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궁.유영 모녀뿐만이 아니었다. 봉 대인 역시 황후가 갑자기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고 싶었다.하지만 궁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불안감이 엄습했다.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러다 영화궁 안에서 유영과 정희를 마주한 순간, 그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두 모녀가 또 무슨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하인을 데려올 걸 그랬나? 누가 그 대신 뺨이라도 맞아줘야 할 텐데 말이다!!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어디까지나 자신은 황후의 친부이다. 황후가 아무리 거침없는 성격이라도, 친부에게 손을 댈 수는 없을 터. 그는 서둘러 몸을 숙였다."황후마마를 뵙습니다!"봉구안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예를 면하십시오."몸을 일으키자마자, 봉 대인은 본능적으로 유영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그는 분노 섞인 표정으로 두 모녀를 바라보았다.'저 여인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지?'유영 역시 봉 대인의 시선을 느끼고 속으로 비웃었다.'황후가 그를 부른 목적이 뻔하지 않은가.'하지만 그녀는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오랜 상업 경험으로 단련된 그녀에게, 위기란 그저 넘어서야 할 또 하나의 장애물일 뿐이었다.남제의 율법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설령 황후라도 자신에게 사적인 처벌을 가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였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봉구안에게 서신을 내밀었다."황후마마, 이건 언니께서 제게 남긴 서신입니다.""아직 읽어보시지 못했을 텐데, 먼저 확인해보시는 게 어떠신지요?"궁녀 만추는 그 말을 듣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 유씨 부인이라는 자, 고작 서신 한 장으로 마마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은근히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황후를 흘깃 바라보았다. 하지만 봉구안은 서신을 볼 생각조차 없는 듯,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제야 만추는 다시 시선을 바로 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봉구안은 그저 찻잔 뚜껑을 살짝 열어 찻잎을 저으며 나직이 말했다."내가 듣기로, 봉가의
봉 대인은 약을 먹고 겨우 숨을 골랐지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나를 강주로 보내겠다고?"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저 한 번 더 혼인하려 했을 뿐인데, 그것이 무슨 대역죄라도 된단 말인가?"그렇게 되면 나는 이제 다시는 황성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 아니더냐?"분노는 봉구안이 아닌 유영을 향했다.그는 거칠게 유영의 팔을 붙잡았다."너… 대체 또 무슨 짓을 한 거냐!"틀림없이 유영이 황후 봉구안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후가 이토록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진 않았을 터였다.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의심이 가득했다."대체 또 무슨 계략을 꾸민 것이냐! 어서 말해 보거라!"유영은 억울했다.이번만큼은… 정말 그녀가 한 일이 없었다."대인,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그녀는 눈물 머금은 얼굴로 애처롭게 봉구안을 바라보았다."황후마마, 만약 저에게 불만이 있으시다면, 저를 처벌하셔야지 왜… 왜 죄 없는 분까지 연루시키십니까?""특히, 대인은 정말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대체 무슨 죄가 있어 이런 가혹한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까?"'나는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봉 대인은 여전히 억울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정희는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구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머니, 저희 여기서 이러고 있을 필요 없어요!""지금 당장 궁을 나가서 이모님을 찾아가야 해요! 이모님이라면, 저희가 이렇게 당하는 걸 두고 보지 않으실 거예요!"그녀는 봉구안을 향해 날을 세웠다."황후마마, 솔직히 말씀하세요. 이건 저희 가족을 황성에서 몰아내려는 의도 아닌가요?""대체 무슨 이유로! 저희 부모님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황후마마께서는 사적인 감정을 이용해 권력을 남용하고 계십니다!""버릇없이 굴지 마라!"그 순간, 봉구안의 궁녀 만추가 앞으로 나섰다."황후마마께 불경한 언사를 내뱉은 죄, 궁중의 법도로 엄히 다스려야 마땅
유영은 평생 장사를 하며 수많은 권력자들을 상대해왔다.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그녀는 침착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태연하게 반문했다."황후마마, 저와 대인의 일은 이미 언니께서 알고 계십니다.""언니께서 직접 황후마마께 설명하지 않으셨습니까?""그 모든 것이 단순한 오해였다는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그런데 지금 뭐라고 하셨죠? 제가 같은 수법을 쓰려 한다고요?"유영은 마치 황후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네요. 설마 저희가 추석 연회에 참석하려는 것이 황제 폐하를 가까이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그녀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억측입니다!""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만을 총애하신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누가 감히 폐하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그리고 제 딸 정희는 이미 강주에서 혼인까지 했던 몸입니다. 불행히도 지아비를 일찍 여의었지만요…""또한 정희에게는 세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시댁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고, 지금 저희에게 남은 건 기댈 곳조차 없는 처참한 현실뿐입니다.""황후마마, 저희는 그저 의지할 곳이 필요했을 뿐입니다!"정희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손끝을 꼼지락거렸다.그러나 어머니의 말을 듣고 그녀도 정신을 차렸다.‘맞아! 황후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황후가 단순히 의심하고 있을 뿐,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정희는 순간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그리고 고개를 들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황후마마, 저희를 정말 오해하고 계십니다.""제가 감히 황제 폐하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저는 단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혼인하신 후, 강주에 있는 제 아이들을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그 아이들은 제 친자식들입니다! 하지만 시댁에서는 저를 내쫓고 아이들까지 빼앗아 갔습니다!"그녀는 애절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게… 저의 유일한
유영과 정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머물던 객잔에 황후의 첩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황후가 어째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지, 왜 그들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는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우리는 이제 끝났구나."정희는 자신이 했던 말들을 되새기며, 숨이 점점 가빠졌다.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고,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팔을 붙잡았다."어머니…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유영 역시 손끝이 떨렸다.그녀는 이 상황을 뒤집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이 모든 게 내 실수다…'그녀는 스스로를 원망했다.너무 성급했다.황후는 단순한 후궁 싸움에서 살아남은 여인과는 차원이 달랐다.그녀는 궁정의 중심에서 권력을 손에 쥔 황후였다.그 어떤 여자들보다도 철저하고, 냉철하고, 잔혹했다.이곳은 강주가 아니다. 황성이었다.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과 권모술수만이 아닌 더 거대한 권력이 필요했다.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봉 대인은 혼란스러웠다.유영과 정희를 번갈아 바라보며, 곧장 오백의 손목을 붙잡았다."오백 장군, 황후마마께 전해 주시오!""이건 다 모함이오. 나는 저들의 계획에 대해 전혀 몰랐소!""유영… 저 자와 혼례를 치르지 않을 것이라 전해주시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황후를 향해 가차 없이 불효라며 비난을 퍼부었다.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한없이 비굴했다.얼마 전까지의 오만과 격노는 어디로 갔는지, 그는 고개를 조아리며 애처롭게 변했다."황후마마,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그의 얼굴에는 뼈저린 후회가 가득했다.마치 이제야 유영과 정희의 본색을 깨달은 사람처럼.그러나 황후는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었다.이제 와서 후회하는 그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제발, 황후마마께 전해주시오."오백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조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봉 대인,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황후마마를 찾아뵙겠다고 난리를 치지
소욱은 믿을 수 없었다.그 뻔뻔한 모녀가 감히 자신을 이용하려 했다니!그들을 단순히 궁에서 내쫓은 것이 오히려 너무 관대한 처사였다.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봉구안을 탓하게 되었다."이렇게 중요한 일을 왜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이냐?"혹여나 그 모녀가 무슨 수를 써서 봉구안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을까… 그녀가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이 엄습했다.그러나 봉구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조정의 정무에 비하면, 이런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그녀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소욱은 그녀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그러다 이내, 그녀의 옆에 앉아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그렇다면, 내가 저들 모녀의 계략에 걸려들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네 덕이구나."봉구안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이제야 아셨습니까?"소욱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부친을 강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부터, 이미 그 모녀의 계략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었군."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처음에는 단순히 봉구안이 부친의 재혼을 못마땅하게 여겨 반대한 줄로만 알았다.하지만 지금 보니, 그녀는 이미 그들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었다."그런데 봉 대인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것이냐?""내가 아무 여인에게나 손을 대는 사람으로 보였단 말이냐?"소욱의 목소리에는 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봉구안은 가볍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태연하게 말했다."병이 급하니 아무 약이나 찾는 것이지요."그녀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자신이 아이를 얻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각종 잡귀들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게다가 그녀 자신이 부친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으니, 그가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하지만, 그것이 그를 변명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이제 모든 것이 지나갔다.더 이상 이 문제를 논할 필요도 없었다.소욱의 시선이 문득 책상
현상금에 적힌 금액은 그리 크지 않았다.그것만으로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엔 부족했다.게다가, 비녀의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그러나 유영은 장사로 단련된 촉이 예리한 여자였다.이것이 단순한 보상금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이건 그저 잃어버린 비녀를 찾으려는 게 아니야. 분명 이 뒤에는 더 큰 뭔가가 있어.'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여관으로 돌아갔다."당장 강주로 가자!"부모님과 남동생이 세상을 떠난 뒤, 그들이 남긴 물건들은 전부 강주 저택에 보관돼 있었다.이번에 황성으로 올 때는 오직 금은보화와 몇몇 값진 물건만 챙겨온 상황이었다.비녀의 나머지 반쪽을 찾으려면 반드시 강주로 돌아가야 했다.정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어머니, 갑자기 강주는 왜요? 이제 막 황성에 왔는걸요."그녀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설마… 아버지가 우리를 완전히 버린 건가요?""우릴 강제로 쫓아낸 거죠? 그렇죠?!""다 황후 때문입니다! 황후가 아버지를 압박한 거라고요!""아버지가 절 버릴 리 없어요!""그렇죠, 어머니?!"짝!따귀 소리가 여관 안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유영은 얼굴이 새파래진 채 손을 들고 서 있었다.정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유영의 눈빛은 분노와 냉소로 가득 차 있었다."대체 언제쯤 정신 차릴래?""그게 황후 때문이라고?""네 그 잘난 아버지는 젊었을 땐 어머니에게 휘둘리고, 늙어서는 딸에게 휘둘리는… 언제나 남의 눈치나 보는 겁쟁이에 불과해!""그는 원래부터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유영은 차갑게 한마디를 던졌다."더 이상 헛소리하지 마.""짐부터 싸거라. 우린 강주로 갈 것이다."정희는 눈물을 삼키면서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여관을 떠났다.……그 시각, 남방 전선에서는 서왕이 이끄는 군대가 대승을 거두고 있었다.그는 남강에서 동경까지 이어지는 전장을 누비며,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했다.서왕이 황성으로 복귀하는 동안, 그와 함께하는 여자가
"황성에 도착하는 즉시, 난 폐하께 이혼을 청할 것이다!"서왕은 단호했다.이제 더 이상 이 가식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완부옥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방금까지 짓고 있던 부드러운 미소는 사라지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뭐라고요? 이혼?"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왕을 노려보았다."그럴 순 없어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하며, 소매 속에서 작은 독전갈이 모습을 드러냈다."이혼?""전하께 그런 선택지는 없어요.""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지아비의 죽음뿐입니다."서왕은 그녀의 살의를 감지하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나를 죽이겠다는 것이냐?""너, 내 부하들이 다 눈먼 장님인 줄 아느냐?"완부옥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변했다.그러나 이내 태연하게 웃으며 독전갈을 집어 들었다.그리고는 그것을 서왕의 눈앞에서 흔들며 말했다."오해십니다, 전하.""제가 어떻게 전하를 해칠 수 있겠어요?""전 오히려 전하를 위하는 사람인 걸요."그녀는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이 전갈은 보양에 아주 좋은 약재랍니다.""전하께 몸보신을 시켜드리려고 준비한 거예요."서왕은 코웃음을 쳤다."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가 통할 것 같으냐?"설령 그녀가 지금 당장 그를 해치려 해도, 그는 두렵지 않았다.서왕은 마지막으로 짧게 한마디를 남겼다."완부옥,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그렇게 말하고, 그는 그녀를 뒤로 한 채 자리를 떠났다.완부옥은 그를 노려보았다."빌어먹을…!"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언제까지 이런 가식적인 혼인 생활을 해야 한단 말인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차라리… 소환을 내 것으로 만들겠어.""이번에 황성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소환을 내 사람으로 만들거야." ……영화궁.오백이 영화궁으로 들어섰다.그때, 봉구안은 적연검을 조심스럽게 닦고 있었다.그녀는 이 검을 몹시 아꼈다.그것은 단순히 황제
봉 대인은 멍한 얼굴로 궁을 나섰다.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두 다리는 힘이 풀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그는 다급한 마음에 황후를 찾아가 사정해 보려 했지만, 황후는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집에 돌아온 봉 대인은 충격으로 병이 나 큰 앓이를 했다."난 황후의 친부이거늘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그의 곁에서 지켜보던 하인이 말했다."나리, 황후마마께서 말씀을 들으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누구 말이냐?""바로 나리의 전 부인이신 봉 부인입니다."이미 봉 대인과 이혼한 봉 부인이었지만, 황후의 어머니였기에 여전히 '부인'이라 불렸다.봉 대인의 눈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그래! 유씨를 찾아가 부탁하면 황후도 내 말을 들어줄지 모르겠구나!"그러나, 봉 부인은 이미 장주로 보내진 상태였다. 봉 대인도 곧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 하는 처지였다. 상황이 긴박했다."시간이 없다! 붓과 먹을 가져오너라!"그는 서둘러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추석을 하루 앞두고, 서왕은 대군을 이끌고 황성으로 돌아왔다.그날 서왕은 입궁해 전투 보고를 했고, 완부옥 역시 남강왕의 명을 받아 남제와의 영구 동맹 의지를 전달했다.평소에는 자유분방한 완부옥이었지만, 국가 대사 앞에서는 흐트러짐이 없었다.소욱은 그녀를 흘낏 보았다. 얼마 전 서왕이 보낸 서신에 따르면, 완부옥은 아이를 잃었다고 했다. 서신에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지만, 그는 전쟁 중 태아를 지키지 못했을 거라 짐작했다.'아이를 잃고도 저렇게 웃고 있다니…'만약 이번 전쟁이 없었다면, 그들의 아이는 이미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니, 소욱의 마음 한편에서 서왕 부부를 향한 연민이 피어올랐다.하지만 정작, 서왕은 황제와 황후를 더욱 걱정하였다.그는 황후가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폐하께서 얼마나 황자를 기다리셨을까.'그 부부가 쉽게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을 거란 걸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두 사람 모두, 사실을 모른 채 서로를 걱정하고 있었다
“북방으로 가겠다고?”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곧장 봉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말이 진심인지, 그녀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그는 여러 가능성을 떠올려봤지만, 봉구안이 아이를 위해 북방으로 간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택이었다.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당분간 떨어져 있어야 한다.황제와 황후… 부부가 멀리 떨어져 지내는 일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맹 부인 또한 그 점이 걱정스러웠다.봉구안의 지아비는 그저 그런 사내가 아니었다.한 나라의 군주였고, 궁궐엔 이미 수많은 후궁이 있었다.그가 과연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세상일은 알 수 없고, 사람의 마음은 더더욱 그렇다.지금은 아무리 다정해도, 시간이 지나고 자리가 비면 변할 수도 있는 일.그녀는 봉구안이 훗날 후회하는 상황만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남자의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연 같아서,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 않은가.맹 부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께서 북방으로 태교를 가신다면, 저희 부부가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기꺼이 도와드릴 일이긴 하나… 결국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한 번쯤 폐하와 다시 상의해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그녀는 느꼈다.황제의 반응만 봐도 이건 미리 상의된 결정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그러자 봉구안은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사모님, 오해십니다.”“실제로 북방에 갈 생각은 없습니다.”그녀의 말투는 조용했지만 안에는 단단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굳이 떨어져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녀도 외로웠고, 두려웠다.봉구안은 또렷하게 덧붙였다.“그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서여국이든 남제든, 지금은 그 어느 쪽도 방심할 수 없는 때입니다.”“그래서 양쪽 모두를 잠시 속이는 수밖에요. 지금은 그게 가장 안전합니다.”“속인다는… 말씀입니까?”맹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뇌었다.하지만 소욱은 가장 먼저 그 뜻을 깨달았다.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화선 안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소욱은 별다른 예를 갖추지 않았다.그저 조용한 집안 연회처럼, 봉구안과 소욱, 그리고 맹건 부부 네 사람은 하나의 상에 둘러앉았다.화선 한 척 통째로 소욱이 빌린 터였다.외부인의 발길은 끊긴 채, 오직 이 순간을 위한 자리였다.봉구안은 잔을 들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사부님, 사모님. 멀고도 고단한 길 오시느라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한 잔, 두 분께 올립니다.”어린 시절부터 그들 곁에서 자란 봉구안이었다.그러나 세상 속으로 나간 후론, 정작 곁에서 효도 한 번 하지 못했다.그 죄스러움이 술잔 속에 고이 담겨 있었다.근래엔 약쟁이 사건이며 조정 일로 하루하루를 쫓기듯 보냈다.편지 한 장 못 띄운 자신이 더없이 부끄러웠다.그녀가 잔을 들고 입술에 가져가려는 찰나… 소욱이 조용히 그녀의 손목을 눌렀다.그리고 말없이 잔을 건네받은 뒤, 한 번에 들이켰다.“이 술은 내가 너대신 마시도록 하마.”맹건과 맹 부인은 동시에 눈이 커졌다.의아한 시선이 오가고, 곧 맹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마… 혹, 몸이 불편하신 겁니까?”맹건 역시 얼굴이 굳어지며 덧붙였다.“설마, 약쟁이 사건을 쫓다 다친 것입니까?”그는 예전부터 봉구안이 이 사건에 발을 담그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무림에서든 조정에서든, 위험한 일에 몸을 담가선 안 된다고 여러 차례 당부했던 터였다.하지만 소욱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다. 다친 것은 아니다. 염려 말거라.”그는 봉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 눈빛은 전과 달리 유순하고 부드러웠으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구안이가… 아이를 가졌다.”“아이를요?!”맹건 부부의 얼굴에 일순 기쁨이 번졌다.맹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가를 훔쳤다.“하늘이 도우셨구나… 정말로…!”맹 부인은 봉구안 옆으로 바짝 다가와, 조심스레 그녀의 맥을 짚었다.잠시 후, 그녀의 눈에도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정말입니다.”“태기가 단단히 자리를
소탁은 죽산진에 머무르며, 붉은 연초초의 유통 경로를 샅샅이 추적하고 있었다.소욱은 그가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용한 조력자 몇을 붙여주었고, 마침내 중요한 실마리를 쥐게 되었다.처음부터 그는 붉은 연초초가 일반 약재처럼 거래되지는 않았을 거라 의심하고 있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을 리 없었다.결국 그는 연초초를 사료 삼아 기른 닭을 추적하게 되었고, 그 닭들이 매달 일정 수량씩 인근 고을로 팔려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그런데 그 닭 장수들은 모두 행적은 불분명하고, 입도 무거워 매우 수상했다.“폐하, 폐태자께서 닭 장수들을 붙잡았다 하나, 그 자들이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았답니다.”소욱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입을 열든 말든, 진실은 이미 떠올랐다”오늘은 봉구안의 생일이었다.심문 따위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그는 봉구안의 손을 가만히 잡아 이끌며 부드럽게 말했다.“가자. 오늘은 네 탄신일이지 않느냐.”“오늘만은 그 시름을 잊게 해주고 싶다.”봉구안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곁에 나란히 마차에 올랐다.객잔 안.강림과 동방세는 객잔 마당 한켠에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이야… 사람 둘이 저리 정답게 나가는 걸 보니, 괜히 속이 허해지는구려.”“자넨 언제 혼인할 작정이오?”동방세는 입꼬리조차 들지 않고 술만 넘겼다.강림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 여인은 이미 떠났소.”“죽은 사람에 갇혀 사는 삶이란, 결국 스스로를 묶는 것이오.”잠시 침묵을 삼키던 동방세는 되레 반문했다.“나야 한 번은 혼례도 올린 몸이오.”“자네는 어찌 아직도 총각이오?”강림은 턱을 괴며, 익살스럽게 웃었다.“나 같은 미남자와 어울릴 자가 천하에 몇이나 되겠소?”“그만한 인물이 아니면 난 혼자 살리이다.”동방세는 말없이 술잔을 비우며 중얼거렸다.“허, 입만 살아선…”교외, 호숫가.소욱은 오래 전부터 봉구안의 탄신일을 위해 비밀리에 준비를 마쳐두고 있었다.이날 햇살
남제 전역이 술렁였다.황성에서 내려온 어명이 번개처럼 각지로 퍼지며, 온 나라가 약쟁이 사건 수사에 돌입한 것이다.무림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전진파가 앞장서고, 각 문파가 연대하여 ‘약쟁이’ 소탕을 모의하자 강호 역시 깊은 물결이 이는 듯 긴장감이 팽팽해졌다.겉은 평온해 보였지만 물밑에선 이미 암류가 소용돌이쳤다.조정에서 내건 포고문은 거리마다, 골목마다 붙었다.그 앞엔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세상에, 약쟁이이라니, 도대체 뭡니까?”“듣자하니 사람을 납치해선 독약을 먹이고,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괴물로 만든다더이다.”“관아에서 외진 데는 피하고, 외출할 땐 여럿이 함께 다니라 하지 않소. 허나, 도둑놈 마음 먹으면 우린 당해낼 재간이 없지요…”“에이, 이젠 집 밖이 제일 위험한 거 아니오.”“근데 이거 봐요. 제보만 잘하면 상금도 나온다 하오!”조정은 단호했다.약쟁이를 뿌리째 뽑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고, 백성들 또한 생존이 걸린 일이라면 앞장서 도울 각오였다.이건 단순히 나라의 체면이나 명예의 문제가 아니었다.바로 그들 자신의 가족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으니 말이다.가족을 잃은 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관아로 찾아와 울부짖었다.“대감, 제 딸은… 대체 언제 돌아옵니까?”“대감, 저희 상인은 두 해 전 떠난 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혹 약쟁이방에 끌려간 건 아닌지… 부디 찾아주십시오.”“대감! 저희 아버지도 실종된 지 두 해가 넘었사옵니다… 제발요…”강주 관아.황제는 친히 어전에 앉아, 각지에서 모여든 보고를 듣고 있었다.그 얼굴엔 사사로운 감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물론, 봉구안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 마음을 뺏고도 남았지만… 지금 이 자리만큼은 남제의 군주로서 천하 만백성의 안위를 짊어진 사람이었다.그 역시 한 아내의 지아비이자, 곧 아이를 맞이할 아버지였으나,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되어야 했다.소욱의 시선은 차갑고도 날카로웠다.“즉시 조사하라.”“실종자들
소욱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녀와 자신 사이에 아이가 생기다니.그녀의 난임을 치료하겠다고 무애산까지 다녀왔고, 스승이 내려준 약도 꾸준히 복용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이미 단념했던 터였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그의 구안이가… 아이를 품었다.의원은 단호하게 말했다.“경사입니다. 태동은 아직 없으나 맥을 보건대, 한 달 남짓 된 태아의 맥이 맞습니다.”소욱의 눈빛이 반짝이며 환하게 빛났다.“좋다! 상을 주마! 여봐라, 어서 포상 준비를 해라!”진한길이 황제의 손짓에 따라 금화를 꺼내 의원 손에 쥐어주자, 의원은 그 자리에서 그만 다리가 풀릴 뻔했다.맥 하나 짚었을 뿐인데, 황금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린 횡재였다.의원이 물러간 뒤, 소욱은 참지 못하고 봉구안을 덥석 안아 올렸다.“구안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다.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어!”봉구안은 미소 지으며 그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조용히 하십시오. 아이가 놀랍니다.”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하지만 태는 3개월이 지나야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괜한 기대에 들떠 방심했다간,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었다.그래서일까. 봉구안은 들뜬 감정을 애써 누르며 담담히 반응했다.소욱은 그녀를 침상에 조심스레 눕히고, 이불을 배 위로 덮었다.작은 한기라도 스며들까, 손끝까지 세심했다.그녀의 손을 가만히 감싸쥐고,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며 중얼거렸다.“이 아이는 강할거야. 우리를 닮아서 말이다.”한 달 전, 함께한 밤이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의 몸이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소욱은 자책하듯 고개를 떨궜다.“내가 좀 더 일찍 의원을 불렀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무애산의 스승은 치료에 시간이 걸릴 거라 했고, 그는 그 말대로 될 거라 믿었다. 아니, 사실상 기대를 내려놓았던 게 더 가까웠다.하지만 오늘, 모든 걸 뒤엎는 기적이 일어났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이 감정은 황위에 올랐을 때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벅참이었
봉 대인은 소욱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다.황제가 죄를 묻지 않으니 그저 안도의 한숨이 나왔을 뿐이다.다만 의외였던 건, 황후를 향한 황제의 애정이었다.이런 황당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눈 감아주는 걸 보면,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짐작이 갔다.자신 같았으면?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내가 제멋대로 나랏일에 얽혀드는 일이라니, 그에게 있어서는 절대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폐하의 너그러운 아량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이번 일은 전적으로 저희 봉가에서 비롯된 것이온데… 신이… 신이 어찌 면목이 있겠습니까…”하지만 소욱은 봉 대인 앞에서도 봉구안을 향한 깊은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황후는 내게 더 많은 것을 참아주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꿀이라도 묻어 있는 듯, 다정함이 묻어났다.봉구안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 대인에게 말했다.“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돌아가시지요.”“폐하와 저는 정사로 논의할 것이 있어 바쁩니다.”지금은 강주의 약쟁이 사건을 샅샅이 조사해야 할 시기였다.사마 신분으로 이토록 한가하게 돌아다니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봉구안은 봉 대인을 마주할 때조차 한 점의 온기도 비치지 않았다.친부녀 사이라기보다는 낯선 이와 응대하는 듯했다.봉 대인은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했다.그는 뭔가 떠오른 듯 무심히 물었다.“서여국 일 말이다… 맹건은 알고 있느냐?”봉구안은 특별히 숨길 이유도 없다는 듯 덤덤히 답했다.“사부님은 북방에 계십니다. 아직 편지를 드리진 않았습니다.”그러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의 사람 보는 눈이라면, 이미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을 터였다.그 말을 들은 봉 대인은 눈에 띄게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곧 들키지 않으려 애써 눌렀다.‘허허, 결국 그 늙은 맹가 장군보다 내가 먼저 알았다는 거지. 역시 구안이는 나를 더 가깝게 여기는 게야.’‘말은 저래도, 속은 참 여린 아이라니까.’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흡족한 듯 대청을 나섰다.그
강주, 관아 내부.관아의 관리들은 끼니도 거른 채, 수년간의 실종자 명단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실종자 관련 신고도 줄줄이 접수되고 있었다.황후가 강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오직 봉 대인뿐이었다.나머지 관리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몇몇은 봉 대인을 슬쩍 떠보았다.“봉 대인, 황후마마께서 서여국으로 가셨다던데요.”“그쪽에서 황제가 되셨다… 그런 이야기가 돌던데, 사실입니까?”봉 대인의 표정은 단호했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소!”그러자 한 관리가 더 나섰다.“봉 대인, 이쯤 되면 숨기실 것도 없지 않습니까?”“다들 아는 얘기예요. 들은 바로는, 대인의 전부인 되시는 분께서 서여국 선황의 친동생이라던데요.”그 말에 봉 대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그 역시 그런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예전 봉구안에게 직접 물어본 적도 있지만, 당시 그녀의 반응만 보면 다 헛소문이라 여겼다.하지만 이렇게 또 다시 거론되자, 어쩌면 단순한 유언비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그럼에도 ‘유씨’가 서여국 황실의 혈통이라는 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봉 대인은 발걸음을 곧장 봉구안에게로 옮겼다.유씨와 서여국의 관계… 이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대청에는 부녀 둘만이 남았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낮고 무거웠다.“말씀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소문은 사실이에요.”이미 온 세상이 다 알아버린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도 없었다.봉 대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 네, 네 어미가… 정말 서여국 전 황제의 여동생이었다는 말이냐?”“그럼, 유씨 댁 두 어른은… 너희 외가 말이다. 그분들이 친부모가 아니었던 것이냐?”봉구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봉 대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자신이 외면했던 그 여인이… 황실 혈통이라니.그제야 떠올랐다.과거 유씨 댁 두 어른들은 유독 봉 부인에게 박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친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봉 대인은
봉 대인은 딸을 핑계 삼아, 강주의 특산 복숭아 누름과자를 들고 궁으로 들어왔다.하지만 봉구안은 소욱보다도 냉담했다. 얼굴엔 미소 하나 없었고, 목소리는 싸늘했다.“왜 오셨어요?”어젯밤 분명히 경고했다.요즘 강주는 어수선하니 조용히 사마부에 머물라고.그런데도 기어코 선물까지 들고 얼굴을 비추다니.봉 대인은 기가 죽은 듯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황제와 황후 앞에 섰다.“저… 아니, 신이… 혹시 무슨 도움이 될까 하여 들렀습니다.”“그래도 한때 강주 사마였으니, 백성들 얼굴쯤은 익숙합니다.”봉구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말투엔 그늘 하나 없이 냉정했다.“쓸데없는 짓 안 하시는 게 제일 큰 도움이에요.”그 말에 봉 대인은 더욱 풀이 죽었다.소욱조차 이번만큼은 봉구안이 지나치게 매정한 것 같았다.“좋은 마음에서 온 게 아니겠느냐. 그만 화 풀어라, 구안아.”소욱이 본인의 편을 들어주자, 봉 대인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그러나 소욱은 곧 공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요즘 실종자 수색이 한창이네.”“관아에서도 이 일에 집중하고 있지.”봉 대인은 그제야 눈빛이 살아났다. 곧장 예를 올리며 말했다.“신이 바로 나가 보겠습니다!”돌아서기 전, 그는 봉구안에게 조심스레 덧붙였다.“누름과자는 따뜻할 때 드셔야 제맛이지. 좀 먹어보거라.”봉 대인이 떠나자, 소욱이 조심스레 봉구안을 달랬다.“그래도 부친이지 않느냐. 걱정돼서 온 게 느껴졌다.”봉구안은 냉소를 머금은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그게 느껴지셨어요?”소욱은 탁자 위의 누름과자를 집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이게 그 누름과자 아니냐.”소욱은 상자를 열며 중얼거리다가, 손을 멈췄다.“근데 이 과자…”봉구안이 고개를 들었다.“왜 그러십니까?”소욱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차갑지 않느냐. 이걸 어떻게 따뜻할 때 먹으라는 거지?”“게다가 다 부서졌지 않느냐. 대인은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도, 속으로는 공 훈장이나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화살이 운산파 장문이 머무는 주실을 향해 날아들었다.문 앞을 지키던 대제자는 익숙한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화살촉에는 짧은 서찰이 매달려 있었다.아직 잠들지 않았던 ‘구학’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직접 화살을 걷어냈다. 서찰에는 역시나 약쟁이 수거 장소가 적혀 있었다.통상대로라면, 이 시점부터 바로 인원을 파견해 약쟁이를 인수하면 되었다.어둠 속, 나무 위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열무신이 문득 눈을 떴다. 방금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림자는 몸을 숨기며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작은 날렵했고, 무엇보다 운산파의 지형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듯했다.열무신이 뒤쫓았지만, 검은 그림자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길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눈빛에는 차가운 전의가 서려 있었다.머릿속을 스친 건 오래전 실종된 친구, 맹성주의 얼굴이었다.복수하겠다는 그 의지가 지금껏 그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반드시 그들을 잡아내 맹성주를 대신해 복수를 하리라 다짐하였다.스윽! 스윽!어둠 속에서 연달아 화살이 날아들었다. 열무신은 몸을 틀어 회피했지만,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그림자는 사라진 뒤였다.그가 아쉬움에 이를 악물던 순간, 옆을 스쳐 지나가는 또 다른 그림자가 있었다. 봉구안이었다.그녀의 몸놀림은 열무신보다도 날쎄고, 판단력은 번개처럼 빨랐다. 폭풍처럼 망설임 없이 숲을 가로질렀다.두 시진 후, 숲 한가운데. 봉구안은 마침내 그림자를 따라잡았다.상대는 나무를 이용해 시야를 가리려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오산이었다. 그의 속도는 둔해졌고, 그 틈을 봉구안이 놓칠 리 없었다.그녀는 그의 앞을 막아서며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려쳤다.쿵!그림자는 허공에서 떨어지는 낙엽처럼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봉구안은 몸을 틀며 허리춤에서 암기를 꺼내 날렸다. 화살은 정확히 그의 다리를 꿰뚫었다. 다친 다리로는 경공을 펼칠 수 없었고,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그녀는 정확히 착지하자마자 혈도를 찔