그녀는 이미 채팅 기록까지 다 지워놓았다. 진태하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두 번의 송금 내역이었다. 각각 600만 원씩, 총 1200만 원에 달하는 돈이었다.이체시간 역시 정확했다.“저 진짜 돈이 없어서 그래요. 월급이 한 달에 200만 원이 안 되는데, 거기서 100만 원은 월세로 나가고, 그럼 저는 100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한단 말이에요. 거기다가 옷도 사고, 화장품도 사고, 공과금까지 나가야 하는
오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리모컨을 들어 올려 텔레비전을 켰다.사실 그녀는 막장 드라마를 좋아했지만 오늘만큼은 진태하를 의식해 일부러 가볍고 유쾌한 예능 프로그램을 골랐다.스타들이 출연하는 리얼리티 쇼였고 분위기는 제법 밝고 재미있었다.“이거 보자. 재밌네.”오서린은 리모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조용히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TV 볼륨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소리가 집 안 전체에 은은하게 퍼져 거실은 한결 따뜻한 분위기가 됐다.방송 속에는 잘생긴 남자 톱스타가 등장했다.오서린은 예전에 그가 고등학생 역할로 나왔던 학원 로맨스를 본 적이 있었다.그때는 차갑고 시크한 캐릭터였지만 이번엔 달랐다.허당미 넘치는 모습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전형적인 예능 캐릭터였고 그 반전 매력이 꽤 인상 깊었다.오서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몇 번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어느새 젓가락을 든 채 TV에 푹 빠졌고 보고 싶던 장면이 끝난 뒤에야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진태하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예능 속 남자에게 환하게 눈웃음을 짓는 그녀를 볼 때마다 그의 미간엔 주름이 하나씩 늘어났다.그러나 오서린은 그런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진태하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에도 그녀의 밥은 여전히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결국, 진태하가 직접 다가가 TV를 꺼버렸다.“반찬 다 식었어. 다 먹고 나서 봐.”“아... 알겠어요.”오서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조용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진태하는 서재로 향하다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한 번 더 돌아봤다.“다 먹고 나면 불러. 데려다줄게.”그 말에 오서린은 기분이 좋아진 듯 고개를 들고 밝게 웃었다.“네, 고마워요!”그녀의 미소를 본 진태하는 그제야 찌푸렸던 미간을 천천히 풀었다.식사를 마친 오서린은 조용히 부엌을 정리한 뒤, 잠시 고민하다가 서재 앞을 지나쳐 다시 거실 소파에 앉았다.이번에는 TV 볼륨을 최대한 줄인 채 조심스럽게 리모컨을 눌렀다.서재에서 회사
오서린의 눈빛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여기 왜 왔어?”강지후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 뒤에 서 있던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오서린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너, 이놈이랑 잤어?”핏발 선 두 눈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고 그 안에서 타오르는 광기는 금방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듯했다.오서린은 그런 강지후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자신이 무슨 바람이라도 피우다 들킨 사람처럼 몰아붙이는 태도에 비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이 손 안 놔?”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강지후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거셌다.“우리가 얼마나 오래 만났는데 난 차마 너한테 손끝 하나 못 댔어. 그런데 넌 이렇게 쉽게 다른 남자한테 몸을 허락해? 남자랑 동거를 하냐고!”“놓으라고! 아프다니까!”오서린이 소리쳤고 곁에 있던 유재준이 황급히 끼어들었다.“이봐요, 진정하세요. 말로 하시죠. 여성분께 폭력은 안 됩니다.”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지후는 그대로 발을 들어 유재준의 배를 걷어찼다.순식간에 유재준은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네가 뭔데 애한테 손을 대?! 감히 다시 건드리기만 해 봐. 죽여버릴 거니까.”살기 서린 눈빛으로 유재준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오서린이 황급히 몸을 가로막았다.그녀는 강지후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지금 멈추지 않으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뻔했다.“그런 거 아니야! 이분은 그냥 건너편에 사는 이웃이야!”오서린이 급히 설명하자 유재준도 고개를 연달아 끄덕였다.“맞습니다. 전 바로 맞은편에 살아요. 오해하신 겁니다.”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오서린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럼 전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유재준은 바닥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자기의 집으로 들어갔다.강지후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오서린을 매섭게 노려봤다.“어디서 저딴
“너 진짜!”“다시 날 찾아오기만 해봐. 내가 하나 못하나!”오서린이 이를 악물고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그녀의 눈빛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한편, 진태하는 여전히 차 안에 앉아 있었다.그는 휴대폰 화면을 슬쩍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오서린이 올라간 지 벌써 십 분이 지나 있었다.“이제는 집 안에 들어갔겠지.”차를 출발시켜 병원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눈에 익은 실루엣이 아파트 출입문을 밀치고 나왔다.강지후였다.표정부터가 언짢아 보이는 그는 주차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자신의 차에 올라 그대로 빠져나갔다.그 모습을 지켜본 진태하의 미간이 순간 일그러졌다.불길한 예감이 스쳤고 그는 곧바로 오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참을 울리던 벨 소리 끝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괜찮아? 별일 없지?”“네, 방금 집에 들어와서 현관문도 잘 잠갔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진태하는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입을 다물고 통화를 마쳤다.다음 날 아침.김혜숙은 남편이 손자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던 길에 오토바이에 부딪혀 넘어졌다면서 당분간 간병에 전념해야 할 것 같다고 진태하에게 연락해 왔다.진태하는 그 소식을 오서린에게 전하고 저녁은 알아서 해결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려 했지만 오전 내내 수술 두 건을 집도하다 보니 그마저도 깜빡하고 말았다.병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마치고 나서야 뒤늦게 생각이 난 그는, 직접 오서린을 바래다주겠다고 나섰다.그 순간, 옆에 있던 김지안과 정혁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사실 정혁수도 오늘 오서린을 데려다줄 생각이었다.사실은 어젯밤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정혁수는 오서린에게 마음이 있었다.예쁘고 사려 깊고 절대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여자. 밥 한 끼도 당연하다는 듯 반씩 계산했고 누군가 밥을 사면 꼭 음료나 간식을 사서 챙기는 사람.남자에게 기댈 줄 모르는 오서린을 보면서 만약 그녀와 사귀게 되고 나중에 집을 산다고 해도 정혁수는 자신의 선에서 어떻게든 도
진태하가 퇴근해 집에 돌아왔을 때 오서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대신 식탁 위에 놓인 분홍색 반찬 용기가 눈에 들어왔다.그가 평소 들고 다니는 보온 텀블러와 같은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용기에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미안해요, 이모가 같이 밥 먹자고 해서 오늘은 집에 들르기로 했어요. 간단히 요리해서 반찬통에 넣어뒀어요. 배고플 때 데워 드시고 내일은 제가 제대로 저녁 차려드릴게요.]메모 끝엔 귀엽게 그려진 이모티콘이 덧붙여져 있었다.진태하는 그녀의 익숙한 손 글씨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곧 메모 속 ‘이모’라는 단어에 시선이 멈추자 미간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그 시각, 오서린은 다시 강씨 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강인헌은 집을 비운 상태였고 집 안에는 배정숙만 있었다.오서린이 온다는 소식에 배정숙은 이미 한 상 가득 식탁을 차려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이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한창 웃고 있을 때 복도 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어쩐 일이세요? 오늘 안 오신다고 하셨잖아요!”가정부의 말에 배정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더니 불쾌함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분명히 오늘은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듣고...”이내 배정숙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싸늘한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강지후는 임다정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당당히 다가왔다.“엄마, 여자 친구랑 같이 인사드리려 왔어요.”임다정은 준비해 온 선물을 두 손에 들고 밝게 웃었다.“어머님,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소소한 선물이지만 받아주세요.”탁!그 순간, 배정숙이 젓가락을 식탁에 세게 내려치며 목소리를 높였다.“넌 진짜 내가 미치는 꼴 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야?!”임다정은 그 기세에 움찔하며 놀랐고 강지후는 그녀를 다급히 감싸며 얼굴을 찡그렸다.“엄마, 오늘은 내가 어렵게 여자 친구 데려왔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체면이라도...”“체면? 지금 체면 타령이야?!”배정숙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제가 알아서 할게요.”“정말 네가 알아서 했다면 내가 지금 이런 전화를 하고 있겠니?”송미경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지만 그 이면엔 걱정과 조바심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태하야, 넌 우리 집안 하나뿐인 아들이야. 네가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으면 그럼 진씨 가문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니?”그때였다.“저 여자 친구 있어요.”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 말에 정작 진태하 본인도 놀랐다.생각보다 감정은 빠르게 입으로 이어졌고 그 말이 실수였단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니? 여자 친구가 있다고? 어느 집 딸이야? 왜 난 처음 듣는데?!”송미경은 놀란 나머지 새된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이내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근데 왜 오늘 그 연회장에 따라온 거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노력 중이에요.”“진짜야?”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금방 감을 잡았다.아들은 거짓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올해 설에 데리고 갈게요.”“좋아. 그럼 당분간은 맞선 안 잡을게. 근데 태하야, 엄마 속이면 진짜 가만 안 둬. 알았지?”“네.”통화를 끝낸 진태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짧은 숨을 토해냈다.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고 아랫배에 남은 뜨거운 잔열은 쉽게 식지 않았다.한참 뒤 그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거실을 지나 옆방으로 향했다.오서린의 핸드백과 휴대폰을 조심스레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고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잠든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잔잔하게 들리는 숨소리, 흰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흐르는 머리카락.진태하는 조용히 이불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다음 날 아침.오서린은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잠든 사이에 흘러간 밤을 되짚었다.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옷도 말끔히 입고 있었다.‘별일 없었던 건가?’그
사실 진태하 역시 오서린에게 아무 생각이 없던 게 아니었다.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맥주 두 병을 사 오는 걸 그렇게 쉽게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오서린이 잠들었더라면 진태하도 그녀를 그냥 내버려뒀을 것이다.하지만 오서린은 깨어있었고 도발적인 눈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무심코 아래로 향했다. 얇은 슬립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있었고 얇은 천 사이로 드러나는 곡선은 꽤 적나라했다.샤워를 마친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바디워시 향기는 껍질을 막 벗긴 과일처럼 유혹적이었다.진태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내려 손을 뻗었다.“너, 술 취했어.”“나 안 취했어요!”오서린은 오히려 그의 목을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그리고 들뜬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정적으로 말했다.“그쪽이 인정 안 해도 상관없어요. 나 알아요. 일부러 나 데리러 온 거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여사님들도 그랬어요. 그쪽, 원래 그런 자리에 안 나온다면서요. 근데 오늘은 나 때문에 왔죠? 결국 날 데리러 온 거였잖아요.”끝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조잘거림.술기운에 발그레 물든 입술이 흔들리며 단어마다 꿀처럼 흘러내렸다.진태하의 목 안쪽이 바짝 말라왔고 혀끝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스쳤다.그가 자부하던 자제력은 언제나 그녀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오서린. 너 계속 이러면 나 진짜 장담 못 해.”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속삭였다.“나 오늘 부모님 생겼어요.”그 순간, 진태하의 굳어가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오서린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오늘 나, 딸로 받아줬어요.”“그래서 너무 기뻤어요. 그런데 그 집엔 강지후가 있어서 같이 살 수는 없어요...”“친구도 있긴 한데 은채도 이제 남자 친구 생겨서 그 집에도 못 얹혀살아요.”“나, 혼자인 거 너무 싫어요. 외로운 건 더 무섭고. 근데 지금이 그쪽이 있어서
빨간불에 차량은 천천히 멈춰 섰다.무심코 고개를 돌린 진태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또렷한 시선을 느꼈다.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오서린은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잘생겼으니까요.”스물둘, 한창 생기가 얼굴 가득한 나이였다.선홍빛 입술에 하얀 치아,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는 그 미소는 햇살처럼 눈 부셨다.진태하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목울대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낮고 짙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앞으론 그런 옷 입지 마.”오서린은 눈을 깜빡이며 당황했다.고개를 숙이자마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깊은 가슴골이었다.순간, 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당황한 나머지 옷깃을 위로 끌어올렸지만 이 옷은 애초에 그런 디자인이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슬그머니 손을 내린 오서린은 시선을 피하듯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러던 중, 차가 포장마차 앞을 지나가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 배고파요.”결국 두 사람은 꼬치와 맥주를 사 들고 진태하의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오서린은 배정숙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다.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드레스를 벗고 샤워를 한 뒤 민소매 상의에 짧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그녀가 집에서 가장 편하게 입는 차림이었다.며칠 전, 진태하의 집에서 처음 밤을 보내고 난 후 오서린은 결심했다.‘이 집에 자주 올 일이 생길 거야. 그럴 거면 아예 옷 몇 벌쯤은 갖다 두자.’매번 그의 옷을 빌리는 것도 번거롭고 어색했다.그녀의 이런 행동을 진태하는 말리지 않았고 입으로는 선을 지켜야 한다고 운운하면서도 그의 눈빛과 행동은 달랐다.오늘 밤도 그랬다.오서린이 “TV 좀 볼게요.” 하고 말했을 때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머리를 말리고 번 헤어로 단정히 묶은 오서린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얼굴을 한 번 훑어본 뒤, 만족한 듯 방문을 열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저.. 어머님과 같이 가게 됐어요.]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송미경의 차에 올라탔다.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송미경은 곱게 차려입은 그녀를 한 번 흘긋 보더니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배 여사는 정말 복도 많지. 이렇게 예쁜 딸을 뒀으니 말이야.”그녀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예전에 네가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갔으면 지금쯤 나도 아들이랑 딸 하나씩 두고 있었을 텐데... 서린아, 아예 아줌마 딸 할래?”송미경의 장난스러운 말에 오서린은 머쓱하게 웃었다.그 순간, 앞자리의 기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모님, 저기 도련님 차 같은데요.”송미경이 고개를 돌리자 마당 한 켠에 아직 떠나지 않은 진태하의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순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아직 안 갔잖아? 급한 일 있다고 했던 거 다 거짓말이었네. 그냥 출발해요!”송미경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고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자신이 보낸 메시지는 그대로 읽음 표시도 없이 남아 있었다.‘봤을까? 봤겠지...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지?’오서린은 틈날 때마다 고개를 돌려 차창 너머를 살폈다.차가 큰 도로로 접어들어도 진태하의 차량은 따라오지 않았다.‘혹시 메시지를 또 보내야 하나...’그 생각이 스치려는 찰나 송미경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뭐라고요! 쓰러져요? 의사 선생님은 오셨어요? 네, 지금 바로 돌아갈게요!”송미경은 전화를 끊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기사에게 물었다.“근데 이 길 아니잖아요, 잘못 든 거 아니에요?”기사는 당황한 듯 말했다.“그게... 사모님께서 오서린 양 먼저 데려다주신다고 하셔서요.”순간, 송미경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스쳤고 그걸 눈치챈 오서린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여기서 저 그냥 내려주셔도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갈게요.”“안 돼. 밤길에 어떻게 혼자 보내.”“요즘은 앱으로 금방
“맞아, 이제 막 왔으니까 금방 가지는 않을 거야. 얼른 딸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해야겠다. 지금 출발하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여인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서로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그 대화 너머 살짝 떨어진 자리에서 오서린은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표정은 담담했지만 귀 끝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 순간. 오서린의 핸드백 안에서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켜보자 단 한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갈 거야?]보낸 사람은 진태하였다.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오서린은 그와 눈이 마주쳤고 아무 말도 없었지만 심장이 쿵 하고 요동쳤다.그의 눈빛은 담담했고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듯 차분했다.오서린은 손에 쥔 휴대폰을 꾹 쥐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짧고 단호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갈래요.]곧이어 다시 메시지 한 줄이 도착했다.[밖에서 기다릴게.]그 말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고개를 들어보니 진태하는 이미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오서린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어머니를 찾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얘가 겨우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가겠대?”그때 송미경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얼굴엔 실망이 가득했다.“이번엔 뭔가 달라질 줄 알았지. 정신 좀 차리고 여자 친구 하나 진지하게 만나려나 했더니 내가 또 괜히 기대만 했네. 그렇게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옆에 서 있던 배정숙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태하가 요즘 얼마나 바빠요. 병원 일에 회사 일까지 맡고 있다던데. 워낙 책임감이 강한 애니까 이해해 줘요.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오라고 하면 되죠.”“지금 벌써 스물여덟이에요. 나이가 적으면 말도 안 하지...”송미경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이대로 두면 서른 넘기고 마흔 넘길까 봐 두려워요. 나는 대체 언제쯤 며느리 한 번 보나 몰라. 손자 하나 안고
남자의 차가운 시선이 임다정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하게 물었다.“누구시죠?”찬물이 정수리에 쏟아진 듯 임다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졌다.그녀는 얼어붙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눌렀다.“나 기억 안 나요?”진태하의 조각 같은 얼굴은 무표정했다.잠시 그녀를 살피던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무심하게 되물었다.“환자였나?”그 말에 임다정의 얼굴에서 완전히 빛이 사라졌다.수치심과 참을 수 없는 절망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죄송합니다. 지금은 제 근무 시간이 아니라서요. 다른 일정이 있습니다.”진태하는 딱 잘라 말한 뒤,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 옆을 지나쳐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임다정은 마치 텅 빈 껍데기처럼 서 있었다.그는 그녀를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다.몇 년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던 이름과 사진첩에 몰래 저장했던 그 미소, 그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우리 아들 왔네!”연회장 안, 송미경의 목소리가 환한 미소와 자부심을 머금은 채 울려 퍼졌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귀부인들은 앞다퉈 딸들을 앞으로 내세우며 번뜩이는 눈빛으로 자리를 탐색했다.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서린의 혼처 얘기에는 외면하던 얼굴들은 이제는 딸을 진태하 옆에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정숙의 속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미소 속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오서린은 진태하의 등장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섰다.하지만 그 순간, 송미경의 한마디가 그녀를 움찔하게 만들었다.“난 또 의사들은 다 여자 만날 시간 없는 줄 알았는데, 서린이 남자 친구도 의사라며? 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잘만 하던데? 그런데 너는 스물여덟이 되도록 왜 이러니 진짜.”한순간에 연회장 안의 시선이 모두 오서린을 향했다.진태하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하얗던 얼굴은 금세 붉게 물들고 가슴은 쿵쿵
“서린이 이 옷을 입으니까 정말 예쁘네요. 내가 뭐랬어요? 분홍색은 서린이한테 찰떡이라니까요!”한 여자가 연신 칭찬을 늘어놓자 배정숙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우리 딸이 워낙 예쁘잖아요. 뭘 입혀도 다 잘 어울리죠.”“딸?”옆에 있던 송미경이 살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그러자 곧장 주위 사람들이 웃으며 상황을 설명해 줬다.“아, 이번에 정식으로 양녀로 들였대요. 오늘 발표도 했고요.”송미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그런데 전에 서린이를 며느리 삼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그녀는 남의 뒷말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최근 강지후와 오서린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배정숙은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다시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건 내키지 않았다.사실 그녀도 요즘 들어 괜히 아들과 오서린의 관계를 이리저리 떠벌려 결국 오서린이에게 상처만 준 건 아닐까 싶어서 후회하고 있었다.“우리 아들이 그럴 복이 없었나 봐요.”배정숙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서린이가 그 아이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났거든요.”“그래요?”송미경은 흥미로운 듯 오서린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래서 남자 친구가 의사라며?”그 말에 오서린의 속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이미 한 번 뱉어버린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송미경의 다음 질문이 두려워졌다.“어느 병원에서 근무해?”그 순간, 오서린은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설마 병원 이름 얘기하면 어느 의사인지 까지 물어보는 거 아니야?’다행히도 그때 배정숙이 기지를 발휘했다.“송 여사님, 그런데 아드님은 대체 언제 오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잖아요.”송미경이 가볍게 핸드백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조금 늦는다더니 혹시 깜빡했나? 내가 전화 좀 해볼게요.”그 시각, 연회장 바깥.임다정은 조용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차 안은 담배
라수아는 주변에 모여 있던 여자들을 쓱 훑어보았다.하성시에서 이름 좀 있다고 하는 인사들은 죄다 이 자리에 모여 있었고 그녀들 사이에서는 종종 남편이나 자식 이야기가 대화의 주요 소재였다.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누구네 아들이 오서린과 사귄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이 모임은 겉으로는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사실은 날마다 경쟁이 치열한 무대나 다름없었다.자식 혼사는 당연히 신중하게 따져야 했고 며느리는 백번 천번 골라야 하며 딸은 반드시 상위 집안으로 시집보내야 한다는 불문율도 존재했다.그때, 누군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물었다.“서린아, 오늘은 남자 친구 안 데리고 왔어?”배정숙의 체면을 생각한 오서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일이 바빠서요. 오늘은 못 왔어요.”“이렇게 늦은 시간까지도 일한다고?”몇몇 사모님들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을 막고 수군거렸다.그 모습을 본 배정숙은 속이 다 타는 기분이었다.‘이럴 땐 그냥 대충 둘러대지, 어쩜 저렇게 솔직하냐고...’“그래? 남자 친구는 무슨 일 하는데?”그 질문에 오서린은 가장 먼저 진태하를 떠올렸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의사예요.”“의사라, 어쩐지.”사모님들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그들 자식 중 의사인 남자는 없었고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의사는 성실한 직일 수는 있어도 ‘상류층 자제’들에게 흔한 직업은 아니었으니까.‘역시 배 여사가 사윗감 보는 눈이 없구먼.’그들 눈빛 속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어느 병원에 있어?”누군가 집요하게 물었고 배정숙의 얼굴엔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하지만 그때였다.“어머, 저기 송 여사 아니야?”누군가의 말에 모든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연회장이 일순 술렁이기 시작했다.송미경.하성시의 최상위 재벌 가문 중 하나인 송씨 가문의 안주인이자 진태하의 어머니였다.귀부인들은 경쟁하듯 딸을 데리고 그녀에게 다가갔고 라수아도 딸을 이끌고 빠르게 가서 환한 미소로 인사를
오서린은 배정숙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고 있자니 가슴 한켠이 저릿하게 뭉클해졌다. 그동안 마음 한편에 조용히 묻어두었던 외로움이 감사와 애틋함으로 바뀌며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그녀는 이 자리에서 배정숙 부부가 난처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눈물로 가득한 눈을 꾹 감은 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외쳤다.“아빠, 엄마...”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정숙은 오서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팔엔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고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강인헌 역시 눈가가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이며 오서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래, 우리 착한 딸...”행사가 마무리되고 무대에서 내려온 뒤, 배정숙은 오서린을 데리고 재벌가 사모님들 모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딸’을 데리고 등장한 그녀를 향해 모두가 진심 어린 칭찬과 부러움 섞인 인사를 건넸고 배정숙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근데 말이에요, 라 여사님. 양도준 군은 오늘 왜 안 왔어요? 이런 좋은 자리에 한 번쯤 얼굴 비출 법도 한데?”순간, 그 자리에 있던 부인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고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라수아를 향했다.오서린은 어머니가 왜 갑자기 양도준의 이름을 꺼낸 건지 알 수 없었고 라수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 애가 이런 모임 별로 안 좋아해서요.”배정숙은 가늘게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웃었다.“내가 듣기론 그 아이가 우리 서린이를 꽤 좋아한다던데요? 오늘 나도 한 번 보려고 했는데 아쉽네요.”그 말에 라수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우리 아들이 그런 말 한 적 없어요.”단호하고 건조한 말투에는 명백한 불쾌감이 느껴졌다.배정숙도 그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하고는 속으론 불쾌함이 밀려들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그럼, 여러분 댁에 괜찮은 청년 있으면 우리 서린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